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구FC

[스포츠니어스 | 홍인택 기자] 뛰는 것만 생각했다. 어느 팀에 들어가도 뛰지 못하면 의미가 없었다. 뛰고 싶었고 뛰기만을 원했다. 그래서 이 팀 저 팀을 찾아다녔다.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일본으로 향했다. 뛸 수 없었다. 국내로 돌아와 대학도 가봤다. 꿈에 그리던 프로팀 입단을 위해 테스트도 봤다. 첫해는 풀리지 않았다. 또 다른 팀 테스트를 봤다. 겨우 뛰기 시작했다. 뛸 수 있는 팀을 찾아다니던 정우재는 뛰기 시작하면서 첫 러브콜을 받았다.

어린 시절부터 주목받는 선수도 K리그에 적응하기 쉽지 않다. 혜성처럼 등장했다가 연기처럼 사라지는 선수들도 많았다. 정우재는 뛰기 시작하면서 성장했다. 자신이 그토록 뛰기 원했던 녹색 운동장에 들어선 순간부터 점점 기량이 발전했다. 그저 경기에 나가기 위해 팀을 옮겨 다니던 정우재는 어느새 K리그 105경기를 뛰었다. 2016년 자신에게 생애 첫 러브콜을 보냈던 대구FC의 왼쪽 수비를 책임지고 있다.

안정환처럼 되고 싶었던 소년

처음 시작은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남들보다는 조금 늦은 시기. 2002 월드컵을 경험한 그는 안정환처럼 되고 싶었다. 안정환처럼 머리도 길렀다. 그는 방과 후에 친구들과 공을 차다가 육상 경기에 출전했다. 클럽팀의 제의를 받아 클럽에서 공을 차다가 5학년 말에 축구부가 있는 학교로 전학을 했다. 안산부곡중학교와 태성고등학교를 다니며 실력을 키웠다. 정우재의 표현을 빌리면 "기본은 하는 선수"였단다. 태성고 감독도 정우재의 실력을 인정했다. 주변에서도 정우재를 '물건'이라고 불렀다. 자신감이 붙었다. 바로 프로로 진출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태성고를 졸업하자마자 짐을 꾸려 프로팀 테스트를 받으러 떠났다. 그것도 일본으로.

정우재는 "해외에 나가보고 싶었다"라고 했다. 첫 도전은 비셀 고베 입단 테스트였다. 오히려 츠바이겐 가나자와 관계자가 정우재에게 눈독을 들였다. 가나자와는 2011년 당시 3부 리그 격인 JFL 리그에 있었다. 프로는 아니었지만 경험을 위해 가나자와에 입단했다. 선수들은 텃세도 부리지 않고 정우재를 챙겼다. 가나자와팀 감독도 정우재를 아꼈다. 그러나 너무 아꼈던 탓일까. 감독은 정우재에게 좀처럼 기회를 주지 않았다.

남들보다 일찍 공을 차고 경기에 뛰고 싶었던 정우재는 불안했다. 정우재에게 일본어는 버겁기만 했다. 혈혈단신으로 떠난 일본에서 끼니를 챙기기도 쉽지 않았다. 경기 출전은 점점 미뤄지고 있었다. 답답한 마음에 감독을 찾아가니 "너는 19살이다. 나이가 어려 다칠 위험이 있다. 경기에 내보낼 수 없다"라는 대답을 들었다. 정우재는 "이럴 거면 왜 왔나 싶었다"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가나자와 구단은 정우재의 가능성에 기대를 걸며 1년 더 팀에 남아주길 원했지만 정우재는 그저 뛰고 싶은 마음에 1년 만에 일본 생활을 정리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2012년 한국으로 돌아와 드래프트를 신청했으나 이렇다 할 경력이 없었던 정우재에게 손을 내미는 팀은 없었다. 당시에는 J리그 유출 방지를 위한 '5년 룰'도 제정되지 않았던 시기였다. 대구FC가 공개 테스트를 열었지만 탈락하고 말았다. 고등학교로 찾아가 개인 운동을 하면서 뛸 수 있는 팀을 찾았으나 쉽지 않았다. 정우재의 선택지는 좁혀지고 있었다. 정우재는 한 경기라도 뛰기 위해 다음 해 예원예술대학교 입학을 선택했다.

