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엠블럼을 단지 벌써 15년이 됐다.

[스포츠니어스 | 김현회 기자] “가슴에 태극마크를 단다.” 언제 들어도 의미심장하고 가슴 뛰는 말이다. 우리는 누군가 국가대표에 발탁되면 “가슴에 태극마크를 단다”고 했다. 하지만 적어도 축구에서 만큼은 이 표현이 더 이상 맞지 않는다. 여전히 상투적인 표현으로 쓰고는 있지만 한국 축구 대표팀 유니폼에는 태극마크가 없다. 그 자리를 협회 호랑이 엠블럼이 대신하고 있다. 벌써 이 호랑이 엠블럼을 단지도 15년이 흘렀다. 지금은 당연한 것처럼 보이는 대표팀 유니폼의 호랑이 엠블럼이 등장과 지금 이 엠블럼이 주는 의미까지 칼럼으로 담아봤다.

54년 동안 달았던 태극마크를 대신하다

한국은 1948년부터 가슴에 태극기를 달고 뛰었다. 한국은 1954년 스위스월드컵 당시에도 가슴에 큼지막한 태극기를 달고 경기에 나섰다. 이 전통은 2001년까지 이어졌다. 물론 그렇다고 협회 엠블럼이 없었던 건 아니다. 1970년대부터 1998년까지 사용된 엠블럼도 있고 협회가 1998년 5월 15일 새로 발표한 엠블럼도 있었다. 협회는 1998년 “스포츠 마케팅을 적극 추진하기 위해 공식 엠블럼을 제작해 발표한다”고 했지만 이때 발표한 엠블럼은 별로 특색이 없었다. 협회는 대행사인 금강기획을 통해 엠블럼을 제작하면서 “고유 색상인 청색과 적색위에 축구공을 올려놓아 동방의 떠오르는 축구강국의 이미지를 형상화하면서 남과 북이 하나 되는 국민의 염원을 담았다”고 했지만 개성이 없었다.

당시 엠블럼은 한국의 특색을 반영하지도 못했다. 그저 평범한 축구공에 태극 무늬를 형상화한 게 전부였기 때문이다. 물론 당시 대표팀 유니폼에는 태극기가 붙어 있어 이 엠블럼이 쓰일 일도 별로 없었다. 축구를 애국심으로 대하는 한국에서 태극기를 대신해 개성 없는 협회 엠블럼을 다는 건 허용되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점점 흐르고 추세가 변했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자국 국기 대신 협회 엠블럼을 유니폼에 달고 뛰는 추세가 되면서 “우리도 대표팀 유니폼에 엠블럼을 부착해야 한다”는 의견이 모아지기 시작했다. 협회는 2000년 9월 새로운 엠블럼 공모전을 열었다. 대표팀 유니폼에 엠블럼을 달고 뛰는 게 로망이 있던 팬들은 손수 이 공모전에 참가하며 흥분했다. 태극마크를 떼어내고 협회 엠블럼을 다는 게 그래도 선진국 축구에 조금은 더 다가간다는 ‘느낌적인 느낌(?)’도 없진 않았다.

우리 문화의 특징을 그대로 살린 엠블럼이 쏟아져 나왔다. 호랑이와 용 등이 엠블럼을 수놓았다. 협회에서는 이 가운데 당선작을 선정했다. 당시 3등 당선작 가운데는 대전시티즌과 서울유나이티드, 경남FC 엠블럼 등을 디자인한 장부다 씨의 작품도 있었다. 1등 당선작도 선정됐다. 하지만 1등 당선작에 대한 평가는 좋지 않았다. 고구려 벽화를 인용한 작품이라는 원작자의 설명이 있었지만 이 엠블럼이 웨일즈 국가와 너무 닮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협회가 야심차게 추진한 엠블럼 공모전에서 입선된 작품은 실제로 쓰이기 못했다. 협회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일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2002년 한일월드컵 전까지는 공식 엠블럼을 발표해 유니폼에 부착할 예정이어서 시간이 빠듯했다.

1998년부터 3년간 사용됐던 협회 엠블럼. 하지만 유니폼에 부착하지 않아 많은 이들에게는 익숙하지 않다.

발톱 없는 나약한 호랑이? 용맹스러운 호랑이?

