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이 시작되면 또 이런 분위기가 연출될까. ⓒ부천시

[스포츠니어스 | 김현회 기자] 한국 축구 대표팀의 졸전을 보며 이런 생각은 한 번씩은 해봤을 것이다. ‘이따위로 할 거면 그냥 월드컵 한 번 나가지 말자. 정신 좀 차리자.’ 나 역시 마찬가지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8회 연속 월드컵 본선 무대에 나섰던 한국이 한 번쯤은 월드컵에 출전하지 못하는 충격 요법도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실망스러운 경기력에 대한 분노였다. 정말로 한국이 월드컵에 나가지 못하게 된다면 큰 일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상상하기도 싫지만 한국이 월드컵에 나가지 못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측해 보자. 정말 이래도 월드컵 한 번 안 나가도 그만이라는 생각이 드는가.

월드컵 못 나가도 당장은 타격 없다

2018년 6월 14일 러시아에서 월드컵이 성대하게 개막했다. 하지만 한국은 이 대회에 참가하지 못했다. 월드컵 중계를 위해 무려 1,100억 원에 중계권을 구입한 지상파 방송 3사는 절망에 빠졌다. 한국이 월드컵에 진출하지 못한 상황에서 남의 잔치를 빠지지 않고 지켜볼 시청자는 극히 적기 때문이다. 지상파 3사는 개막전과 브라질, 독일, 스페인 등 주요 팀들의 경기를 제외한 나머지 경기는 스포츠 전문 케이블 채널에서만 중계하기로 했다. 차라리 예정된 드라마를 방영하는 게 시청률은 물론 광고 수익도 더 괜찮았기 때문이다. 한국의 충격적인 월드컵 본선 진출 실패 이후 가장 먼저 타격을 입는 건 지상파 방송 3사였다.

‘100분 토론’에서 <위기의 한국 축구, 이대로 좋은가>라는 주제로 열띤 토론을 펼쳤다. 패널로는 신문선 교수와 이용수 교수, 이천수, 안정환, 김흥국 그리고 <비정상회담>에 출연 중인 알베르토 등이 나왔다. 100분 동안 이런 저런 이야기를 주고 받은 이들의 결론은 이렇게 났다. “자국리그부터 살려야 한다.” 대한축구협회는 월드컵 본선 진출 실패로 성난 여론을 달래기 위해 세계적인 명장을 영입하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장고 끝에 선임한 외국인 감독은 독일 2부리그와 중동 리그 등을 경험한 지도자였다. 그래도 이 감독을 영입하기 위해 1년 연봉으로만 무려 20억 원을 투자하기로 했다. 월드컵 진출 실패로 월드컵 특수를 노렸던 치킨집이 망했고 길거리 응원도 없어 남녀 간 헌팅도 4년 전만 못했다.

하지만 당장 느끼는 타격은 이게 전부였다. 한국이 없는 월드컵이 이렇게 막을 내렸고 ‘월드컵에 나가지 못하면 망한다’고 잔뜩 겁을 준 김현회를 욕하기 시작했다. 비록 월드컵은 못 나갔지만 프리미어리그 새로운 시즌이 시작되니 손흥민과 기성용이 펄펄 날았기 때문이다. 월드컵은 못 나갔어도 해외에서 맹활약하는 태극전사들의 활약은 변함이 없었다. 월드컵 본선 진출에 실패하면 마치 금방이라도 한국 축구가 망할 것 같았지만 피부로 느끼는 변화는 거의 없었다. 이승우와 백승호, 장결희가 유럽 무대에서 이따금씩 골을 넣었다는 소식까지 전해지니 한국 축구는 더 강해진 것만 같았다.

