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니어스|조성룡 기자] 정말 천당과 지옥을 오간 지도자다.

인창수 감독은 한국축구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인물 중 하나다. 내셔널리그 할렐루야 축구단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해 K3리그 포천시민축구단을 거쳐 서울이랜드의 코치 생활을 했다. 이후 그는 서울이랜드 감독직을 맡으며 프로 감독에 데뷔했다. 하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그 해 서울이랜드는 10승 7무 19패를 기록하며 K리그2 최하위를 기록하는 아쉬움을 남겼다.

이후 인 감독의 행적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곳에서 그를 발견했다. 바로 U-20 월드컵이었다. 인 감독은 U-20 월드컵에서 정정용 감독을 보좌하는 코치로 참가했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준우승을 이끌었다. 서울이랜드에서 나락에 빠졌다가 U-20 월드컵을 통해 화려하게 부활한 인 감독은 요즘 전라남도 목포에서 여자 U-16 대표팀을 맡아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목포축구센터에서 <스포츠니어스>와 인 감독은 마주 앉아 그동안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나눴다.

반갑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나.

사실 피곤하다. U-20 월드컵 일정이 끝나고 바로 여자 U-16 대표팀 감독을 맡아 목포에 왔다. 솔직히 시간적 여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우리나라가 U-20 월드컵 결승에 가면서 시간이 촉박해졌다. 사실 예상 못했다. 그 덕분에 몸은 더욱 피곤해졌다. 인천공항에 도착한 이후 서울광장에서 환영식 하고 바로 목포에 왔다. 그래서 이후 U-20 월드컵 결산 기자간담회 등도 가지 못했다. 죽는 줄 알았다.

U-20 월드컵이라는 달콤한 꿈에서 아직 깨지 못했는데 바로 여자 U-16 대표팀을 맡아야 했다. 꿈에서 빨리 깨고 현실로 돌아와야 하는데 정작 나는 시차 적응도 제대로 못한 상황이었다. 목포에 와서 한참 있다가 또 청와대에서 환영 행사가 있다고 하더라. 그래서 다시 서울에 올라갔다가 목포로 돌아왔다. 그나마 시차 적응이 좀 되서 나아졌지 계속해서 쉬는 날이 없다.

이후 일정도 빡빡하다. 이번 소집훈련이 끝나면 일주일 쉬었다가 경상남도 합천으로 이동한다. 거기서 열리는 전국 여자축구선수권대회에서 선수들을 확인할 예정이다. 그리고 8월 1일에 목포로 돌아와서 3일부터 열리는 2019 동아시아축구연맹 U-15 여자축구대회에 한국 팀 감독을 맡는다. 이후 다시 U-16 대표팀을 소집해서 일주일 훈련한 다음 일주일 쉬었다가 AFC U-16 여자 챔피언십이 열리는 태국으로 간다. 9월 말까지 일정이 쉼없이 있을 예정이다.

여전히 당신의 축구 인생은 파란만장한 것 같다.

맞다. 정말 내가 생각해도 나는 죽었다 살았다를 반복했다. 서울이랜드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가 U-20 월드컵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잘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이번에는 여자 청소년 대표팀이다. 코치도 아니고 감독이라 부담감이 꽤 있다. 무언가 맡으면 잘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럼 과거부터 차근차근 짚어보자. 아르헨티나 사람이라는 것이 가장 독특하다.

뭐 독특할 게 있나. 1985년에 가족들이 모두 아르헨티나로 이민을 가면서 나도 따라갔다. 아직도 어머니와 형님은 아르헨티나에 계신다. 아버지는 아르헨티나에서 살다가 돌아가셨다. 거기서 축구선수의 꿈을 키웠고 실제로 축구선수로 뛰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축구를 비교적 늦게 시작한 편이라 한계가 있더라. 1부리그나 2부리그 같은 상위리그에서 뛰어야 하는데 계속 3부리그와 4부리그를 전전했다. 거기는 돈도 벌기 힘들었다.

그래서 이렇게 선수 생활을 계속할 바에는 빨리 지도자 교육을 받자고 생각했다. 그래서 27세에 지도자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축구협회가 인증한 단체에서 1년 공부하면 유소년 지도자 자격증을 먼저 딸 수 있다. 그것부터 땄다. 하지만 그 단체에서 하는 교육은 질이 좀 떨어진다. 그래서 2003년에 곧바로 아르헨티나 축구협회에서 직접 관리하는 2년짜리 코스에 들어갔다. 1년은 아마추어, 1년은 프로 코스를 모두 수료했다. 그리고 2005년에 할렐루야 축구단 코치로 한국에 왔다.

