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수저’라는 말이 생겨났다. 재력과 배경, 사회적인 영향력을 갖춘 부모를 두고 있어 가진 능력 이상의 혜택을 보는 이들을 뜻한다. 부모의 도움으로 연예계에 데뷔하는 이들을 보며 연예인을 꿈꾸는 많은 ‘흙수저’들이 좌절하기도 하고 부모의 재산 덕분에 능력도 없으면서 떵떵거리며 사는 이들 또한 평범한 이들을 힘 빠지게 만든다. ‘금수저 논란’은 청년 실업과 경제난, 그리고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이어지는 이 사회에서 젊은이들을 더 좌절하게 만들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런 ‘금수저 논란’이 생겨나면서 나는 한 축구선수를 떠올리게 됐다. ‘차범근의 아들’이라는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차두리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축구계에서 차범근의 아들이라는 명함이 엄청난 ‘금수저’인 건 맞지만 이제 차두리에게 ‘차범근의 아들’이라는 말을 하는 이들보다는 차범근 해설위원에게 ‘차두리의 아버지’라고 하는 이들이 더 많다. 오늘 칼럼을 통해 ‘금수저 논란’을 겪고 있는 많은 이들이 차두리를 보며 나아가야 할 방향을 잘 설정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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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재중 시절 차두리(11번)의 모습. 바로 그 옆은 현재 개그맨으로 활약 중인 노우진(12번)이다. (사진=노우진 제공)

차두리는 아버지 빽(?)으로 국가대표가 됐을까

차두리가 처음 성인 국가대표팀에 발탁될 당시의 상황부터 설명하려 한다. 사실 차두리는 고려대학교에 진학하기 전까지 연령별 대표팀 한 번 거쳐가지 못한 선수였다. 배재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는 스피드나 체격도 또래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평범한 선수였다. 하지만 고등학교 2학년에 접어들면서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다. 힘이 늘었고 스피드도 붙기 시작하더니 대학교 4학년생들과의 연습경기에서도 한참 선배인 수비수 두 명을 돌파해낼 정도의 선수로 성장한 것이다. 어깨싸움 한 번에 대학교 4학년생들이 나가 떨어질 정도였다. 당시 폭풍 성장한 그를 두고 많은 이들이 “차두리는 청소년 대표팀에 뽑혀야 한다”고 했지만 차범근 감독이 “얘는 더 준비해야 한다”면서 막았다는 이야기도 기정사실처럼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때까지 평범한 축구선수에 불과했던 차두리는 지금의 체형을 갖추면서 급성장을 이뤘다. 참고로 고등학교 2학년 때 키가 7cm나 크고 기량도 급성장한 것에 대해 차두리는 원인을 이렇게 평가한 적이 있다. “고래를 잡으면 키가 큰다는 이야기가 있잖아요. 고2 때 고래를 잡고 많이 성장했어요.”

일부에서는 차두리가 아버지의 영향력 때문에 아버지의 모교인 고려대학교에 진학했다고 지적하는 이들도 있다. 아마도 그랬다면 이게 바로 ‘금수저’의 시작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1998년 고등학교 3학년의 나이에 차두리는 제53회 전국고교축구선수권대회에서 득점왕을 차지하며 대학팀들의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전국 무대에서 득점왕에 오른 선수가 축구 명문인 고려대학교에 진학하는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여러 대학의 스카우트 전쟁에서 차두리가 고려대를 선택했다는 건 아버지의 모교라는 이유가 있긴 했겠지만 그가 고려대에 갈 수 있었던 걸 아버지의 절대적인 빽(?)으로 보기에는 큰 무리가 있다. 고등학교 축구의 명문 배재고의 주전 공격수이면서 전국 대회 득점왕을 차지한 선수가 좋은 대학교에 입학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차두리의 대학교 진학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더군다나 차두리의 고려대 입학이 확정됐던 당시인 1998년 말에는 차범근 감독이 프랑스월드컵 참패로 인해 엄청난 비난을 받고 있을 때였다. 오히려 차두리가 차범근 감독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역풍’을 맞아도 이상할 게 없던 시절이었다.

