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나는 축구경기의 ‘주장’이라는 말이 정용환과 동의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내 기억 속 처음 축구경기에서 한 선수가 주장 완장을 차고 등장해 경기 전 상대팀, 심판과 악수를 나누며 무슨 천 쪼가리 같은 걸 주고 받는 모습을 봤는데 그 사람은 정용환이었고 천 쪼가리는 지금 생각해 보니 페넌트라는 것이었다. 나는 주장이 왜 있어야 하는지도 잘 몰랐지만 ‘왜’라는 의문을 갖기도 않았다. 그냥 정용환이라는 선수가 태어날 때부터 저 주장 완장이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선수였고 그냥 그가 저 완장을 계속 차고 있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나에게 있어 ‘왜’라는 의문은 필요치 않았다. 그냥 정용환이 하면 하는 건가보다 싶었다. 하지만 그저께(7일) 밤 믿기지 않는 소식을 들었다. 내 기억 속 첫 번째 주장이었던 정용환이 세상을 떠났다는 안타까운 소식이었다. 오늘은 젊은 나이에 하늘로 간 그에게 칼럼을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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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환은 상상을 초월하는 훈련법으로 불리한 신체조건을 이겨내며 국가대표로 승승장구했다. (사진=대한축구협회)

작은 키를 훈련으로 극복한 노력파 축구선수

부산 출신인 정용환은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운동 신경으로 주목 받았다. 초등학교 시절 축구부는 물론 육상부, 핸드볼부에서 활약할 만큼 그는 멀티 플레이어였다. 초등학교 6학년 때는 학교 대표로 육상 대회에 나가 맨발로 경남 전체에서 6위를 할 만큼 빨랐다. 하지만 초등학교 시절 축구부가 해체돼 체계적인 축구 훈련을 받지 못했던 그는 새롭게 축구부가 창단되는 장안중학교에 입학해 본격적인 축구선수로서의 인생을 시작했다. 이후 정용환은 중학교 3학년 때 “보다 더 큰 꿈을 키워보자”는 각오로 시내에 있는 부산진중학교로 전학을 갔다. 정용환은 부산진중학교에서 팀을 대한축구협회장배 정상에 올려 놓는 등 맹활약 펼치며 부산 지역에서 가장 촉망받는 축구선수로 성장하기 시작했고 이후 김호와 김호곤, 박성화 등 걸출한 수비수들을 배출한 동래고로 진학하며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정용환은 가진 능력만 뛰어난 선수는 아니었다. 그는 늘 상상 이상으로 노력하는 선수였다. 훈련 시간 30분 전에 미리 나와 개인 운동을 하는 건 물론 일상에서도 훈련을 접목해 생활화했다. 정용환은 수비수로서는 작은 키를 극복하기 위해 길을 걷다 베어낸 가로수가 있으면 그걸 뛰어 넘으며 점프력을 키웠다. 학교 운동장 옆 네티스장에 가 네트를 뛰어 넘는 훈련도 게을리하지 않았고 “수비수는 언제나 뛸 자세가 돼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발 뒤꿈치를 들고 버스를 탈 때도 손잡이를 잡지 않고 버텼다. 거리에서는 사물을 빠르게 파악하기 위해 ‘옆에 하얀차가 지나간다. 그 옆에는 빨간차가 서 있다’는 식으로 훈련을 하기도 했다. 동료들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의 지독한 연습벌레였던 그를 보며 당시 동래고를 지휘하던 김호 감독도 찬사를 보냈다. 그렇게 축구를 온 몸으로 익힌 정용환은 고등학교 3학년 때인 1979년 최순호, 이태호, 이길용 등과 함께 도쿄에서 열린 세계청소년축구대회에 참가하며 한국 축구의 미래를 책임질 선수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고려대에 진학한 정용환은 1983년 마침내 성인 대표팀 유니폼을 입게 됐다. 1983년 6월 열린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 태국과의 경기에서 상대를 무득점으로 꽁꽁 묶으며 화려하게 A매치 데뷔전을 소화한 정용환은 이후 붙박이 주전으로 도약했다. 1984년 LA올림픽 아시아 예선에서도 정용환의 활약은 이어졌다. 그는 1984년 프로팀 대우에 입단하면서 신인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좋은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177cm로 수비수 중에서는 좋지 않은 신체 조건이었지만 당시 네덜란드 출신 현대 공격수인 전반기 득점왕 렌스베르겐을 꽁꽁 묶으며 팀의 우승을 이끈 것이었다. 소속팀과 대표팀에서 이렇게 정용환의 시대가 활짝 열렸다. 정용환은 대우에서 11시즌 동안 168경기 9골 4도움을 기록하며 정규리그(1987, 1991), 아시아클럽선수권(1986), 아시아·아프리카클럽선수권(1987) 우승을 이끌었고 대표팀에서는 멕시코 월드컵(1986), 이탈리아 월드컵(1990) 등에 나섰고 1990년부터 주장을 맡으면서 북경 다이너스컵 우승(1990, 1992)도 경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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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 이탈리아와의 경기를 앞두고 정용환(윗줄 왼쪽에서 두 번째)이 차범근과 허정무, 조영증, 최순호, 오연교, 변병주, 박경훈, 김주성, 조광래, 박창선 등과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사진=대한축구협회)