아르헨티나는 소고기와 소금이 그렇게 맛있다는데 사실인가.

당신 아르헨티나 좀 잘 아는 것 같다. 아르헨티나가 소고기를 비롯해 먹을 것이 풍부한 곳이다. IMF 이후 경제 회복만 좀 됐다면 살 만한 곳이다. 한국은 IMF 이후 다시 일어섰지만 아르헨티나는 그러지 못했다는 것이 정말 큰 차이다. 목축업이 발달했으니 좋은 소고기가 많고 소금도 맛있다.

특히 소금 같은 경우는 유명하다. 예전에 한국에서 스위스산 소금을 판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게 알고보니 아르헨티나산 소금이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우리 막내 고모와 친척들이 항상 갖다 달라고 한다. 내가 아르헨티나에 들어갈 때 꼭 소금을 사다 달라고 한다. 굵은 소금과 가는 소금 두 종류를 챙겨와 달라고 강조하신다. 그래서 아르헨티나 갔다올 때마다 소금을 꼭 챙겨 온다. 다음에 당신도 소금통 들고 오면 좀 나눠주겠다.

한국의 소고기가 성에 안찰 수도 있겠다.

아르헨티나에서 소고기를 하도 많이 먹어서 이제는 소고기 자체가 물린다. 난 돼지고기를 좋아한다. 돼지고기가 더 맛있다.

아르헨티나는 어떤 나라인가?

내가 이민 갔을 때는 한국 사람이 약 3만 명 정도 있었다. 사실 먹고 살 만한 곳이 바로 아르헨티나다. 먹는 것은 정말 싸다. 소고기도 싸고 과일도 싸고 우유나 마찬가지다. 모든 것이 저렴하다. 그런데 IMF가 문제였다. 아까도 말했지만 한국은 극복하고 아르헨티나는 극복하지 못하고 아직까지 힘들어하고 있다. 2001년에 아르헨티나에 IMF 사태가 터졌으니 약 20년 가까이 힘들어하는 것이다.

IMF 이후 한국 사람들이 많이 떠났다. 한국으로 돌아가거나 근교의 다른 남미 국가로도 갔다. 미국에 간 사람도 있다. 지금은 2만 명 이하로 알고 있다. 게다가 요즘은 치안도 좋지 않다. 권총 든 강도들이 많다. 이게 경제가 좋지 않아서 다들 힘들다. 하지만 괜찮아질 거다. 다시 회복해야 하지 않겠는가.

한국에 어떤 인맥도 없던 당신이 어떻게 한국에서 성인 팀 코치 생활을 시작했나?

내가 사람들이 잘 모르지만 한국에서 잠시 뛰었던 적이 있다. 실업축구 팀인 이랜드푸마에서 잠시 뛰었다. 당시 나는 공격수였다. 공은 잘 못차고 둔탁한데 성실히 열심히만 뛰었던 선수였다. 당시 나와 함께 뛰었던 공격수가 박건하 전 감독님이다. 거기에 제용삼 등 훌륭한 선수들이 많았다. 정정용 감독님도 당시 이랜드푸마에서 뛰었다. 그 때 이영무 감독님이 지휘봉을 잡고 있었다.

당시 내가 성실하게 뛰니 이영무 감독님이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코치 자격증을 땄으니 할렐루야 축구단에서 일해보자"라고 권유했다. 그래서 비행기 편도 티켓만 끊고 한국으로 왔다. 여기서 나는 반드시 성공하겠다는 일종의 다짐이었다. 그게 내 한국 생활의 시발점이었다. X발점이 아니라. 발음 조심해야 한다. 하하. 그 때가 내 나이 35세였다. 결혼해야 할 나이인데 여자 만날 생각도 안하고 축구에만 모든 것에 '올인'했다.

이후 2006년에 내셔널리그 후기리그를 우승하고 대통령배 축구선수권대회 우승을 차지하면서 지도자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교회에서 지금의 아내를 만나 1년 연애하고 결혼도 했다. 그렇게 약 8년을 할렐루야 축구단에서 일하다가 포천시민축구단 감독으로 부임해 약 3년을 머물렀다.

실업축구 내셔널리그에 이어 K3리그라니 다사다난하다.

아니다. 포천도 환경이 괜찮은 편이었다. 물론 K3리그이기 때문에 환경이 열악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포천은 K3리그에서 환경이 좋은 편이었다. 거기에 선수들도 좋았다. 포천에 있으면서 '이렇게 지도자 생활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워낙 우리가 강했다. 1년에 한 번 지는 수준이었으니 경기력이나 성적 때문에 스트레스 받을 일도 없었다. 당시 우리 라이벌이 화성FC였다. 그 때 감독이 지금 경남FC 김종부 감독님이다. 우리가 한 번 우승하면 화성이 한 번 우승하고 그랬다.

