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 최익형 코치는 단일팀의 산증인이다. 그가 1991년 남북 단일팀에 관한 뒷이야기를 공개했다. ⓒ스포츠니어스

[스포츠니어스 | 광양=김현회 기자] 다가올 평창올림픽에서 남과 북이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을 구성하기로 합의했다. 찬반이 엇갈린다. 하지만 이미 정해진 일이고 이 상황에서는 단일팀이 어떻게 해야 더 올바른 길로 갈 것인지 논의해야 할 때다. 우리에게는 단일팀을 구성해 본 사례가 별로 없고 시간도 촉박하다. 역사적으로 1991년 세계탁구선수권대회와 세계청소년축구대회의 단일팀 두 번이 전부다. 당시 단일팀을 경험해 본 이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야 한다. 1991년 한반도기를 가슴에 달고 세계청소년축구대회 주전 골키퍼로 활약했던 아산무궁화 최익형 골키퍼 코치를 전지훈련지인 전남 광양에서 직접 만났다.

최근 들어 일본에서는 두 차례나 취재진을 직접 광양으로 파견해 최익형 코치를 인터뷰한 뒤 남북 단일팀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 요즘도 하루에도 몇 차례씩 최익형 코치에게 일본 언론에서 전화 인터뷰를 요청하고 있다. 일본은 남북 단일팀에 대해 뜨거운 관심을 보이고 있고 역사에 대해 알고 싶어한다. 하지만 국내 언론 중 남북 단일팀에 관한 주제로 최익형 코치와 만난 건 <스포츠니어스>가 유일했다. 우리는 찬반에만 관심이 있고 색깔론에만 열중할 뿐 정작 단일팀을 잘 운영하는 데는 별로 관심이 없다. 최익형 코치는 “일본 언론에도 이야기하지 않은 게 많은데 오늘 다 이야기하겠다”고 반겼다.

1991년 남북 단일팀에서 주전 골키퍼로 활약했던 당신을 만나게 돼 영광이다. 아직도 그때의 기억이 생생한가.

물론이다. 그때 한 팀에서 같이 뛰었던 북쪽 친구들이 잘 지내고 있나 모르겠다. 이름도 다 기억한다. 그때 북측 선수들은 조인철, 최철, 윤철, 리창하, 최영선, 정강성, 김정만, 김정선 등이었다. 우리는 나를 비롯해 박철, 강철, 노태경, 장현호, 이임생, 한연철, 서동원, 이태홍, 그리고 얼마 전에 하늘로 간 조진호가 뽑혔다. 북측 선수들도 모습도 생생하다. 다들 잘 살고 있는지 궁금하다. 이젠 꽤 나이가 들었을 텐데….

요즘 단일팀 문제가 민감하다. 당신에게 이 문제의 찬반을 묻는 게 아니라 그 시절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왔다.

요즘 아이스하키 단일팀 문제로 파장이 크다는 건 나도 잘 알고 있다. 관심 있는 뉴스라 쭉 지켜보고 있다. 그런데 우리 때는 그냥 까라면 까고 나가라면 나가고 그랬다. 팀에 남아 있으면 ‘아, 나는 그냥 같이 가나보다’ 했다. 평양 훈련까지 갔다가 엔트리에서 탈락해 서울로 내려온 형들도 있었다. 우리 때처럼 그냥 한 방향으로 쭉 흘러가는 게 아니라 요즘은 논란이 많더라.

일본 언론은 남북 단일팀에 대한 관심이 많다. 직접 최익형 코치를 취재해 소개하기도 했다.

그때 이야기를 듣고 싶다. 처음 북한에 갔을 때가 기억나는가.

1990년대에 평양 시내까지 갔던 건 굉장히 특별한 경험이었다. 월북하지 않고서는 거의 할 수 없는 경험 아닌가. 1991년 5월 남측 대표로 선발돼 서울에서 1차 평가전을 치렀다. 남과 북으로 나누지 않고 홍팀과 백팀으로 나눠 경기를 했다. 그리고 2차전은 평양에 가 치러야 했는데 그 전에 평양에 가는 선수는 물론 임원들까지 다 통일부에 가 교육을 받았다. 미그기를 타고 귀순했던 이웅평 대위라고 아는가. 그 분이 직접 통일부에 오셔서 우리에게 강연을 했다. 북한에 가면 조심해야 할 것들에 대해 미리 교육하셨다. 개인 행동을 하면 안 되고 숙소에서 멀리 떨어진 곳도 가지 말라고 했다. 이동할 일이 있으면 세 명씩 뭉쳐 다니라고 했고 특히나 말조심을 하라고 신신당부했다. 한 시간 넘게 교육을 받았다.

