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축구협회

[스포츠니어스|전영민 기자] 오늘(15일)은 자랑스러운 제 74회 광복절이다. 광복절은 1945년 8월 15일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광복된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광복절은 지난 1949년 10월 1일 제정된 '국경일에 관한 법률'에 의거해 국경일로 제정되었다.

최근 한일관계는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이유는 과거를 반성하지 않는 일본 정부에 있다. 한국 대법원은 일제 강점기 당시 강제 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지난해 10월 연관된 일본 기업들이 1인당 1억 원씩 피해자들에게 배상할 것을 최종 판결 내렸다.

일본 정부는 지난 1965년 체결된 한일 청구권협정의 존재로 인해 일본 기업들이 강제징용 피해에 대해 개인에게 배상할 의무가 없다고 주장해왔다. 하지만 한국 대법원은 한일 청구권협정은 정치적인 해석에 불과할 뿐 개인의 청구권에 적용될 수 없다고 최종 판단을 내렸다.

이후 일본 정부는 한국에 대한 정치적 보복을 시작했다. 일본은 지난 2일 아베 신조 총리 주재로 국무회의를 열고 수출 절차 간소화 우대국 명단을 뜻하는 백색국가 명단에서 한국을 제외했다. 뻔뻔한 일본의 처사에 국내에서도 일본 제품을 사용하지는 말자는 '노재팬' 불매 운동의 바람이 강하게 불고 있다. 그렇기에 이번 제 74회 광복절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의미가 깊다.

축구에서도 한일 양국은 지난 1954년 3월 7일 열린 첫 경기 이래 치열한 싸움을 계속해왔다. 하지만 아직까지 일본은 한국에 미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A대표팀의 역대 한일전 전적은 한국이 78전 41승 23무 14패로 크게 앞선다. 23세 이하(U-23) 대표팀으로 눈을 돌려도 16전 7승 4무 5패의 기록으로 한국이 우위를 점하고 있다. 20세 이하(U-20) 대표팀에서는 더욱 차이가 벌어진다. U-20대표팀의 역대 한일전 전적은 44전 29승 9무 6패다.

광복절을 맞아 <스포츠니어스>에서는 '광복절 특집'으로 기획 시리즈의 기사들을 준비했다. 지금부터 소개할 그 두 번째 이야기는 바로 역대 한일전 명승부 TOP 5 경기다. 사이타마에서 보여준 박지성의 산책 골 뒷풀이부터 '패배하면 대한해협에 몸을 던지겠다'는 각오로 대한해협을 건넜던 1954년 대표팀 선수들의 이야기까지. 역대 한일전 명승부 다섯 경기를 소개한다.

5.친선경기 - 2010.05.24 일본 사이타마 스타디움 2002 (한국 2-0 승)

ⓒ SBS 방송화면 캡쳐

2010년 5월 24일 일본 사이타마 스타디움 2002에서 펼쳐진 한국과 일본의 친선전은 한국 축구 팬들에게 잊을 수 없는 경기다. 당시 한국 대표팀은 5월 16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에콰도르와 2010 FIFA 남아공 월드컵 출정식에서 2-0 기분 좋은 승리를 거두고 친선전이 열리는 사이타마로 향했다.

이 경기는 양 팀 모두에 물러설 수 없는 경기였다. 허정무 감독이 이끄는 한국 대표팀은 당시 남아공 월드컵에서 사상 첫 원정 16강 진출에 도전했다. 멤버도 화려했다. 세계 최강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활약 중인 주장 박지성과 베테랑 수비수 이영표, 신예 기성용과 이청용 그리고 천재 스트라이커 박주영과 '로봇' 차두리까지 대표팀은 그야말로 최고의 선수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렇듯 최강으로 불리는 대표팀이었기에 일본전 패배는 절대 용납될 수 없었다.

일본 대표팀의 명단 이에 뒤지지 않았다. 당시 일본 대표팀에는 엔도 야스히토, 하세베 마코토, 혼다 케이스케, 오카자키 신지, 나카무라 슌스케, 나가토모 유토 등 아시아 정상급 선수들이 대거 포진해있었다. 더군다나 일본으로선 이날 경기가 2010 FIFA 남아공 월드컵 출정식을 겸해 열리는 경기였기 때문에 반드시 승리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격차는 컸다. 한국 대표팀은 5만 7천여 홈관중의 응원을 등에 업은 일본을 손쉽게 격파했다. 선봉장은 주장 박지성이었다. 박지성은 전반 5분 김정우의 헤딩 패스를 이어받은 후 벼락같은 돌파로 일본 수비수 세 명을 순식간에 벗겨냈다. 이후 박지성은 강력한 오른발 중거리슛을 날렸고 이 슈팅이 그대로 골문을 통과하며 한국이 선제골을 기록했다.