멕시코 월드컵과 남북통일축구

정용환을 논할 때 가장 빼놓을 수 없는 경기가 바로 1985년 10월 펼쳐진 운명의 한일전이었다. 당시 한국은 1954년 스위스월드컵 이후 단 한 차례도 월드컵에 나서지 못한 팀이었다. 일본과의 마지막 두 차례 대결에서 이겨야 32년 만의 감격적인 월드컵 본선 진출을 달성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한국은 1차전 경기가 열리는 일본 도쿄 요요기 국립경기장으로 떠났다. 6만 명이 넘는 일본 관중이 경기장을 가득 채웠고 정용환에게는 183cm의 장신 공격수 하라 히로미를 막아내야 하는 특명이 떨어졌다. 당시 하라는 싱가포르와 북한, 홍콩 등을 상대로 연이어 득점포를 가동하는 등 일본의 확실한 에이스로 급부상해 있었다. 상당히 부담스러운 승부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날 정용환은 하라를 완벽히 막은 건 물론 감격적인 골까지 기록하며 영웅이 됐다. 전반 30분 정용환은 최순호가 오른쪽 측면에서 크로스한 공을 일본 수비수가 걷어내자 그대로 달려들며 강슛을 날려 일본 골문을 갈랐다. 이 공은 골네트를 맞고 튕겨 나올 정도로 강력했다.

결국 적지에서 귀중한 선취골을 넣은 한국은 이후 이태호의 한 골을 더 보태 키무라가 한 골을 넣은 일본을 2-1로 제치며 승리를 따냈다. 이어 안방에서 벌어진 2차전에서도 정용환은 하라가 공을 몇 번 잡지도 못할 정도로 완벽 봉쇄했고 허정무의 골로 1-0 승리를 따내면서 무려 32년 만의 월드컵 본선 진출이라는 위업을 달성했다. 이후 한국의 8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이라는 대기록의 출발은 이렇듯 정용환의 발에서부터였다. 정용환은 이후 멕시코 월드컵 본선에서 세계적인 공격수들을 상대했다. 아르헨티나전에서는 레알 마드리드 주전 공격수였던 호르헤 발다노에게 두 골을 내주고 불가리아와의 경기에서는 스파르타크 모스크바의 공격수 프라멘 게토프에게 한 골을 내줬다. 마지막 이탈리아와의 경기에서는 알레산드로 알토베리를 전담마크했지만 두 골을 내줬다. 하지만 그는 척박한 환경에서 자란 한계를 뛰어 넘는 능력을 선보였다. 온몸으로 상대 공격을 막아낸 것이다.

