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레인저스, 더비카운티 페이스북

[스포츠니어스 | 임형철 기자] 친구들 사이에서 '램제 논쟁'(혹은 제램 논쟁)은 쉽게 꺼낼 만한 주제가 아니다. 서로 의견이라도 엇갈리면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우정에 금이 가기에 십상이다. 제라드와 램파드 중 최고의 미드필더는 누구일까? 사실 답이 없는 문제지만 축구를 좋아하는 이라면 누구나 한번 쯤은 '램제 논쟁'에 뜨겁게 참여한 기억이 있을 것이다. 이제 와서 생각하면 취향 차이 정도로 정리하고 싶다.

현역 내내 선수로서 참 많이 비교되어왔던 둘은 공교롭게도 2018-19 시즌 나란히 성인팀 감독 데뷔 시즌을 맞는다. 스티븐 제라드는 지난 5월 4일 스코티쉬 프리미어리그의 명문 팀 레인저스 FC의 감독으로 선임됐다. 그리고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은 5월 31일 이번엔 프랭크 램파드가 잉글랜드 챔피언십의 만년 승격 후보 더비카운티의 지휘봉을 잡았다.

서로 다른 무대에서 성인팀 지도자로서 첫걸음 내딛는 둘은 2018-19 시즌 선수가 아닌 감독으로 새로운 램제 논쟁을 부추길 전망이다. 선수 시절 램제 논쟁은 차마 결론을 낼 수 없었다. 그러나 감독이라면 얘기는 달라질 수 있다. 모든 것은 2018-19 시즌 감독 경력의 첫 페이지를 누가 어떻게 장식하느냐에 달려있다. 해묵은 논쟁이라 불리던 '램제 논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선수 시절 골 넣고도 이 동작 자주 했었다 ⓒ 레인저스 페이스북

두 감독은 어떻게 시즌을 준비하고 있나

두 감독의 데뷔 과정에도 역시 리버풀과 첼시가 빠지면 섭섭하다. 제라드와 램파드 두 사람은 이제 옛 팀의 소속이 아니다. 그러나 레전드의 성공적인 지도자 커리어 출발을 위해 리버풀과 첼시 모두 아낌 없는 지원을 보냈다. 레전드에게 ‘YNWA(You’ll Never Walk Alone)’을 실천하는 리버풀과 ‘Blue Is the Colour’로 램파드의 푸른 피를 증명하는 첼시의 행보는 그 자체로 흥미롭다.

제라드는 지난 시즌 자신이 감독을 맡았던 리버풀 U18 팀의 코치진과 함께 레인저스로 이동한다. 제라드 이전에 U18 팀을 감독으로 지휘했던 마이클 빌, U18 팀의 수석 코치로 제라드를 보좌했던 톰 컬쇼, U18 팀의 피트니스 코치였던 조던 밀섬이 함께한다. 리버풀 구단은 제라드의 요청에 이들을 흔쾌히 보내줬다. 선수 시절 제라드의 리버풀 동료였던 개리 맥칼리스터도 코치로 동행한다.

리버풀은 오랜 시간 공들여 지켜보고 있는 유망주 오비 에자리아의 레인저스 임대도 승낙했다. 구단과 재계약을 체결한 동시에 곧바로 레인저스 임대를 확정했다. 그 밖에도 라이언 켄트, 해리 윌슨, 도미닉 솔랑케 등 리버풀 내 어린 선수들의 레인저스 임대 루머가 연이어 보도되고 있다. 제라드도 리버풀의 어린 선수들을 전력감으로 원하고 구단도 이들을 보내는 데 주저함이 없는 분위기다.

