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전을 앞두고 만난 서정원 감독의 모습. 이 경기가 그의 마지막 경기였다. ⓒ스포츠니어스

[스포츠니어스 | 수원=김현회 기자] 수원삼성은 제주도에서 태풍을 직격으로 맞았다. 수원삼성은 지난 22일 제주월드컵경기장에서 제주유나이티드와 KEB하나은행 K리그1 2018 25라운드를 앞두고 있었다. 지난 19일 전남 광양에서 열린 전남드래곤즈와의 경기가 끝난 뒤 20일 여수공항을 통해 제주로 들어갔다. 이틀 간 제주에서 훈련한 뒤 제주와 경기를 펼치고 23일 수원으로 돌아가는 일정이었다. 하지만 제주도가 역대급 태풍 ‘솔릭’의 직접 영향을 받게 되면서 일이 꼬였다. 가까스로 24일 수원에 돌아온 서정원 감독은 경남과의 경기를 앞두고 제주에서의 고생담을 털어놨다.

제주에서 태풍 ‘솔릭’ 만난 수원 선수단

수원삼성 선수단은 제주에 도착해 강한 바람 때문에 제대로 된 훈련도 하지 못했다. 호텔에서 매트리스를 깔아 놓고 스트레칭을 하는 게 전부였다. 서정원 감독은 “호텔에서 바람만 보고 있다가 왔다”면서 “첫 날과 둘째 날에는 호텔 홀에 모여 매트리스를 깔아 놓고 몸을 풀었다. 호텔 앞에 잠깐 나가 산책을 하는데 바람이 장난이 아니었다”고 혀를 내둘렀다. 훈련에만 지장이 있었던 게 아니다. 밤에는 공포감을 느낄 정도의 바람을 경험했다. 서정원 감독은 “어찌나 바람 소리가 세던지 무슨 굴삭기 소리가 났다”면서 “바닷가 쪽에 창이 난 방에 머문 선수들은 공포심을 느끼기도 했다. 귀마개를 해도 잠을 못 잘 정도였다”고 당시 상황을 회상했다.

심지어 호텔로 물이 차 경기 분석관 노트북이 물에 젖기도 했다. 서정원 감독이 제주에서의 태풍 경험담을 털어놓자 구단 관계자도 옆에서 “바람 시속이 108km/h였다”고 덧붙였다. 서정원 감독은 제주에서의 공포스러웠던 기억을 떠올리며 직접 찍은 영상을 보여줬다. 숙소 앞 나무가 거세게 흔들릴 정도의 강풍이 영상에 담겨 있었다. 훈련은커녕 제대로 된 휴식도 취하지 못하고 경기 당일이 됐다. 이미 뉴스에서는 태풍 솔릭의 진로와 세기에 대해 특보를 내고 있었다. 제주가 태풍의 직접적인 영향권에 들 것이라는 건 모두가 알고 있었다. 하지만 프로축구연맹에서는 경기 세 시간 전에 경기 중단 여부를 판단한다는 규정을 내세웠다. 서정원 감독은 직접 감독관에게 전화를 했다.

서정원 감독은 “초대형 태풍의 진로와 세기가 이미 다 예측된 상황이었는데 경기 세 시간 전까지 기다리다가 연기 여부를 결정한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면서 “빨리 경기 연기를 결정했으면 당일 아침이라도 우리가 제주도를 빠져 나올 수 있었다. 22일 저녁 6시까지는 그래도 비행기가 떴다”고 아쉬워했다. 서정원 감독은 “밖에 나가면 서 있지도 못할 정도였는데 어떻게 공을 차나. 우리나라가 이런 경험이 부족하다고는 해도 일본은 벌써 이런 예보가 나오면 경기 이틀이나 사흘 전에 연기를 결정하기도 한다. 내가 경기 날 아침부터 감독관과 통화를 하면서 상황을 파악했다”고 덧붙였다. 결국 연맹은 최진철 경기위원장을 제주로 급파해 상황 파악에 나섰다.

수원 팬들은 경남전을 앞두고 이런 반응을 보였다. ⓒ스포츠니어스

수원은 쉬지도 못하고 훈련도 못했다

서정원 감독은 연맹의 결정이 내려지지 않아 제주전을 예정대로 준비해야 했다. 이미 태풍으로 난리가 난 마당에 경기가 예정대로 열릴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았지만 경기 연기 결정은 경기 세 시간 전까지는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서정원 감독은 “경기 준비를 다 하고 선수들과 미팅을 하기 위해 나서는데 그때 연기가 결정됐다”면서 “선수들도 미팅실에 다 모여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경기 취소 소식을 접했다”고 했다. 하지만 경기가 연기됐다고 해 끝이 아니었다. 수원은 태풍으로 발이 묶인 제주에서 떠날 수가 없었다. 일단 하루를 더 제주에서 보낸 선수단은 사흘 동안 운동을 전혀 하지 못한 상황이라 몸이라도 풀어야 했다.

하지만 이미 태풍으로 난리가 난 제주에서 잔디 구장을 빌릴 수는 없었다. 결국 인조잔디 구장을 빌려 바람과 비를 온몸으로 맞으며 몸을 풀었다. 제주전은 연기됐지만 25일 경남과 안방에서 치를 경기를 곧바로 준비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주에서 수원까지 올 길이 막막했다. 태풍으로 발이 묶여 제주를 떠날 수가 없었다. 항공편을 구할 길이 없었다. 결국 가까스로 24일 오후 제주를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제주까지 날아가 나흘을 체류하고도 호텔에 발이 묶여 경기도 치르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온 수원은 얻은 게 없다. 휴식이라고도 할 수 없다.