사실 이날 박지성의 득점이 아직까지 팬들에게 회자되는 이유는 골 못지 않게 박지성의 득점 이후 행동이 통쾌했기 때문이다. 박지성은 선제골 후 자신에게 야유를 보내던 일본 관중들을 뚜렷이 응시하며 경기장을 도는 일명 '산책 골 뒷풀이'를 선보였다. 가장 박지성스러웠고 너무나도 완벽했던 골 뒷풀이에 일본 홈관중들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일본의 콧대를 꺾은 박지성은 이후 다시 한 번 놀라운 모습으로 일본의 전의를 상실케했다. 전반 38분 박지성은 일본 오른쪽 풀백 나가토모의 돌파를 저지하던 과정에서 중심을 잃고 넘어졌다. 하지만 오뚝이같이 일어선 박지성은 약 35m 가량을 전력 질주해 결국 나가토모의 공을 태클로 처리해냈다. 이 장면은 아직까지도 대표팀의 투혼을 얘기할 때 빠지지 않는 명장면으로 꼽힌다.

일본 해설자들은 경기 내내 한국 선수들의 플레이를 칭찬하기에 바빴다. 일본계 브라질인 2세로 前 일본 국가대표팀 경력이 있는 축구해설자 세르지오 에치고는 "세계 무대를 경험한 박지성의 실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한국은 승점 3점을 어떻게 하면 얻고 지킬 수 있는지 보여주고 있다"며 한국 선수들을 극찬했다.

이후 대표팀은 후반 막판 터진 박주영의 페널티킥 쐐기골로 2-0 완승을 거뒀다. 완벽했던 대표팀의 승리에 사이타마 스타디움 2002는 침묵으로 뒤덮였다. 이렇게 일본의 출정식을 잿더미로 만든 한국 대표팀은 기분 좋게 월드컵 전지훈련지인 오스트리아 인스크부르크로 이동했다. 반면 일본은 최악의 월드컵 출정식을 맞이하며 자존심을 구길 수밖에 없었다.

4. 1994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8강전 - 1994.10.11 일본 히로시마 현립경기장 (한국 3-2 승)

ⓒ SBS 방송화면 캡쳐

1994년 10월 11일 일본 히로시마 현립경기장에서 열렸던 일본과의 1994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8강전 역시 잊을 수 없는 명승부다. 당시 쿠웨이트, 오만, 네팔 등과 함께 조별리그 C조에 속했던 한국 대표팀은 조 2위로 8강에 진출했다. 우승을 노리는 대표팀이 8강에서 만난 상대는 다름 아닌 개최국 일본이었다.

당시 한국 대표팀에는 하석주, 홍명보, 강철, 유상철, 서정원, 故 조진호, 황선홍, 노정윤, 고정운, 김도훈 등 1990년대 한국 축구를 대표하는 선수들이 대거 포진해있었다. 일본 대표팀 역시 마에조노 마사키요, 미우라 가즈요시, 이하라 마사미 등 최고의 선수들로 구성돼있었다.

막다른 골목에서 만난 두 팀의 승부는 치열했다. 선제골은 홈팀 일본의 몫이었다. 전반 30분 엔도 마사히로의 헤딩 패스를 이어받은 미우라가 선제골을 기록하며 일본이 기세를 잡았다. 하지만 대표팀은 후반 6분 유상철의 감각적인 오른발 발리슛으로 균형을 맞추는데 성공했다.

이후 한국은 후반 33분 황선홍의 헤딩골로 기어코 역전에 성공했다. 바로 이 득점 직후 한일전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명장면이 등장했다. 역전골을 기록한 황선홍은 흥분했다. 황선홍은 득점 후 곧바로 관중석 앞에 놓인 육상 트랙으로 다가가 히로시마 현립경기장을 가득 채운 일본 홈관중들에게 '주먹감자' 골 뒷풀이를 선보이며 기쁨을 만끽했다. 경기를 시청하던 국민들에게는 그야말로 통쾌한 골 뒷풀이었다.