프랭크 램파드도 첼시의 도움을 받고 있다. 첼시 U18 팀에서 4년 간 감독으로 일하며 국내 대회 모든 트로피를 들어 올린 조디 모리스가 더비카운티의 코치로 합류한다. 조디 모리스는 첼시도 큰 기대를 걸고 있는 유망한 지도자지만, 레전드와 동행해 그의 짐을 덜어줄 수 있도록 인도했다. 누구보다 램파드에 대해 잘 아는 첼시 레전드 존 테리도 아스톤빌라를 떠나 더비카운티의 선수로 함께한다.

더비카운티는 아직 선수 영입에 대한 구체적인 소식을 들려주지 않았다. 그러나 추후 첼시 유스 팀 선수가 더비카운티로 팀을 옮길 가능성이 매우 크다. 첼시는 유럽축구연맹(UEFA)의 FFP 2.0 발표에 따라 프로 계약 선수가 25명으로 제한되어 과거처럼 수십 명의 유스 출신 선수를 여러 팀에 임대 보낼 수 없게 됐다. 따라서 첼시는 거취가 불투명해진 선수를 램파드의 더비카운티로 통 크게 보낼 가능성이 커졌다. 때마침 램파드도 툴롱컵 경기를 관찰하는 등 잉글랜드 국적의 유망주들에게 이미 상당한 관심을 보인 바 있다.

두 감독 모두 옛 팀의 지원과 지지를 받으며 탄탄히 새 시즌을 준비하고 있다. 언뜻 레인저스와 더비카운티에서 벌써 리버풀과 첼시의 향기가 느껴질 정도다. 제라드, 램파드와 함께 이동한 코치진, 선수들이 함께 성장해 다같이 옛 팀에 복귀하는 그날이 기다려진다. 두 구단은 레전드에 대한 예우와 동시에 미래를 위한 투자를 감행한 셈이다. 그러나 아무리 준비 과정이 탄탄해도 감독이 스스로 준비되어있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두 감독 모두 성인팀 감독 경험이 없다는 사실이 이따금 떠오른다.

선수 시절 골 넣고도 이 동작 자주 했었다 ⓒ 레인저스 페이스북

아직 검증되지 않은 두 감독의 지도력

과거 수많은 사례가 말해주듯 감독은 이름값과 얼굴만으로 할 수 있는 직책이 아니다. 선수 시절과 분리해서 오직 한 명의 감독으로서 보여줄 수 있는 능력에 주목해야 한다. 그러나 두 감독 모두 성인팀 감독 경력이 없다. 현재로선 기대보다 걱정이 앞서는 게 사실이다. “최고의 선수는 최고의 감독이 될 수 없다”는 말이 두 사람 모두에게 틀린 말이 될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제라드는 2016년 11월 24일 현역 은퇴 발표 후 리버풀 U18 팀 코치로 지도자 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2017년 7월 마이클 빌의 후임으로 U18 팀의 감독을 맡았다. 초반엔 아주 좋은 출발을 했다. 성적도 잘 나왔고 어린 선수 육성도 계획대로 됐다. 선수들의 칭찬도 따라왔다. 한 선수는 “평생 배운 것보다 제라드와의 6개월에서 배운 게 더 컸다”고 말할 정도로 제라드의 가르침에 흠뻑 빠져 있었다.

물론 위기도 있었다. 2018년이 되자 U18 팀에서 잘하는 선수는 윗 연령대로 승급하거나 더 좋은 팀으로 임대가는 일이 많아졌다. U18 팀에서 쓸 선수가 부족해진 제라드는 급히 새로운 선수를 수혈했지만 전력의 공백을 메우지 못하고 연패에 빠졌다. U18 팀의 순위도 순식간에 1위에서 3위로 떨어졌다. 이에 대한 현지 팬들의 평가는 엇갈렸다. 갑자기 발생한 선수 공백이 컸다는 의견과 모든 팀 유스가 다 그렇게 운영되므로 제라드의 준비가 부족했다는 반박이 충돌했다.