한국이 월드컵에 나가지 못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RussianPresident

줄어드는 후원이 재앙의 시작

당장 K리그에도 별 영향이 없었다. K리그 클래식 슈퍼매치에는 그래도 2~3만 명의 관중이 들어찼다. 월드컵 본선 진출 실패 전과 마찬가지로 K리그 클래식은 5천명 대, K리그 챌린지는 2천명 대의 관중이 몰렸다. K리그 마니아들은 “어차피 K리그는 더 망할 것도 없다”며 껄껄 웃었다. 언론과 대중의 관심이 적은 K리그는 월드컵 본선 진출 실패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월드컵엔 못 나갔어도 슈퍼매치는 여전했고 조나탄과 데얀은 골을 넣었다. AFC 챔피언스리그에서는 K리그 팀들이 8강 이상 올라가며 여전한 위력을 과시했다. 사람들은 “월드컵 한 번 못나가도 뭐 없네”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A매치가 열릴 때마다 관중석이 반도 차지 않았을 뿐 달라진 건 없었다.

하지만 2020년 1월 깜짝 놀랄 만한 소식이 전해졌다. 협회와 나이키의 후원 계약이 만료되는 시점에서 재계약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그런데 이전까지 8년간 현금 600억 원, 현물 600억 원 등 총 1,200억 원을 받았던 협회는 절반 가까이 깎인 조건에 재계약을 맺어야 했다. 월드컵에 나가지 못하며 홍보 효과가 줄어든 나이키가 손익 계산서를 들이미니 협회는 할 말이 없었다. KEB하나은행, KT, 네이버, 교보생명, 현대자동차, 아시아나항공, 코카콜라, 서울우유 등 협회를 후원하는 업체 대부분이 절반 가까이 삭감된 재계약 조건을 제시하거나 후원을 중단했다. 협회는 수입의 64%를 차지하는 후원금이 절반으로 줄어드는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이뿐 아니라 월드컵 본선에 나가기만 하면 전패를 해도 국제축구연맹(FIFA)가 주던 약 100억 원의 배당금도 받지 못했다.

후원을 줄이거나 끊은 업체 중 상당수는 2020년 도쿄올림픽을 앞두고 야구 대표팀 후원사로 넘어갔다. 올림픽에 복귀한 야구의 인기를 실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도 겉으로 보기에 협회는 끄떡없어 보였다. 월드컵에 나가지 못한 대표팀 선수들은 여전히 중국과 중동, 일본 등지에서 수십억 원의 연봉을 받으며 초호화 생활을 누리고 있었다. 대표팀 단체 ‘카톡방’에는 “나 이번에 이적료로 80억 원 벌었어”라고 자랑하는 이들도 있었다. 대표팀은 A매치 원정 경기를 떠날 때도 늘 그랬던 것처럼 비즈니스석을 타고 편하게 이동했고 최고급 호텔에 묵었다. 월드컵 한 번 나가지 못했다고 대표팀 선수들의 생활이 갑자기 변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여전히 최고의 대접을 받았다.

한국이 월드컵에 나가지 못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RussianPresident

‘월드컵 키즈’의 실종과 유소년 예산 삭감

그런데 예산이 반 토막 난 협회는 골머리를 앓기 시작했다. 성인 남자 국가대표 선수들을 이코노미석에 태울 수도 없고 라면을 끓여 먹일 수도 없어 이 지원은 그대로 이어졌지만 살림이 쪼그라들면서 어딘가는 지원을 줄여야 했다. 가장 먼저 지원을 줄인 건 유소년 육성이었다. 유소년 육성은 당장 지원을 줄여도 크게 티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협회가 이제껏 1년 예산 중 가장 많이 투자했던 게 바로 유소년 지원 육성 사업이었다. 1년 예산의 무려 28%를 유소년 육성에 썼다. 하지만 협회 살림이 빠듯해지면서 대표팀 운영을 위한 비용을 유소년 육성비용에서 빼 쓰기 시작했다. 심판 및 지도자 양성 비용도 확 줄었다. 그나마 유소년 및 심판, 지도자 양성 비용을 줄이는 게 당장은 티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꽤 많은 연봉을 받던 협회 직원들의 급여도 깎였다.

