
[스포츠니어스 | 김현회 기자] 대한민국 축구장 잔디를 볼 때마다 민망하고 부끄러운 생각이 든다. 광주FC가 17일 광주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2024-25시즌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 엘리트(ACLE) 1차전 요코하마 F. 마리노스와의 경기 7-3 대승은 역사적인 장면이었다. 하지만 광주월드컵경기장 잔디는 어디 내놓기 부끄러운 수준이었다. 당연하게도(?) 경기 후 상대팀 감독은 이 경기장 잔디에 관해 한 마디했다. 경기력은 감탄스러웠지만 안타깝게도 잔디 수준은 ACLE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그나마 이 잔디 상태도 ACLE 경기를 위해 광주시와 광주FC가 부랴부랴 극약처방을 한 결과였다. 잔디 상태가 심각했던 광주월드컵경기장은 아예 경기 2주 전부터 잔디 집중 관리에 들어갔다. 광주월드컵경기장에서 훈련을 중단하고 광주축구전용경기장에서만 훈련을 했다. 그 사이 광주월드컵경기장 잔디는 ‘땜질’에 들어갔다. 더 황당한 건 6월달에 30억 원을 들여 다시 문을 연 광주축구센터 잔디는 이미 논두렁보다 심각한 상태라 활용할 수 없던 상황이었다는 점이다. ACLE 한 경기를 위해 광주FC는 광주축구전용경기장에서 훈련과 K리그 경기를 다 소화했다.
그 사이 광주축구전용경기장 잔디도 정상적인 경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좋지 않아졌다. 어찌어찌 국제대회에서 망신을 당하지 않기 위해 광주월드컵경기장을 급하게 보수하면서 광주축구전용경기장 잔디도 심각하게 망가졌고 그렇다고 광주월드컵경기장에서 ACLE 경기가 최고의 잔디 상태로 치러진 것도 아니었다. 비단 광주만의 문제가 아니다. 18일 울산문수축구경기장에서 열린 울산HD와 가와사키 프론탈레와의 경기도 마찬가지였다. 이날 잔디 역시 국제대회를 열기 부끄러운 수준이었다. 가와사키 선수들은 경기가 중단되면 연신 축구화에 박힌 진흙을 떼어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대한민국 축구 성지 서울월드컵경기장은 또 어떤가. 이미 지난 해 잼버리 사태 이후 급하게 죽은 잔디를 걷어내고 ‘땜질’을 했지만 또 다시 그라운드는 최악의 상황이 되고 말았다. 오죽하면 2026 북중미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에서 대한민국과 경기를 치른 팔레스타인 감독까지도 서울월드컵경기장 잔디 상태를 지적했을까. 손흥민 역시 서울월드컵경기장 잔디 상황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했다. 대한민국 축구보다 몇 수 아래인 오만 원정에 나서 승리를 거둔 대한민국 선수들은 “잔디 상태가 좋아 원하는 플레이가 잘 나왔다”고 말하기도 했다. 대한민국 축구장 잔디는 팔레스타인이나 오만과 비교해도 오히려 떨어지는 수준이다.

경기장에 가면 한숨부터 푹푹 나온다. 이게 프로 선수들이 뛰고 몸을 날리라는 곳인지 고등학교 체육대회인지 헷갈릴 정도다. 최근 FC안양 리영직은 김포솔터축구장에서 벌어진 김포FC와의 K리그 경기가 끝나고 자신의 SNS에 사진 한 장을 올렸다. 해당 게시글에는 ‘’다치지 않고 이길 수 있어서 다행이야‘라는 글과 함께 축구화 밑창에 잔뜩 흙이 붙어 있는 사진을 올렸다. 배수가 되지 않는 김포솔터축구장은 폭우가 내리면 경기 전에 대형 선풍기를 틀어 그라운드 안에 고인 물을 날려버리는 웃픈 광경을 연출하기도 한다. 이런 곳에서 K리그가 열리고 있다. 전국 각지의 축구장이 대부분 비슷한 상황이다. 심지어 광양축구전용경기장 잔디는 병충해를 입어 하얀색으로 변했다.
충남아산 홈 경기장인 이순신종합운동장은 잔디 사정이 악명 높기도 유명하다. 이 경기장도 배수가 되지 않아 비가 오면 구단 직원들이 눈을 치울 때 쓰는 넉가래로 빗물을 그라운드 밖으로 걷어낸다. 심지어 경기 날 인근 문구점에서 스폰지를 구입해 경기 직전 직원들은 그라운드에 투입돼 빗물을 스폰지에 흡수시켜 양동이에 짜내기도 했다. 대한민국 축구장은 A매치가 열리는 곳부터 K리그 경기장까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대부분 상황이 비슷하다. 축구장 잔디 수준으로만 월드컵 진출 순위를 매긴다면 대한민국은 아시아 지역 2차 예선 선에서 ‘컷’이다. 모르겠다. 2차 예선 수준까지 가지 못할 수도 있다.