인창수의 포천은 당시 '최강'이었다 ⓒ 대한축구협회 제공

그렇게 평온하게 포천에서의 생활을 이어가면서도 한 편으로는 욕심이 있었다. K리그에 가고 싶었다. 'K리그에서 불러주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조금씩 했다. 그래도 내가 아르헨티나 사람이라는 강점이 있다. 외국 감독이나 외국인 선수와 함께 할 때 통역을 거치는 것보다 운동장에서 직접 말해주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그 사람들의 언어나 문화를 이해하는 코치가 있다는 것은 팀의 장점이 될 수 있었다. 게다가 한국에는 브라질 등 남미 선수들이 많지 않은가.

그러다가 마침 포천에 있을 때 서울이랜드와 연습경기를 두 번 할 일이 있었다. 그 때 마틴 레니 전 감독이 나를 지켜본 모양이었다. 그래서 마틴 레니 감독의 제의를 받아 서울이랜드에 코치로 부임했다. 그렇게 내 프로 코치 생활이 시작됐다.

코칭스태프로 처음 입성한 프로 무대는 어땠는가.

어휴, 정말 대단했다. 어쨌든 프로는 프로다. 재정적인 부분이나 주변 환경 등이 확 달랐다. K3리그 같은 경우는 원정경기 가면 숙소에서 코치들이 모여서 자고 그랬다. 물론 포천은 그 정도로 열악한 환경은 절대 아니었다. 반면 서울이랜드에 오니 1인 1실 숙소를 쓰면서 넓은 곳에서 자고 식단도 확 달라져서 잘 먹고 다녔다. 뿐만 아니라 훈련장의 기구나 의류까지 모든 부분이 좋아졌다. 참 감사했다. 코치 생활한 3년 동안 잘 보냈던 것 같다. 물론 그 이후에는 엄청난 쓴 맛을 봤다.

이후 당신은 마틴 레니 감독 사임 이후 비자 문제로 한국을 떠났다.

여러가지 복합적인 요인이 있었다. 먼저 아내를 미국으로 보냈고 나는 좀 남아 있었다. 사실 시즌을 모두 마칠 생각도 많이 했다. 그런 가운데 비자가 만료되는 상황이 있었다. 비자가 만료된 것이 팀을 떠난 결정적인 요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저 새로운 코칭스태프로 개편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물러났다고 생각해달라. 비자보다는 떠날 시기가 되어 떠났다는 것이 맞는 것 같다.

하지만 당신은 약 반 년도 되지 않아 서울이랜드 감독으로 돌아왔다.

사실 서울이랜드에서 감독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가족이 있는 미국으로 돌아가 미국에서의 활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당시 미국에서 일할 수 있는 워크퍼밋 또한 발급 받았다. 가족들과 함께 미국에 있으면서 지도자 생활을 하고 싶었다. 최종적인 목표는 미국 메이저리그싸커(MLS)에서 지도자, 그리고 감독으로 일하는 것을 꿈꿨다. 서울이랜드를 떠난 후 차근차근 준비하고 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아내와 자녀들이 미국 샌디에이고에서 살고 있다. 그래서 샌디에이고를 중심으로 조금씩 활동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오래 지도자 생활을 한 내가 미국에서 경력을 쌓으려면 작은 것부터 해야 했다. 개인 레슨도 하고 샌디에이고 한인 50대 대표팀도 맡아서 가르치는 등 열심히 일을 했다. 그러다가 서울이랜드로부터 감독직을 제안 받아 가게 된 것이다. 나도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요즘도 가족들과 떨어져 사는 것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남는다. 아이들(9세, 6세)이 아직 어리다. 아빠의 사랑이 필요한 시기다. 그리고 아내 혼자 아이들을 키우는 것도 힘들다. 그런데 내가 한국에서 일하면서 본의 아니게 '기러기 아빠'가 됐다. 떨어져 산지 이제 2년 정도 됐다. 지금도 가족들과 항상 미국에서 살 것인지 한국에서 살 것인지 의논하고 있다.

직설적으로 묻겠다. 서울이랜드에서 왜 실패했나.

내가 생각했을 때는 세 가지다. 나의 경험 부족과 선수단 구성, 그리고 외국인 선수 문제였다. 일단 내가 경험이 부족한 부분이 가장 크다. 그래서 선수단 구성과 외국인 선수에 대해서도 잘 대처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부임 초기에는 자신감이 있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성적이 나오지 않으면서 굉장히 힘들었다. 잠도 거의 자지 못할 정도였다. 고민도 많이 했다.

