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 시절 맹활약했던 박성호의 모습. ⓒ포항스틸러스

‘슬기로운 축구’는 전직 K리그 선수 출신인 이슬기 SPOTV 해설위원의 공간입니다. 대구FC에서 데뷔해 포항스틸러스와 대전시티즌, 인천유나이티드, FC안양 등 다양한 팀에서 활동했던 그는 현재는 은퇴 후 SPOTV에서 K리그 해설을 맡고 있습니다. 선수 시절 경험과 해설위원의 냉철한 시각을 덧붙여 <스포츠니어스> 독자들에게 독특하고 신선한 칼럼을 전달합니다. -편집자주

[스포츠니어스 | 이슬기 객원 칼럼니스트] 지난 2일 성남탄천종합운동장에서 벌어진 KBE 하나은행 2017 K리그 챌린지 19라운드 성남FC와 부천FC의 경기 중계를 위해 현장을 찾았다. 성남은 나에게 특별한 인연이 있는 팀이었다. 아직도 기억나는 게 내 K리그 데뷔전이 바로 2009년 개막전 대구FC와 성남일화의 경기였다. 그때 성남일화에는 정성룡을 비롯해 조병국과 사샤, 김정우, 이호, 모따, 라돈치치 등 정말 어마무시한 선수들이 포진해 있었다. 그들과 같이 뛴다는 것 자체가 설렜다. 그렇게 성남은 K리그를 대표하던 선수들이 뛰던 곳이었다. 그런데 이날 중계를 하며 세상이 참 많이 변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이날은 성남 황의조가 J리그 감바오사카로 떠나며 고별식을 여는 날이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성남이 ‘에이스’를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한 팀으로 판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황의조는 이적료를 남기고 떠났지만 성남을 대표하는 공격수가 더 오래 팀에 남지 못하고 떠난다는 건 세상이 변했다는 증거 아닐까. 아니 세상에 성남이 선수를 지키지 못할 정도가 될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나. 어쨌든 비가 이렇게 무섭도록 오는 상황에서의 경기는 생소했다. 중학교 때 실제로 한 번 이런 비를 경험하며 경기를 해본 뒤에는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그리고 나에게는 이날 경기가 조금은 더 특별했다. 이날 경기 직전 캐스터가 양 팀 선발 명단을 소개했는데 익숙하면서도 뭔가 나에게는 사연이 있는 한 선수의 이름을 들었다.

“성남FC 최전방에는 박성호 선수가 위치하겠습니다.” ‘아, 박성호… 박성호…’ 아무렇지도 않게 해설을 하려고 했지만 박성호는 나에게는 특별한 존재다. 박성호를 볼 때마다 가슴 아픈 기억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 박성호의 잘못은 단 1%도 없다. 그냥 나 혼자만의 가슴 아픈 기억이다. 2011년 포항스틸러스 소속이던 내가 시즌이 끝날 때 쯤 트레이드가 됐는데 그 상대가 바로 박성호였다. 나와 김동희가 대전으로 가고 대전에 있던 박성호가 포항으로 오게 되는 2대1 트레이드였다. 포항에서는 원톱 공격수를 찾았고 대전에는 미드필드가 필요한 상황에서 나름대로 ‘윈-윈’ 트레이드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트레이드에서 이득을 본 건 포항이었다. 박성호는 이듬해 포항에서 9골 8도움을 올리며 맹활약했고 포항의 FA컵 우승까지도 이끌어 냈다. 반면 나는 2012년 부상으로 대전에서 한 경기밖에 뛰지 못했다. 같이 대전으로 트레이드 됐던 김동희도 9경기 출장을 하며 공격 포인트를 단 한 개도 올리지 못했다. 아마 대전 팬들이 이 칼럼을 본다면 한숨을 내쉴 수도 있다. 박성호를 내주고 데려온 나와 김동희는 아무 것도 보여주질 못했다. 그런 지적을 받는다면 할 말이 없지만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건 경기 중계를 위해 박성호의 플레이를 보니 그 당시 트레이드의 악몽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내가 포항에서 대전으로 트레이드 될 당시 나에게는 아무런 권한이 없었다. 당시 나는 대구에서 두 시즌 동안 52경기에 나서며 4골 11도움을 올리고 포항으로 이적해 적응기를 거치고 있을 때였다. 포항에서 조금 더 잘하고자 하는 마음이 컸다. 그런데 어느 날 황선홍 감독이 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일 네가 대전으로 트레이드된다. 내일 오전에 기사가 날 것이다”는 것이었다. 평소 존경하는 황선홍 감독을 이 자리를 통해 욕하려는 게 아니다. 황선홍 감독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내게 따뜻한 말씀을 해주시며 위로해 주셨다. 하지만 나는 공식 발표가 나기 하루 전날 이렇게 황선홍 감독에게 전화를 받을 때까지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다. 나에게는 큰 상처였다.

