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AR (자료사진) ⓒ스포츠니어스

[스포츠니어스 | 김현회 기자] 비디오 판독(Video Assistant Referee)이 지난 7월부터 K리그 클래식에 도입됐다. VAR이 도입되면 심판의 오심이 줄고 판정 논란도 잦아들 것이라 믿는 이들이 많았다. 애매한 판정에 대해서는 영상을 다시 돌려보며 정확한 판정을 내려줄 것이라 기대했다. 하지만 VAR 도입 후 4개월이 지난 시점에서 돌아보면 이 같은 기대에는 한참 미치지 못했다. VAR은 만능 열쇠가 아니었다. 나는 지금 K리그 클래식은 VAR이 없을 때만도 못하다고 생각한다. VAR은 축구장 분위기만 전혀 다르게 만들었을 뿐 여전히 심판에 대한 신뢰감은 없다. VAR이 도입된 후 바뀐 풍경과 그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 봤다.

1. PK 찍고 영상부터 보는 심판

주심이 단호하게 페널티킥을 선언하는 장면은 축구 경기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기도 하다. 근엄한 표정으로 항의하는 수비수들에게 카드를 주거나 "뒤로 물러나라"면서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 주는 건 주심만이 할 수 있는 멋진 행동이다. 하지만 K리그 클래식에서는 지난 7월부터 이런 모습을 볼 수 없게 됐다. 페널티킥을 선언하면 여지없이 주심이 헤드셋을 만지며 VAR 심판과 교신을 하거나 쪼르르 하프라인으로 달려가 리플레이를 감상한다. 페널티킥을 선언하고 확신에 찬 표정으로 VAR을 보지 않은 채 단호하게 자신의 판정을 굽히지 않는 주심을 본지 꽤 오래 됐다.

VAR은 부수적인 요소인데 어느 순간부터 페널티킥을 선언하면 VAR을 확인하는 게 필수요소가 되고 말았다. 앞으로 여러분도 눈여겨 보시라. 페널티킥을 선언하고 VAR에 의존하지 않는 주심이 과연 몇 명이나 있는지 잘 살펴보길 바란다. 거의 없다. VAR은 주심 판정에 보조 역할을 해야 하는데 어느 순간부터 주심들은 VAR을 절대적으로 의존하기 시작했다. 마치 30대가 돼 독립을 한 뒤에도 툭하면 부모님께 손을 벌리는 나와 비슷하다. 명색이 K리그 클래식 주심을 볼 정도면 자신이 확신에 찬 페널티킥에 대해서는 VAR에 의지하지 않는 자존심을 보여줘야 한다. 페널티킥을 선언한 뒤 쪼르르 화면 앞으로 가 느린 장면을 보며 ‘아, 내가 맞았구나’라고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은 심판의 권위를 완전히 떨어트린다. VAR은 내가 못 본 장면에 대해 활용하라고 있는 것이지 자신의 판정을 실시간으로 확인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다.

2. 골 넣고도 눈치 보는 선수들

골은 축구에서 하이라이트다. 한 경기에 두세 번 나올 때도 있고 한 번도 안 나올 때도 많다. 중간에 볼 일이 급해도 화장실에 가지 못하는 것 역시 골 때문이다. 이 한 순간을 위해 경기장에 갔는데 골 장면을 놓치고 89분 40초 동안 앉아 있는다는 건 고역이다. 축구에서 골은 희귀해서 더 가치가 있다. 다른 스포츠를 폄하하는 게 아니라 한 팀이 80~90점씩 내는 농구와 한 팀이 한 경기에서 한 번 넣을까 말까한 축구는 한 골의 가치가 다르다. 물론 농구는 농구 나름대로의 매력이 있다. 어찌 됐건 오늘 나올 딱 한 골이 터질 때의 희열 때문에 몇 번의 무득점 경기도 감내하는 것 아닐까.

그런데 VAR이 도입된 후 골의 희열이 줄어들었다. 골이 들어가면 관중은 환호하고 선수는 세리머니를 해야 하는데 일단 주심 눈치부터 본다. ‘제발 큰 네모를 그리지 말고 하프라인으로 재빨리 뛰어가줘’라는 무언의 메시지를 수천 명이 주심에게 보낸다. VAR 판독 없이 골로 이어져도 이미 어느 정도의 희열은 잦아든 상태다. 경기를 보다 골이 들어가면 일단 옆에 있는 미녀와 얼싸 안아야 하는데 심판의 행동부터 관찰해야 하니 골 자체의 묘미를 제대로 즐길 수가 없다. VAR 판독 이후 다시 골 선언이 되면 한 순간에 확 느껴야 할 희열이 분산된다. 골을 넣고도 좋아하기보다는 일단 주심 눈치부터 봐야 하는 축구는 별로다.

대구FC의 팬들은 VAR 판정으로 골을 잃은 뒤 이렇게 항의했다. ⓒ'인천유나이티드FC의 모든 것' 제공

3. VAR은 어떤 골도 취소할 수 있다

칼은 누군가에게 생활에 필요한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상대를 해하는 도구가 될 수도 있다. VAR도 마찬가지다. 처음 VAR이 도입됐을 때는 이게 심판의 오심을 바로 잡아줄 좋은 도구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VAR이 도입되니 악의적으로 쓴다면 그 어떤 골도 취소할 수 있는 무시무시한 핑계거리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9월 전북현대와 대구FC의 경기가 바로 그랬다. 심판이 의도하고 일부러 반대의 판정을 내린 건 아니었겠지만 이날은 VAR을 맹목적으로 믿으면 안 된다는 메시지를 줬다. 오히려 VAR이 골을 취소하는 도구로 전락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 경기였다.

