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프로축구연맹

유상철 감독이 우리 곁을 떠났다. 유상철 감독은 지난 7일 췌장암 투병 끝에 안타깝게 세상과 작별을 고했다. 2002 한일월드컵 4강 신화의 주역인 그는 A매치 124경기에 출장하며 한국 축구의 역사를 썼다. 그가 향년 5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많은 이들은 고인을 추모하며 슬퍼하고 있다. <스포츠니어스>는 우리를 울리고 웃겼던 유상철 감독을 추모하는 의미를 담아 기획 기사를 준비했다. -편집자주

[스포츠니어스 | 홍인택 기자] 어려운 팀을 도맡으며 위기를 극복해 나갔던 지도자였다.

'감독' 故유상철은 선수들의 잠재력을 극대화하는 포지션 기용, 과감한 전술 변화로 위기를 극복해 나가는 지도자였다. 유소년 등 어린 선수들의 육성에 힘쓰고 한국 축구를 위해 힘썼으며 상황이 어려운 팀을 도맡으면서도 끝까지 선수들의 버팀목이 되어줬다. 비록 부진한 성적으로 지휘봉을 내려놓을 때가 있었지만 마지막 감독 생활을 했던 인천유나이티드에서 선수단을 결집시키며 끝내 인천의 K리그1 생존을 이끌었다. 스타플레이어였지만 '스타플레이어 출신은 명감독이 되지 못한다'는 편견을 깨고 싶었던 지도자 중 한 명이었다.

'승부조작' 여파 남아있던 대전을 살린 감독

많은 이들이 기억하는 '지도자' 故유상철은 2006년 KBS 축구 예능 '날아라 슛돌이'에서의 모습일 것이다. 유상철 감독은 해당 프로그램에서 이강인을 지도하기도 했다. 이후 2009년 춘천기계공업고등학교 축구부가 창단되면서 초대 감독으로 부임하기도 했다. 춘천기계공고에서 유상철 감독의 지도를 받았던 선수 중 하나는 FC서울과 울산현대, 김천상무에서 활약한 박용우다. 유상철 감독은 '고등학생' 박용우와의 만남을 회상하며 "처음 용우를 봤을 때 기성용이 떠올랐다"며 "신체조건도 그렇고 스타일도 마찬가지다. 부족한 면은 있었으나 가능성을 굉장히 많이 봤다. '저놈은 잘 되게 도와줘야겠다' 싶었다"라고 전한 바 있다. 박용우는 이후 프로 무대에서 성장했고 2016 리우 올림픽 본선 무대에도 합류할 수 있었다.

춘천기계공고 초대 감독 유상철은 약 2년 반 만에 프로 무대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2011년 7월, 이미 자리에서 물러난 대전시티즌 왕선재 감독의 후임으로 지휘봉을 잡았다. 당시 대전은 승부조작 파문으로 선수단이 제명당한 상황이었고 신진원 감독 대행 체제에서 치른 두차례 경기에서 7골씩 실점해 팬들의 실망이 컸다. 유상철 감독은 7월 23일 강원FC전을 통해 프로 감독 데뷔전을 치렀고 데뷔전에서 1-0 승리를 거두며 침체된 대전의 분위기를 반전시켰다. 승부조작 사태로 어수선했던 대전은 유상철 감독의 리더십으로 빠르게 상황을 수습했고 리그 최하위를 면할 수 있었다.

여름부터 팀의 지휘봉을 잡은 유상철 감독은 2012 시즌을 앞두고 위기에 봉착했다. 대전의 상징 최은성이 계약 문제로 팀을 떠나게 되면서 팀 분위기가 다시 흔들렸다. 리그 초반 잠시 힘들었지만, 이 때도 유상철 감독의 지도력이 빛을 발했다. 케빈과 김형범을 앞세워 수원을 잡은 뒤 선수들의 활동량을 최대로 끌어 올리며 K리그 무대에서도 절대 만만하지 않은 팀으로 변모시켰다. 비록 해당 시즌 대전은 16팀 중 13위라는 아쉬운 성적을 거뒀지만 1부리그에 생존할 수 있는 힘을 보여줬다. 시즌 마지막 경기를 앞두고 대전 구단의 계약 만료 소식을 기사로 접하는 등 유 감독으로서는 회의감이 짙어질 수밖에 없는 일이 벌어졌지만 대전 팬들을 위해 끝까지 벤치를 지켰다. 대전 감독으로서 마지막 경기였던 대구전에서도 1-0으로 승리하며 유종의 미를 거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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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의 영건들을 길러낸 지도자

대전시티즌의 지휘봉을 내려놨던 유상철 감독은 약 1년 만에 다시 선수들의 육성을 위해 감독으로 돌아왔다. 이번엔 프로 무대가 아닌 대학 무대였다. 유상철 감독은 울산대학교의 제안에 "망설임이 없었다"라고 했다. 이는 유상철 감독이 울산현대에 입단하면서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던 이유가 크다. 유상철 감독은 다양한 매체를 통해 "울산은 운명처럼 다가올 정도로 각별한 도시다"라면서 "그동안 지역민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기에 이제는 제가 보답해야 할 차례라고 생각했다"라고 전하기도 했다.