이후 차두리는 대학 무대에서 부상으로 고전했다. 대학 1학년 때인 1999년 말 오른발 피로골절로 1년 넘게 부상과 싸우며 치료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2000년 들어 차두리는 다시 부상을 털고 대학 무대를 누볐다. 대통령배 축구대회에서 펄펄 날았고 추계대학연맹전에서도 좋은 활약을 이어가며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회 추천으로 올림픽 상비군과 함께 훈련한 기회를 얻은 것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당시에는 차범근 전감독이 프랑스월드컵 참패의 책임을 지며 비난을 온몸으로 받아야 했고 대한축구협회로부터 승부조작에 관한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중징계까지 당한 상황이었다. 이 상황에서 그의 아들인 차두리가 협회의 혜택을 봤을 리 만무하다. 아니 오히려 ‘차범근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부당한 대우를 받을 수도 있을 만큼 협회와 차범근 전감독의 사이는 좋지 않았다. 당연히 차두리는 온전히 실력과 가능성을 바탕으로 올림픽 상비군과 함께 훈련할 기회를 얻은 것이었다. 하지만 아버지인 차범근 감독은 아들의 경기를 지켜볼 때마다 늘 만족스럽지 못한 반응이었다. “창피해서 못 보겠다.” 아들을 감싸고 돌 법도 했지만 차범근 감독은 늘 부족한 아들을 채찍질했다.

히딩크 감독 눈에 든 21세의 유망주

사실 당시 20세 이하 선수들이 모이는 대표팀에서 21세의 차두리는 사령대에 맞는 선수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차두리는 2004년 아테네올림픽에 나설 선수들과 함께 훈련할 수 있었는데 이 역시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이가 받은 혜택’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속사정은 조금 다르다. 당시 거스 히딩크 감독은 유망한 선수들을 선발하기 위해 여기저기 둘러보던 중 조금 더 이들을 면밀하게 지켜보기 위해 협회와 협의했다. “내가 더 살펴보고 싶은 선수들이 있는데 올림픽 대표팀과 함께 훈련하는 모습을 볼 수 있겠는가.” 물론 차두리만 혜택을 본 건 아니다. 당시 중앙대를 졸업하고 부천SK에서 활약하던 24세의 수비수 최정민 또한 올림픽 대표팀에서 함께 훈련을 했다. 차두리만을 위한 테스트가 아니라 히딩크 감독이 지켜보고 싶어하는 올림픽 대표팀 연령대의 어린 선수들과 그 연령대는 아니지만 차두리와 최정민을 더 면밀히 관찰하기 위한 방식이었다. 차두리에게만 돌아간 혜택이 전혀 아니었다. 당시 올림픽 대표팀 훈련 명단에는 차두리와 최정민을 비롯해 조병국, 신동근(이상 연세대), 곽태휘(중앙대), 곽희주(광운대), 김정우, 이천수, 최성국(이상 고려대), 현영민(건국대), 정조국(대신고) 등이 선발됐다.