하지만 너무나도 일찍 축포를 터뜨렸던 탓일까. 대표팀은 후반 41분 이하라에게 중거리슛 동점골을 내주고 만다. 이렇게 경기가 연장전으로 흐르는듯하던 후반 추가시간 믿을 수 없는 상황이 발생했다. 동점골을 터뜨렸던 이하라가 페널티 박스에서 반칙을 범하며 페널티킥을 내준 것이다. 이후 키커로 나선 황선홍은 침착한 슈팅으로 다시 한 번 일본의 골문을 갈랐고 결국 경기는 한국의 3-2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이날 경기는 한국 축구사에 남을 명승부였다. 대표팀은 전반 30분 첫 실점을 내줬지만 이후 동점골과 역전골에 성공했다. 하지만 이하라에게 골을 내주며 동점을 허용했고 후반 추가시간 극적인 득점으로 재역전에 성공했다. 이렇게 한일 양국의 스타들이 총출동했던 라이벌전은 한국의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대표팀은 이후 준결승전과 3·4위전에서 각각 우즈베키스탄(0-1 패)과 쿠웨이트(1-2 패)에 연이어 발목을 잡히며 대회 4위에 만족해야 했다.

3. 1954 FIFA 스위스 월드컵 아시아 예선 - 1954.03.07 일본 도쿄 메이지진구경기장

 

역사적인 한일전 첫 번째 경기는 지난 1954년 3월 7일 열렸다. 1954년 3월 한국과 일본은 1954 FIFA 스위스 월드컵 예선에서 맞닥뜨렸다. 당시 두 팀의 경기는 홈 원정 방식을 고수하는 FIFA의 규정에 따라 한국과 일본에서 각각 한 경기씩 치러져야 했다. 하지만 광복 후 많은 시간이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던 당시 국내에서 반일 감정은 엄청났고 결국 한일전 두 경기는 모두 도쿄에서 치러지게 되었다.

광복 후 처음으로 일본을 상대하게 된 대표팀의 의지는 대단했다. 당시 국가대표팀 감독이었던 이유형 감독이 일본으로 떠나기 전 "반드시 일본을 이기고 돌아오겠다. 만약 일본을 이기지 못하면 대한해협(현해탄)에 몸을 던지겠다'는 출사표를 던졌다. 그만큼 당시의 한일전은 의미가 남달랐다.

하지만 시작은 녹록지 않았다. 대표팀은 전반 16분 나가누마 겐에게 선제골을 내주며 끌려갔다. 이후 대표팀은 더 강한 의지로 일본 선수들을 상대했다. 그들은 "패배하면 대한해협(현해탄)에 몸을 던지겠다"는 이유형 감독의 각오를 되뇌었다. 이 경기에서의 패배는 죽음과 다름없었다. 결국 전반 22분과 34분 한 골씩을 추가하며 역전에 성공한 대표팀은 후반전 세 골을 몰아치며 역사적인 첫 한일전에서 5-1 대역전승을 거뒀다. 그것도 일제강점기 36년 동안 우리 민족을 괴롭혔던 일본의 심장 도쿄에서 말이다.

하지만 승리에 도취되기에는 일렀다. 대표팀은 1차전이 열린 3월 7일의 정확히 1주일 뒤 같은 장소에서 다시 한 번 일본과 만났다. 2차전 결과는 1차전에 비해 다소 아쉬웠다. 대표팀은 전반 16분 상대 공격수 이와타니 도시오에게 선제골을 내주며 끌려갔다. 이후 전반 24분과 전반 43분 정남식과 최정민이 한 골씩을 추가하며 역전에 성공한 대표팀은 후반 15분 동점골을 내주며 결국 2-2 무승부로 경기를 마무리했다. 그러나 1승 1무를 거둔 대표팀은 결국 아시아 예선 통과에 성공했고 사상 처음으로 월드컵 본선 무대를 밟았다.

2. 2012 런던 올림픽 3,4위전 - 2012.08.10 영국 카디프 밀레니엄 스타디움(한국 2-0 승)

ⓒ SBS 방송화면 캡쳐

상대적 약체로 평가받았던 아시아 축구는 2012 런던 올림픽에서 대이변을 일으켰다. 올림픽에 나선 한국과 일본은 나란히 준결승에 진출하며 세계 축구 팬들을 놀라게 했다. 하지만 파죽지세를 이어가던 두 팀 모두 아쉽게 결승 진출에는 실패했다. 이후 한일 양국은 영국 카디프에서 운명의 3,4위전을 치르게 됐다.

더 간절한 팀은 한국이었다. 한국은 당시 기성용, 구자철, 김보경, 박종우, 김영권, 지동원 등 20대 초반의 선수들과 김창수, 박주영, 정성룡 등 세 명의 와일드카드가 포함된 역대급 멤버들로 런던올림픽에 임했다. 한국 축구 차세대 10년을 책임질 것으로 평가받던 이들이기에 이 선수들이 병역 혜택을 해결할 수 있는지 여부에 대해 많은 축구 팬들의 관심이 집중됐다.