2018 러시아월드컵에서 한국의 본선 진출 실패로 막대한 타격을 입은 지상파 방송 3사도 A매치 중계권료를 확 줄였다. 협회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적은 금액이었지만 지상파 방송 3사는 “이 이상은 줄 수가 없다”고 했다. 결국 빠듯한 살림으로 고민하던 협회는 지상파 방송 3사가 아니라 더 많은 돈을 제시한 SPOTV와 중계권 협상을 맺었다. 일부에서는 보편적 시청권을 주장하면서 A매치는 지상파가 중계해야 한다고 했지만 한 푼이 아쉬운 협회는 중계권료를 더 많이 제시한 방송사와 손을 잡았다. 하지만 중계권을 아예 놓친 지상파 방송 3사는 스포츠 뉴스 시간에 대표팀에 관한 단 한 꼭지의 기사도 내보내지 않으며 복수 아닌 복수를 했다. 2020년 3월 한국과 바레인의 A매치 경기에는 4,508명의 관중만이 들어찼다.

당장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이때부터 유소년 지도자들은 문제점을 실감하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운동부에서 탐나는 자원이 있으면 축구부가 마음 먹고 빼오던 시절도 있었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재능 넘치는 육상부원에게 “축구 선수 해볼래?”라고 물으면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저 김국영 같은 육상선수가 될 건데요.” 2020년 도쿄올림픽에서 또 다시 좋은 성적을 낸 야구를 보며 야구부에 입단한 이들도 많았다. 축구부가 재능 있는 어린 선수들을 싹 쓸어가던 시대는 이렇게 끝이 났다. 우상들이 월드컵에서 뛰는 걸 보지 못한 어린 세대들은 이렇게 축구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축구는 그저 새벽에 보는 프리미어리그가 전부였다.

한국이 월드컵에 나가지 못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RussianPresident

월드컵 진출 실패는 재앙에 가깝다

그나마 선수를 데려온다고 해도 상황이 너무 열악해졌다. 유소년 지원금이 줄어 당장 다 닳아버린 인조잔디 교체 비용도 없었기 때문이다. 어린 선수들은 차라리 맨땅이 나을 정도의 좋지 않은 인조잔디에서 공을 차기 시작했다. 유소년 육성 예산이 줄면서 초중고 주말리그 역시 절반으로 축소됐다. 한 해에 뛰는 경기가 절반으로 줄어든 것이다. 프로구단 산하 유소년 클럽에서는 선발하는 선수를 절반으로 줄였고 지도자들과 심판의 수준도 더 낮아졌다. 체계적인 교육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대회가 열릴 때마다 수준 미달의 감독들이 다 낡아 빠진 경기장에서 심판들과 판정 문제로 다투는 일이 벌어졌다. 유소년 대표팀 상비군은 일본에서 치르는 유소년 대회 비용을 줄이기 위해 일본이 아닌 남해에서 전지훈련으로 대체했다.

한국은 다시 2022년 카타르월드컵 본선 진출에 성공했지만 기성용과 손흥민 등은 카타르월드컵을 끝으로 대표팀 은퇴를 선언했다. 그리고 이제야 한 번의 월드컵 진출 실패에 대한 후유증이 눈에 띄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세대교체 이후 새롭게 등장해야 할 어린 선수들의 기량이 이전 세대에 비해 한참 떨어진 것이었다. 재능 있는 어린 선수들은 다 야구선수가 됐고 그나마 축구를 선택한 이들은 열악한 환경에서 기대 만큼 성장하지 못했다. 이렇게 제대로 지원을 받지 못한 이들은 이제 월드컵 무대가 아니라 아시아 무대에서도 힘을 발휘하지 못할 정도였다. 일본에 0-3으로 패하고 베트남과 0-0으로 비겨도 화를 내는 이들은 없었다. 선수들의 실력이 딱 그 정도였기 때문이다.