그리고 히딩크 감독은 2001년 9월 23일부터 26일까지 이들의 훈련을 지켜봤다. 그런데 이 훈련 과정에서 차두리가 큰 일을 냈다. 히딩크 감독이 지켜보는 가운데 국가대표팀과의 연습 경기 도중 차두리가 통렬한 중거리슛으로 골문을 가른 것이다. 히딩크 감독은 연습경기와 훈련 모습을 쭉 지켜본 뒤 이렇게 말했다. “한국 축구의 미래인 젊은 선수들의 성장에 기쁘다. 한 두명은 국가대표로 발탁할 수도 있다.” 그리고 실제로 히딩크 감독은 2001년 10월 대표팀 명단에 차두리와 함께 현영민, 신동근을 나란히 선발했다. 그 어떤 올림픽 대표팀 상비군 선수라도 실력을 보여줬으면 갈 수 있는 자리였다. 반대로 말해 차두리도 실력을 보여주지 못했다면 대표팀에 가지 못했을 것이다. 참고로 함께 특별 케이스로 훈련에 임했던 최정민은 여기에서 히딩크 감독의 선택을 받지 못했다. 아직도 차두리의 첫 성인 대표팀 발탁에 관해 ‘차범근의 아들’이라는 ‘금수저’ 때문에 가능했다고 믿는 이들은 없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오히려 히딩크 감독은 차두리에 대한 언론의 관심이 뜨겁자 “그에게 들어오는 인터뷰 숫자를 제한하라”고 미디어 담당관에세 요청할 정도로 통제했다.

차두리는 대표팀 훈련 과정에서 가능성을 보여줬다. 투박하고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무엇보다도 저돌적인 스피드와 힘은 유럽 선수들과 견줘도 손색이 없다는 히딩크 감독의 평가를 받았다. 실제로 정해성 당시 대표팀 코치는 차두리와 몸싸움 훈련을 하다가 갈비뼈에 금이 가기도 했고 거칠기로 유명했던 김남일도 차두리와 충돌해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히딩크 감독은 대표팀 최종 엔트리 선정 직전까지 여러 공격수들을 놓고 고민하다가 결국 차두리를 최종 합류시켰다. 차두리가 ‘차범근의 아들’인 건 맞지만 그가 고등학교 무대에서 대학에 진학하는 순간, 그리고 대표팀에 이름을 올린 순간 모두 오로지 자신의 힘만으로 이뤄낸 성과다. 물론 여기에서 협회와 갈등을 겪고 있던 아버지 차범근 전감독의 입김이 존재할 틈은 없었다. 아버지의 좋은 유전자를 이어 받은 게 ‘금수저’라면 ‘금수저’겠지만 차두리가 대표팀 유니폼을 입기까지 능력에 비해 과한 대접을 받거나 특혜를 받은 건 없었다.

아버지의 냉정한 판단, 그리고 아들의 도전

하지만 차범근 감독은 늘 아들에 대해 박한 평가를 내렸다. 가끔은 칭찬을 해줄 법도 하지만 늘 언론 앞에 서면 아들을 한 없이 낮춰 평가했다. 2002년 한일월드컵 개막을 앞두고는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평가전 도중 실수가 많았다. 본선에서 그런 실수를 한다면 정말 혼나야 한다. 나는 대학교 때도 라면을 먹고 축구를 했는데 (차)두리는 그런 고생을 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어려움을 극복하는 능력은 내게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앞으로는 더 성장할 가능성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차범근 감독이 언론 앞에서만 그런 건 아니다. 차두리가 갓 대표팀에 뽑히고 세네갈과의 평가전에 나서 막판 5분만을 뛰었지만 아버지는 아들에게 호되게 꾸짖었다. “그렇게 엉성하게 플레이할 거면 차라리 안 하는 게 낫다.” 차두리 역시 대표팀 발탁 이후 소감에 대해 한 없이 자신을 낮췄다. “나도 마찬가지고 아버지 또한 나를 국가대표감이 아니라고 평가하는 사람 중 하나다. 오로지 실력으로 입증해야 한다.” 2002년 한일월드컵과 그 이후 A매치 등에서 아버지인 차범근 감독이 해설위원으로 아들의 경기를 중계하는 일이 잦았지만 유독 차두리가 공만 잡으면 말이 없어지고 혹여 실수라도 할 경우에는 과할 정도로 아들의 실수를 지적했다. 그러니 그 누구도 “아버지가 능력 없는 아들을 감싸고 돈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물론 차두리가 아버지의 혜택을 전혀 보지 않은 건 아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차두리가 2002년 한일월드컵 이후 독일 분데스리가에 진출할 수 있었던 건 아버지의 배경이 큰 힘이 됐다고 생각한다. 차두리가 촉망받는 선수임에는 분명했지만 당장 유럽 무대에 진출하기에는 경력이 부족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차두리는 아버지의 과거 소속팀인 레버쿠젠의 부름을 받았고 이후 임대 생활을 하며 독일에서의 플레이를 이어나갔다. 내 의견에 반대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이 부분에 있어서 나는 차두리가 유일하게 아버지의 도움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차두리는 아버지의 후광만으로 독일에서 버텨온 게 아니다. 공격수로 쭉 활약한 그는 2007년 독일 2부리그 코블렌츠에서 위엄한 도전을 택했다. 바로 풀백으로의 포지션 변화였다. 유소년 시절에는 포지션 변화가 가능한 일이지만 성인 무대에서 공격수가 갑자기 측면 수비수로 보직을 변경하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차두리는 유럽 무대에서 살아남기 위해 모험을 걸었다.