이미 한 차례 월드컵을 경험한 정용환은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당시 많은 기대를 모았다. 하지만 신은 그에게 두 번의 월드컵을 허락하지는 않았다. 주장으로 팀을 이끌었지만 아킬레스건 부상을 당해 첫 경기 벨기에전만을 뛰고 어린 홍명보에게 그 자리를 물려주게 된 것이다. 하지만 정용환은 월드컵이 끝난 뒤 한 달 후 중국에서 열린 다이너스티컵에서 또 다시 한국을 우승으로 이끌며 투혼을 발휘했다. 그리고 그해 정용환은 한국 축구 역사에 남을 주인공이 됐다. 남북통일축구 평양 원정경기에 나선 그가 주장 완장을 차고 북한 대표팀 주장과 나란히 손을 잡은 채 평양 능라도 경기장에 입장했기 때문이다. 이 장면은 남과 북이 이념을 뛰어 넘는 명장면으로 손꼽히며 많은 이들의 눈시울을 붉혔고 지금도 많은 이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참고로 그와 함께 손을 맞잡고 그라운드에 들어섰던 이는 훗날 북한 대표팀 감독을 지낸 공격수 윤정수였다. 정용환은 이렇게 주장 완장을 차고 당당하게 남과 북의 평화, 그 한 가운데 서 있었다.

경고 없는 수비수, 정용환

정용환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건 그가 8년 동안 경고를 단 한 장도 받지 않을 만큼 깨끗한 플레이를 펼쳤다는 점이다. 사실 수비수라면 무리한 반칙으로 상대 공격을 끊는 일이 자주 벌어지고 경고도 많을 수밖에 없지만 정용환은 경고가 극히 적은 선수였다. 1984년 프로 무대에 데뷔해 은퇴를 앞둔 1992년에 처음 경고를 받을 정도로 깔끔한 플레이를 펼친 것이다. 그것도 1992년 당시 럭키금성의 구상범에게 했던 반칙으로 첫 경고를 받았는데 이 진로방해 판정 역시 경고를 주기에는 다소 과하다는 논란이 아직도 남아있다. 정용환은 11년 동안 대우 소속으로 뛰며 168경기에 나서 경고를 딱 6장 기록했을 뿐 단 한 번의 퇴장도 당하지 않았다. 그는 이 비결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정당하게 상대를 제압하려면 기술이 있어야 해요. 그래서 예측수비를 터득하기 위해 숱한 노력을 기울였죠. 수비수로서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경고 숫자가 적은 이유가 이때문인 것 같아요.” 그는 A매치에서도 85경기에 나서 단 5장의 경고를 받았을 뿐이다.