그런 교육이 정말 평양에 가서 도움이 됐나.

이웅평 대위가 여러 이야기를 한 뒤 “평양 호텔 방에 들어가면 침대 위 베개 하나를 침대 밑으로 숨겨보라고 하더라. ‘이거 잠을 어떻게 자라고 베개도 안 챙겨준 거야’라고 투덜거린 뒤 나가서 한 30분 있다가 들어와 보라고 했다. 평양 고려호텔이 우리 숙소였는데 2인 1실이었다. 나랑 박철이 한 방을 썼던 걸로 기억한다. 방에 들어가니 침대가 두 개 있고 한 침대에 베개가 두 개씩 있었다. 그래서 이웅평 대위가 말한 것처럼 베개를 하나씩 숨긴 뒤 투덜거리고는 밖에 나가서 일을 보고 방에 돌아왔다. 그랬는데 소름이 싹 돋는 장면을 목격했다. 침대마다 베개가 네 개씩 올려져 있는 거다. ‘설마’했는데 등에서 식은 땀이 날 정도였다. 다 도청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 다음부터는 철저히 말을 조심하게 됐다.

선수단이 육로를 이용해 서울에서 평양까지 간 건 정말 의미 있는 일이었다.

서울에서 선발전 1차전을 치르고 평양에서 2차전을 치른 다음 탈락한 선수는 기차를 타고 평양을 떠나 개성을 거쳐 서울로 돌아와야 했다. 무척 잔인한 일이었다. 그리고 살아남으면 평양에 남아 강화훈련을 한 뒤 서울에서 다시 훈련을 하고 결단식을 하는 일정이었다. 이후 포르투갈에서 대회를 마치면 해단식을 평양에서 하기로 했다. 처음 평양에 갈 때를 잊을 수 없다. 판문점에서 버스를 타고 개성까지 가야 해 판문점 북측 지역으로 넘어가 대기하고 있었다. 김일성 사진이 걸려 있고 지금껏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분위기를 느꼈다. 가구도 좀 칙칙했다. 앉아서 ‘내가 다시 남쪽으로 넘어올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고 겁이 났다. 그때가 대학교 1학년 때인데 뭘 알겠나. 옆에 형들한테도 “우리 정말 괜찮은 거야?” 막 이런 이야기를 했다.

정말 특별했던 경험이었을 것 같다.

판문점을 통해 개성까지 버스를 타고 개성에서부터 평양까지는 다시 기차를 타고 들어갔다. 기차가 정말 느렸는데도 개성에서 평양까지는 40분밖에 안 걸렸다. 가는 동안 도로에 차도 몇 대 없었다. 김두한이 나오는 드라마나 영화 속 시대의 느낌이랄까. 논과 밭 밖에 없었다. 또 기억에 남는 건 개성까지 함께한 여성 안내원이 평양에 가니 먼저 도착해 기다리고 있다가 우리를 또 안내하는 거다. 기차가 천천히 달리는 동안 따로 차를 타고 먼저 빨리 도착해 우리를 기다리고 있더라. 길도 안 좋은데 어떻게 그렇게 빨리 도착했는지 잘 모르겠다. 평양에 도착하니 북한 사투리로 여기저기서 “반갑습네다”라는 인사가 전해졌다. ‘내가 정말 북한에 왔구나’ 싶었다. 호텔에 도착해 텔레비전을 틀어보니 한 여자가 나와 뉴스를 전하고 있었다. 그런데 요새도 뉴스에서 북한 소식을 전할 때 그 아줌마가 나오더라. 오래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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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측 선수들과 만나서는 금방 친해질 수 있었나. 같은 또래라 금방 친해졌을 것 같다.

훈련할 때나 식사 시간을 제외하면 그 친구들하고 접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우리가 북측 선수들 방을 들어가거나 북측 선수들이 우리 방에 들어오는 건 금지돼 있었다. 한 번은 우리측 선수가 밥을 먹으러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다가 북측 선수를 만난 적이 있었다. 북측 선수 이름도 기억난다. 최영선이었다. 그런데 이 친구가 사상이 제대로 박힌 애였다. 우리측 친구가 말 한 번 걸어보려고 “야, 근데 김일성 수령이…”라고 했다가 바로 최영선한테 멱살을 잡혔다. 난리가 났었다. 우리 쪽에서는 그래도 좀 친해보려고 했던 건데 김일성 이야기가 나오자 얘가 아주 확 돌아버리더라. 그때 우리끼리 큰 싸움이 날 뻔했다.

