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니어스 | 김재학 기자] 스포츠계에서 2위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그러나 유럽 축구리그에서 2위, 혹은 3~4위는 매우 매력적인 순위다. 리그 우승을 노리기 힘든 팀이더라도 챔피언스 리그 무대에 오를 수 있는 높은 순위는 팀의 재정에 큰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팀의 위상 역시 올려준다. 그런 맥락을 고려한다면 설사 약팀들이라 하더라도 리그 상위권에 목을 매는 이유가 충분히 설명된다.

이런 상황에서 대부분의 리그에 의외의 복병들이 리그 상위권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돌풍이 불고 있다. 특히 올 시즌을 앞두고 많은 팀들이 각각 전력을 보강하고 많은 선수들을 영입한 프리미어 리그는 더욱 그렇다. 리그의 강호였던 팀이나 새로 올라온 팀들이 불러 일으킨 돌풍이 단순히 찻잔 속의 태풍에 불과할지 혹은 지난 시즌의 레스터 시티처럼 리그 생태계 자체를 변화시킬 거대한 바람이 될 지는 미지수이나 적어도 틀에 박힌 리그 순위만을 지켜보던 팬들의 입장에선 신선한 반전이다.

롤러코스터를 타던 에버튼의 지난 날들

에버튼은 전통적으로 강팀을 잘 잡는 팀으로 유명했다. 대륙대회에도 종종 진출하는 명실상부 프리미어리그의 강호 중 한 팀이었으며 프리미어리그의 전신인 '더 풋볼 리그'의 창립멤버이자 1부리그에서 가장 오랫동안 살아남은 터줏대감이다. 그러나 최근 몇 시즌간의 행보는 다소 실망스러웠다.

가난했던 팀을 이끌고도 꾸준히 한 자릿수 등수를 유지하며 1980년대 이후 팀의 전성기를 이끌던 데이비드 모예스 감독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보낸 후 위건 애슬레틱에게 생존왕이라는 별명을 선사할 정도로 매 시즌 팀을 잔류권으로 끌어올렸던 로베르토 마르티네즈 감독을 선임했다. 그러나 마르티네즈 감독의 에버튼은 첫 시즌 이후 내리막 행보를 그리며 에버튼의 팬들의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했고 결국 경질됐다.

에버튼의 입장에서는 마르티네즈 감독의 선임이 실패로 돌아간 셈이었다. 위건에서 부족한 선수진을 가지고도 매 시즌 프리미어 리그에 잔류는 물론 FA컵 우승을 이뤄내는 모습을 보고 더 높은 위상의 에버튼을 이끈다면 한동안 나가지 못했던 대륙대회 진출이라는 청사진을 현실로 가능하게 하리란 적임자라고 판단해 야심차게 영입한 감독이었으나, 첫 시즌 5위를 기록한 이후 두 시즌 연속 11위를 기록하며 '실패'에 가까운 행보를 보였다.

누군가에게는 금지어, 누군가에겐 명장인 '그'가 에버튼으로 오다

그리고 이번 시즌 선임된 감독은 이전까지 사우스햄튼을 맡아 리그 수위권 구단으로 올려놓은 로날드 쿠만 감독이다. 쿠만 감독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으로 갈리는데, 이는 그가 맡았던 팀들 중 이전에 비해 발전한 구단이 있는 반면, 눈에 띄게 침몰한 구단이 있기 때문이다.

전자의 경우에는 프리미어리그의 사우스햄튼 FC와 에레디비지 리그의 비테세, 아약스, 아인트호벤 등이 해당된다면 후자의 경우에는 프리메라 리가의 발렌시아 CF가 해당된다. 이런 극단적이고 양면적 결과지를 받은 이유는 그의 극단적인 팀 리빌딩 방식의 산물이다. 쿠만 감독은 노장 선수들을 선호하지 않으며 어린 선수들이나 새로 영입된 선수들에게 기회를 많이 주는 감독으로 알려져있다. 이 방식이 성공했던 케이스가 많지만 발렌시아 CF에서는 완전히 실패했고, 그의 감독생활 명운이 달린 위기가 찾아왔다.

그러나 쿠만 감독은 자신을 망하게 했던 실험적인 축구 철학으로 다시금 네덜란드 정상급 감독으로 우뚝섰다. 사우스햄튼에서 역시 부임과 동시에 주전선수들이 대거 이탈했음에도 새롭게 영입된 선수들을 잘 추스르며 자칫 짧은 부흥기 이후 침몰할 것이라는 시선을 받던 팀을 이끌고 유럽대회까지 진출하는 쾌거를 이뤘다.

선수를 바라보는 쿠만 감독만의 독특한 시선

앞서 언급했듯 쿠만 감독은 여러 팀의 감독을 맡으며 유망주들에게 많은 기회를 제공하거나 기존 선수들의 포지션을 다수 옮기는 등 실험적이고 독특한 축구를 해왔다. 그 중에서도 유명한 일화인 발렌시아 시절을 살펴보면 당시 리그 최고의 날개자원인 호아킨과 비센테의 위치를 바꿔 기용하거나 호아킨을 원톱자원으로 기용하기도 하는 등 때론 상식 밖의 기용도 서슴치 않았다.

이번 시즌 에버튼에서의 초반 행보 역시 독특하다. 첫 경기부터 올 시즌 영입된 이드리사 게예와 메이슨 홀게이트를 선발로 기용하는 한 편, 공격수로 거의 뛴 적이 없던 헤라르드 데울로페우를 최전방 공격수로 기용하는 등 파격행보를 보이고 있다.

그럼에도 에버튼 특유의 조직력을 바탕으로 첫 경기 무승부를 거둔 이후 쿠만 감독은 매 경기 소속팀의 선수들을 최대한 활용하는 라인업을 내놓으며 4연승을 거뒀다. 지난 시즌 흔들렸던 수비 조직력을 완벽하게 다지는 한 편 새롭게 영입된 선수들을 완벽히 전술에 녹여내며 경기 중 선제골을 넣는다면 탄탄한 수비를, 실점을 허용한다면 강력한 한 방으로 승점을 얻어내는 모습을 보였다.

오우, 제대로 놀아보자

현재까지 완벽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맨체스터 시티의 후광에 가려 주목받지 못하고 있는 에버튼이지만, 이번 시즌의 행보는 여타 축구팬들의 시선을 받기 충분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쿠만 감독의 지휘 하에 지난 시즌 흔들리던 에버튼을 정상궤도를 넘어 전에 없던 훌륭한 성적을 내고 있는 에버튼은 15/16시즌 레스터 시티가 보여줬던 여우들의 기적을 연상케하는 '토피스의 기적'을 일으킬 준비를 서서히 준비하고 있다. 리그 8라운드에 펼쳐지는 맨체스터 시티와의 경기만 무난하게 넘긴다면 에버튼은 최근 몇 시즌간 이루지 못했던 높은 위치를 노려볼 수 있을지 모른다.

[사진 = 로스 바클리, 로베르토 마르티네즈, 로날드 쿠만, 에버튼 선수단 ⓒ 에버튼 FC 공식 홈페이지 및 S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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