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프로축구연맹 제공

[스포츠니어스|조성룡 기자] "그런데 말이야, 그 얘기 좀 안했으면 좋겠어."

지난 2월 26일 하나원큐 K리그 2019 미디어데이, 김병수 감독은 나와 함께 자리에 앉아 "외모가 서로 닮았다"는 농담을 하며 웃던 중 불쑥 이 말을 꺼냈다. '역시 나와 닮았다는 건 좋은 얘기가 아니지'라고 생각하며 머쓱해할 때 김 감독은 말을 이어갔다.

"그 천재라는 이야기 있잖아. 전술 천재, 비운의 천재, 뭐시기 천재… 이런 이야기 좀 안했으면 좋겠어. 기자들도 기사에는 천재 얘기 안썼으면 좋겠어." 솔직히 두 가지에서 놀랐다. 첫 번째로 김 감독은 자신의 속내를 쉽게 꺼내지 않는 스타일이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했다. 두 번째로 그는 자신에 대한 세간의 평가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있었다.

우리가 알고 있던 김병수 감독의 수식어, 천재

우리는 김병수라는 인물을 향해 '천재'라는 단어를 쉽게 떠올린다. 당연하다. 선수 시절 그는 1990년대 한국 축구를 이끌어갈 천재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었다. 이는 지도자가 되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영남대학교에서 대학 축구를 평정한 그는 2017 시즌 K리그2 서울이랜드 감독직을 맡으며 프로 감독에 데뷔했다. 당시 축구계의 반응은 정말로 뜨거웠다. 재야에 묻혀있다 세상에 나온 제갈량을 맞는 분위기였다. 스타 감독의 탄생을 예고했다.

김 감독을 향해 제자들은 '전술 천재'라며 극찬했고 그의 영남대 축구를 본 팬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함께 지도자 강습을 들었던 축구계 동료들도 기대감을 드러냈다. 모두가 필살기인 불꽃슛을 던지는 피구왕 통키처럼 김 감독이 무언가 K리그를 평정할 필살기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김 감독은 '그 무언가'를 보여주지 못했다. 자연스럽게 '김병수 거품론'까지 조금씩 등장하고 있다.

물론 제자들과 지켜본 사람들의 극찬을 전적으로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김 감독의 토로는 시사하는 바가 많다. 생각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전술 천재' 김병수에 대한 기대치는 상당히 높았다. 그리고 그 기준대로 김 감독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는 지금까지 김 감독을 '천재'의 프레임에서 가둬놓은 것은 아닐까? 결과론적으로 그 호평들이 김 감독에게 또다른 짐이 된 것은 아닐까?

선수들도 갇혀버린 김병수 '천재' 프레임

단순히 팬들과 관계자들만 김 감독의 '천재' 프레임에 갇힌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최근 한 강원 구단 관계자로부터 하소연을 들을 수 있었다. "김 감독이 요즘 스트레스 많이 받고 있다"라는 이야기였다. 감독에게는 항상 성적 스트레스가 있기 때문에 이 이야기는 그리 놀랍지 않았다. 하지만 그 다음 이야기는 어찌보면 안타까웠고 충격적이었다.

"김 감독이 선수들에게 이런저런 지시를 내리면 선수들은 정말 열심히 잘 따른다. 그런데 그 뿐이다. 딱 거기까지만 한다. 선수들에게도 김 감독은 천재적인 전술가 또는 지략가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프로 선수임에도 불구하고 김 감독의 말이 무조건 정답이라 믿는 것이다. 김 감독이 한 마디 하면 선수들은 그것이 진리라 생각하고 그대로'만' 한다. 한 번은 김 감독이 '내가 이런 것까지 설명해야 하니?'라고 한탄했다. 그리고 두 번 세 번 설명을 해야한다."

김 감독의 '천재' 프레임으로 인해 선수들이 덩달아 갇혔다는 이야기다. 프로 선수들이 김 감독의 이미지로 인해 학생 선수가 되어버린 느낌이다. 김 감독 또한 이 상황을 모를 수 없다. '천재'라는 프레임은 단순히 김 감독에게만 부담된 것이 아니었다. 선수들도 덩달아 '천재의 제자'가 된 것이다. 부담스러울 수 밖에 없다.