단일팀을 화합과 배려만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던 입장에서는 놀라운 이야기다. 그런 충돌과 갈등이 있는지는 몰랐다.

하지만 걔네들 중에서도 어린 나이에 실력이 출중해 청소년 대표팀에 속해 있으면서 성인 대표팀에도 차출되는 친구가 몇 명 있었다. 그런 친구들은 사상이 굉장히 깨어 있었고 개방적인 모습도 있었다. 아무래도 대표팀 생활을 하며 해외도 경험해 봐 그런 것 같았다. 하지만 막 청소년 대표팀에 처음 들어온 3~4명은 그렇지 않았다. 당에서 심어놓은 선수도 있었다. 북측 골키퍼는 원래 더 잘하는 애가 있었는데 그 친구를 제치고 다른 선수가 뽑혔다. 북한 고위급 간부 아들이라고 했다. 우리는 쉬는 시간이면 호텔 수영장도 이용하고 그랬는데 북측 친구들은 딱 방으로 들어가면 외출 금지다. 밥 먹을 때 잠깐 보고 미팅할 때나 훈련할 때 빼면 접촉할 일이 많지 않았다.

북측 선수단이 남측으로 내려와 훈련을 했던 것도 대단히 의미 있는 일이었다.

평양에 있을 때 식사를 한 뒤 소화시킬 겸 호텔 앞으로 산책을 나가면 50m 뒤에서 누군가 항상 우리를 쫓아왔다. 공식 행사가 아니면 늘 우리를 따라다니는 이들이 있었다. 하지만 북측만 그런 건 아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평양에서 훈련한 뒤 서울로 와 워커힐 호텔에서 결단식을 했다. 워커힐 호텔 로비가 엄청 큰데 도착하니 무슨 배지를 단 사람들이 바글바글하게 있는 거다. 놀러온 사람처럼 앉아 있는데 다 배지를 달고 있었다. 알고 보니 다 안기부 사람들이었다. 밥을 먹은 뒤 조금 일찍 나와 다른 선수들과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이중 한 사람이 다가와 나에게 말을 걸었다. “혹시 북측 선수들을 구별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느냐”고 했다. 비슷한 또래가 다 똑같은 옷을 입고 있으니 안기부 요원들도 남측과 북측 사람을 구분할 수 없었던 것이다.

슬픈 일이다. 같은 옷을 입으면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같은 사람들인데 남과 북으로 갈려 있다는 건 대단히 안타까운 일인 것 같다.

그때 아디다스에서 후원을 해줬다. 공식적으로는 라피도가 단일팀을 후원했는데 그전부터 아디다스는 축구화와 운동화를 선수들에게 10켤레씩 지급했다. 당시 제일 좋았던 운동화를 받아 다들 신이 나 있었다. 북측 친구들도 남측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똑같이 후원을 받았다. 남측 친구들은 좋은 운동화를 자랑하고 싶어서 막 티내고 신고 다녔고 결단식 때도 그 아디다스 운동화를 신었다. 그런데 북측 애들은 이 신발을 안 신고 라피도의 인조가죽 운동화만 고집하더라. 아디다스 운동화를 아껴 신으려고 했던 거 같은데 물어보지 않아서 정확히는 이유를 잘 모르겠다. 그래서 안기부 직원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디다스 신은 애들은 남측 애들이고 아닌 애들은 북측 애들입니다.”

그런데 양 측 선수들의 사적인 대화까지도 막을 정도면 조직력을 다지는 데도 문제가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운동장 안에서 만큼은 하나가 되려고 했다. 어차피 축구라는 건 다 똑같다. 우리 전술이나 걔네 전술이나 비슷하다.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코치님들이 분위기를 잘 풀어주시려고 노력했다. 남측의 최만희 코치와 북측의 문기남 코치가 그 역할을 했다. 운동장에 들어가면 남측이건 북측이건 정부 요원들이 터치할 수 없는 일 아닌가. 몸 풀 때부터 코치님들이 선수들에게 웃음을 주려고 많이 노력하셨다. 2인 1조로 패스 훈련을 할 때도 꼭 남북 선수들이 한 조가 되도록 했다. 최만희 선생님이 특히 소통을 위해 애쓰셨다.