경기장에 나선 한국 선수들의 표정은 비장했다. 한국은 경기 시작과 동시에 일본을 강하게 압박하며 기선 제압에 나섰다. 한국의 강력한 피지컬과 힘, 투지를 일본은 이겨내지 못했다. 일본 선수들의 표정엔 당황한 모습이 가득했다. 그들이 준결승까지 진출하며 보여줬던 기세는 온데간데없었다.

전반 37분 한국의 선제골이 터졌다. 주인공은 '와일드카드' 박주영이었다. 경기장 중앙에서 공을 잡은 박주영은 상대 골문을 향해 거침없는 돌파를 했다. 이후 박주영을 저지하기 위해 일본 수비수 네 명이 달라붙었지만 박주영은 환상적인 움직임으로 이들을 제친 후 깔끔한 오른발 슈팅을 때리며 선제골을 기록했다.

놀라웠던 박주영의 플레이에 많은 축구 팬들은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리며 방영 중이던 '각시탈'이라는 칭호를 박주영에게 붙였다. 축구 팬들의 말대로 여러 명의 수비수들을 무용지물로 만든 박주영의 움직임은 수십 명의 일본 군인들을 한순간에 바보로 만드는 각시탈의 모습과 흡사했다.

이후에도 대표팀은 압도적인 모습을 보였다. 대표팀은 후반 11분 구자철의 추가골이 터지며 점수 차를 벌리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경기 종료 직전인 후반 45분이 다가오자 홍명보 감독은 특별한 교체 카드를 준비했다. 홍명보 감독은 올림픽 기간 동안 단 1분도 경기장을 밟지 못했던 김기희를 후반 45분 교체 투입시키며 그에게 출전 기회를 부여했다. 이후 경기는 대표팀의 2-0 승리로 끝났고 대표팀은 역사상 처음으로 올림픽 동메달을 목에 거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경기 종료 이후 예상치 못한 문제가 터졌다. 바로 국제올림픽위원회(IOC)와 FIFA가 박종우의 독도 골 뒷풀이를 문제 삼은 것이다. 경기 종료 후 박종우는 관중석에서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적힌 스케치북을 받아 경기장을 활보했다. 이후 정치적 사항과 관련된 활동을 금지하는 IOC가 박종우의 행동을 문제삼았고 결국 박종우는 동메달 시상식에 참가하지 못했다.

박종우의 이 행동은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기도 했다. 만약 박종우가 IOC로부터 동메달을 수여하지 못할 경우 박종우의 병역혜택 역시 무효가 되는 것 아니냐는 주장이 제기된 것이었다. 하지만 이에 대해 당시 김일생 병무청장은 "병역혜택을 주는 국내법을 충족했다고 보고 이를 적용하는데 문제가 없다고 본다"는 공식 입장을 밝혔다. 이어 김일생 청장은 "개인적으로 봤을 때 박종우는 용기있고 기특한 선수"라는 의견을 덧붙이기도 했다.

이후 FIFA는 2012년 12월 박종우에게 A매치 두 경기 출전 정지와 벌금 400만원이라는 징계를 내렸다. 이로 인해 박종우 역시 늦게나마 동메달을 수여받을 수 있었고 결국 올림픽에 참가했던 선수 18명 모두 동메달을 목에 걸 수 있었다. 이렇듯 절대 패배해서는 안됐고 반드시 이겨야만 했던 3,4 위전에서 대표팀은 승리를 거두며 웃을 수 있었다.

1. 1998 FIFA 월드컵 예선 '도쿄대첩'- 1997.09.28 일본 도쿄 국립경기장(한국 2-1 승)

ⓒ SBS 방송화면 캡쳐

1998 FIFA 프랑스 월드컵 본선 진출을 노리는 한국 대표팀은 지난 1997년 9월 28일 도쿄 국립 경기장에서 일본과 만났다. 아시아 지역 1차 예선에서 각각 조 1위로 최종 예선에 진출한 두 팀은 이렇게 외나무다리에서 마주하게 되었다.