핑계는 있다. 최근 대한민국 여름 날씨가 유난히 더 덥고 습해졌기 때문에 잔디가 더 많이 상했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건 우리나라보다 여름에 더 덥고 습한 J리그 경기장을 보면 쉽게 반박이 가능하다. 지난 해 9월과 올해 3월 ACL 경기 취재를 위해 두 차례 방문한 요코하마 F. 마리노스 홈 구장 닛산스타디움은 J리그에서 잔디가 좋지 않은 대표적인 경기장으로 꼽힌다. 이 경기장에 가니 요코하마 구단 관계자는 “우리 잔디 상태가 좋지 못하다”며 안절부절했다. 하지만 이 경기장에 가 잔디를 확인해 보고 표정 관리를 해야했다. 속으로 ‘뭐야? 우리나라 어느 경기장보다 잔디가 좋잖아’라고 놀라면서도 겉으로는 “음, 이 정도? 살짝 아쉬운 잔디 상태네”라고 연기를 했다.

J리그 경기장까지 갈 것도 없다. 그래도 K리그 내에서 잔디 관리가 잘 된 천안종합운동장을 보면 날씨는 핑계일 수밖에 없다. K리그 경기장이 통풍이 잘 안 되고 구조상의 문제가 있어 잔디 관리가 어렵다는 말도 나오는데 그렇게 따지면 전용구장이면서 그래도 잔디가 좋은 DGB대구은행파크는 어떻게 설명할 건가. 이런 저런 말이 핑계라고 생각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투자한 잔디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돈과 시간과 인력을 쓴 잔디는 병충해도 이겨내고 배수도 잘 된다. 그 좋은 사례가 옆나라 일본에도 있고 천안과 대구에도 있다. 단순히 한 순간 거액을 들여서 여론 잠재우기식으로 잔디를 다 뒤집어 엎고 새로 까는 게 대안이 아니다. 그래도 죽을 잔디는 또 죽는다. 서울월드컵경기장처럼 말이다.
대한민국에서 잔디 관리가 가장 잘 되고 있는 천안종합운동장은 우리나라 경기장 관리 현실에서 기적과도 같은 곳이다. 천안종합운동장은 천안시시설관리공단 문화체육부 최규영 반장이 잔디를 책임지고 관리하고 있다. 2006년부터 지금까지도 마찬가지다. 최규영 반장은 천안종합운동장과 천안시시설관리공단이 운영 중인 녹지 관리를 맡고 있다. 천안종합운동장은 최규영 반장이 경기가 끝나면 밤 12시까지 혼자 스위퍼 작업과 관수 작업, 롤링 작업을 해왔다. 저녁 7시 경기가 9시에 끝나면 이때부터 밤 12시까지 이 작업을 하며 잔디를 관리했다. 이 작업을 유럽 빅클럽 한 경기장은 무려 20명이 한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그렇지 못하다.
최규영 반장이 애지중지 관리한 잔디가 전국에서 최고라는 평가를 받자 천안시도 잔디 관리 중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올 시즌부터는 최규영 반장이 전반적인 관리를 맡고 위탁해서 업체까지 고용했다. 다른 K리그 경기장이 잔디 문제로 논란이 되는 동안에도 천안종합운동장은 잔디 관리도 찬사를 받고 있다. 결국 잔디 관리는 정성과 투자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한 명의 장인이 이끌어 와 결국 시스템까지 만들어낸 천안이 바로 그 성공사례다. 물론 최규영 반장은 스스로 주말과 야간을 반납하고 스스로 나와 혼자 잔디 관리를 하며 시스템을 일궈냈지만 관리 인력을 확충하고 인건비와 관리 비용을 확장하면 다른 경기장도 이렇게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사례다.

잔디를 그저 경기장에 있는 시설의 하나 쯤으로 여기는 인식도 개선해야 한다. 지금껏 경기장 잔디는 그저 경기장의 관중 좌석이나 축구 골대, 조명탑 등과 별다를 것 없는 경기장의 한 부분이라고만 여겨져 왔다. 수천 명이 잔디로 들어와 스탠딩 콘서트를 하는 것도 아무렇지 않다. 아예 잔디 위에 무대까지 설치하는 공연도 당연한 듯 열린다. 그러다가 이게 국가적인 문제로 부각되면 경기장 출입을 전원 통제한 뒤 남모르게 잔디를 새로 깐다. 그게 바로 지난 해 잼버리 사태다. 당시 공연이 논란으로 부각되지 않았다면 아마 부랴부랴 새로운 잔디를 정부 차원에서 깔아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잔디를 다시 깔아도 관리가 안 되면 다시 망가진다. 경기장 잔디는 그저 여러 경기장 시설물 중 하나가 아니다.