서울이랜드에서 감독을 하면서 선수단 구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았다. 전임 김병수 감독님이 어느 정도 선수단 구성을 한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떠나셨다. 나도 서울이랜드 감독이 될 것이라고 상상하지 못했지만 김병수 감독님도 그렇게 선수 구성을 하시고 갑작스럽게 떠날 것이라고 상상하지 못하셨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선수단 구성에 대해 개편보다는 '함께 맞춰나가면 된다'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 정도면 될 거라고 생각했던 나의 자만이었다.

외국인 선수의 경우 내가 오판한 것이 컸다. 서울이랜드는 예산이 적은 팀이 아니었다. 충분히 더 좋은 외국인 선수를 데려올 수 있었다. 아르헨티나 또는 우루과이 1부리그에서 뛰는 선수를 데려올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 정도까지는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보다 비교적 아래라 평가받는 칠레 1부리그 정도면 충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아니었다.

비엘키에비치 같은 경우 큰 부상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몸부림을 쳤다. 부상에서 돌아와 컨디션이 정상이 아닌데도 "내가 너 도와줄게"라고 하면서 정말 열심히 뛰었다. 그런데 안되더라. 에레라의 경우 적응을 못했다. 향수병이 생기더라. 지금 에레라는 칠레 1부리그에 돌아가서 정말 잘 뛰고 있다.

인창수의 포천은 당시 '최강'이었다 ⓒ 대한축구협회 제공

한 가지 더 있다. 내가 현실과 타협하면서 방향성을 잃어버렸다. 시즌 초반 약 여섯 경기는 내가 원하는 축구를 구현하려고 노력했다. 전방 압박이 중점이었다. 그렇게 해서 FC안양전에 상대 골키퍼 실수로 인한 자책골로 승리했다. 그런데 밸런스와 간격 유지 등에 실패하면서 전술을 바꿔버렸다. 동계 전지훈련 때는 곧잘 하다가 시즌에 들어오니 잘 안되더라.

그래서 그 이후에 수비적인 전술로 바꿨다. 그렇게 몇 승은 챙겼다. 문제는 이도 저도 아닌 전술이 됐다는 것이다. 여름 이적시장 때 좀 더 내가 원하는 축구를 하고자 안성빈, 이현성, 이반 등을 영입해 7월부터 다시 라인을 올려봤다. 그러다가 최치원 등이 부상으로 이탈하면서 다시 힘들어졌다. 아쉬움이 많았다. 남들은 '운이 없었다'라고 위로했지만 기본적으로 내가 실력도 부족했고 준비도 부족했다.

지도자라면 이런저런 변명보다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해 좋은 성적을 내야 한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내 경험이 부족했고 선수 구성과 외국인 선수 등 여러가지를 간과했다. 나도 많이 후회된다.

사실 <스포츠니어스>도 당시 서울이랜드를 좀 비판했다.

알고 있다. <스포츠니어스>에서 서울이랜드에 대해 쓴 기사들을 봤다. 하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읽고 나서 고개를 끄덕이며 '맞는 말이네'라고 했다. 사실 만을 이야기하지 않았나. 전혀 불쾌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 당신과 이렇게 웃으면서 인터뷰도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하하.

할렐루야와 포천시민축구단에서 좋은 성적을 거뒀다는 것을 감안하면 자존심 많이 상했을 것 같다.

꼴찌가 됐다는 것에 자존심이 많이 상했다. 지금까지 아무리 어려워도 꼴찌는 해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할렐루야 축구단에 있을 때도 꼴찌는 안했다. K리그 챌린지 출범 직전 구단 예산과 선수 수급 등의 문제로 어려운 시기가 있었지만 그 때도 중위권이었다. 그런데 서울이랜드에서 꼴찌를 했다. 밤새 경기 영상을 돌려보고 또 돌려보면서 고민해도 안되던 시기였다.

감독이라는 것이 그렇다. 팀 성적이 꼴찌면 감독의 인생도 꼴찌가 된다. 많이 괴로웠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것이 나를 성장시키는 소중한 자양분이 됐다고 생각한다. 기분 좋은 경험만 해서는 좋은 지도자가 되기 어렵더라. 서울이랜드에서 감독으로 보낸 1년이 내게는 가장 힘들었던 시기지만 나를 한 단계 더 성장시킨 계기가 됐다고 생각한다. 정말 쓰디 쓴 보약이었다.

