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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니어스 | 화성=명재영 기자] 이보다 짜릿한 복수전은 없었다.

18일 화성종합운동장 주경기장에서 화성FC와 수원삼성의 KEB 하나은행 FA컵 2019 4강 1차전이 열렸다. 사상 최초로 K3리그 소속으로 FA컵 준결승 무대까지 오른 화성과 FA컵 최다 우승팀이자 K리그1 빅팀으로 꼽히는 수원의 '다윗과 골리앗' 맞대결이었다. 화성의 파죽지세가 놀라웠지만 많은 축구인은 "그래도 수원"이라며 수원의 우세를 점쳤다.

축구공은 역시 둥글었다. 화성은 수원을 압도했다. 전반 24분에는 화성 문준호가 환상적인 감아차기 슈팅으로 수원의 골문을 흔들었다. FA컵 우승이 절실한 수원이지만 실점 이후에도 화성의 맹공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경기는 홈팀 화성의 1-0 승리로 막을 내렸다.

여기까지만 해도 충분히 흥미로운 이야기다.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더 애달프면서 통쾌한 사연이 있다. 결승골을 기록한 문준호가 그 주인공이다. 문준호는 2016년 수원을 통해 프로 무대에 입성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2군 자원으로 취급되며 리그 경기에 단 한 번도 나서지 못했다. 수원에서의 기록은 2년 동안 FA컵 1경기 출전과 R리그(2군) 32경기 출전 3골이 전부다.

용인대에서 U리그 우승을 이끌고 2015년 광주 하계 유니버시아드 대회에서 대표팀 주장까지 맡았던 문준호에겐 너무나도 힘든 시간이었다. 문준호는 경기 후 인터뷰에서 "수원에서의 2년이 축구 인생에서 제일 힘들었던 시간이었다"며 "사실 올해 수원에서 뛸 줄 알았는데 이런 식이 되어서...."라며 씁쓸한 표정으로 말을 줄였다.

지난해 K리그2 FC안양으로 1년 임대를 간 문준호는 임대 기간 만료에 따라 연말 팀에 복귀했다. 그러나 구단은 문준호에게 계약해지 카드를 꺼내 들었다. 계약 기간이 남아있었지만 짐을 싸라는 의미였다. 쌓아놓은 입지가 없었던 문준호는 수원이 제시한 상호 간 계약해지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수원에서 나온 후 프로와 실업 무대를 가리지 않고 팀을 찾았지만 보여준 실적이 없었기에 선뜻 자리가 나지 않았다. 결국 아마추어 리그로 평가되는 K3리그 화성에 가까스로 입단했다. 자존감이 바닥까지 떨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문준호는 이를 악물고 그라운드를 누볐다. 그렇게 소속팀 화성이 FA컵 준결승 무대까지 올라가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8강에서 멋진 골로 경남FC를 침몰시킨 문준호는 4강 대진 추첨만을 기다렸다. 바라는 상대는 오직 수원이었다. 전력상 절대 열세지만 한 번이라도 수원에 자신의 존재감을 보여준다는 각오뿐이었다. 그리고 그 바람은 현실이 됐다. 문준호는 "대진 추첨이 끝나고 개인적으로 준비를 정말 열심히 해왔다. 내 이름 석 자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최근을 회상했다.

각오도 있지만 두려움도 있는 법. 객관적으로 화성은 재정부터 팬 규모까지 수원과 경쟁 자체가 되지 않는다. 문준호는 "솔직히 수원을 제대로 상대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안 했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런데 팀원들 모두가 많은 준비를 했기에 일말의 기대감이 있었고 결정적으로 오늘 경기를 해보니 해볼 만한 것 같다. 구단 전체가 자신감이 많이 올라왔다"고 말했다.

1차전은 화성의 잔치였지만 아직 90분이 남아있다. 다음 달 2일 수원월드컵경기장(빅버드)에서 2차전이 열린다. 한때 빅버드에서 경기를 뛰는 것이 소원이었던 문준호로서는 더욱 동기부여가 되는 상황이다. 친정팀 수원을 침몰시킨 문준호는 "수원이 K리그1 구단인 만큼 선수들의 능력이 좋은데 우리가 간절함과 끈끈함이 더 큰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1차전을 이겼고 2차전도 기대가 된다"며 수원에 묵직한 한 방을 날렸다.

올해 엄청난 활약으로 프로 무대로의 재진출도 언급되는 문준호지만 당장의 소원은 소박했다. 2년 동안 고정 자리였던 수원월드컵경기장 본부석 2층 좌석을 벗어나 그라운드에서 멋진 경기력으로 문준호라는 선수가 한때 수원 선수였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다. 인터뷰 내내 침착함을 유지했던 문준호는 축하하러 온 지인들을 마주치자 꾹 눌러왔던 본심을 포효하며 드러냈다. "(드디어) 됐어! 이제 (날 버린) 수원 할 말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