당장 피부로 느끼지 못했던 K리그도 이때쯤 큰 타격을 입게 됐다. 투자가 확 줄어 그나마 근근이 운영되던 K리그에서는 AFC 챔피언스리그 16강에도 들지 못하며 더더욱 고립 상태에 빠지게 됐고 그나마 육성되는 선수가 없어 경쟁력이 확 줄어들었다. K리그는 경제적 빈곤이 더 극심해졌고 결국 몇몇 선수들은 단 돈 500만 원에 승부조작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다. 여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그나마 유소년 육성 정책으로 재능 있는 선수들을 발굴해내며 지자체로부터 지원을 받았던 몇몇 시도민구단들이 충격적인 해체를 선언했기 때문이다. 기업구단 또한 지원을 확 줄이고 눈치만 보며 언제든 구단 운영에서 발을 뺄 준비를 마쳤다.

한국이 월드컵에 나가지 못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RussianPresident

우리는 반드시 월드컵에 나가야 한다

대표팀 성적과 인기에 기대 운영되던 K리그가 그나마 막대한 손해를 입으면서도 한국 축구 기반을 유지하기 위해 운영했던 팀을 더 이상 운영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수익성 때문이 아니라 대표팀 성적 유지를 위해 가까스로 운영되던 K리그에 구단 해체라는 연쇄 작용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한 번 이렇게 무너진 구조를 다시 돌리기에는 어려웠다. 2028년 결국 나이키는 협회에서 손을 뗐고 그 자리를 르까프가 대신했다. 협회는 코카콜라 후원 대신 콤비콜라가 후원하기 시작했고 아시아나항공 대신 진에어가 후원사로 등장했다. KEB하나은행 자리는 러시앤캐시가 대신했다. 월드컵은 이제 한국 축구에서 아주 가끔 오는 기회 정도가 됐다. 협회는 결국 축구회관 건물을 매각해 빚을 청산하고 세입자 신세가 됐다.

끔찍한 일이다. 위험성을 경고하기 위해 다소 과장한 측면도 적지 않다. 하지만 이거 하나 만큼은 분명하다. 한국이 월드컵에 나가지 못하면 그 파장은 엄청나다는 것이다. 당장 대표팀에 영향은 전혀 없을 테지만 10년 뒤쯤 그 여파가 몰려올 것이다. 이제 막 축구를 시작할 어린 선수들에게는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 당장 월드컵 한 번 못 나가는 것 쯤이야 상관없지만 그러면서 제2의 박지성, 제2의 기성용이 성장하지 못한다는 건 대단히 심각한 문제다. “월드컵 한 번 못 나가고 정신 차리자”라는 말이 대단히 위험한 이유이기도 하다. 결국 대표팀 성적 부진과 흥행 부재로 시작된 이 현상은 유소년 육성에 엄청난 타격을 입히고 K리그 존립까지 위협할 수 있을 정도로 민감한 사안이다. 한국 축구는 가진 인프라와 환경에 비해 많은 걸 누려왔는데 이건 순전히 월드컵에 계속 출전하면서 얻은 것들이었다. 월드컵에 나가지 못하는 순간 이 모든 건 무너진다.

오늘(31일) 열릴 한국과 이란의 2018 러시아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 경기에 임하는 선수들에게 부탁하고 싶다. 그들 역시 당연히 월드컵에 나가고 싶고 이기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꼭 자신의 영달을 위한 건 아니었으면 좋겠다. 이미 이룰 만큼 다 이루고, 가질 만큼 다 가진 선수들에게는 월드컵 한 번 나가지 못하는 게 대수롭지 않은 일일수도 있지만 오늘 경기 한 번에 한국 축구의 미래가 걸려 있다고 책임감을 느꼈으면 한다. 그들이 좋은 경기장에서 좋은 지도자들로부터, 좋은 축구를 배울 수 있었던 건 머리가 깨지고 몸을 던져가며 월드컵에 나갔던 선배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 이란과의 경기에 나서는 이들은 선배들로부터 물려받은 월드컵 본선 진출이라는 전통을 후배들에게도 물려줘야 할 의무가 있다. 월드컵 본선 무대에서 0-5로 크게 깨지더라도 우리는 반드시 월드컵에 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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