그러나 대학 생활도 만만치 않았다. 정우재는 예원예술대의 강도 높은 훈련에 혀를 내둘렀다. 이를 악물고 버텼지만 정우재에겐 너무나 맞지 않는 옷이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또 1년이 지났다. 정우재는 자신의 축구 인생을 걸었다. 다시 프로팀 테스트에 도전했다. 도전 과정에서 가족들과의 의견 차이도 있었다. 가족들은 정우재가 계속 팀에 몸담고 뛰길 원했다. 정우재는 하루빨리 프로팀 유니폼을 입고 운동장에 나가 뛰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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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여곡절 끝 입단한 성남, "뛰지 못해 괴로웠다"

그렇게 다시 문을 두드린 곳은 성남FC였다. 당시 성남은 일화 그룹이 구단 운영을 포기한 후 시민구단 체제로 전환했던 시기였다. 성남은 선수 수급을 위해 공개 테스트를 진행했다. 그리고 자신의 축구 인생을 걸었던 정우재는 이 테스트에서 합격 통보를 받고 성남FC의 유니폼을 입었다. 성남시민프로축구단의 초대 감독이었던 박종환 감독이 그를 뽑았다. 

너무 극적으로 프로팀 입성에 성공한 탓일까. 정우재의 프로 1년 차도 쉽지 않았다. 정우재는 "당시에는 프로팀에 들어가기만 하면 성공이라는 느낌이 있었다"라고 말했다. 강도 높은 훈련이 맞지 않았던 정우재에게 성남 생존은 또 다른 과제였다. 박종환 감독은 하루에 훈련을 네 번 소집하며 선수들을 엄하게 지도했다. 이미 여러 번 팀을 옮겨 다녔지만 K리그와 프로팀은 처음이었다. 정우재는 적응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힘들게 프로팀에 입단했는데 경기에 나가 뛰지도 못하고 훈련만 하니까 또 미쳐버리겠더라"라며 성남 시절 겪었던 어려움을 전했다.

정우재뿐만 아니라 2014년 성남이라는 팀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박종환 감독은 시즌 초반 선수단 폭행 사건을 일으켜 팀을 떠났다. 박종환 감독 대신 이상윤 감독대행이 팀을 이끌다가 결국 성적 부진으로 이상윤 대행도 팀을 떠났다. 이영진 수석코치가 팀을 이끌더니 시즌 막판 김학범 감독이 부임했다. 정우재는 프로 첫 번째 시즌에 네 명의 지도자를 거쳤다. 이 중에서 이상윤 대행만이 정우재에게 출전 기회를 줬다.

정우재는 7월 19일 전남 드래곤즈 원정에서 후반 40분에 투입되며 K리그 데뷔를 알렸다. 4일 뒤 홈에서 열린 경남FC전에는 선발로 출전했다. 정우재는 "성남에서 데뷔했을 때는 진짜 얼어서 한 게 없었다. 미드필더로 뛰었는데 들어가자마자 상대 선수 다리를 차서 카드도 받았고 경남전에는 전반만 뛰고 나왔다. 딱히 보여준 게 없었다"라며 K리그 초년생 시절의 씁쓸한 기억을 떠올렸다. 정우재가 성남 유니폼을 입고 뛴 기록은 그 두 경기가 전부다.

정우재가 지닌 가능성을 높게 평가한 성남 구단 측은 정우재에게 "내년에도 재계약을 할 테니 열심히 준비하고 있으라"라고 했다. 그러나 이영진 수석코치, 김학범 감독을 거치며 구단 내부에도 인사이동이 있었다. 정우재를 아끼던 사람들이 팀을 떠나자 그를 챙기는 사람은 없었다. 정우재의 프로 계약을 도왔던 인물은 에이전트 계약을 차일피일 미뤘다. 호기롭게 일본 무대에 도전했던 때와 마찬가지였다. 이번엔 국내에서 덩그러니 남겨졌다. 정우재는 "솔직히 성남에 있는 게 싫었다. 경기도 못 뛰고 너무 괴로웠다. 그냥 힘들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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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기 위해 찾아간 충주, 그리고 대구의 '러브레터'