그리고 서울이랜드에서의 경험이 U-20 월드컵에도 상당히 많은 도움이 됐다. 정정용 감독님께도 서울이랜드에서의 경험을 많이 이야기했다. 좋은 시기의 경험도 좋지만 나쁜 시기의 경험 또한 많은 것을 배우게 한다. 서울이랜드에서 배운 선수 구성의 중요성으로 인해 U-20 월드컵 전부터 정말 많은 경기를 찾아 다녔다. 선수를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우리 팀의 스타일에 맞는 선수를 찾아 감독님께 건의했다.

그러게, 꼴찌 팀 감독이 갑자기 U-20 월드컵 코치라는 중책을 맡았다.

죽어있던 나를 정정용 감독님이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신 것이다. 사실 많은 분들이 도와주셨다고 생각한다. 정 감독님만 나를 원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지 않겠는가. 김판곤 부회장님을 비롯해 최영준 기술교육실장님 등 많은 분들이 내게 기회를 줬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U-20 대표팀을 맡으면서 수비를 담당하라는 나름대로의 중책이 주어졌다. 나는 미팅에서 말했다. "맡겨 주시면 주어진 임무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당시 언론과 외부의 시선은 그랬다. 이강인, 조영욱, 전세진, 엄원상, 정우영 다섯 명이 U-20 대표팀에서 제일 많이 거론되는 선수였다. 그러면서 수비는 비교적 약하다는 평가가 많이 있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살짝 부담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우리 잘 할 수 있는데…'라는 생각을 했다. 일종의 오기였다. 그리고 선수들을 만나면서 이 오기는 확신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인창수의 포천은 당시 '최강'이었다 ⓒ 대한축구협회 제공

2019년 초에 U-20 대표팀이 스페인 전지훈련을 갔다. 거기서 나는 김현우를 처음 봤다. 당시 이지솔과 이재익은 전지훈련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친구가 정말 잘하는 것이다. 그 때 딱 정답을 찾았다. 이지솔은 전투적인 스타일이고 이재익은 공 예쁘게 잘 차고 빌드업 잘하는 스타일이다. 그리고 윙백에는 주장 황태현과 최준이 잘하고 있었다. 이 다섯 명을 잘 버무리면 좋을 것이라 생각했다.

훈련을 하면서 더욱 그런 느낌을 받았다. 이 선수들이 한 가지를 가르쳐주면 두 가지를 아는 친구들이었다. 그만큼 능력이 있었다. 라니에리 감독이 레스터시티를 처음 맡았을 때 구단에서는 "강등만 면하게 해달라"고 했지만 막상 선수들을 보니 중상위권도 가능하겠다는 판단을 했다더라. 내가 이 수비수들을 봤을 때 딱 그런 느낌이었다. 물론 한국 공격수들 잘한다. 이강인은 말할 것도 없고. 하지만 수비수들이 이름값만 좀 떨어지지 절대 밀리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 수비수들 실전 대회에서 정말 잘했다.

수비도 수비지만 당신에게 잊지 못할 경기는 아르헨티나전 아닌가.

사실 경기 전날에 아르헨티나 감독을 만났다. 공교롭게도 한국과 아르헨티나가 당시 같은 호텔을 숙소로 쓰고 있었다. 게다가 그 아르헨티나 감독이 내 지인의 지인이었다. 친구의 친구인 셈이다. 그래서 호텔에서 만나 반갑게 인사하고 서로 덕담을 건넸다. 그 때 아르헨티나는 2연승으로 16강을 확정지었고 우리는 16강을 확정짓기 위해서는 승리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괜히 아르헨티나 감독을 자극시켜 동기부여를 주지 않으려고 나는 겸손하게 말했다. "우리 목표는 조별예선 통과입니다."

그런데 웬걸, 아르헨티나 선발 라인업을 보니 거의 최정예 멤버로 꾸린 것이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이 지고는 못사는 성격이다. 그 아르헨티나 감독이 2017년 U-20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 코치였다. 그 때 한국에 패했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한국 한 번 제대로 밟아보자고 그렇게 최정예 멤버를 꾸린 것이다. 당시 미디어에서 아르헨티나가 1.5군을 내세웠다고 했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8명이 최정예 자원이었고 2명이 바뀌었고 1명이 경고누적으로 어쩔 수 없이 대체자원으로 나온 것이었다.

감독님은 일본전이 제일 부담스러웠다는데 내 입장에서는 아르헨티나전이 제일 부담스러웠다. 아르헨티나 사람이라 아르헨티나전 준비에 공을 꽤 많이 들였다. 주변 지인을 총동원해 아르헨티나 선수들의 유소년 시절 영상을 대부분 구해서 분석했다. 개개인은 다 파악됐다. 선수들에게도 상대 선수의 장단점을 분석해서 공유해줬다. 마침 오세훈 쪽에 붙었던 센터백이 1군 경험이 없는 그 한 명의 선수였다. 그래서 그 쪽으로 공략하라고 했다. 조영욱의 골도 그 지역에서 만들어졌다. 내 덕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제대로 분석했던 것 같아 정말 다행이었다.