이날 경기 전까지 한국 대표팀은 1,2차전에서 각각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을 상대로 3-0, 2-1 승리를 거두며 좋은 흐름을 유지하고 있었다. 반면 일본은 1차전인 우즈베키스탄전 6-3 승리 후 아랍에미리트와 2차전에서 0-0 무승부를 기록해 한국과 3차전에서 승점 3점 확보가 절실한 상황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경기는 일본의 우세 속에 흘러갔다. 그리고 후반 20분 일본의 선제골이 터졌다. 수비 진영에서 공격수 고정운이 일본 야마구치 모토히로에게 어이없게 공을 내줬고 이후 야마구치가 예상치 못한 칩슛을 날리며 선제골을 기록했다.

하지만 한국 대표팀은 물러서지 않았다. 이어 후반 38분 한국의 동점골이 터졌다. 이기형이 우측 측면에서 정확한 오른발 크로스를 올렸고 이 공을 최용수가 헤딩으로 서정원에게 연결했다. 최용수의 패스를 받은 서정원은 지체 없이 헤딩슛을 시도했고 이 슈팅이 일본의 골문을 가르며 대표팀은 균형을 맞췄다.

그러나 승점 1점만 가져갈 순 없었다. 일본과 예선 경쟁에서 확실한 우위를 점하기 위해선 승점 3점이 필요했다. 그리고 기어코 대표팀은 이 어려운 목표를 이루는데 성공했다. 후반 42분 중원 지역에서 최용수가 수비수 이민성에게 공을 건넸다. 패스를 받은 이민성은 망설임 없이 벼락같은 중거리슛을 때렸고 이 슈팅이 일본 골키퍼 가와구치 요시카츠의 손을 지나치며 대표팀은 역전에 성공했다.

이민성의 역전골 직후 당시 경기를 중계하고 있던 송재익 캐스터는 "후지산이 무너지고 있습니다!"라는 통쾌한 명언을 날리기도 했다. 이렇게 두 나라의 자존심을 걸었던 경기는 결국 추가적인 상황 없이 한국의 2-1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이 경기의 여파는 엄청났다. 5만 6천여 홈관중 앞에서 경기에 나섰던 일본 대표팀은 경기 종료 후 큰 비난에 직면했다. 일본 축구 팬들은 '가모 슈 감독은 할복하라' 등의 극단적인 구호들을 내뱉으며 일본축구협회를 압박했다. 결국 일본축구협회는 가모 슈 감독을 경질했고 이후 일본은 플레이오프 경기를 거쳐 가까스로 프랑스 월드컵 본선 진출에 성공했다. 반면 한국 대표팀은 남은 경기에서 3승 1무 1패를 거두며 조 1위로 본선에 직행했다.

'도쿄대첩'으로 불리는 이 경기는 경기 외적으로도 여러 가지 이야깃거리를 남겼다. 당시 MBC가 중계한 이 '도쿄대첩'은 56.9%라는 전무후무한 시청률을 기록했다. 더불어 MBC는 생중계로 '도쿄대첩'을 시청하고 있던 역전골의 주인공 이민성의 집을 찾아 이민성 가족들의 모습을 방송으로 내보내며 국민들의 관심을 집중시키기도 했다.

'도쿄대첩'의 승리는 그 어떤 경기보다도 특별했다. 지난 1993년 김영삼 대통령 취임 이후 한국 정부와 일본 정부는 아슬아슬한 갈등 국면을 이어가고 있었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부임 후인 지난 1995년 광화문에 위치해있던 일제강점기의 상징인 조선총독부를 폭파시켰다. 더불어 1995년 11월에는 중국 장쩌민 국가주석을 만난 자리에서 "이번 기회에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는 사이다 발언을 날리기도 했다.

이렇듯 냉각된 한일관계가 이어지고 있었기에 대표팀 선수들은 비장한 각오를 안고 도쿄로 향했다. 더불어 경기가 열리는 장소는 당시 일본의 상징과도 같았던 도쿄 국립경기장이었다. 하지만 대표팀은 한 수 위의 기량을 선보이며 일본을 압도했고 짜릿한 승리를 거두는데 성공했다. 이날 대표팀은 선제골 후 시간 지연 등 비매너 행위로 일관한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단단히 고쳐주며 아시아 최강팀이 누구인지를 증명했다.

치열했던 한일전, 공 하나에 담겼던 우리의 자존심 

이렇듯 한일전은 그 오랜 역사와 치열한 승부를 자랑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간 이 한일전에서 많은 짜릿한 승리를 거머쥐었다. 축구는 단지 공 하나를 두고 펼쳐지는 단순한 스포츠이지만 우리는 한일전에 자존심을 걸었다. 그리고 승리했다. 오늘은 그 어느 때보다도 의미가 깊은 제 74회 광복절이다. 오늘만큼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잠시간 한일전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것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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