K리그의 천재가 아닌 가장 비참한 감독, 김병수

K리그, 그리고 프로축구의 감독은 참 어려운 자리다. 언제라도 옷을 벗을 수 있다. 그리고 축구의 재미도 추구하면서 성적까지 잡아야 한다. 두 마리 토끼를 빨리 잡지 않으면 죽을 위기에 놓인 사냥꾼과도 같다. 김 감독도 이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더욱 고민이 많았다. "쉽게 쉽게 축구하면 성적은 나올 거야. 그런데 그 축구는 또 내가 하고싶은 축구는 아니거든. 보는 사람 입장에서 재미도 없고."

누군가는 김 감독을 '천재'로 기억하지만 나는 그를 'K리그에서 가장 비참한 감독'으로 기억한다. 아마 누군가 이 칭호를 가져가기에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서울이랜드의 2017 시즌이 끝나고 "저는 반드시 서울이랜드를 일으켜 세울 겁니다"라고 울먹이며 말했던 김 감독은 불과 며칠 뒤 자진사퇴(인지 아닌지 모르겠는) 영상을 찍어야 했다. 이렇게 비참한 감독의 말로는 없었다. 그렇게 그는 한 번 죽은 사냥꾼이 됐다. 두 마리 토끼를 제대로 잡지 못했다는 이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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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서울이랜드에서 마음 고생을 참 많이 했다. <스포츠니어스>에 김 감독은 쉽지 않은 인터뷰이였다. 재미있는 질문을 던지면 말 없이 미소로만 답했다.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이것이었다. "뭐 그냥 하는 대로 하는 거지 뭐." 참 쿨한 감독인 줄 알았다. 그런데 서울이랜드가 연패를 끊는 순간 김 감독은 너무나도 환한 표정으로 모든 기자들과 일일이 악수를 했다. 그동안 속으로 끙끙 앓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 환한 표정은 잠깐이었다. 서울이랜드에서 김 감독의 마지막은 너무나도 좋지 않았다. 그의 첫 프로 감독 생활은 뼈저린 교훈을 남겼다. 아니 남긴 줄 알았다.

김병수 감독의 고집, 또는 뚝심은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강원에서는 변해야 했다. 두 마리 토끼를 잡지 못한다면 한 마리라도 확실히 잡아야 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그가 여전하다는 것이다. 물론 시즌 도중에 지휘봉을 잡았다는 것은 감안해야 했다. 하지만 어찌보면 고집스러웠다. 슬슬 김 감독의 '천재적인 축구 전술'은 일본 대표팀의 1군처럼 전설이 되어가고 있었다. 2018 시즌 강원은 제리치도 침묵하기 시작했고 성적도 떨어지면서 8위로 마감했다. 아쉬운 성적이었다.

김 감독은 이런 상황에 대해 명확하게 진단하고 있었다. "수비에서 곧바로 때려넣는 전술은 금방 만들어. 그런데 패스를 하면서 공격을 하는 것은 달라. 시간이 굉장히 많이 걸려. 적어도 2~3년은 잡아야 완성될 수 있을 거야." 갑자기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된다. 김 감독은 강원에 부임한지 이제 7개월 차에 접어들었다. 강원 팬 여러분 큰일 났다. 아직 2년 반은 기다리셔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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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이 생각해보면 김 감독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 서울이랜드에서는 불과 1년 만에 지휘봉을 내려놨고 강원에서도 이제 두 번째 시즌이다. 첫 시즌을 절반 밖에 소화하지 못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사실상 2019년이 김 감독의 첫 번째 시즌이라고 볼 수 있다. 워낙 그의 프로 감독 생활이 다사다난 했기에 그만큼 시간이 길게 느껴졌으리라. 어쨌든 그에게는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그런데 다시 한 번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천재가 3년이란 시간이 필요한 것일까?'

김병수 감독에게 천재라는 수식어는 온당할까?

답은 어찌보면 간단하다. 그가 천재라는 생각을 내려놓으면 이해할 수 있다. 천재의 사전적 의미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남보다 훨씬 뛰어난 재주, 또는 그런 재능을 가진 사람'이다. 김 감독은 천재일 수 있다. 하지만 K리그라는 곳은 '천재'라는 수식어를 증명해야 하는 자리다. 김 감독은 증명해내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는 선수 시절 천재라 불렸어도 감독으로 천재라고 평가하기에는 이르다.