일본 언론은 남북 단일팀에 대한 관심이 많다. 직접 최익형 코치를 취재해 소개하기도 했다.

그리고 단일팀은 1991년 세계청소년축구대회에 나가 아르헨티나를 1-0으로 잡고 8강에 올랐다. 당시 분위기는 어땠나.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1991년 5월 초에 처음 북측 친구들이 서울로 내려와 만났고 대회를 치른 뒤 6월 말에 해단식을 치렀다. 두 달 정도 함께 지냈다. 그런데 아쉬운 건 이 두 달 중 한 달 넘는 기간 동안 되게 서먹서먹했다는 점이다. 실질적으로 분위기가 좋아진 건 아르헨티나를 이긴 다음부터였다. 아르헨티나를 1-0으로 이기니 남이고 북이고 할 것 없이 서로 부둥켜 안고 좋아했다. 그때도 아리랑을 불렀다. 어린 나이에 울컥하더라. 그런데 아마 그 경기를 이기지 못해 분위기를 타지 못했으면 그대로 끝났을 것이다. 두 달의 시간이 있었는데 이 귀중한 시간 중 상당 시간을 서먹하게 보냈다는 게 참 아쉽다. 더 일찍 가까워졌어야 한다.

결단식은 서울에서 하고 해단식은 평양에서 했던 것도 의미가 있었다. 포르투갈에서 평양으로 비행기를 타고 들어간 것도 색다른 경험이었을 것 같다.

잊을 수 없다. 고려항공을 타고 갔다. 그런데 인상적이었던 건 보통 비행기에는 위에 짐을 싣고 덮개를 덮는데 고려항공 비행기는 그냥 일반 버스에 선반이 있는 정도였다. 되게 놀랐었다. 그리고 날개에 프로펠러가 달린 비행기를 10시간 넘게 타 무섭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했다. “이거 가긴 가는 거냐”고 웃었던 기억이 난다. 모스크바를 한 번 경유했다가 평양으로 간 걸로 기억한다. 북측 선수였던 (김)정만이가 한 승무원을 보더니 “동무, 내 여자친구야”라고 하더라. 아무리 나이를 계산해 봐도 애인은 아닌 거 같았는데 그 승무원도 “제가 여자친구 맞습네다”라고 했다. 그래도 정만이는 성인 대표까지 해 외국 나갈 일이 꽤 많으니 자주 마주치는 승무원과 친해진 것 같았다.

8강 진출의 위업을 이루고 평양에 갔다가 그곳에서 해단식을 했다. 대회도 끝났으니 긴장도 풀어질 법 했을 텐데.

평양 호텔 로비에서 판매하는 뱀술이나 산삼주 등을 대회 전부터 눈여겨 보고 있었다. 우리는 흔히 볼 수 없는 술이라 사서 부모님께 선물하고 나도 한잔씩 해보고 싶었다. 지금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북한에는 북한 주민들이 쓰는 돈이 있고 달러나 이런 걸 바꾸면 ‘외화와 바꾼 돈’이라고 써 있는 돈이 따로 있었다. 이게 자기네들이 쓰는 돈보다 값어치가 더 높았다. 이 돈을 들고 다니면 잘 나가는 거다. 대회에 나가기 전에 호텔 로비에서 파는 술 가격을 보니 북한 돈으로 20원씩 하더라. 우리 돈으로 치면 4~5천 원 정도였다. 그런데 서울에서 결단식을 할 때 이 술을 못 사가지고 내려왔다. 대회에 나갈 어린 선수들이 술을 사들고 내려오는 것도 보기 안 좋았고 부모님을 만나서 술만 전해주는 것도 이상했다. 그래서 평양에서 해단식을 할 땐 꼭 이 술을 사 가지고 내려갈 생각이었다.

그런 귀한 술이 우리 돈으로 4~5천 원이면 정말 싼 것 아닌가.

그런데 대회가 끝나고 평양에 가니 그 술이 다 북한 돈으로 100원이 돼 있는 것이었다. 아니 한 달도 안 지났는데 어떻게 20원 짜리가 100원이 될 수 있나. 평양 호텔 직원한테 물었더니 넉살 맞게 웃으면서 “기래도 있는 사람이 사가야지” 하더라. 그래서 한 병에 100원씩 주고 샀다. 어떤 친구는 라면 박스로 한 박스를 다 술만 사기도 했다. 그런데 그중 반은 다 깨졌다. 평양에서 개성까지 기차 타고 내려와 판문점까지 거치다보니 술병이 온전할 리가 없었다.