정용환은 1993년 3월 캐나다와의 A매치를 끝으로 11년간 정들었던 태극마크와 작별했고 1994년 11월 럭키금성과의 마지막 경기를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1984년과 1987년, 19911년 대우의 리그 우승을 이끌었고 이해에 모두 K리그 베스트11에 올랐으며 1991년에는 리그 MVP까지 석권했던 한국 축구의 전설은 이렇게 그라운드를 떠났다. 하지만 정용환은 한 번의 더 놀라운 반전을 준비했다. 은퇴할 무렵 잉글랜드 풀럼에서 메디컬 테스트까지 통과한 것이었다. 비록 당시 풀럼은 3부리그 팀이었지만 34세의 정용환을 필요로 했다. 풀럼에서도 정식으로 그에게 선수로 뛰어줄 것을 제안했다. 비록 당시 취업 비자를 발급받지 못해 정용환의 유럽 진출 꿈은 이뤄지지 못했지만 그는 2년 동안 런던에 머물며 지도자로서의 새로운 출발을 준비한 뒤 경남 창원에 정착했다. 부산보다 유소년 축구가 활성화되지 않은 창원에서 축구부를 창단하고 ‘정용환 어린이 축구교실’도 만들어 어린 선수 육성에 매달린 것이었다. 이후 그는 대한축구협회 전임 지도자로 활약하며 부산외국어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2004년에는 정용환을 사랑하는 이들이 모였다. ‘정용환 후원회’라는 이름의 이 단체는 선수 시절부터 정용환을 전폭적으로 지지했던 이들이 기반이 됐다. 열혈 축구팬인 부산 지역 중국집 사장들을 만나게 됐고 이들에게 축구 클리닉을 열며 가까워진 것이었다. 부산 지역에만 200여 명이 회원으로 참여했고 서울에도 70여 명의 회원이 정용환과 함께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정용환은 이들과 함께 좋은 일에 앞장섰다. 중식당을 운영하는 ‘중국집 사장님’들이 모인 것에 착안해 “이왕 모인 거 함께 뜻 있는 일을 해보자”고 한 것이다. 그렇게 정용환은 자신을 따르는 이들과 함께 군부대 등으로 가 10년 넘게 짜장면 무료 급식 봉사 활동을 펼쳤다. 그는 이 무료 급식 봉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평생 축구를 하면서 사랑을 많이 받았으니 이제는 봉사하는 마음으로 돌려드리고 싶었어요.” 정용환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보호관찰 대상인 청소년들에게 축구를 지도하는 재능 기부를 하며 꿈을 심어주기도 했고 급식 봉사 활동을 하며 모은 돈은 유소년 축구 장학금으로 기탁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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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북경에서 열린 다이너스티컵에서 우승을 차지한 뒤 우승 트로피를 번쩍 들어올리고 있는 주장 정용환의 모습. (사진=대한축구협회)

내 기억 속 첫 번째 대표팀 주장, 故정용환

그런데 지난해 5월 몸에 이상을 느낀 정용환은 병원을 찾았다가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위암 말기 판정을 받은 것이었다. 곧바로 모든 활동을 접고 항암치료에 들어갔지만 몸무게가 35kg이나 빠졌고 결국 병원에서 제대로 손을 쓸 수 없는 상태가 됐다. ‘정용환 후원회’에서 후원 행사를 개최해 모금 운동을 펼칠 계획을 세웠지만 그의 몸상태는 점점 악화되고 있었다. 현역 시절 누구보다도 늠름했던 정용환은 바짝 마른 몸으로 사경을 헤매야 했다. 그리고 지난 7일 그는 향년 55세의 나이로 결국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더 안타까운 건 그를 후원하는 이들이 후원 행사를 개최하려던 게 바로 오늘(9일)이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힘을 주는 행사를 하려고 했던 오늘은 결국 고인의 발인일이 됐다. 그의 발인은 오늘 오전 9시다. 이렇게 한 시대를 풍미했던 우리의 영원한 주장이자 우리의 듬직한 수비수는 안타깝게도 아직 할 게 많은 젊은 나이에 하늘로 떠나고 말았다.

그는 참 많은 메시지를 던지고 떠났다. 정용환은 불리한 신체조건도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대표적인 선수였다. 베어낸 가로수와 테니스장 네트를 뛰어넘으며 악착 같이 점프력을 키웠기에 177cm라는 작은 키로 세계 무대에 도전장을 내밀 수 있었다. 훈련과 일상을 따로 구분하지 않고 늘 자신이 더 강해지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이런 그의 노력은 정정당당한 플레이의 밑바탕이 됐다. 수비수는 거칠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고 당연하게 생각하는 축구계에서 무려 8년 동안 경고 한 장 받지 않고도 정상을 지켜냈다. 현역에서 물러난 뒤에는 많은 이들이 주목하지 않았음에도 받은 사랑을 돌려주기 위해 노력했다. 앞으로 대한민국 축구 대표팀에는 실력과 리더십을 갖춘 주장이 계속 계보를 이어가겠지만 언제나 내 기억 속 첫 번째 대표팀 주장은 정용환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그 동안 우리는 그에게서 참 많은 걸 얻었다. 진심으로 故정용환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