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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니어스 | 김현회 기자] 24일 수원종합운동장에서 열린 KEB하나은행 K리그2 수원FC와 부천FC의 경기를 앞두고 만난 수원 김대의 감독은 검정색 정장을 입고 있었다. “멋을 좀 부리셨다”고 농담을 건네자 쑥스러운 듯 웃으며 이런 답이 돌아왔다. “故남대식 감독님을 위해 입었다. 존경하는 감독님이 돌아가셨는데 나라도 혼자 추모하고 싶어 옷을 이렇게 차려 입었다.”

지난 20일 한국 축구의 원로 故남대식 감독이 지병으로 70세의 나이에 별세했다. 언론을 통해서도 이 사실이 그리 많이 알려지진 않았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선수였고 지도자였지만 관심은 부족했다. 김대의 감독은 이 사실에 안타까워했다. “그 분의 노고가 세상에 더 알려졌으면 한다. 아마 연락이 되지 않아 빈소를 찾지 못한 제자들도 많을 것이다. 오늘 작은 리본 하나를 달고 벤치에 앉을 생각인데 이게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그래도 이렇게라도 추모하고 알리고 싶다.”

故남대식 감독은 생전 한국 축구를 위해 많은 일을 했다. 1948년 전북 군산에서 태어난 그는 동북고와 고려대를 졸업한 뒤 국가대표 1진 청룡 팀에도 발탁돼 활약했다. 1974년부터는 실업팀 국민은행에서 선수 생활을 하다 1980년 현역에서 물러났다. 이후 발자취는 더 화려하다. 지도자로 변신한 그는 1984년 고려대 감독으로 부임한 뒤 고려대 전성시대를 열었다. 홍명보 대한축구협회 전무를 비롯해 이임생 대한축구협회 기술발전위원장, 서정원 수원삼성 감독, 최성용 수원삼성 코치, 김대의 수원FC 감독 등이 모두 故남대식 감독에 의해 발굴됐다. 이기형 인천유나이티드 감독과 박진섭 광주FC 감독도 그의 제자다.

특히나 당시 최대 라이벌로 평가 받던 연세대와의 대결에서 故남대식 감독의 고려대는 압도적인 성적을 냈다. 김대의 감독은 이때를 회상했다. “정기전에서 지면 감독 목숨이 날아갈 정도였다. 1994년 미국월드컵을 앞두고 나하고 임생이 형은 부상을 핑계로 대표팀에서 나온 뒤 정기전에 나갔다가 징계를 받기도 했다. 임생이 형은 이때 징계로 4학년일 때 경기에도 나가지 못했다. 그 정도로 정기전 열기가 뜨거웠다. 그런데 故남대식 감독님이 고려대를 이끄는 동안 우리가 무려 6년 연속 연세대를 이겼다. 나의 입학 전후로 고려대가 8년 동안 정기전에서 패하지 않았다. 그 정도로 입지가 대단했던 감독님이셨다.”

김대의 감독은 연세대에 입학 파동이 일어나는 바람에 정기전이 취소된 4학년 때를 빼놓고 대학 시절 연세대를 상대로 4승 1무의 성적을 기록했다. 김대의 감독은 “故남대식 감독님이 워낙 훌륭한 선수들을 많이 배출하셨지만 연세대에 안 진 것만으로도 고려대에 오래 계셨다고도 할 수 있는 분”이라며 웃었다. 특히나 故남대식 감독은 공격형 미드필더였던 홍명보 전무를 최종 수비수로 변신시킨 인물이기도 하다. 홍명보 전무는 대학교 2학년에서 3학년으로 올라갈 때 수비수로 변신했다. 홍명보 전무는 “그때는 당황스러웠지만 그 포지션 변경이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 됐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남대식 감독은 한국 축구를 위해 많은 일을 했다. ⓒ대한축구협회 트위터

1984년부터 14년 동안 고려대 감독을 지낸 故남대식 감독은 이후에도 한국 축구를 위해 많은 일을 했다. 1991년에는 남북 단일팀을 구성한 청소년대표팀 코치를 맡아 북한의 안세욱 감독과 단일팀이 포르투갈에서 열린 국제축구연맹(FIFA) 세계청소년선수권 8강에 오르는 성과를 냈고 1998년 9월부터 1999년 4월까지 7개월간 축구협회 기술위원장을 역임했다. 2001년에는 K리그 전북 감독을 잠시 맡은 적도 있다. 특히나 남북 단일팀 코치는 의미가 크다. 김대의 감독은 “그 시절에 그런 중책을 맡는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사람들이 이런 큰 업적을 세우신 분이 돌아가셨다는 걸 많이 알지 못해 아쉽다”고 했다.

김대의 감독은 故남대식 감독을 추억했다. “당시에는 무서웠던 분이셨다. 말씀이 별로 없으셨지만 운동장에 서 있는 자체로도 카리스마 넘치는 분이셨다. 감독님이 없이 훈련하다가 ‘감독님 떴다’고 하면 막 파이팅을 넣으면서 분위기가 달라졌다. 분위기를 열정적으로 끌어 올려주셨던 분이다.” 하지만 故남대식 감독이 냉정하고 차가웠던 지도자였던 것만은 아니다. 김대의 감독은 故남대식 감독의 진심을 잘 알고 있었다. “우리처럼 막 살갑게 표현하지 못하실 뿐 정이 정말 많으셨던 분이다. 고등학생 때 직접 경기를 다 찾아보고 뽑은 선수들이니 우리는 감독님에 대한 마음을 잘 안다.”

김대의 감독은 말을 이었다. 그때가 떠오르는 듯했다. “이성재가 나보다 2년 후배인데 늘 감독님께서 ‘야, 김대의 넌 끝났어. 똥이야. 이성재 들어오면 끝난 거야’라고 표현하셨는데 그게 다 애정이었다. 서정원 감독이나 최성용 코치 등 지금 난다 긴다하는 지도자들도 다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요새로 말하면 ‘츤데레’처럼 툭툭 던지시는 분이었다. 날 미워하는 건 아닌지 오해하기 쉬운데 그게 그 분이 정을 표현하는 방법이었다. 아, 최성용 코치는 좀 예뻐하셨던 것 같다.” 김대의 감독은 줄곧 빈소를 지키다가 부천전 준비를 위해 어제 숙소로 돌아와 발인을 함께하지 못했다. 김대의 감독은 수원FC 김현배 스카우트에게 “감독님을 마지막까지 잘 모시고 오라”며 빈소를 지키도록 했다. 홍명보 전무를 비롯해 고인과 함께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이들이 끝까지 故남대식 감독과 함께 했다.

경기를 준비해야 하는 김대의 감독은 빈소에서 곧장 수원 훈련장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숙소에서 하루를 보낸 뒤 부천전이 열리는 경기장에 도착했다. 옷을 갈아입을 수도 있었지만 그는 빈소에 갈 때 입었던 검정색 양복을 그대로 입고 나왔다. 곧장 경기장으로 향하는 바람에 추모 리본을 준비하지 못해 구단 직원에게 이를 부탁했다. 김대의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이런 축구 선배들을 잘 모시는 분위기가 됐으면 한다. 오늘 감독님의 제자였던 박진섭 감독도 나와 같은 시간에 경기가 있다. 그 친구도 나름대로의 추모를 할 것이다. 어린 팬들은 잘 모르는 분이겠지만 이런 계기를 통해 훌륭한 선배 축구인들에 대한 언론 보도도 많아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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