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띤 응원을 펼치고 있는 칼레 팬들 ⓒ 칼레RUFC 공식 페이스북

[스포츠니어스|곽힘찬 기자] 이 세상에 감동 없는 스포츠는 없다. 축구 역시 그렇다. 종종 약체로 평가받는 하부리그 팀들은 의외의 경기력을 보여주며 돌풍을 일으킨다. 비록 마지막 관문에서 패배를 맛보더라도 팬들은 그들이 결코 실패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이 보여준 기적은 팬들에게 잊을 수 없는 감동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약팀의 기적은 운이 가미되어야 일어날 수 있다고들 한다. 하지만 그저 운으로만 생기는 것이 아니다. 99%의 정신력과 단 1%에 불과한 실낱같은 간절한 희망이 만들어 낸다.

지난해 12월, 2018 러시아 월드컵 조 편성이 완료됐다. 추첨 결과가 나오자마자 많은 언론들은 부정적인 기사를 쏟아냈고 팬들 또한 전패 탈락을 예상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 일수 있다. 아시아 지역 월드컵 최종예선을 힘겹게 뚫고 본선 진출에 성공한 한국대표팀에 유럽과 북중미 강호들은 매우 버거운 상대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팬들의 눈높이가 2002 한일 월드컵 이후 매우 높아졌다고 해도 대회가 시작하지도 않는 이 시점에서 벌써부터 결과를 단정 짓기는 어렵다. 많은 사람들의 예상처럼 진짜 우리에게 기적이라는 것은 결코 일어날 수 없는 것일까?

우리는 종종 프로, 아마 모든 클럽이 참가하는 토너먼트 대회인 FA컵에서 일어나는 기적을 목격한다. 숨겨져 있던 하부리그 팀이 강팀을 연이어 격파하고 올라오는 것을 보면 ‘공은 둥글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은 상, 하위 팀의 격차가 큰 프랑스 리그를 두고 ‘그들만의 리그’라 부르기도 한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프랑스 FA컵인 ‘쿠프 드 프랑스’에서 기적이 유독 많이 일어난다. 강팀을 연이어 격파하고 올라온 숨겨진 하부리그 팀의 감동 스토리는 많은 축구 팬들에게 웃음과 눈물을 선사한다.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칼레의 기적

프랑스의 항구 소도시 칼레는 두 가지의 기적 스토리를 가지고 있다. 첫 번째는 옛날 중세시대 칼레의 지역 유지 여섯 명이 보여준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일컫는다. 당시 프랑스와 영국은 치열한 백년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수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전투를 치른 끝에 칼레를 포위한 영국의 왕 에드워드 3세는 칼레의 항복을 수용하는 대신 조건으로 모든 시민을 대신해 칼레 시민 여섯 명의 목숨을 가져오라고 했다. 이때 칼레의 가장 부유한 인물 중 한명이었던 우스타슈 생 피에르를 비롯한 지역 유지들이 솔선수범하여 나섰고 이들의 희생정신에 감복한 에드워드 3세는 칼레의 시민들을 모두 살려주었다.

칼레의 시민 동상 ⓒ ChrisO

이러한 ‘칼레의 기적’이라는 단어는 훗날 프랑스 축구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사건에 다시 사용되었다. 1995/96 시즌 ‘쿠프 드 프랑스’ 당시 어느 누구도 4부 리그 팀이 돌풍을 일으킬 것이라고 상상하지 않았다. 많은 팬들은 늘 그래왔듯 1부 리그에서 우승팀이 나올 것이라 예상했다. 그저 별 볼일 없는 팀인 칼레RUFC는 팬들의 관심 밖이었다. 하지만 칼레가 당시 2부 리그 우승팀이었던 릴OSC와 1부 리그의 스트라스부르를 격파하고 준결승에 진출하자 전 세계가 이들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이때 칼레는 4부 리그의 아마추어 팀이었다. 팀의 주장은 동네 슈퍼마켓 주인, 공격수는 대형 할인매장인 까르푸의 직원이었고 나머지 선수들 역시 각자 직업이 있던 파트타임 선수들이었다. 이들은 이름 있는 프로팀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말했지만 팬들을 위해 그리고 자신이 몸담고 있는 도시를 위해 미친 듯이 뛰었다. 그리고 그들은 연장전까지 가는 치열한 접전 끝에 까르푸 직원의 활약에 힘입어 당시 1부 리그 우승팀 지롱댕 드 보르도를 3-1로 격파하는 파란을 일으키며 결승으로 향했다.

