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야구 대표팀에 뽑혀 베이브 루스와 기념 촬영을 한 이영민

[스포츠니어스 | 김현회 기자] 축구팬들도 이영민 타격상이라고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나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이영민이라는 훌륭한 야구선수의 뜻을 기려 만든 상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이영민 선생이 뛰어난 야구 실력은 물론 초창기 한국 야구 발전을 위해서도 많은 일을 한 훌륭한 야구인이라는 사실은 나도 어렴풋이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이영민 선생이 축구선수로도 활약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그냥 축구선수가 아니라 축구계에도 큰 족적을 남겼지만 우리는 이 사실을 크게 주목하지 않는다. 오늘은 야구선수로 더 잘 알려져 있지만 한 번쯤은 재조명 해 볼 필요가 있는 축구인 이영민에 대해 소개하려고 한다.

FA컵 우승 트로피 들어 올린 이영민

이영민은 1905년 경북 칠곡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운동 신경으로 주목받았던 그는 대구 계성학교에서 축구와 야구를 동시에 접했다. 지금이야 한 종목에 집중하는 게 정상적인 일이지만 당시에는 스포츠에 대한 체계적인 육성 시스템이 부족한 터라 가능한 일이었다. 1923년 계성학교를 졸업한 뒤 배재고보로 진학한 이영민은 여기에서도 축구와 야구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축구와 야구뿐 아니었다. 운동 신경이 대단했던 이영민은 육상에서도 발군의 실력을 자랑했다. 육상 대회가 열리는 날이면 축구와 야구를 잠시 뒤로하고 대회에 나서 당당히 1위를 차지하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빨리 영민이 불러와.” 1923년 7월이었다. 당시 배재고보 야구선수로 일본 동경 유학생 팀과의 야구경기에 나선 이영민은 경기가 끝나자마자 부랴부랴 옷을 갈아입고 축구화를 신었다. 곧바로 축구경기에 나서야 했기 때문이다. 이영민은 이날 열린 배재고보와 동경 유학생 간의 한일전 축구에서 최전방 공격수로 맹활약했다. 이듬해에도 이영민은 바쁜 나날을 보냈다. 배재고보의 조선 순회경기에 축구부와 야구부 소속으로 나섰기 때문이다. FA컵의 효시인 전조선축구대회에 참가해 결승전에서 평양고보를 3-0으로 격파하는 데 일등공신이 된 것도 이영민이었다. 전조선축구대회가 치러진지 한 달 후 나선 전조선육상경기대회 400m에서도 1분 3초 1의 기록으로 2위에 올랐다.

이영민은 1928년 경성운동장 야구장에서 열린 경성의전과의 경기에서 개장 4년 만에 최초 홈런의 주인공이 됐고 같은 해 열린 전조선육상경기대회 200m와 400m 우승은 물론 400m와 800m, 1600m 계주에서도 우승을 차지해 무려 5관왕의 위업을 달성하기도 했다. 특히 당시 400m에서 기록한 54초 6은 당시 육상계를 깜짝 놀라게 한 대회 신기록이었다. 육상에서 두각을 나타낸 이 해에도 연희전문과 숭실전문의 축구 정기전에서 부동의 주전 공격수로 맹활약했고 연희전문의 일본, 중국 원정 친선 경기에서 나서기도 했다. 이영민은 ‘오빠부대’를 몰고 다니는 당대 최고의 인기스타였다. 연희전문을 졸업한 1929년 실업 야구단 식산은행에 입단했지만 그럼에도 축구와의 각별한 인연은 계속 됐다.

경성축구단과 조선축구협회의 핵심

최고의 빅매치였던 경평축구에서도 그의 존재는 빛났다. 1929년 이영민이 불참한 제1회 대회에서 평양팀에 1무 2패로 패한 경성팀은 이듬해 열린 2회 대회를 앞두고 잠시 야구에 집중하던 이영민 카드를 꺼내 들었다. 1930년 11월 경성운동장에서 열린 제2회 대회는 이영민을 앞세운 경성팀의 화끈한 설욕전이었다. 1차전에서 승부에 쐐기를 박는 이영민의 골에 힘입어 3-2로 승리한 경성팀은 2차전에서 3-5로 패했지만 3차전에서 5-1 대승을 거두면서 종합전적 2승 1패로 지난 대회 패배를 설욕했다. 이영민은 3차전에서도 골을 기록하면서 최고의 스트라이커로 다시 화려하게 축구계로 돌아왔다. 같은 해 중학교 축구대회 심판을 맡기도 하는 등 축구를 향한 그의 애정은 여전했다.

지금도 위대한 역사로 기억되는 경성축구단 역시 이영민을 빼놓고 논할 수는 없다. 1933년 경성의 라이벌 지역인 평양에서 무오축구단을 계승한 평양축구단이 공식적으로 출범하자 경성 지역도 이에 질세라 축구단 창단에 발 벗고 나섰다. 여운형 이사장을 중심으로 김용식과 이혜봉, 채금석 등 당대 최고의 선수들이 경성축구단에 합류했다. 물론 이영민 역시 이들과 함께 나란히 경성축구단 유니폼을 입었다. 1930년 2회 대회를 끝으로 양 지역의 과도한 열기 때문에 중단됐던 경평축구대회가 다시 열렸고 이영민은 주전 공격수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경성축구단은 1933년 창단하자마자 전조선축구대회 준우승을 기록하면서 강팀으로 자리 잡았다. 만주와 사할린 등으로 원정경기를 떠날 때면 그곳의 조선인들로부터 크게 환영을 받는 등 많은 사랑을 받았다. 물론 늘 이영민도 경성축구단과 함께였다.