그래도 전반적으로 제라드가 선수 육성, 경험 전수 측면에서 훌륭히 감독직을 수행했다는 평가가 쏟아졌다. 그러나 유스팀 감독직만으로 성인팀에서의 지도력을 평가하기엔 무리가 있다. 어린 선수들과 성인 선수는 통제하는 범위부터 다를뿐더러 선수 육성 이상의 관리 차원까지 신경 써야 한다. 대회나 일정의 난도도 대폭 상승하고 선수단 장악에도 변수가 많아진다. 한 시즌 U18 팀 감독 경력으로 성인팀 지휘를 낙관하기엔 어려움이 있다. 당장은 헤쳐 나가야 할 난관이 많다.

램파드의 경험은 더 부족하다. 램파드는 2017년 2월 2일 현역 은퇴 발표 후 그동안 첼시 U18 팀의 비공식 코치를 하며 지도자 일에 뛰어들었다. 얼마 전까지는 자격 취득을 위해 지도자 코스를 밟고 있었다. 감독직 자체는 아예 더비카운티가 처음이다. IQ가 150에 달할 정도로 명석한 두뇌와 그에 따른 축구 이해 능력을 갖춘 램파드지만 부족한 경험 때문에 감독 도전이 이르다고 보는 우려가 적지 않다.

두 감독 모두 자신의 선수 시절보다 낮은 레벨의 선수를 지도해야 한다. 과거 첼시 감독을 맡아 램파드를 가르쳤던 아브람 그랜트는 램파드의 더비카운티 감독 부임 소식을 듣고 이런 말을 남겼다. “늘 최고의 선수만 가르칠 수 없다. 감독이 되는 순간 자신이 최고였다는 생각을 버려라.” 도전을 앞둔 제자를 향한 묵직한 충고였다.

선수 시절 골 넣고도 이 동작 자주 했었다 ⓒ 레인저스 페이스북

두 감독이 새 팀에서 이루어야 할 목표

제라드와 램파드 모두 새로운 도전과 경험을 쌓기 위해 감독직에 뛰어들었다. 부족한 경험 탓에 반드시 시행착오가 따라온다는 것을 그들도 잘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2017-18 시즌 리버풀 U18 팀 감독 재임 중이던 제라드는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배울 시간도 필요하다. 향후 2년 정도는 기다려 달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제라드는 2년이 지나기도 전에 레인저스의 감독직을 수락했다. 그러나 두 팀이 온전히 두 감독의 성장을 기다릴 수만은 없는 일이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두 팀에게도 나름 급한 사정이 있다.

재정 파산으로 2012-13 시즌 4부 리그로 강등된 레인저스는 2016-17 시즌이 돼서야 간신히 1부 리그로 복귀했다. 그리고 두 시즌 연속 3위를 기록 중이다. 한 번 큰 실패를 맛본 팀의 성적으로 보면 나쁠 것이 없지만 레인저스의 불만은 다른 곳에 있다. 바로 셀틱을 향한 열등감이다. 라이벌 팀 셀틱은 2016년 5월 브랜던 로저스 감독 선임 후 황금기를 맞고 있다. 그동안 레인저스는 임시 감독까지 포함해 4명을 감독직에 앉혔지만 한 번 벌어진 셀틱과의 격차를 좁히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2018년 3월 있었던 셀틱과의 올드 펌 더비에서 레인저스는 2-3으로 패했다. 4월 말 셀틱 원정에서는 무려 0-5로 무너졌다. 이로써 레인저스는 2012년 3월 25일부터 시작된 올드 펌 더비 무승 기록을 14경기째로 늘렸다. 레인저스는 스스로 셀틱의 야성을 위협하는 팀이 되길 간절히 원한다. 그들이 스티븐 제라드라는 특급 스타를 감독 자리에 앉힌 것도 팀 분위기를 쇄신하고 자신감을 끌어올리기 위함일 것이다. 제라드를 내세운 레인저스는 셀틱에 힘없이 무너지는 모습을 반복해서는 안 된다. 두 팀의 차이가 현재로서 매우 크지만 제라드라면 단기간 내 차이를 만들어야 한다.