전화를 받고 아침 식사 때까지 한숨도 자지 못했다. 머릿속이 너무 혼란스러웠다. 당장 이 길로 포항 클럽하우스에서 짐을 싸 나가면 포항과의 인연은 이렇게 간단히 끝나는 것이었다. 뉴스를 본 몇몇 선수들에게 연락이 왔고 그들은 날 위로해줬다. 아무래도 트레이드의 특성을 잘 아는 이들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팀을 떠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어떤 이야기도 위로가 되진 못했다. 나는 당시 포항클럽하우스에서 생활을 했는데 원래는 단체로 아침을 먹어야 하는 규정이 있다. 하지만 나는 아침을 먹지 않았다. 그리고 10시쯤 선수들과 다 같이 모여 미팅실에서 인사를 하고 짐을 싸들고 서울로 출발했다. 하루 아침에 팀을 떠나는 신세가 된 것이다.

박성호는 성남FC에서도 좋은 활약을 펼치고 있다. ⓒ프로축구연맹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다음 달에 집으로 고지서 한 장이 날아왔는데 과속 딱지였다. 서울로 올라오는 내내 신경을 딴 데 팔고 있었던 모양이다. 내가 슬펐던 건 포항을 떠나 대전으로 간다는 점이 아니었다. 대전에서 비록 내가 많은 걸 보여주지는 못했지만 대전 역시 정이 넘치는 좋은 팀이었다. 그런데 그 누구도 나에게 왜 포항을 떠나야 하는지 이유를 설명해주지 않은 건 슬펐다. 선수들의 운명이 이렇다.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팀을 떠나야 하는 경우도 많고 마지막 결정이 나고 하루아침에 이를 일방적으로 통보받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억울한(?) 사정을 팬들에게 일일이 설명할 수도 없다.

물론 이런 트레이드에는 선수의 거부권은 없다. 프로축구연맹 규정 제2장 제23조 선수 계약의 양도에 보면 ‘선수는 원소속 클럽에서의 계약조건보다 더 좋은 조건(기본급 연액과 연봉 중 어느 한쪽이라도 더 좋은 조건)으로 이적될 경우, 선수는 이를 거부할 수 없다. 선수가 이적을 거부할 경우, 선수는 임의탈퇴 선수로 공시된다’는 조항이 있다. 다른 팀에서 10만 원이라도 더 준다면 선수에게는 거부할 수 있는 권리가 없다는 것이다. 계약기간도 이적 후에 다시 정해야 하고 그렇다보면 군 입대 계획도 틀어지지만 누구를 원망할 수는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런 결정에 반발하는 게 아니라 그저 축구를 하는 것뿐이었다.

난 ‘낭만’이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사전을 찾아보니 ‘낭만’이라는 건 ‘현실에 매이지 않고 감상적이고 이상적으로 사물을 대하는 태도나 심리. 또는 그런 분위기’라고 의미라고 한다. K리그 선수가 된다는 건 단지 축구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도시를 대표해서 뛰는 것이다. 그 팀을 응원해주는 사람들을 위해 뛰는 것이기도 하다. 그 경기를 보고 있는 어린 아이들에게 꿈을 보여주는 것이고 K리그에 관심 있는 모든 사람에게 좋은 영향력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도 ‘원클럽맨’이 되고 싶었다. 아마 많은 축구선수들이 그럴 것이다. 돈을 조금 적게 받더라도 AS로마의 프란체스코 토티처럼, AC밀란의 말디니처럼 ‘원클럽맨’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대구에서 포항으로 갈 때도, 포항에서 대전으로 갈 때도 나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물론 ‘원클럽맨’은 일단 엄청난 실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조건이 있지만 그래도 선수가 이적에 대해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전혀 없다는 건 아쉬운 대목이다. 그래서 박성호를 볼 때마다 포항에서 대전으로 옮겨야 했던 그 때의 가슴 아픈 기억이 자꾸 떠오른다. 내가 소심해 보일지 모르지만 중계석에서 박성호를 보고 있으니 트레이드 되던 그 때 그 기억이 스쳐지나 간다. 물론 이건 박성호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은 아니다. 박성호는 2001년 안양LG에 입단해 지금까지 288경기에 나서 61골 24도움을 올린 엄청난 베테랑 공격수다. 그의 플레이를 존경하고 적지 않은 나이에 대단한 플레이를 펼치고 있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를 진심으로 응원하고 있다. 하지만 그래도 박성호를 보면 선택권 없는 트레이드의 기억에 떠오르는 것도 어쩔 수 없다. 나에게 박성호라는 이름은 참 특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