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폼니시 감독과 강창석 씨가 지난 10일 부천종합운동장에서 열린 기자회견에 나란히 참석한 모습. ⓒ스포츠니어스

[스포츠니어스 | 김현회 기자] 지난 10일 부천종합운동장 기자회견장에 발레리 니폼니시 감독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배가 나온 중년 남성이 함께 앉았다. 이 남성은 만감이 교차하는 듯 주위를 살폈고 니폼니시 감독이 한 마디씩 할 때마다 능수능란하게 그의 이야기를 통역했다. 젊은 통역사들이 스포츠계에 종사하는 게 대부분인데 50대 중년 남성의 연륜 있는 통역은 인상적이었다. 이날 니폼니시 감독은 ‘어록’에 남을 만한 명언도 많이 남겼는데 이는 여유 넘치고 표현력도 뛰어난 베테랑 통역의 역할도 한 몫했다. 과연 이 중년의 통역사는 누구였을까. 그와 니폼니시 감독의 20년 우정을 소개하려 한다. 그는 이 통역을 위해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에서 날아왔다. 바로 리타산업 강창석 부대표다.

27살 강창석과 51세 니폼니시의 첫 만남

한국외대 러시아어과에 재학 중이던 강창석 씨는 군대에 다녀온 뒤 러시아 모스크바로 1년 6개월 동안 어학연수를 떠났다. 그리고 대학교 4학년 때 SK해운에 입사했다. 그런데 운명이었을까. 당시 SK 계열사인 유공코끼리 축구단에서 러시아어에 능통한 이를 찾고 있던 것이었다. 러시아 출신 니폼니시 감독이 취임하게 되면서 통역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주위에서는 더 대우가 좋은 SK해운에 남는 게 이득이라고 했지만 강창석 씨는 고민할 것도 없이 바로 이 팀 통역에 지원했다. 중학교 때까지 축구선수로도 활약했던 그는 러시아어 능력을 발휘하며 축구와 함께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만족했다. 강창석 씨는 27살이던 1995년 유공코끼리 축구단에 러시아어 통역으로 입사하며 그렇게 운명이 바뀌었다.

강창석 씨는 니폼니시 감독과 김포공항에서 처음 만났다. 구단 직원과 자가용을 몰고 직접 니폼니시 감독으로 모시러 간 것이었다. 떼려야 뗄 수 없는 이 둘의 20년 넘는 우정은 이렇게 시작됐다. 이때만 하더라도 이 둘이 20년 넘게 인연을 이어올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니폼니시 감독도 처음 겪는 한국 생활에 꽤 긴장을 하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니폼니시 감독은 처음 만난 강창석 씨에게 이렇게 말했다. “모르는 건 모른다고 정확히 의사 전달을 해 달라. 앞으로 나의 혀가 되고 오른팔이 되어 달라.” 이때부터 강창석 씨는 하루 중 잠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니폼니시 감독과 붙어 있어야 했다. 니폼니시 감독은 강창석 씨를 ‘쏙’이라고 불렀다. ‘강창석’의 ‘석’에서 따온 것인데 ‘쏙’은 러시아어로 ‘주스’와도 발음이 같았다. ‘쏙’은 강창석 씨의 귀에도 쏙 들어왔다.