모험은 대성공이었다. 2008년에는 소속팀 팬들이 뽑은 베스트 플레이에 2위에 오르기도 했고 2010 남아공월드컵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스코틀랜드 명문 셀틱으로 이적해 2년 동안 우승을 경험하기도 했다. 지금이야 많은 이들이 측면을 치고 달리는 차두리의 모습을 익숙해하지만 원래 차두리가 최전방에서 골을 노리는 선수였다는 건 많이 잊고 있다. 그만큼 차두리는 과감한 포지션 변경을 통해 다시 한 번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 단순히 아버지의 후광만을 등에 업고 유럽 무대에서 안주한 게 아니다. 이후 2013년 차두리는 국내 복귀를 택했는데 또 다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비록 아버지가 감독 자리에서 물러났지만 차두리가 아버지의 영향력이 미치는 수원블루윙즈에 갈 것이라고 믿는 이들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차두리는 수원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인 FC서울을 새로운 팀으로 선택했다. 아버지와 늘 경쟁하던 팀으로 간 건 의외의 일이었다. 하지만 어느덧 차두리는 서울의 간판 선수로 자리 잡았고 특히나 2014 시즌에는 리그 최고의 오른쪽 수비수로 인정받으며 베스트11에 당당히 선정되기도 했다.

‘금수저 논란’, 차범근과 차두리처럼 이겨내길

차두리는 대표팀에서도 은퇴했고 지난달 31일 열린 2015 KEB 하나은행 FA컵 결승전에서 소속팀 서울을 창단 첫 우승으로 이끈 뒤 선수 생활의 마침표를 찍었다. 경기 전 이미 최용수 감독과 “이번 경기를 끝으로 현역에서 물러나겠다”는 이야기를 주고 받았지만 동료들이 큰 경기를 앞두고 동요할까봐 이 사실을 비밀로 한 뒤 우승이 확정되자 공개한 것이다. 이제 그라운드를 누비는 차두리를 더 이상 볼 수는 없지만 그는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됐고 또 존경의 대상이 됐다. 이제 어느 누구도 차두리를 ‘아버지의 후광을 입은 금수저’라고 평하지 않는다. 부모로부터 훌륭한 유전자를 물려 받은 건 사실이지만 되지도 않는 실력에 비해 과한 대접을 받은 적도 없고 오히려 겸손한 아버지의 혹독한 채찍질을 받아가며 이 자리에 섰기 때문이다. 차두리 역시 “차범근의 아들치곤 평범하다”는 평가를 이겨내기 위해 수 없이 도전하고 노력했기에 지금의 자리에서 많은 박수를 받으며 물러날 수 있게 됐다. 2006년 독일월드컵과 2014년 브라질월드컵에서 낙마하기도 했지만 그는 늘 더 좋은 모습으로 우리 앞에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