그리고 1년 뒤 경성축구단 창단의 주도적 인물이었던 김원겸이 구단 운영에서 손을 떼고 조선축구단에 집중하자 이영민이 경성축구단의 실질적인 중심으로 자리 잡게 됐다. 경성축구단은 단순한 서울 지역 축구팀이 아니었다. 실질적인 남한 축구 대표팀의 뿌리라고 보는 게 맞다. 이러한 위대한 팀의 창단과 함께 한 인물이 바로 이영민이었다는 사실은 참 흥미롭다. 또한 이영민은 조선축구협회 창립에도 큰 역할을 했다. 이전까지 조선체육회와 조선축구심판협회가 축구 경기 개최를 맡았지만 이영민과 정문기, 권희창 등 축구인들이 조선축구협회 설립의 필요성을 역설했고 마침내 1933년 9월 조선축구협회가 출범하게 됐다. 이영민은 갓 출범한 조선축구협회에서 이사장을 맡았다. 야구인으로만 알려진 이영민이 조선축구협회 창립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일왕배 우승과 런던 올림픽 8강 이끈 이영민 감독

또한 이영민이 이끈 경성축구단은 1935년 조선 대표팀 자격으로 일왕배에 나가 덜컥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한 차례의 우승과 준우승을 경험한 나고야를 준결승전에서 6-0으로 대파한 경성축구단은 결승전에서도 도쿄 문리대학에 6-1 대승을 거두면서 우승을 차지했다. 90년 역사의 일왕배에서 일본팀이 아닌 팀이 우승한 건 경성축구단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놀라운 건 당시 이영민이 주장 겸 감독으로 경기에 나섰다는 점이었다. 그는 도쿄 문리대학을 대파하고 우승을 차지한 뒤 이렇게 말했다. “십년 전 만났던 일본 팀과는 달리 지금의 일본팀은 기술이 많이 발전했다. 그래서 많은 고민을 한 끝에 역습 형태의 공격을 지시했고 선수들이 이를 잘 따라줬다. 고향에 선물을 가져가게 돼 기쁘다.” 그와 경성축구단이 거둔 승리는 단순히 실력에서 앞선 게 아니라 전술의 승리였다.

1948년 런던올림픽에 나서게 된 한국은 박정휘 감독이 이끌고 있었다. 하지만 선수 선발 과정에서 문제가 있었다는 논란이 있었고 결국 선수단이 먼저 런던으로 향했지만 조선축구협회는 선수 선발 과정의 잘못을 인정하면서 박정휘 감독을 비롯한 임원진을 모두 경질하는 초강수를 두게 됐다. 당연히 대표팀은 흔들릴 수밖에 없었고 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이영민을 감독으로 선임하는 결정을 내렸다. 이영민은 당시 조선야구협회 사찰단 자격으로 런던에 가 있는 상황이었다. 갑작스럽게 축구 대표팀을 맡은 이영민은 당황하지 않고 전력 강화에 착수했고 멕시코와의 첫 경기에서 5-3으로 승리를 따내면서 8강 진출이라는 위업을 달성했다. 축구의 변방이 올림픽 8강에 진출하자 모두들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이영민 감독은 한국 축구 역사상 올림픽 첫 승의 주인공이 됐다.

당시 올림픽에는 연령별 제한이 없어 6개월 동안 이 팀을 맡았던 이영민 감독은 한국 성인 축구 대표팀의 역대 사령탑 중 한 명으로 평가하는 게 옳다. 최강희와 조광래, 허정무 감독 등 역대 한국 축구 대표팀 감독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1948년에는 이영민 감독이 한국 축구 대표팀 사령탑으로 자리하고 있다. 이유형과 김용식, 홍덕영 등 한국 축구의 전설들이 선수로 나섰던 이 대회를 지휘한 인물이 이영민 감독이라는 사실은 참 흥미롭고도 놀랍다. 이렇게 한국 축구 역사에 큰 획을 그었던 이영민은 이후 안정적이지 못한 결혼 생활로 방황하다가 1954년 아들의 친구가 쏜 총에 맞아 결국 안타까운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화려했던 선수 생활과 지도자 생활에 비해 인생의 마지막은 무척 쓸쓸했다.

그의 축구 인생도 재조명하자

이영민은 야구인으로서도 대단한 업적을 남겼다. 한국인 1호 홈런의 주인공이자 일본 야구 대표 선수로 선발돼 베이브 루스와 대결을 펼치기도 했고 조선야구협회 초대 이사장을 맡기도 했다. 이영민 타격상이 재정돼 야구계에서는 여전히 존경을 받고 있다. 하지만 야구인이 아닌 축구인 이영민에 대한 조명은 지금까지 단 한 차례도 이뤄진 적이 없었다. 그와 함께 한 시대를 풍미했던 김용식, 채금석, 이유형 등이 훗날 위대한 축구인으로 평가받는 동안 이영민은 그저 잠깐 축구계를 거쳐간 야구인 정도로 기억되는 게 전부다. 숱한 자료를 뒤져도 그가 야구를 위해 헌신한 기록만 쏟아져 나올 뿐 축구 발전을 위해 세운 공은 그저 “축구와 야구를 하다가 이후 야구에 전념했다”라는 단 한 줄로 설명되는 게 전부다.

하지만 그는 경성축구단 창단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조선 팀을 이끌고 일왕배 우승을 거뒀으며 한국 축구 역사상 올림픽 첫 승과 8강 진출을 일궈낸 위대한 축구인이라는 사실도 한 번쯤은 조명할 필요가 있다. 조선축구협회를 세우는 데도 큰 역할을 했다는 점 또한 마찬가지다. 이영민은 훌륭한 야구인이자 훌륭한 축구인이었다. 그가 한국 축구를 위해 얼마나 많은 공을 세웠는지는 이제부터 우리 축구인들의 의지에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