처음에는 강창석 씨가 니폼니시 감독의 스타일에 적응하는데 애를 먹었다. 훈련을 앞두고 니폼니시 감독은 늘 강창석 씨에게 날씨를 물었다. 그럴 때마다 미리 일기예보를 챙기지 않았던 강창석 씨는 당황했고 이후 꼬박꼬박 일기예보를 챙겨 니폼니시 감독에게 보고했다. “오늘 기온은 이렇고 바람은 이렇습니다.” 강창석 씨는 당시 니폼니시 감독의 스타일이 생소했다. “그냥 매일 일기예보를 챙기라고 직접적으로 지시를 하지 않아요. 자기가 알아서 생각하고 행동에 옮길 때까지 기다려주시는 거죠. 사실은 그냥 ‘야 인마 이거 해’라면서 시키는 게 나을 때도 있잖아요. 하지만 감독님은 절대 그러지 않으셨어요. 자발적인 행동을 바라셨던 거죠.” 강창석 씨는 당시 3대 스포츠 신문에 나온 뉴스를 모두 공부해 니폼니시 감독에게 매일 보고하는 일도 맡았다. 물론 니폼니시 감독은 “이거 읽어보고 보고하라”는 말을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강창석 씨와 니폼니시 감독은 이렇게 늘 붙어다녔다. ⓒ강창석 제공

니폼니시의 손과 발, 입이 된 통역사 강창석

강창석 씨도 처음 맡는 축구단 통역이 생소했다. “다른 학문의 통역을 맡으면 속된 말로 ‘야부리’를 털 수 있잖아요. 뭐 맥락만 대충 맞춰 의역을 해도 큰 문제가 없는데 스포츠는 달라요. ‘앞으로 구르고 전력질주하라’는 걸 잘못 통역하면 그 자리에서 서른 명 넘는 선수가 바보가 되잖아요. 거짓말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죠.” 하지만 니폼니시 감독은 훈련 전 강창석 씨와 코치진을 따로 불러놓고 혼란을 최소화했다. “오늘은 한 시간 40분 동안 어떤 훈련을 할 거고 선수들에게는 이런 말을 해줄 거다. 참고하라.” 축구단 통역이 생소했던 강창석 씨는 니폼니시 감독의 꼼꼼하고도 정확한 스타일 덕분에 어렵지 않게 적응할 수 있었다.

강창석 씨는 니폼니시 감독과 1년 중 320일을 붙어 있어야 했다. 시즌이 끝나고 크리스마스를 앞둔 상황에서 니폼니시 감독이 고국으로 휴가를 갈 때를 빼면 매일 그의 손과 발, 입이 되어야 했다. 기본적인 훈련을 물론 일상생활도 강창석 씨 없이는 어려웠다. 니폼니시 감독 가족이 아프면 강창석 씨가 병원도 모셔가야 했고 세금 업무 처리도 도와야 했다. 거기에다 부천SK에는 러시아 출신 외국인 선수도 있었다. 강창석 씨는 이들의 민원(?)까지도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1년에 그렇게 320일을 니폼니시 감독을 비롯한 러시아 선수들에게 바쳤다. 하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러시아에 어학연수를 간 것보다 이게 러시아어를 배우는데 훨씬 더 낫잖아. 나는 한국에 살고 있지만 그러면서 러시아에 살고 있어.”

강창석 씨는 늘 니폼니시 감독과 붙어 다니며 통역사로서의 적응을 마쳤다. 하지만 그가 니폼니시 감독에게 완전히 빠지게 된 건 통역 일을 시작한지 몇 달이 지나고 나서였다. 당시 부천SK와 울산현대의 경기가 열렸는데 경기 내용이 무척이나 거칠었다. 상대가 부천 선수들의 발목을 향해 거친 태클을 했고 부천 선수들이 부상으로 실려 나간 것이다. 그런데 이 거친 경기 도중 부천 조성환이 찬 공이 울산현대 선수 얼굴을 강타했고 벤치에 있던 강창석 씨는 자기도 모르게 한마디 툭 던졌다. “나이스.” 거친 경기를 보며 흥분한 것이다. “그때는 상대팀을 적군이라고 생각했었죠.” 그런 강창석 씨를 니폼니시 감독이 슬쩍 쳐다봤지만 별다른 말은 없었다. 그리고 일주일이 지난 뒤 식사 시간에 커다란 빵이 나오자 니폼니시 감독이 강창석 씨에게 한마디 했다.