평양도 수요에 따라 물가가 조정되는 자본주의 사회인 것 같다. 그래도 같은 유니폼을 입고 명승부를 연출하며 8강에 오른 북측 친구들과 작별할 때는 슬펐을 것 같다.

평양에서 결단식이 끝나고 서울로 내려오려는데 북측 선수와 임원들이 판문점까지 배웅을 나왔다. 같이 기차를 타고 내려오면서 사진도 찍고 했다. 두 달 동안 그래도 정이 많이 들었었다. 감시하는 이들이 있으면 “동무. 동무” 그랬지만 보는 눈이 없을 때는 슬쩍 이름도 부를 정도로 가까워지던 때 다시 헤어지게 됐다. 당시 일주일에 수당이 200달러씩 나왔고 아르헨티나를 이겼을 때는 선수들이 다 1,000달러씩 받았다. 이건 남과 북 선수 모두 공평했지만 북측 친구들에게 제대로 전달이 됐는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사상이 좀 풀어진 한 북측 친구가 판문점에서 헤어질 때 나한테 슬쩍 묻더라. “익형이 딸라 좀 있니?” 달러가 더 필요했던 모양이다.

그 친구도 그 부탁을 할 때까지는 고민이 많았을 것이다. 자존심이 걸린 일이기도 했고 걸리면 큰 문제가 되기도 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냥 내 지갑에서 돈을 꺼내 줄 수는 없었다. 그러면 문제가 될 게 뻔했고 아마 그 친구들도 그 돈을 빼앗길 것이었다. 그래서 기념 사진을 찍으면서 손을 잡는 척하며 내가 가진 달러를 건네줬다. 그리고 또 남측 선수들에게 “달러 있으면 좀 줘보라”고 해 달러를 더 받았다. 이 북측 친구에게 “사진 한 장 더 찍자”면서 팔짱을 끼며 달러를 또 몰래 전해줬다. 돈을 부탁하는 상황이 슬펐고 그걸 또 몰래 전해줘야 한다는 상황에 마음이 울컥했다. 헤어지는데 마음이 참 안 좋았다. 당시 대회가 끝난 뒤 삼성전자에서 모든 임원진과 선수들에게 ‘비디오비전’이라는 걸 선물로 주기도 했다. 텔레비전과 비디오 플레이어가 붙어 있는 기기였는데 당시에는 대단히 고가였다. 나는 그걸 얼마 전까지 집에서 썼다. 비디오 플레이어는 고장 났어도 텔레비전은 잘 나오니 계속 봤다. 그 낡은 비디오비전을 볼 때마다 그때 생각도 나고 친구들 생각도 나더라.

그 이후로 다시 북측 친구들을 만난 적은 없나.

그때 그 친구들에게 “우리 다시 만날 수 있을까”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그 이후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나도 성인 대표팀에는 못 가고 상비군만 하다 끝났고 그때 북측 친구들도 성인 대표로 승승장구하거나 지도자로 지금까지 외부 세계에 알려진 적이 없다. 2005년에 한국에서 동아시안컵을 개최했는데 그때 내가 협회 전임 지도자를 하고 있을 때였다. 이제는 그 친구들도 계속 축구계에 있으면 지도자가 임원이 됐을 나이다. 북한팀 명단을 받고 임원과 지도자 명단을 쭉 훑어 봤는데 그때 친구들은 안 보이더라. 그 당시 그 친구들은 청소년 대표팀에 있으면서도 성인 대표팀도 왔다 갔다해서 나름 더 잘 풀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걔네 또래 애들은 그 이후로 하나도 안 보인다.

당신도 이제 흰 수염이 얼굴을 덮을 정도로 세월이 흘렀다. 그 친구들도 이젠 꽤 늙었을 것이다.

북측 문기남 코치가 2004년 귀순해 이야기를 들어보니 당시 단일팀 감독이었던 윤세욱 감독님은 돌아가셨다고 하더라. 나머지 선수들에 대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2005년 동아시안컵 경기장에서 만난 북한 여자축구 대표팀 김광민 감독에게 그때 그 친구들 근황을 물으니 “다들 잘 지내고 있다우”라면서 그 정도로 답변을 대신 하시더라. 잘들 지내고 있는지 모르겠다. 내가 북측 친구들한테 받을 돈도 좀 있는데 연락이 됐으면 좋겠다. 환율이 그 당시에도 1달러에 1,500원 정도였다. 그 사이 이자도 많이 붙었을 거다. 다시 만났으면 좋겠다.