성남 구단은 2014시즌 마무리 후 다음 해 1월이 되어도 정우재에게 재계약을 제의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방출 통보도 없었다. 정우재는 이번에도 스스로 움직였다. 충주 험멜에 있는 친구에게 전화해 "거기 자리 없느냐"라고 물었다. 그 친구는 "마침 우리 팀에서 측면 풀백을 찾고 있더라. 한 번 와서 테스트를 보라"라고 말했다. 친구의 한마디에 정우재는 부랴부랴 충주로 향했다. 이 결정으로 정우재의 축구 인생이 풀리기 시작했다. 당시 충주를 이끌던 김종필 감독이 테스트 선수 정우재를 품었다. 정우재를 높게 평가한 김종필 감독은 꾸준히 선발 명단에 정우재의 이름을 올렸다.

충주 유니폼을 입은 정우재는 탈장 수술과 코뼈가 부러져 부상으로 이탈했을 때를 제외하면 꾸준히 경기에 출전했다. 그토록 뛰고 싶었던 K리그 경기장에서 충주 유니폼을 입고 날개를 폈다. 그는 2015년 6월 27일 충주가 대구를 홈으로 불러들인 경기에서 데뷔골을 터뜨렸다. 0-1로 끌려가던 상황에서 기록한 천금과 같은 동점골이었다. 당시 대구는 K리그 챌린지 1위를 달리는 상주 상무를 추격하는 상황이었다. 바로 밑에는 서울 이랜드FC가 순위 상승을 위해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정우재는 그런 대구에 찬물을 끼얹으며 1-1 무승부라는 결과를 이끌어냈다. 이 경기를 무승부로 마친 대구는 3위로 떨어졌다.

정우재는 꾸준히 기회를 주던 팀에서 처음으로 선수다운 시즌을 보냈다. 물론 충주의 팀 사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하위권을 오가다가 결국 최하위로 시즌을 마무리했다. 그렇게 다음 시즌을 준비하는 정우재에게 절대 잊지 못할 놀라운 소식이 전해졌다. 대구가 그를 원한다는 소식이었다. 시즌 중반 동점골로 대구를 울렸던 정우재에게 대구가 '러브콜'을 보냈다. 정우재는 러브레터를 받은 것처럼 들떴다.

정우재는 "대구가 날 불러줄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그때 대구가 승격엔 실패했지만 2위도 하고 잘했다. 좋은 팀이었고 선수들도 좋았다. '내가 가서 경기를 뛸 수 있을까'하는 생각도 들었다"라고 말했다. 정우재는 항상 한 해가 마무리되면 다른 팀을 찾았다. 경기장에서 공을 차기 위해 뛸 수 있는 팀을 찾아다니며 문을 두드렸다. 테스트 과정에서 탈락의 쓴맛도 많이 봤다. 그런 그에게 대구가 손을 내밀었다. 그는 "축구하면서 처음으로 콜을 받았다. 날 원하는 구단이 있다면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라며 대구 이적을 결심한 계기를 전했다.

대구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복권'에 2년 계약을 제시했다. 정우재는 "2년 계약도 새로웠다"라고 말했다. 2016년 대구도 시즌 도중 이영진 감독이 경질되며 손현준 감독대행이 새롭게 부임했지만 성남 때와는 달랐다. 두 감독은 정우재에게 꾸준히 기회를 줬다. 정우재는 대구 유니폼을 입은 첫 시즌 37경기에 출전하며 3골을 기록했다. 그는 후반기 집중력이 떨어지며 무너지기 일쑤였던 대구를 끝까지 지켜냈다. 대구가 긁은 '복권'이 터진 셈이다. 대구는 2위로 시즌을 마무리했지만 그해 1위를 기록한 안산 경찰청의 연고 이전, 신생팀 창단 문제가 떠올라 플레이오프 없이 K리그 클래식 승격 자격을 얻었다.