프랑스 축구대회 82년 만에 아마추어 팀이 결승에 진출하자 프랑스를 넘어 전 세계가 열광했다. 칼레시청 앞 광장에는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때 보다 더 많은 인파가 모여 승리를 축하했고 프랑스 월드컵 우승 감독이었던 에메자케가 직접 칼레 선수단을 찾아와 격려하고 전술을 짜줬다고 한다. 당시 프랑스의 유력 일간지인 ‘르 몽드’는 칼레를 두고 ‘인간의 얼굴을 한 축구의 수호자(Un gardien de football américain)’라고 대서특필했다.

스타드 드 프랑스에서 열린 대망의 결승전. 상대는 1부 리그의 강호 FC낭트였다. 8만 명의 관중석은 만원이 되었고 프랑스 대통령까지 경기장을 방문해 칼레를 응원했다. 전반 34분 까르푸 직원인 제롬 듀티트르가 선제골을 터뜨리며 칼레의 우승을 이끄는 듯 했다. 하지만 심판의 오심이 만들어 낸 PK로 인해 동점골을 내주게 되었고 결국 경기 종료 직전 추가골을 허용하면서 1-2로 역전패 하고 말았다.

이날 칼레는 패배했지만 경기의 주인공이었다. 8만 명의 관중은 경기가 끝난 이후에도 “칼레”를 연호했고 대통령 역시 “결과에서 이긴 팀은 낭트이지만 정신에서 이긴 팀은 칼레”라고 말하며 칼레의 분전을 극찬했다. 칼레 선수들은 스스로를 결코 패배자라 생각하지 않았다. 이미 아마추어 팀으로서 이뤄내기 힘든 FA컵 준우승을 차지하며 프로팀과 어깨를 나란히 했기 때문이다. 비록 우승컵을 들어 올리지는 못했지만 그들은 엄청난 노력을 바탕으로 7만 5천 명에 불과한 칼레 시민들과 함께 약 650여년 만에 ‘칼레의 기적’을 다시 일궈냈다.

칼레 기적의 연장선

그로부터 약 23년 후인 2018년 3부 리그 소속의 레 에흐비에가 ‘칼레 기적’의 연장선의 주인공이 되었다. 사실 레 에흐비에는 토너먼트 대진운이 좋은 편에 속했다. 2부 리그의 AJ오세르와 RC랑스를 상대한 것을 제외하면 그렇게 강력한 상대와 마주하지 않았다. 하지만 상위, 하위 리그의 전력 차이가 꽤 큰 프랑스 리그의 특성상 3부 리그 11위에 불과한 팀의 FA컵 결승 진출은 모두가 주목할 만한 일이었다.

‘쿠프 드 프랑스’의 출범 이후 3부 리그 소속의 구단이 결승전까지 진출한 사례는 레 에흐비에를 포함해 단 4번에 불과하다. 1995/96 시즌의 님 올림피크, 2000/01 시즌의 아미앵SC, 2011/12 시즌의 쾨얼리 루앙이 역사적인 결승 진출을 이뤄냈다. 하지만 모두 준우승에 그쳤기에 레 에흐비에의 도전은 세계 축구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작성할 절호의 기회였다. 결승전 당일 1,674명의 레 에흐비에 팬들이 입장권을 구매했다. 레 에흐비에의 인구가 약 1만 6,000여 명에 불과하다는 것을 감안하면 꽤 많은 레 에흐비에 시민들이 '혹시 일어날지 모르는' 기적을 목격하기 위해 스타드 드 프랑스 경기장을 찾은 것이다.

하지만 이전 토너먼트에서 마주했던 오세르와 랑스에 비해 PSG는 너무도 강했다. 프랑스 최고 리그라는 리그1에서도 압도적인 경기력으로 우승을 차지했던 PSG는 시종일관 레 에흐비에를 압도했다. 레 에흐비에 선수들은 무려 30개에 가까운 슈팅을 온몸을 던지며 막아냈지만 내로라하는 공격진을 앞세운 PSG를 이길 수 없었다. 결국 지오반니 로 셀로와 에딘손 카바니에게 전, 후반 각각 한 골씩 허용하며 0-2로 패배하고 말았다. PSG의 1년 예산은 무려 6,900억 원에 달하는 반면 레 에흐비에는 25억 원에 불과하다. 돈이 곧 팀의 전력이 되는 현대 축구에서 PSG는 레 에흐비에에 골리앗을 넘어 신과 같은 상대였다.