협회는 공식 용품 후원사인 나이키에 엠블럼 제작을 의뢰했다. 그리고 2001년 5월 마침내 새로운 엠블럼이 세상에 공개됐다. 우리에게 지금은 너무나도 익숙해진 호랑이 엠블럼이었다. 협회는 “백의민족을 상징하는 흰색을 바탕으로 우리민족의 기상을 나타내는 호랑이를 엠블럼으로 만들었다”면서 “새 엠블럼은 2002월드컵을 계기로 세계로 뻗어가는 한국축구의 저력과 기상을 나타내고 있다. 호랑이의 용맹함을 한국 축구의 상징으로 삼고 싶다”고 했다. 새 엠블럼은 축구공을 앞발로 제압하고 있는 호랑이의 모습이 흰색 바탕위에 짙은 푸른색으로 묘사돼있다.

지금은 익숙한 엠블럼이지만 발표 당시 반응은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다. 일단은 호랑이가 너무 순해 보인다는 의견이 많았다. 호랑이의 발톱이 묘사되지 않아 강인한 인상을 주지 못한다는 지적이었다. 또한 붉은색 바탕이 아니라 파란색으로 디자인 됐다는 점 역시 팬들의 지적이었다. 하지만 협회는 이 엠블럼이 부탁된 유니폼을 2002년 2월 공개했다. 반응이 엇갈렸지만 1948년부터 줄곧 태극마크를 달고 뛰던 대표팀이 태극마크 대신 협회 엠블럼을 달고 뛴다는 건 대단히 의미 있는 일이었다. 한국은 2002년 2월 13일 우루과이에서 열린 원정 평가전을 끝으로 정든 태극마크 유니폼 시대를 마감했고 그 다음 경기인 2002년 3월 13일 튀니지와의 평가전 때부터 호랑이 엠블럼이 부착된 유니폼을 입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국은 이 호랑이 엠블럼을 달고 나선 첫 대회에서 역사를 썼다. 월드컵 4강 진출이라는 믿기지 않는 성적을 낸 것이다. 기분 좋은 출발이었다. 하지만 2005년 9월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알고 봤더니 이 엠블럼이 정몽준 당시 회장 개인 명의로 돼 있다는 것이었다. 상표권 등록은 정몽준 회장 명의로 돼 있었고 엠블럼 안의 호랑이 도안은 나이키 소유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국회 문화관광위원회의 대한체육회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공개된 내용이었다. 협회는 상표권 등록 당시 협회가 비법인 문화단체라 단체 명의의 상표등록을 할 수 없어 불가피하게 정몽준 회장 명의로 등록할 수밖에 없었다고 해명했다. 그러면서 나이키가 직접 엠블럼을 도안해 저작권이 2001년 3월 20일자로 나이키 명의로 등록됐다고 밝혔다.

1998년부터 3년간 사용됐던 협회 엠블럼. 하지만 유니폼에 부착하지 않아 많은 이들에게는 익숙하지 않다.

엠블럼 주인이 정몽준 회장과 나이키?

한국 최고 인기 스포츠 팀인 국가대표 축구팀 엠블럼이 정몽준 회장과 나이키 소유라는 사실은 대단한 충격이었다. 만약 정몽준 회장이 협회를 그만두거나 나이키 대신 다른 후원 업체가 등장할 경우 일은 복잡해 질 가능성이 컸다. 엠블럼에 대한 권리를 정몽준 회장과 나이키가 보유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 둘이 손을 떼도 협회 수익이 마음만 먹으면 고스란히 이들에게 넘어가기 때문이었다. 아니면 정몽준 회장과 나이키가 손을 떼면 또 새로운 엠블럼을 제작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모든 걸 다 떠나 대표팀 선수들이 정몽준 회장과 나이키가 소유한 엠블럼을 달고 그라운드를 누볐다는 사실은 팬들에게 배신감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더 황당한 점은 이 문제가 제기되자 협회가 부랴부랴 정몽준 회장이 보유한 상표권을 협회로 넘겼다는 점이었다. 협회는 비법인 문화단체라 불가피하게 정몽준 회장 명의로 등록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지만 문제가 제기되고 3개월 만에 상표권을 정몽준 회장에게서 협회로 넘겨받았다. 나이키 역시 2006년 1월 협회와 양도계약을 맺었다. 협회가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4년 동안 버텨온 것이었다. 당시 국정감사에서 이 같은 사실이 밝혀지지 않았더라면 협회 호랑이 엠블럼은 여전히 정몽준 회장과 나이키 소유였을지도 모른다. 2006년 1월이 되고 나서야 호랑이 엠블럼은 온전히 협회의 소유가 됐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을 앞두고 국제축구연맹(FIFA)과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안 그래도 서로 견제하던 이 둘은 올림픽 축구에서 협회 엠블럼을 달고 뛰는 문제에 대해서도 충돌했다. 월드컵과 달리 IOC의 주관으로 열리는 올림픽에서 국가를 상징하는 국기가 아니라 협회 엠블럼을 달고 경기에 나서는 건 용인되지 않았다. 국기 외 다른 상징물을 유니폼에 허용하지 않는다는 규정 때문에 축구 종목의 유니폼에서도 엠블럼을 떼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일본은 올림픽을 앞두고 축구 대표팀의 유니폼에서 협회 엠블럼을 뗀 채 일장기를 달고 미리 준비했다. 하지만 한국은 달랐다. 협회는 “대한체육회로부터 협회 엠블럼이 달린 유니폼을 입고 뛰어도 문제가 없다는 연락을 받았다”며 이 논란을 해프닝 쯤으로 여겼다.