서정원 감독은 “쉬더라도 운동을 하면서 쉬었으면 좋았을 것”이라면서 “우리가 좋지 않았던 장면이나 불안했던 걸 훈련으로 채우면서 쉬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복귀도 간당간당할 정도로 노심초사했다. 제주에서 태풍이 예상보다 오래 머물렀는데 우리를 따라 태풍이 김포로 올라오는 건 아닌지도 걱정했다. 남들이 보면 제주도에서 운동도 하지 않고 쉬다 온 거라고 생각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전혀 쉬지 못하고 경기를 준비하다가 돌아왔다”고 말했다. 결국 24일 가까스로 수원에 돌아온 선수단은 이튿날 곧바로 경남과의 홈 경기에 나서야 했다. 제주전은 오는 9월 8일로 연기돼 다시 제주도로 한 번 더 내려가야 한다. 타격이 크다.

수원 팬들은 경남전을 앞두고 이런 반응을 보였다. ⓒ스포츠니어스

태풍이 온 듯한 빅버드의 풍경

수원은 가까스로 안방에 돌아왔다. 하지만 서정원 감독이 말하는 흐린 풍경은 이게 다가 아니었다. 경남과의 홈 경기에 열리는 수원월드컵경기장에는 태풍 ‘솔릭’이 온 것만 같았다. 팬들은 골대 뒤 응원 걸개를 전부 떼어내고 ‘야망이 없는 프런트, 코치, 선수는 당장 나가라. 수원은 언제나 삼류를 거부해 왔다’는 걸개 하나만을 거꾸로 내걸었다. 지난 전남전 4-6 참패를 비롯해 3연패를 기록 중인 팀에 대한 강력한 항의였다. 선수 입장을 앞두고는 여기 저기 항의성 걸개가 더 내걸렸다. 경기 전 만난 서정원 감독은 “인생이 늘 맑고 쾌청한 날만 있을 수는 없다”면서 “살다보면 태풍 ‘솔릭’도 이렇게 만난다”고 했다.

서정원 감독은 솔직한 심정을 털어놨다. 그는 “나도 우리 팀에 오래 있었다. 지금 상황이 너무 마음이 아프다”면서 “이건 솔직히 내 책임이지 그 누구의 책임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태풍 ‘솔릭’으로 제주에 체류했던 상황을 격하게 이야기했던 서정원 감독은 경기장 분위기 이야기가 나오자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문제라면 내가 문제다. 우리 선수들은 절대 나태하지 않다. 요즘 경기마다 몇 번 아쉬운 장면이 있었지만 나는 우리 선수들을 끝까지 믿는다. 거기에 대한 책임은 내가 진다. 항상 책임질 각오는 돼 있다”고 밝혔다. 의미심장한 이야기였다.

서정원 감독은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겠나. 내가 이 팀에서만 13년을 있었다. 팬들이 열정적이고 애착이 강한 것도 충분히 이해한다. 이 팀에서 13년을 있었던 내가 지금 분위기를 가장 잘 안다”면서 “책임은 확실히 내가 지겠다. 이 생각은 변함이 없다. 내가 부족하면 나가야 하는 거 아닌가. 당연히 지도자가 부족하면 떠나야 한다. 내 자리에 연연하는 모습을 절대로 보여주기 싫다. 대신에 힘들 때 우리 선수들에게 힘을 줬으면 좋겠다”고 강하게 말했다. 그는 “항상 날씨가 맑고 쾌청할 수는 없다. 살다보면 ‘솔릭’도 만난다. 다 그렇듯 리그도 타이밍이 있다. 내려갈 때도 있고 올라갈 때도 있다”고 이 상황을 태풍 ‘솔릭’에 빗대 말했다.

“책임질 상황은 내가 책임지겠다”

서정원 감독은 “하지만 정말 자신 있게 이야기하는 건 나는 1년 365일 하루도 빼놓지 않고 선수들과 동고동락했다는 점이다. 이건 정말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다”면서 “한눈 팔지 않고 흐트러짐 없이 했다고 자부한다. 숙소 일지를 봐도 어느 선수보다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한다. 13년간 진짜 흐트러짐 없이 올바르게 선수들을 인도했는데 요즘 들어 결과가 나오지 않아 안타까운 마음이다. 팬들이 바라는 눈높이에 맞추지 못해 가슴이 아프다. 우리는 올해 1월부터 시즌을 시작해 FA컵도 8강에 올라 일단은 전북보다도 더 많은 경기를 해야 한다. 최선을 다하고 있다. 잠시나마 이렇게 힘든 상황을 겪고 있지만 당연히 헤쳐 나가야 한다. 혹시나 책임질 상황이 있으면 내가 책임을 지겠다”고 말했다.

제주도에서 강력한 태풍을 경험한 수원은 이 태풍을 뚫고 안방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서정원 감독의 말처럼 팀 분위기는 아직도 흐리다. 그들이 이 태풍을 견뎌내고 쾌청한 날을 맞이할 수 있을까. ‘솔릭’은 소멸됐지만 아직 수원에는 구름이 껴 있다. 서정원 감독의 고심은 점점 더 깊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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