인창수의 포천은 당시 '최강'이었다 ⓒ 대한축구협회 제공

아르헨티나전을 치르면서 순위에 가장 많이 신경을 썼다. 2-0인 상황에서 한 골만 더 넣으면 조 1위도 가능했다. 그래서 급하게 조 1위가 되면 16강 대진에서 어떤 팀들을 만나는지 확인했다. 그러다가 아르헨티나의 기습적인 슈팅에 한 골을 내줬다. 그래서 '됐다. 이렇게 된 이상 2위로 가자'라고 생각했다. 2-1이 됐는데 여기서 한 골 더 먹으면 포르투갈에 밀리는 상황이었다. 최대한 안정적으로 경기를 마무리하려고 했고 그렇게 됐다.

아르헨티나전은 이겼지만 포르투갈전이 참 아쉽다. 솔직히 포르투갈이 우리 생각보다 못했다. 이 선수들이 대회 개막 3일 전에 폴란드에 왔다. 물론 유럽이니까 이동 거리가 짧아서 그럴 수 있지만 조금 자만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포르투갈을 상대로 우리가 긴장하는 바람에 패배한 거다. 조별예선 결과만 봐도 알지 않는가. 포르투갈이 떨어졌다.

포르투갈 측면 수비수들 한 번 봐라. 맨유 선수가 오른쪽(디오고 달롯)이고 울버햄튼 선수(루벤 비나그레)가 왼쪽이다. 그런데 우리 측면 수비수들은 어떤가. 최준은 연세대학교 다니고 황태현은 안산그리너스에서 뛴다. 소속팀 무게감만 보면 확 차이가 난다. 그런데 우리 선수들 잘했다. 내가 최준에게 "너 맨유 '빽' 상대로 굉장히 잘한 거야"라고 격려했다.

아르헨티나 사람이 애국가 그렇게 크게 부르니 신기하긴 하더라.

애국가는 당연히 크게 불러야 하지 않겠는가. 그 때 정말 열심히 불렀다.

솔직히 아르헨티나 국가도 불렀을 것 같은 의심이 든다.

국가가 나올 때 기분이 좀 야릇하더라. 묘한 느낌이다. 농담 삼아 코칭스태프에게는 그랬다. "아르헨티나전 때 아르헨티나 국가 나오면 부를 수도 있다"고. 하하. 내가 아르헨티나 국가 가사는 다 안다. 하지만 부르지는 않았다. 그만큼 16강에 가고 싶다는 간절함이 있었다.

이후에도 TV에 내가 굉장히 많이 등장했다고 하더라. 워낙 내가 기쁘면 리액션이 크다. 골 넣거나 이기면 정말 많이 좋아한다. 현장에서 굉장히 즐거웠다. 골이 들어가면 누구보다 더 큰 목소리로 "바모!(Vamos)"라고 외치고 선수들과 끌어안고 서로 기뻐했다.

이후 승승장구해서 결승까지 갔다. 그렇게 될 것이라 생각했는가.

그런 것은 있었다. 조별예선만 통과하면 4강도 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르헨티나와 포르투갈이 있는 조를 뚫어내면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일본전 승리한 다음 보니 아르헨티나와 프랑스가 떨어진 것이다. 딱 보니까 8강에서는 세네갈을 만나게 되고 4강에 진출한다면 에콰도르를 만날 것으로 예상했다. 그래서 결승까지도 갈 수 있겠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특히 에콰도르의 경우 우리가 이미 한 번 만났던 상대였다. 본선 직전 마지막 평가전 상대가 에콰도르였다. 경기 끝나고 코칭스태프끼리 서로 인사하면서 부족했던 점 등을 공유했다. 또 하필 에콰도르 감독이 아르헨티나 사람이다. 에콰도르 감독이 "너네 백 쓰리 전술이 우리에게는 너무 힘들다"라는 말과 함께 "우리 에콰도르는 10번이 좋다"라는 등 참고할 만한 이야기를 많이 해줬다. 그래서 자신있게 에콰도르전은 백 쓰리 전술을 들고 나갔다.