1998년부터 3년간 사용됐던 협회 엠블럼. 하지만 유니폼에 부착하지 않아 많은 이들에게는 익숙하지 않다.

파란색 사인펜으로 지워야 했던 엠블럼

대한체육회는 이후 협회에 엠블럼 부착 금지를 권고하는 공문까지 보냈지만 협회는 신경 쓰지 않고 엠블럼이 박힌 유니폼만 들고 베이징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1차전 카메룬과의 경기에 당당히 호랑이 엠블럼이 달린 유니폼을 입고 그라운드를 누볐다. 하지만 2차전 이탈리아와의 경기를 앞둔 상황에서 IOC의 지적이 나왔다. 엠블럼을 떼고 경기에 임하라는 것이었다. FIFA로부터도 “IOC가 각국 협회에 엠블럼을 떼라는 공문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결국 한국은 2차전 이탈리아와의 경기를 앞두고 엠블럼을 떼야 했지만 따로 준비된 유니폼이 없었다. 한국 선수들은 엠블럼을 파란색 사인펜으로 지운 채 경기에 임해야 했다. 이후 3차전 온두라스와의 경기가 돼서야 부랴부랴 한국에서 공수해 온 엠블럼 없는 유니폼을 입고 경기에 나설 수 있었다.

애초부터 IOC의 규정을 따랐다면 일어나지도 않았을 일이었다. 대한체육회의 권고도 무시한 채 준비 없이 떠나 결국은 망신을 당하고 말았다. 일본은 사전에 철두철미하게 조사하고 준비했지만 한국은 ‘대충 넘어가겠지’라는 생각으로 버텼다가 결국 사인펜으로 엠블럼을 지우는 촌극까지 벌였다. 참고로 지금까지도 올림픽에서는 협회 엠블럼을 달고 경기에 나설 수 없다. 엠블럼은 단순한 협회의 상징이 아니다. 여기에는 이렇게 어마어마한 무게감이 있고 엄청난 영향력이 있다. 호랑이 엠블럼을 달건 태극마크를 달건 신경 쓰지 않는 이들도 많지만 이 자리에 뭐가 달려있느냐에 따라 대단히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들도 있다. 엠블럼이 상징하는 바는 대단히 크다. 태극마크를 대신하는 자리에 붙어 있으니 그 무게감은 상상을 초월한다.

엠블럼은 돈이다. 2011년에는 협회가 호랑이 엠블럼을 사용한 한 의류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협회는 “운동장 벤치에서 입은 코트에만 엠블럼 사용을 허락하는 계약을 체결했을 뿐 트레이닝복 상품에는 사용을 허락한 적이 없다”면서 상표권 침해행위 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다. 이 업체는 호랑이 엠블럼이 사용된 트레이닝복을 공급받아 신문광고를 내고 ‘대한축구협회(KFA) 공식 트레이닝복’이라는 문구를 기재했다. 결국 법원은 협회의 손을 들어줬고 이 엠블럼이 포함된 광고를 계속할 경우 회당 500만 원씩을 지급하도록 간접강제명령까지 내렸다. 이처럼 엠블럼은 상업적 가치도 높게 평가받는다. 이제는 한국 축구와 뗄 수 없는 상징이 됐다.

“태극마크를 단다”는 표현은 사라졌지만…

무려 54년 동안 태극마크가 자리 잡던 곳에 호랑이 엠블럼이 새롭게 등장한지도 벌써 15년이 흘렀다. 처음에는 나약해 보이던 이 호랑이도 이제는 우리 눈에 대단히 익숙해졌다. 그 사이 이 엠블럼을 둘러싼 사건도 많았고 이 엠블럼을 달고 출전해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만들었던 경기도 많았다. 이제는 “가슴에 태극마크를 단다”는 표현이 맞지 않는 시대가 됐지만 국가대표팀 유니폼을 입는 모든 이들이 호랑이 엠블럼을 보며 태극마크 못지 않은 그 무게감을 느꼈으면 한다. 앞으로 이 호랑이 엠블럼을 단 선수들이 우리에게 더 많은 감동을 선사하길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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