후반 39분 대구 세징야가 오른쪽 측면을 돌파해 크로스했고 이를 에반드로가 가볍게 밀어 넣으면서 ‘거함’ 전북을 상대로 2-1로 달아났다. 하지만 이 골은 VAR 판독 이후 노골로 선언됐다. 처음 공격 전개 시 골키퍼 조현우가 정지된 볼이 아니라 흐르는 볼을 찼다는 판정이 나온 것이다. VAR은 경기 결과를 바꿀 수 있는 명백한 오심 상황에서만 적용된다. 하지만 조현우가 골킥을 한 뒤 전북 신형민이 공을 차단하려다가 이 공을 흘렸고 다시 대구가 공을 잡고 공격을 진행했는데 심판은 골 장면이 시작된 시점이 잘못됐다며 노골 선언을 했다. 반대쪽 골대에서 벌어진 일로 그 반대편 골대에 들어간 골을 취소한 것이다. 이렇게 계속 영상을 앞으로 돌린다면 그 어떤 골도 취소가 정당화 될 수 있다. VAR은 골을 취소하는데 있어서 ‘백종원표 만능간장’이다.

4. VAR을 VAR이라 부르지 못하는 선수들

타 종목에서는 VAR을 해당 팀에서 요청할 수 있다. 결정적인 순간 오심이 있다고 생각하면 코치진은 물론 선수들도 손가락으로 네모를 그리며 VAR 판독을 요청한다. 하지만 K리그 클래식에서는 이를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 판정 논란 이후 손가락을 대충 허공에 그리는 것만으로도 징계를 받을 수 있다. 경기 도중 오심이라고 판단한 선수들은 VAR의 ‘V’도 꺼내지 못한다. 심지어 포항 김승대는 지난 8월 퇴장 당한 뒤 “VAR 이런 거 왜 해?”라고 항의하며 욕설까지 했다가 상벌위원회에 넘겨져 5경기 출장정지와 벌금 500만원 징계를 받았다. 우리나라에서 대통령 욕은 해도 VAR 욕은 할 수가 없다.

억울하다고 느끼는데도 VAR을 요청할 수 없으니 선수들은 심판에게 돌려 말해야 할까. “심판님, 다시 한 번 잘 생각해 보시죠.” “첨단 기술을 한 번 이용해 보시죠. 저기 하프라인에 준비돼 있네요.” 아니면 ‘화이트’의 <네모의 꿈>이라도 흥얼거려야 한다. 지난 5일 전남과 인천의 K리그 클래식 경기에서 전남 토미는 상대가 페널티 박스에서 자신의 옷을 잡았다고 항의하며 주심 앞에서 무릎을 꿇고 두 손 모아 간절히 비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다 아는 동작과 말이 있는데 정작 가장 중요한 순간 이 동작과 말을 못 하는 모습은 참 답답하다. 참고로 상대 선수를 밟은 울산 김창수에 대한 추가 징계가 두 경기였는데 김승대는 VAR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다섯 경기 추가 징계를 받았다.

대구FC의 팬들은 VAR 판정으로 골을 잃은 뒤 이렇게 항의했다. ⓒ'인천유나이티드FC의 모든 것' 제공

5. VAR 의지하면 심판 능력 퇴보할 것

기계에 의지하면 인간의 능력은 더 떨어진다. 예전에는 친구들 전화번호를 다 외우고 다녔지만 지금은 외우는 번호가 없다. 술만 먹으면 헤어진 여자친구 전화번호가 떠오르지만 이건 논외로 하자. 인간은 진화하지만 기계가 인간의 자리를 대신하면서 때론 더 퇴보하는 일이 생기기도 한다. 축구 심판은 90분 동안 딱 한 순간의 애매한 상황을 잡기 위해 집중해야 한다. 그게 그들의 일이다. 하지만 VAR이 도입된 이후로 심판들의 집중력은 점점 더 떨어지고 있다. 애매한 상황이 생기면 일단 경기를 멈추고 느린 화면을 보면 되기 때문이다. 만약 VAR이 지금과 같은 형태로 계속 유지된다면 전체적인 심판의 질은 더 떨어질 수밖에 없다. 한 라운드에 VAR 판독이 한두 번 나와도 많은데 매 경기 툭하면 경기를 멈추고 영상을 본다.

VAR에 의존하면 안 된다. 기계가 모든 걸 다 대신해 줄 수는 없다. 심판이 현명하고 능력이 있지 않다면 VAR이 아니라 VAR 할아버지를 데려다 놓아도 오심 논란은 끊이질 않을 것이다. 나는 학창시절 공부할 때 집중력을 높여준다는 ‘엠씨스퀘어’를 사면 내가 바로 전교 1등을 할 줄 알았다. 그래서 부모님을 졸라 ‘엠씨스퀘어’를 샀는데도 성적은 더 떨어졌다. 이상했다. ‘엠씨스퀘어’에서는 눈에 띄게 성적이 오른 전국의 학생들 예시를 들었는데 내 성적은 점점 더 바닥을 쳤다. 그럴수록 나는 책상에 앉아 책을 펴기보다는 ‘엠씨스퀘어’를 더 열심히 들었다. ‘엠씨스퀘어’도 결국엔 공부 잘하는 애들이 써야 효과가 있는 법이다. 여기에 의지한다고 바닥을 치던 성적이 오르지도 않고 오심이 줄지도 않는다. ‘엠씨스퀘어’와 VAR은 보조적인 역할일 뿐이다. VAR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질수록 심판들의 순간 판단 능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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