선수 시절 골 넣고도 이 동작 자주 했었다 ⓒ 레인저스 페이스북

10년 전 프리미어리그에서 38경기 1승만 거둔 채 최하위로 강등된 더비카운티는 이후 챔피언십 중위권에 머물다 2013년부터 상위권 진입에 성공했다. 그 후 2017-18 시즌까지 5시즌 중 세 번이나 승격 플레이오프에 도전했지만 번번이 좌절을 맛봤다. 승격 플레이오프에서 더비카운티를 꺾은 팀은 전부 승격을 이루었기 때문에 더 배가 아팠다. 더비카운티가 승부사 프랭크 램파드를 감독으로 앉힌 이유는 성과에 대한 기대 때문이다. 선수로서 극적인 순간마다 대단한 활약을 남겨 팀의 승부사로 불렸던 것처럼 늘 승격 문턱에서 좌절해온 더비카운티를 이번에는 확실히 승격시켜주길 절실히 바랄 것이다.

그러나 더비카운티가 있는 챔피언십은 그리 호락호락한 무대가 아니다. 선수로서 챔피언십쯤은 가볍게 여겨도 될 클래스를 가진 램파드지만 경험이 전혀 없는 감독으로는 얘기가 달라진다. 챔피언십은 매년 승격 플레이오프 진출권 경쟁이 살벌한 리그다. 한 라운드씩 지나갈 때마다 순위가 요동친다. 챔피언십과 승강 시스템에 숱한 경험이 있는 감독들도 번번이 좌절할 정도다. 가끔 프리미어리그보다 챔피언십이 더 어렵다는 지도자들의 고충이 담긴 기사도 심심치 않게 읽을 수 있다. 램파드는 바로 이 무대를 자신의 감독 데뷔 무대로 잡았다.

결국, 두 감독 모두 각자의 위치에서 혁신을 이끌어야 목표하는 바를 이룰 수 있는 상황이다. 제라드는 눈에 띄게 벌어진 셀틱과 레인저스의 격차를 단기간 내에 좁혀야 한다. 램파드는 살얼음판 같은 챔피언십 승격 경쟁에서 만년 승격 후보에 머물던 팀을 이끌고 확실한 성과를 내야 한다. 생각 이상으로 두 감독에게 주어진 목표가 쉽지 않다. 선수 시절엔 이름이나 얼굴만 봐도 저절로 신뢰감이 생겼지만 아무것도 보여준 적 없는 감독직에서는 상황이 다르다. 이들이 이를 어떻게 풀어나갈지 지켜볼 일이다.

선수 시절 '램제 논쟁'은 쉽게 답을 내리기 어려웠다. 싸우다 지친 이들도 “이 정도면 취향 차이겠지”하며 다름을 인정하기 일쑤였다. 둘 다 뛰어난 능력을 갖춘 훌륭한 선수임이 분명했기에 우열을 가리기란 쉽지 않았다. 그래서 감독이 되어 다시 시작될 램제 논쟁은 어떤 구도로 펼쳐질지 궁금하다.

선수 시절처럼 우열을 쉽게 가리지 못 할 정도로 높은 위치에서 자주 비교되는 모습을 보여줄까? 선수 시절과 다르게 두 감독 간의 행보가 큰 차이를 보여 너무 쉽게 램제 논쟁의 결론이 나지는 않을까? 두 감독 다 감독으로서 인상을 남기지 못해 쓸쓸히 퇴장하는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은 아닐까? 아직 리버풀 감독 제라드, 첼시 감독 램파드가 되어 돌아온 건 아니지만 이 둘의 경쟁은 벌써부터 흥미롭다. 과연 이들은 위대한 선수, 위대한 감독이 될 수 있을까?

stron1934@sports-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