강창석 씨와 니폼니시 감독은 이렇게 늘 붙어다녔다. ⓒ강창석 제공

인생의 스승과 헤어지다

“쏙, 우리는 이런 커다란 빵을 같이 나눠 먹는 동업자야. 일주일 전에 그런 행동은 앞으로 절대 하지마.” 강창석 씨는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니폼니시 감독이 툭 던진 한마디에 부끄러워서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니폼니시 감독은 이렇게 쓴소리도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시간이 지나기를 기다린 것이었고 일주일 뒤에야 이 말을 꺼냈다. 그러면서 니폼니시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오늘은 축구 때문에 우리가 기뻐할 수 있고 축제를 벌일 수도 있어. 하지만 상대가 축제를 벌이는 날에도 박수쳐 줄 수 있어야 해.” 강창석 씨는 이때부터 이 교훈을 마음에 새겼다. 또한 무엇보다도 그 자리에서 바로 지적하지 않고 그걸 되돌아볼 시간까지도 생각하는 니폼니시 감독의 모습에 푹 빠지고 말았다. 니폼니시 감독은 강창석 씨에게 인생의 큰 스승이었다.

당시 부천에는 이원식을 비롯해 젊은 선수들이 많았다. 결혼을 한 뒤 이제 막 첫 아이를 얻게 된 선수들도 늘었지만 총각인 강창석 씨에게는 남일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니폼니시 감독이 조윤환 코치를 불러 놓고 강창석 씨와 셋이 마주했다. 니폼니시 감독이 러시아어로 한 말을 조윤환 코치에게 전달하며 강창석 씨는 또 한 번 무릎을 쳤다. 니폼니시 감독의 배려심이 이 정도인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조 코치, 이제 막 아이를 낳은 선수들한테는 한 달 정도 잔소리 하지마. 아이가 태어나면 부모는 밤낮이 바뀌어서 고생이 많은데 거기에 적응할 시간을 줘야해.” 강창석 씨는 이를 조윤환 코치에게 통역하면서도 감동했다. 강창석 씨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제 인생을 걸고 이 사람을 믿고 따라도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항상 가르침을 받았죠.”

그렇게 강창석 씨는 1995년부터 1998년까지 4년 가까운 시간 동안 함께했다. 친한 친구도, 연인도 이 둘처럼 붙어 다니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부천은 ‘니포 축구’라는 찬사를 받으며 엄청난 경기력을 뽐냈다. 하지만 구단의 지원은 점점 줄어들었고 결국 니폼니시 감독은 1998년 시즌이 끝난 뒤 팀을 떠나야 했다. 영원할 것 같던 니폼니시-강창석 콤비도 이렇게 헤어져야 했다. 니폼니시 감독의 사임 소식을 접한 강창석 씨는 안타까웠다. ‘그래도 리그에서 우승 한 번 하시고 가시면 좋으셨을 텐데….’ 결국 4년 동안, 1년에 320일 이상 매일 보던 니폼니시 감독과 강창석 씨는 1998년 이별했다. 공항으로 배웅을 나간 강창석 씨는 니폼니시 감독과 꼭 껴안은 채 이렇게 생각했다. ‘내 영원한 스승이 이렇게 떠나시는구나.’