생각해보면 에콰도르전은 정말 편안한 경기였다. 선방 몇 개가 있었지만 우리가 TV 리모콘을 잡고 마음대로 채널 돌리듯이 경기했다. 물론 조별예선에서 강팀을 만나면서 자신감을 쌓은 것이 가장 주효했다. 오히려 세네갈전이 힘들었다. 정말 세네갈 선수들은 덩치가 엄청 크다. 우리가 상대하기 쉽지 않았다. 결승까지 가는 길목 중에 세네갈이 가장 강한 상대였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세네갈을 상대로 이길 것이라는 확신은 가지고 있었다. '촉'이라는 것이 있다. 2-2가 되는 이지솔의 동점골도 느낌이 왔다. 백 쓰리에서 백 포로 바꾸는 과정에서 교체하는 이지솔을 내가 건의해서 남겨뒀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강인이 코너킥 준비를 할 때 내가 정정용 감독님에게 말했다. "이거 들어갑니다." 그리고 진짜 들어갔다. 나는 이길 거라고 확신했다. 단지 계속해서 시소 게임을 하면서 '이거 이길텐데 왜 이러지?'라는 생각만 했을 뿐이다.

U-20 대표팀의 많은 것이 화제였다. 특히 자유로운 분위기도 많은 관심을 받았다.

정정용 감독님이 했던 말이 있다. '무질서 속에 질서'라고. 요즘 선수들은 예전처럼 억압하거나 그러면 안된다. 미팅도 자주 하지 않으려고 한다. 미팅을 너무 자주 하면 오히려 역효과가 생긴다. 선수들에게 지시를 할 때도 세세하게 알려주지 않는 편이다. 선수들에게 화두를 하나 딱 던져주면 자기들끼리 서로 논의하고 토론하면서 결과를 찾아낸다. 그래야 창의적인 플레이가 나올 수 있다.

이강인이 말 많아서 동료들이 불편함을 호소하던데 컨트롤 해야하는 것 아닌가.

에이, 나는 이강인의 마음을 정말 다 이해한다. 나도 그랬다. 이강인이 혼자서 스페인에 생활하고 있지 않는가. 그러면 한국어를 쓸 기회가 없다. 물론 훈련 끝나고 집에 가면 부모님이 계시겠지만 부모님과 대화하는 것은 친구들과 대화하는 것과 또 다르다. 이강인은 알게 모르게 스페인에서 한국어를 쓰지 못해 답답했을 것이다. 내가 아르헨티나에서 그랬기 때문에 잘 안다.

그러니까 이강인이 한국에 오니 말이 방언처럼 터져나오는 것이다. 쉴 새 없이 말할 수 밖에 없다. 자신이 한국어를 하면 받아주는 동료들이 있다는 것이 이강인에게는 일종의 행복감인 것이다. 게다가 팀 동료들이 막내의 말을 다 받아주니까 얼마나 더 신나겠는가. 물론 나는 이강인과 가끔 스페인어로 대화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다른 선수들 앞에서는 일부러 한국어를 썼다. 괜히 둘이 스페인어 하면서 잘난 척 한다고 오해할까봐 그랬다. 하하.

인창수의 포천은 당시 '최강'이었다 ⓒ 대한축구협회 제공

세대 차이는 좀 느꼈다. 내가 최준에게 그랬다. "(최)준아, 너는 잔루카 잠브로타의 플레이를 많이 공부하면 좋겠어." 잠브로타라고 하면 유벤투스와 바르셀로나, AC밀란에서 뛰었던 이탈리아 역사상 최고의 측면 수비수 중 한 명 아닌가. 그런데 준이가 고개를 갸우뚱 하면서 묻더라. "잠브로타가 누군가요?" 그 때 정신이 번쩍 들었다. '요즘 애들은 잠브로타 모르는구나.' 그래서 플레이 영상을 구해다 보여줬다.

그리고 에콰도르전 때 이강인이 환상적인 패스를 찔러줘서 최준이 득점했을 때도 그랬다. 내가 경기 끝나고 선수들에게 "(이)강인이와 준이 골은 정말 마라도나가 카니자에게 찔러줘서 만든 득점 같아." 그런데 아무도 공감을 못하더라. 안하는 게 아니라 못하더라. 그 골은 1994년 미국 월드컵 조별예선 나이지리아전에서 아르헨티나가 만들어 낸 골이다. 그 때 이 친구들은 태어나지도 않았더라. 카니자가 누군지도 모르고.

여튼 U-20 월드컵은 당신에게도 좋은 기억일 것 같았다.

대회 기간 동안 일하면서 힘든 것을 몰랐다. 매일 밤 새면서 상대 영상 보고 분석하고 연구하는 고된 나날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피곤하거나 힘들다고 생각을 안했다. 구름 위를 둥둥 떠있는 기분이었다. 나는 할렐루야와 포천시민축구단에서 좋은 나날을 경험했고 서울이랜드에서 좋지 않은 경험도 했다. U-20 월드컵은 또다른 경험이었다. 왜 선수도 지도자도 국제 경험이 중요한 것인지 알았다.