정우재는 3년 만에 K리그 클래식 무대를 밟았다. 승격의 기쁨도 잠시, 다시 돌아온 K리그 클래식 무대는 긴장으로 가득했다. 그의 K리그 클래식 복귀 무대는 광주FC 원정이었다. 정우재는 "성남 때 생각이 나더라. 그런데 성남에서 데뷔했을 때처럼 얼었다. '왜 이러지. 똑같은 리그인데'라는 생각도 들고 이상한 기분이었다"라면서도 "그러다가 점점 괜찮아졌다. 계속 뛰면서 괜찮아진 것 같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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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다 보니 어느덧 100경기

그렇게 정우재는 2017시즌도 대구의 왼쪽을 지켰다. 단단한 수비뿐만 아니라 활발한 공격 가담으로 대구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대구의 현실적 목표는 K리그 클래식 생존이었다. 인천 유나이티드, 전남 드래곤즈, 상주 상무와 생존 대결을 펼쳤던 대구는 10월 28일 포항 스틸러스를 2-1로 제압하며 일찌감치 생존을 확정했다. 11월 18일 전남 드래곤즈를 1-0으로 제압하며 시즌을 마무리했다. 누구보다 간절히 경기 출전을 원하며 팀을 옮겨 다니던 정우재의 K리그 출전 기록은 2017시즌을 끝으로 어느새 98경기가 됐다.

2018시즌에도 그는 여전히 대구의 왼쪽을 지킨다. 3월 10일 수원 삼성과의 경기에서 K리그 100경기를 채웠지만 대구가 수원에 0-2로 패배하면서 빛이 바랬다. 그리고 이번 시즌 7경기 만에 드디어 대구도 첫 승전고를 울렸다. 같은 시민구단인 강원FC를 상대로 2-1 승리를 거뒀다. 그동안 너무 힘들고 어려운 일이 많아 K리그에서 뛴 100여 경기 동안 가장 힘들었던 순간을 꼽기도 어려웠다. 정우재는 "옛날에 너무 힘들고 어려웠다. 비교할 수가 없다. K리그에서 뛰었던 경기를 생각하면 아무래도 첫 승리를 거두기 어려웠던 최근까지가 가장 힘들지 않았을까. 솔직히 축구하는 게 막 싫기까지 하더라. 강원전 경기가 승리로 끝나니까 눈물도 났다"라고 말했다. 정우재는 이날 경기로 K리그 105경기 출전 기록을 세웠다.

그는 "처음에는 '100경기를 언제 다 뛰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엄청 빨리 지나간 것 같다. 계속 꾸준하게 뛰다 보니까 어느새 100경기를 뛰었더라. '몇 경기 뛰어야지'하고 목표를 세운 것도 아니었다. 100경기를 채우고 나니 200, 300경기도 채워보고 싶다"라고 말했다.

정우재는 뛸 수 없어서 괴로워했다. 뛸 수 있는 팀을 찾아다녔지만 쉽지 않았다. 그렇게 두드리다가 뛸 수 있는 팀을 찾았다. 뛰기 시작하니 더 좋은 팀에서 러브콜이 왔다. 대구 소식에 밝은 관계자는 정우재가 대구에서 뛰는 동안 그의 영입을 노리는 팀들도 있었다고 말했다. 뛰면서 점점 잘 풀린다는 느낌이다. 역시 선수는 뛰어야 하나 보다.

그런 그의 목표는 국가대표다. 방과 후에 공을 차며 안정환의 반지 세리머니를 따라 하던 소년은 '안정환처럼 되고 싶다'라는 꿈을 저버리지 않았다. 정우재는 "내가 잘하면 갈 수 있을 거다. 열심히 하면 기회도 오지 않을까. 일단 경기장에서 보여줘야 한다. 목표로 잡고 도전해보고 싶다"라고 말했다. 그가 옳다. 그의 목표를 이루려면 그가 그토록 뛰기 원했던 경기장에서 보여줘야 한다. 출전의 간절함을 아는 선수니까. 뛰기 시작하면서 점점 잘 됐으니까. 그가 운동장을 밟을 때마다 국가대표 유니폼도 그에게 다가오지 않을까. 대구가 그에게 보냈던 러브레터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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