강창석 씨와 니폼니시 감독은 이렇게 늘 붙어다녔다. ⓒ강창석 제공

니폼니시와의 추억은 그에게 운명이 됐다

“제가 운전을 하면 늘 제 오른쪽에 앉아계시던 분이 하루 아침에 사라지셨어요. 아침 7시 15분부터 매일 만나던 스승님이 떠나시니 힘들었고 허탈했죠.” 강창석 씨에게 스승과의 작별은 힘들었다. 하지만 구단에서는 강창석 씨에게 팀에 남아달라고 부탁했다. 러시아어 통역이 아니더라도 선수단 주무 등을 맡아 계속 함께 해주길 바란 것이다. 중학교 때까지 선수 생활을 해 축구에 대해서도 해박했고 거기에 니폼니시 감독을 보좌하면서 축구단 사정도 잘 알고 있는 그가 구단에서 할 일이 많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창석 씨는 니폼니시 감독이 부천을 떠난 뒤 두 달 후 구단에 사직서를 냈다. “매너리즘에 빠져 있었고 구단이 투자도 하지 않는 모습도 싫었어요. 그래서 그냥 나왔죠.” 강창석 씨는 이후 개인 사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강창석 씨는 축구를 잊을 수 없었다. 2002년부터 2004년까지는 골키퍼 사리체프(신의손)를 돕는 일도 했다. 자비를 털어 사리체프 축구교실을 열었고 부천 일대에서 중고등학교 골키퍼들을 상대로 훈련 지도를 한 것이다. “축구를 통해 훌륭한 스승을 만났으니 축구에 보답하자”는 뜻이었다. 니폼니시 감독을 통해 축구계와 인연을 맺게 된 강창석 씨는 이후에도 축구계에 러시아어 통역이 필요할 때면 한걸음에 달려갔다. 대한축구협회의 러시아어 통역 업무도 맡게 된 것이다. 우즈베키스탄과 투르크메니스탄, 타지키스탄 등 중앙아시아 국가와 업무를 볼 때면 협회에서 강창석 씨를 불러 일을 진행했다. 니폼니시 감독과의 인연 때문에 그는 꾸준히 러시아와 관련한 축구 일들을 계속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 계속 일하던 강창석 씨는 2007년 우즈벡에 정착하기로 했다. 한국을 떠나 우즈벡에서 일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강창석 씨는 우즈벡에 살면서 시간이 날 때마다 니폼니시 감독이 있는 곳으로 찾아갔다. 터키 안탈리아를 비롯해 모스크바 등 니폼니시 감독이 보고 싶을 땐 스승을 만나러 날아갔다. 우즈벡에서 텔레비전을 틀어 놓고 잠에 들었다가 꿈같은 경험을 하기도 했다. 니폼니시 감독의 목소리가 어딘가에서 들려왔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잠에서 깨 한참을 추억에 젖었다. 러시아에서 축구 해설위원으로도 활약하는 니폼니시 감독이 텔레비전에 출연해 축구 이야기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강창석 씨는 니폼니시 감독과 축구에 대해 대화를 나누던 그 시절이 그리웠다.

강창석 씨와 니폼니시 감독은 이렇게 늘 붙어다녔다. ⓒ강창석 제공

“통역은 ‘쏙’이 맡아야 한다”

니폼니시 감독이 중국에서 지도자 생활을 할 때도 강창석 씨는 꼭 한 번씩 스승을 만나기 위해 중국으로도 갔고 2009년에는 김남일이 러시아 톰 톰스크로 이적한 뒤 잠시 니폼니시 감독과 일을 같이 하기도 했다. 당시 갓 러시아에 입성한 김남일은 적응에 애를 먹고 있었고 러시아 현지인 통역도 능력이 떨어졌다. 처음에는 강창석 씨가 김남일에게 일주일 정도 도움을 주기 위해 잠시 들렀지만 에이전트의 부탁으로 석 달 동안 김남일과 함께해야 했다. 그런데 당시 이 팀 사령탑이 니폼니시 감독이었다. 강창석 씨가 팀을 위한 통역사는 아니었지만 선수 개인 통역으로 잠시나마 니폼니시 감독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강창석 씨는 늘 니폼니시 감독에게 연락도 하고 가끔 얼굴도 보면서 지난 추억을 떠올렸다. 그런데 지난 3월 니폼니시 감독으로부터 한 통의 연락을 받았다. “부천에서 이메일이 왔는데 네가 이 일을 진행해 달라”는 것이었다. 알고 봤더니 부천FC1995 측에서 창단 10주년을 맞아 니폼니시 감독을 부천으로 초청하고 싶다는 내용의 편지를 니폼니시 감독이 마지막으로 지도자 생활을 했던 톰 톰스크 구단으로 보낸 것이었다. 니폼니시 감독이 기꺼이 초대에 응하겠다고 했고 그가 가장 먼저 찾은 건 역시나 강창석 씨였다. 니폼니시 감독은 강창석 씨에게 이렇게 말했다. “쏙, 네가 구단과 연락해서 모든 일정을 조율해줘. 한국에는 너와 함께 가고 싶어. 네가 간다면 나도 갈게.” 니폼니시 감독에게 한국은 곧 강창석 씨였다.