그래서 U-16 여자 선수들에게도 월드컵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다. 선수들에게 U-17 월드컵에 나가야 그 어마어마한 월드컵 경험을 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이 이야기를 통해 승부욕을 많이 끌어 올리고 동기부여를 주면서 많이 뛸 수 있도록 강조하고 있다.

이제 당신은 여자 U-16 대표팀 감독으로 또다른 도전에 나선다.

쉽지는 않다. 여자 팀은 커리어 중에 처음이다. 뭔가 맡으면 잘해야 하는데 쉽지는 않다. 특히 우리의 목표는 태국에서 열리는 AFC U-16 챔피언십 본선 결승에 진출해 2020년 U-17 월드컵에 출전하는 것이다. 문제는 아시아에 티켓이 두 장 밖에 없다는 것이다. 원래 세 장인데 하필이면 이번 대회 개최국이 인도다. 인도가 한 장을 홀랑 가져가면서 아시아에는 두 장이 남았다. 정확한 전력 파악은 차차 할 예정이지만 이야기를 들어보면 북한이 압도적인 전력을 갖추고 있고 일본도 강팀이라고 하더라.

우리는 3위권 그룹으로 평가 받는다. 중국, 호주와 함께 경쟁하고 있는 상황이다. 만약 티켓이 세 장이라면 해볼 만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두 장으로 줄어드는 바람에 우리는 월드컵 진출마저 도전자의 입장이 됐다. 무조건 4강 토너먼트에 진출하고 4강전에서 북한이나 일본을 꺾어야 하는 상황이다. U-16 챔피언십에서 우리는 북한, 중국, 베트남과 B조에 속했다. 일단 중국과 베트남을 잡고 북한을 꺾고 조 1위를 하거나 조 2위로 토너먼트에 가야한다.

현실적으로 북한을 꺾기는 쉽지 않다고 하더라. 일단 계획은 두 가지다. 앞서 말한 것처럼 북한을 잡아낼 경우 조 1위로 진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상대 조에서 2위가 유력한 호주와 붙게 된다. 그나마 호주는 좀 수월하다. 만약 북한을 잡지 못해 조 2위가 된다면 4강에서 일본을 만난다. 아무래도 북한을 이길 가능성보다는 일본을 이길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이 시나리오를 염두에 두고 훈련하고 있다. 꼭 월드컵 티켓을 따고 싶다. 우리 대표팀에 많은 관심 부탁한다.

알겠다. 마지막으로 인창수라는 사람의 미래는 어떨까?

지금까지 나의 축구 인생은 파란만장했다. 아르헨티나에서 K리그 감독 꿈 이뤄보겠다고 무작정 건너왔다. 당시 사람들은 다 웃었다. 끽해야 실업축구에서 선수 생활 좀 했고 코치 커리어도 내셔널리그에서 시작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인맥도 없었다. 하지만 어쨌든 꿈은 이뤘다. 물론 결과는 좋지 않았지만.

앞으로 나는 계속해서 지도자의 삶을 살고 싶다. 그렇다고 감독직을 고집하고 싶지는 않다. 지도자로 생활하면서 나는 여러가지를 관리하는 '매니저(감독)'의 역할보다 선수들과 함께 교감하고 땀 흘리는 코치가 더 어울리는 것 같다. 코치가 나의 장점을 더 부각시킬 수 있는 직업이라 생각한다. 그렇게 정정용 감독님 밑에서 내 장점을 살렸다.

내가 대한축구협회 전임 지도자가 되면서 미팅 당시 최영준 실장님에게 했던 말이 있다. "시켜주는 것은 열심히 하겠습니다." 지금도 항상 그런 생각으로 살고 있다. 내가 맡은 바 주어진 사명을 감당할 것이고 내가 속한 곳에서 최선을 다할 것이다. 앞으로의 미래는 모른다. 계속해서 열심히 전임 지도자의 삶을 살 수도 있고 새로운 도전에 나설 수도 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어떤 곳에서도 열심히 할 것이다.

인터뷰가 끝난 후 인 감독은 여자 U-16 대표팀의 훈련을 지휘했다. 그가 지도하는 훈련장은 웃음이 넘쳤다. 짝을 지어 훈련할 때 선수들이 스스럼 없이 "우리는 빌드업 커플이다"라고 인 감독에게 가서 주장하자 너털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인 감독은 계속해서 선수들에게 "수비 아주 좋아, 잘했어, 굿!"을 외쳤다. 그 모습을 보며 다시 한 번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는 정말 천상 '매니저'가 아닌 훌륭한 '코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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