비록 패배했지만 그들이 보여준 투지는 '칼레의 기적'의 연장선이었다. 23년 전의 칼레처럼 레 에흐비에 선수단 역시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했고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승자와 패자가 함께 우승컵을 들어올리는 장면은 경기를 지켜본 수많은 팬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줬다.

수 만명의 관중들에게 감동을 준 레 에흐비에 선수단 ⓒ 레 에흐비에 공식 페이스북칼레, 레 에흐비에를 비롯한 약팀들이 FA컵에서 보여준 정신력은 그 어떤 팀도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다. 현대 축구는 돈에 의해서 움직인다. 하지만 팬들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은 돈으로 움직일 수 없는 추상적인 존재다. 아쉽게 우승의 문턱에서 좌절했지만 이미 승패와 관계없이 모든 이에게 기적의 마음을 심어줬다.

공은 둥글다

프랑스 FA컵에서 보여준 약팀들의 반란은 각국 하부리그 팀들의 본보기가 되었다. 한국 축구로 초점을 옮겨와 보면 지난 2011년 K3리그 최초로 32강에 진출했고 2014년과 2017년에는 16강에 진출하는 돌풍을 일으켰다. 그리고 K리그2의 부천FC는 지난 2016년 K리그1의 전통 강호 포항 스틸러스와 전북 현대를 연달아 격파하고 FA컵 4강에 진출했다. 이들은 승패와 관계없이 최선을 다하는 마음으로 경기에 임했다. 그리고 ‘지더라도 멋지게 지자’는 정신력을 바탕으로 그라운드 위에 나선 이들은 ‘기적’의 주인공이 되었다.

지난 2014 브라질 월드컵 당시 코스타리카가 ‘공은 둥글다’라는 것을 증명해보였다. 코스타리카는 한국보다 한수 위의 전력을 보유한 팀이긴 하지만 코스타리카와 같은 조에 편성된 국가가 잉글랜드, 이탈리아, 우루과이였다. 모두 우승 후보국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뛰어난 실력을 보유했기에 많은 사람들은 코스타리카가 조 최하위로 탈락할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코스타리카는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우루과이, 이탈리아를 격파하고 잉글랜드와 비기며 조 1위로 16강에 진출했다. 8강에서 네덜란드에 아쉽게 승부차기에서 져 탈락했지만 그들은 월드컵판 ‘칼레의 기적’을 전 세계 팬들에게 보여주었다.

이제 2018 러시아 월드컵이 약 한 달 앞으로 다가왔다. 한국은 도전자의 입장이다. 같은 조의 스웨덴, 멕시코, 독일 모든 팀이 강호다. 신태용 감독은 “쉬운 상대는 결코 없다. 다만, ‘공은 둥글다’라는 말이 있는데 한 번 해볼 만하다. 쉽게 물러서지 않고 우리가 잘하는 것을 해보겠다”고 다짐했다. 최약체로 평가받는 한국에 16강 진출 가능성이 매우 희박한 조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축구계는 한국의 3전 전패 탈락을 예상하고 있다. 하지만 이전 월드컵에서 코스타리카가 보여줬듯 월드컵은 늘 이변이 존재하는 대회다.

“이 팀이 한국의 1승 제물이 될 것”이라는 설레발은 필요 없다. 설레발은 필패다. 우리가 잘하는 것만 생각하고 포기하지 않는 정신을 바탕으로 겁먹지 않고 투지 있는 경기를 펼친다면 어느 누구도 욕할 사람은 없다. 앞서 말했듯 기적은 약간의 운이 따라줘야 한다. 하지만 그 기적은 99%의 정신력과 단 1%에 불과한 실낱같은 간절한 희망에 의해 만들어진다. 지더라도 경기를 즐기고 멋지게 싸우자. 상대에 비해 절대적으로 약하다고 일찌감치 포기하면 그 경기는 이미 끝난 것과 다름없다. 한국대표팀판 ‘칼레의 기적’, 전혀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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