니폼니시 감독의 위임을 받는 강창석 씨는 부천 구단과 연락을 나눴다. 하지만 부천은 처음에는 의아해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갑자기 니폼니시 감독의 대리인이라면서 연락을 해오니 신뢰도도 걱정됐다. 그렇지만 강창석 씨의 예전 경력을 보고 그를 전적으로 믿기 시작했다. 몇 번이나 니폼니시 감독과의 일정 조율에 차질이 있었지만 겨우 겨우 일정을 맞췄다. 니폼니시 감독이 2017년 6월 8일에 입국해 11일에 출국하는 일정이 확정된 것이다. 물론 니폼니시 감독은 “통역은 ‘쏙’이 맡아야 한다”고 했다. 1년에 세 번 정도 잠깐 한국을 방문하는 게 전부인 강창석 씨는 현지에서의 일도 멈추고 니폼니시 감독과 함께하기 위해 한국에 오기로 결정했다. 니폼니시 감독은 손녀의 손을 잡고 모스크바에서 인천행 비행기에 올랐고 강창석 씨는 타슈켄트에서 인천으로 향하는 비행기를 탔다. ‘니포 축구’를 만들어낸 두 콤비가 오랜 만에 만나는 역사적인 순간은 이렇게 완성돼 가고 있었다.

니폼니시가 뚫어지게 바라본 오래된 사진 한 장

지난 8일 강창석 씨가 먼저 인천에 도착했고 그는 니폼니시 감독을 기다렸다. “감독님을 한국에서 다시 만난다는 게 너무 좋고 다음 세대인 손녀에게 한국을 보여줄 수 있어서 떨린다.” 강창석 씨는 인천국제공항에서 니폼니시 감독을 기다리며 추억에 젖었다. 그리고 이 둘은 만나자마자 뜨겁게 포옹했다. “쏙. 왜 이렇게 살이 쪘어. 이제는 아저씨가 다 됐네.” “감독님. 이렇게 한국에서 다시 뵐 수 있게 돼 영광입니다.” 니폼니시 감독과 강창석 씨는 세월이 지났어도 영원한 콤비였다. 1년 중 320일을 붙어 다니던 이 둘은 이렇게 한국에서 오랜 만에 다시 뭉쳤다. 1995년 51세였던 혈기왕성한 감독은 이제 74세 할아버지가 돼 있었고 27살이던 대학생 통역사는 이제 50세의 중년 사업가가 돼 있었다.

니폼니시 감독과 강창석 씨는 곧바로 내한 일정을 소화했다. 팬들과의 만남을 가지기도 했고 부천 선수들과의 미팅 일정도 있었다. 지난 9일 부천 선수단 앞에 선 니폼니시 감독은 선수들에게 덕담을 건넸다. 그리고 이 러시아어 덕담이 끝나자 강창석 씨가 이를 한국어로 통역했다. 부천 선수들 앞에서 니폼니시 감독과 강창석 씨가 이렇게 메시지를 전한 건 1998년 니폼니시 감독이 팀을 떠나며 작별 인사를 나눈 뒤 무려 20년 만의 일이었다. 미팅이 끝나자 주변에서는 둘의 호흡을 극찬했다. “당장 현역으로 복귀해 일을 해도 되겠다”는 농담도 터져 나왔다. 선수들은 “통역하시는 분이 편한 언어로 통역을 해주셔서 감독님의 말을 이해하기가 더 편했다”고 했다. 오랜 만에 니폼니시 감독과 호흡을 맞춘 강창석 씨는 이렇게 말했다. “예전하고 똑같았어요. 꿈만 같은 일입니다.”