유상철 감독은 울산대 지휘봉을 잡으면서 괄목할 만한 성적을 거뒀다. 우승 트로피는 없었지만 1,2학년 대학축구대회, 추계대학축구연맹전 등에서 총 4번의 준우승의 성적을 거뒀다. 2017년 추계대회를 준우승으로 마무리한 후 정상을 찍지 못해 못내 아쉬움을 드러내기도 했다. 하지만 유 감독은 수도권 쏠림 현상이 심한 대학 축구계에서 울산대를 경쟁력 있는 팀으로 끌어 올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더불어 지금도 K리그 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걸출한 제자들을 양성했다는 점이 더욱 주목받는다. 유상철 감독은 과거 <스포츠니어스>와의 인터뷰에서 "현역 시절 멀티플레이어로 뛴 경험이 어린 선수들을 지도하는 데 도움이 된다"라고 말했다. 광주FC 골키퍼 윤보상, 성남FC 측면 수비수 최지묵, 울산현대 측면 멀티플레이어 설영우 등이 유상철 감독의 지도를 받고 성장해 지금도 K리그에서 맹활약하고 있다.

유상철 감독은 2018년 전남드래곤즈 감독으로 부임하며 본인 커리어의 두 번째 프로 무대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시즌 개막전에서 수원삼성을 상대로 2-1 승리를 거두며 인상적인 경기력을 보여줬으나 이후 부진한 성적을 거뒀다. 유상철 감독이 이끌던 전남은 7월말 최하위였던 인천유나이티드에 패배하며 강등권까지 떨어지는 성적을 거뒀다. 유 감독은 결국 8월 16일 구단에 사임 의사를 밝히고 두 번째 도전을 마무리했다.

인천 생존 약속 지켜낸 유상철

하지만 유상철 감독은 이대로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약 1년의 휴식기를 거치고 2019년 5월 인천유나이티드의 9대 감독으로 돌아왔다. 유 감독은 인천 감독 선임 직전 "실패한 감독으로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게 두렵다"라면서 인천에서 재기를 노렸다. 시즌 중반부터 팀을 맡았기에 초반엔 다소 부침이 있었지만 세 경기 만에 제주 원정에서 2-1 승리를 거두면서 인천 감독으로서 첫 승리를 거뒀다. 더불어 여름 이적시장 동안 당시 인천의 전력강화실장이었던 이천수 실장과 함께 김호남, 장윤호, 마하지, 케힌데 등 여러 선수들을 보강하면서 K리그1 생존을 위해 애썼다.

시즌은 어느덧 종반으로 향했고 파이널 라운드가 시작됐다. 유상철호의 인천은 성남 원정에서 무고사가 프리킥으로 결승골을 넣으며 1-0으로 승리를 거뒀다. 하지만 이날 경기가 끝나자 선수들을 비롯해 이천수 실장까지 오열하는 모습이 중계화면을 통해 팬들에게 전달됐다. 귀중한 승점 3점을 챙긴 팀의 모습치곤 묘한 분위기가 인천을 감쌌다. 이날 결승골을 넣었던 무고사도 언론 인터뷰에 응하지 않고 경기장을 빠져나갔고 김호남도 "나중에 알게되지 않을까"라고 전하며 자리를 피했다.

이후 유상철 감독은 병원에 입원하면서 잠시 훈련장을 떠났지만 본인의 강력한 의지로 다시 인천 훈련장을 찾았다. 유 감독은 수원삼성과의 경기 이후 "나는 끝까지 같이 할 것이다. 마지막까지 우리 선수들과 마무리 하겠다"라며 강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췌장암 4기 판정 소식이 구단 공식 SNS를 통해 전해졌지만 유 감독은 자신의 말을 끝까지 지키겠다는 듯 여전히 인천 벤치를 지켰다. 그리고 유상철 감독은 2019시즌 최종전 경남FC와의 경기에서 0-0으로 비기면서 K리그1 생존을 확정했다. 유상철 감독은 그렇게 팬들과의 약속을 지켰다. 인천 팬들은 생존 확정 후 "남은 약속 하나도 꼭 지켜줘"라는 걸개를 들었다.

유상철 감독은 끝까지 인천을 지키며 인천의 K리그1 생존에 힘을 쏟아냈다. 감독 부임 전 "실패한 감독으로 기억되는 게 두렵다"던 유상철 감독은 두려움을 극복하고 결과로 증명해냈다. 시즌을 마무리한 유 감독은 치료를 위해 구단에 사임 의사를 밝혔다. 구단은 유 감독의 의사를 받아들이며 명예 감독으로 선임했다. 유 감독은 병세가 진정될 때마다 축구장으로 와 선수들의 경기를 지켜보곤 했다. 故유상철 감독은 어려운 팀을 도맡으며 위기를 극복해 나가는 지도자였다. 선수들의 장점을 극대화 시키면서 다양한 포지션으로 선수들을 활용했으며 다양한 전술로 상대를 괴롭히던 장수였다. 의지와 열정이 강해 늘 선수들의 버팀목이 됐던 지도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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