일본 언론은 남북 단일팀에 대한 관심이 많다. 직접 최익형 코치를 취재해 소개하기도 했다.

역사상 단 두 번 뿐이었던 남북 단일팀을 경험해 본 주인공으로서 이번 평창올림픽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길 기원하나.

단일팀을 겪어본 나에게도 평창올림픽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은 굉장히 관심 있는 뉴스다. 남측 선수 중 엔트리에서 빠지게 된 선수도 있다고 들었다. 그 친구들도 엄청난 노력을 해서 올림픽 출전 자격을 갖춰놓고 훈련하는 중이었을 텐데 얼마나 실망이 클까. 그런 면에서는 안타까운 일이다. 그래도 결정이 됐으니 나아갈 방향을 고민해 보자면 이 촉박한 시간을 어떻게 써야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짧은 시간에 조직력을 극대화하기란 쉽지 않다. 1991년에 우리도 조직력을 더 갖출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해 아쉬웠던 기억이 있다. 결국 이걸 해결하려면 선수들끼리 많은 대화를 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 아이스하키 단일팀이 훈련할 수 있는 시간이 며칠 되지 않는 걸로 알고 있다. 형식적인 단일팀이 되지 않으려면 선수들끼리 소통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 시점에서 가장 좋은 조언인 것 같다. 찬반 논쟁이 뜨겁고 나 역시 이번 단일팀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쪽이지만 결국은 단일팀이 결성됐으니 발전적인 이야기가 나와야 할 시점이다.

우리 때는 남과 북 축구 실력이 비슷했다. 누가 명단에 들어와도 괜찮았다. 아마 단일팀을 만들면서 엔트리에서 탈락해야 했던 형들이 들어왔어도 경기력은 비슷했을 거다. 하지만 중요한 건 단일팀을 만들기 위해서는 개인 기량을 떠나 팀이 하나가 돼야 한다는 점이다. 경기장 밖에서는 대화와 소통을 다 차단해 놓고 경기장 안에서만 하나가 되라고 해선 안 된다. 자칫 잘못하면 그러다 경기장에서 서로 공도 안 주는 사태가 벌어진다.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겠지만 남측 선수와 북측 선수를 한 방에 배정해서라도 선수들끼리 이해하고 소통하려 해야 한다. 더군다나 여자 아이스하키 대표팀은 외국인 감독이 지휘하는 걸로 알고 있다. 통역을 거쳐 대화하는 것과 말이 통하는 선수들끼리 소통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단일팀의 든든한 골키퍼로서 해준 조언이 여자 아이스하키 대표팀에 도움이 되길 바란다. 고맙다.

우리는 세계에서 하나뿐인 분단국가다. 이 문제가 잘 풀렸으면 한다. 그리고 1991년 6월 29일 판문점에서 달러 빌려간 북측 친구를 언젠가는 한 번 다시 만나고 싶다. 돈은 됐고 그 동안 살아온 이야기라도 밤새 나누고 싶다.

남북 단일팀은 이제 찬성과 반대의 문제를 넘어섰다. 단일팀이 결성돼 올림픽에 나가기 위해서는 남북 선수들에게 같은 유니폼을 입혀 놓는다고 단순하게 끝날 문제가 아니다. 남과 북 선수들이 하나가 돼 같은 마음으로 뛸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한반도기와 아리랑이 중요한 게 아니라 선수들이 진짜 한 팀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훈련 며칠 하고 정치적으로만 이용되는 겉만 번지르르한 단일팀이 되어서는 안 된다. 단일팀을 경험한 최익형 코치가 전하는 메시지를 새길 필요가 있다.

지금의 분위기는 아쉽다. 일본에서는 한국에 취재진을 파견해 남북 단일팀 주인공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에피소드까지 세세하게 보도했다. 최익형 코치는 일본에서 취재한 영상을 보여줬다. “일본어로 더빙을 해서 내가 한 무슨 말이 방송에 나가는지도 잘 모르겠다”고 웃은 최익형 코치는 “우리보다 일본에서 더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했다. 요새도 일본 여러 매체에서 남북 단일팀 취재를 위해 최익형 코치에게 연락을 해오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찬성과 반대만 놓고 논쟁 중이다. 이럴 때일수록 최익형 코치처럼 단일팀을 경험해 본 이들의 진솔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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