그리고 이 둘은 다음 날 기자들 앞에 섰다. 강창석 씨가 기자회견장에 입장해 만감이 교차하는 듯 주위를 살핀 건 시간을 20년 전으로 돌린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니폼니시 감독과 이렇게 한국에서 기자들을 앞에 두고 나란히 앉을 일이 다시 있을 것이라고는 믿지 못했지만 이게 현실이 된 것이었다. 그리고 강창석 씨와 니폼니시 감독, <스포츠니어스>만 따로 마주한 자리에서 강창석 씨는 지갑을 뒤지더니 사진 한 장을 꺼냈다. 강창석 씨가 이 사진을 니폼니시 감독에게 건네자 니폼니시 감독은 놀랍다는 듯이 사진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사진 속에는 20년 전 열정적이던 니폼니시 감독과 젊은 강창석 씨가 경기에 몰두해 있었다. “감독님. 저 그때 추억을 간직하고 싶어서 이 사진을 늘 지갑에 품고 다녀요.” 강창석 씨의 말에 니폼니시 감독이 씩 웃었다. 그러면서 강창석 씨에게 이렇게 말했다. “넌 내 아들이나 다름없어.”

강창석 씨와 니폼니시 감독은 이렇게 늘 붙어다녔다. ⓒ강창석 제공

20년의 우정과 호흡이 만들어낸 기자회견

강창석 씨는 2013년 니폼니시 감독의 모습을 보고는 마음이 아팠다. 니폼니시 감독이 눈에 띄게 수척해졌고 건강도 걱정됐기 때문이다. “2013년에 사모님이 돌아가셨어요. 그러면서 마음고생을 많이 하셨는지 감독님이 확 늙으셨더라고요. 그런데 오히려 지금은 얼굴이 더 좋아지셨어요. 2살 짜리 증손녀가 태어났는데 얼굴이 돌아가신 사모님하고 신기할 정도로 똑같아요. 이름도 사모님 이름을 그대로 따와 ‘폴리나’라고 지으셨더라고요. 증손녀를 보신 뒤 얼굴이 더 좋아지셨고 건강도 챙기신 것 같아 보는 내내 기분이 좋았습니다.” 이렇게 오랜 만에 밝은 얼굴로 만난 이 둘은 부천 홈 경기장에서 팬들에게 인사를 한 뒤 니폼니시 감독 밑에서 코치 생활을 했던 최윤겸 감독과 맥주를 한 잔 나누며 추억을 곱씹었다.

사흘 간의 짧은 방문 일정을 마치고 니폼니시 감독은 지난 11일 러시아로 돌아갔다. 인천국제공항까지 배웅을 간 강창석 씨는 니폼니시 감독에게 정중히 인사하며 이렇게 말했다. “감독님. 건강하세요. 다음에는 우리 제자들이 한 번 모시겠습니다. 그때 마음껏 축구 이야기해요.” 니폼니시 감독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이 둘은 20년 만의 멋진 이벤트를 마무리하고 다음을 기약하며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대부분은 니폼니시 감독이 부천종합운동장을 방문해 기자회견을 하며 쏟아낸 ‘명언’에 주목하지만 바로 그 옆에 앉아 이 명언을 한국어로 전달한 이가 누구였는지, 이 둘 사이에는 어떤 특별한 인연이 있었는지도 한 번쯤은 많은 이들이 알았으면 한다. 우리가 새겨야 할 니폼니시 감독의 명언은 이렇게 20년의 우정과 호흡, 그리고 연륜이 만들어낸 작품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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