잔디는 살아 숨 쉰다. 보듬어 주지 않으면 바로 티가 난다. 인력을 갈아 넣건 돈을 투자하건 해야 유지된다. 그저 날씨 탓만 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 더군다나 관중이 돈을 내고 입장하는 프로 경기라면 최고의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프로 축구장 잔디가 엉망이라는 건 라이브를 하는 가수 공연장에서 스피커 한 쪽이 망가진 채 공연을 즐기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조건이다. ACL이나 A매치에서 잔디 상태가 좋지 않아 우리가 홈 이점을 안고 가는 것도 아주 부끄러운 일이다. 그래도 아시아에서 가장 월드컵에 많이 나가고 ACL 우승을 그렇게 많이 하는 리그라면 상대팀도 품격 있게 대해야 한다. 최악의 잔디 조건이 우리에게 유리한 조건이 되어서는 발전할 수 없다.
천안종합운동장은 철저하게 잔디 관리를 한다. 일주일에 한두 번 열리는 경기 외에는 구단 관계자나 코칭스태프, 선수단도 그라운드에 거의 못 들어간다. 선수단에서는 “아니 우리도 훈련을 좀 해야할 것 아니냐”는 불만을 표하기도 하지만 이렇게 잔디를 관리하지 않으면 잔디가 숨 쉴 수 없다. 천안시티FC는 훈련을 천안축구센터에서 하고 홈 경기 하루 전 천안종합운동장에서 하는 한 시간 적응 훈련 외에는 천안종합운동장을 못 쓴다. 훈련장이 따로 갖춰져 있어 훈련을 따로 해 홈 경기장 잔디 수준을 유지할 수 있다. 잔디는 한 번 경기를 치르면 회복할 시간이 무조건 필요하다는 게 잔디 관리의 철칙이다. 이건 유럽이건 일본이건 잔디 관리에 돈을 쓰는 모든 구단도 동의하는 내용이다. 이렇게 키워도 최상을 유지할까 말까한 게 잔디인데 여기에 무대를 세우고 관객 수천 명이 들어가면 아무리 잔디 전문가라도 못 살려낸다.

한 K리그 선수는 요즘 축구화를 흔히 말하는 ‘쇠뽕’을 다시 신고 있었다. 익명을 요구한 이 선수는 “요새 경기장에 가 몸을 풀다가 그라운드 상황이 너무 안 좋으면 실제 경기에 들어갈 때 ‘쇠뽕’으로 갈아 신는다”면서 “‘쇠뽕’은 그라운드가 푹푹 파이고 습하고 진흙 같은 바닥 환경 때 신는다. 영국처럼 습한 환경에서 원래 ‘쇠뽕’을 많이 신는데 나도 요새 들어서 거의 대부분의 경기는 ‘쇠뽕’을 신고 있다”고 전했다. 통상적으로 아시아 무대에서는 FG(펌 그라운드)나 HG(하드 그라운드)를 신고 뛰지만 K리그 현 상황에서는 ‘쇠뽕’이라고 통칭되는 SG(소프트 그라운드‘를 선호하는 선수들이 많다. ’쇠뽕‘은 푹푹 패여 체력 소모가 심하고 부상 위험도 더 높다. 미끄러운 그라운드에서 선수들이 더 선호한다.
물론 ‘쇠뽕’이 안 좋고 ‘FG’가 더 좋은 건 아니다. 환경에 따라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K리그 선수들이 사실상 물만 뿌려진 맨땅에서 축구를 하게 돼 ‘쇠뽕’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 돼 가고 있다는 점이다. 세계적인 흐름은 그라운드 환경이 좋아지면서 ‘쇠뽕’보다는 ‘FG’ 쪽으로 가고 있다. 하지만 K리그에서는 사실상 단종 직전인 특정 모델의 ‘쇠뽕 축구화’를 찾는 선수들도 있다. 축구화에 박힌 진흙을 털어내며 뛰는 선수들을 보면 한숨이 나온다. 과연 이게 아시아 축구 선진국이라고 자부하는 나라에서 나오는 모습인지 안타깝다. 이런 잔디에서의 경기는 선수나 관중이나 모두에게 괴롭다. 돈과 시간과 정성을 들여 관리하지 않으면 우리는 매 시즌 여름이 덥다는 핑계로 이런 잔디를 마주해야 하고 겨울에는 춥다는 핑계로 이런 잔디에서 치르는 경기를 봐야한다.
우리나라 잔디 상태의 고비는 9월과 10월이다. 원래 장마가 끝나고 폭염을 만나면 가장 가장 환경이 좋지 않아지긴 했다. 천안종합운동장 최규영 반장은 “잔디는 10월 찬바람이 솔솔 불 때 회복을 시켜야 한다”면서 “시즌이 끝나고 월동 준비에 들어가면 작업을 할 시간이 없다. 다시 2월이나 3월에 개막하는데 10월에 적기를 놓치면 잔디를 복구할 시기를 놓친다. 잔디는 때를 놓치지 않고 성심성의껏 관리해야 한다. 기술이 좋다고 되는 게 아니라 시기에 맞춰 관리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언제까지 잔디 문제에 대해 환경탓, 경기장 구조탓, 날씨탓만 할 건가. 혁신적으로 바뀌지 않으면 우리는 내년 여름에도 A매치 상대팀에 한 소리 듣고 ACL에 나가 부끄러워하고 관중이 경기력보다 잔디 걱정을 하는 상황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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