그리고 김 감독은 천재라는 수식어에 오히려 부담감을 느끼고 있었다. 만일 천재라는 수식어에 그가 집착했다면 그의 선택은 강원과 같은 프로 무대가 아닌 대학 무대였을 것이다. 대학 무대는 그래도 임기가 비교적 길게 보장되는 곳이다. 이곳에서 다시 한 번 제자들을 육성해 자신 만의 축구를 완성한다면 그는 계속해서 '천재'라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김 감독은 그러지 않았다.

어찌보면 고집스러운 자존심으로 분석되기도 한다. 서울이랜드에서 상처를 받은 김 감독은 이대로 물러서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축구를 프로 무대에서도 증명받고 싶었을 것이다. 강원에서 전력강화부장을 통해 지휘봉을 잡았을 때 '예고된 차기 감독'이라는 비아냥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명예 회복을 위해 나섰다. 하지만 상황은 녹록치 않다. 프로 무대는 인내심이 긴 곳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고집스럽게 자신의 길을 가려고 한다. 순간 떠오르는 하나의 단어가 있다. 장인.

김병수 감독은 천재가 아니다, 장인이다

세계 축구의 흐름은 변화무쌍하다. 백 포에서 백 스리로, 화려한 티키타카에서 실리를 추구하는 수비축구로 무게중심이 옮겨진다. 축구는 승리를 추구한다. 그렇기에 승리하기 위한 수단들을 집약해놓은 것이 바로 전술이다. 그리고 그 전술을 통해 감독들은 평가 받는다. 재계약을 할 때도 있고 지휘봉을 내려놓을 때도 있다. 세계 축구는 이미 프로의 세계가 됐고 프로는 냉혹하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 감독은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고 있다. 천재가 아닌 장인의 마음이다. 그도 지고 싶지 않을 것이다. AFC 챔피언스리그도 나가보고 싶고 우승컵도 들어올리고 싶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손쉬운 길을 택하지 않고 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그는 자신의 길을 가고 있었다. 또다시 언제 목에 칼이 들어올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버티고 있었다. 우리는 그의 전술적인 두뇌가 아니라 그의 뚝심에 먼저 주목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은 선수들 또한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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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 정신. 사람이 전력을 다하여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것에 자기의 최선을 다하는 마인드를 일컫는다. 김 감독은 천재가 아니다. 천재는 비교적 쉽게 결과물을 얻는다고 평가 받는다. 프로의 폭풍 속에서 버텨가며 땀 흘리는 김 감독에게 천재라 부르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아직까지 단 한 번의 완성품을 만들지 못했지만 그는 장인 정신으로 도전하고 있었다. 선수들은 장인을 힘껏 돕는 역할을 해야한다. 하라는 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의견도 제시하고 함께 고민도 해야 한다. 김 감독은 모든 것을 다 하는 천재가 아니니까.

그에게 필요한 것은 시간이다. 한 땀 한 땀 정성껏 그는 자신의 축구를 강원에서 만들고 있다. 본격적인 김병수 축구에 대한 평가는 완성작을 놓고 해도 된다. 물론 아직까지는 K리그에서 김 감독의 완성된 축구를 볼 수 있을지 의문이다. 여전히 이곳은 감독에 대한 인내심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강원은 지난 시즌 김 감독과 조기에 3년 재계약을 체결하며 그에게 시간도 주고 힘도 실어줬다. 이 점은 박수 받아야 한다. 투자는 돈 뿐 아니라 시간에도 향해야 하지만 축구는 그렇지 못한 스포츠다. 사실 우리나라 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그렇다.

길지 않은 대화를 마치기 전 나는 김 감독에게 물었다. "김병수 축구의 핵심은 결국 '임기' 아닐까요?" 그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며칠 뒤, 3월 2일 열린 K리그1 상주상무와의 개막전에서 강원은 0-2로 패하며 고개를 숙였다. 벌써부터 강원의 올 시즌 앞날에 먹구름이 끼었다. 마지막으로 그가 내게 진심을 담아 건넸던 한 마디가 자꾸 귓가에 맴돈다. "나는 평범한 사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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