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2월 31일을 끝으로 박지성은 J리그 교토퍼플상가와의 계약이 끝났다. 이미 네덜란드 PSV 에인트호벤으로의 이적도 확정된 상황이었다. 하지만 박지성은 팀을 곧바로 떠나지 않았다. 이미 계약 기간은 다 끝났지만 바로 다음 날인 2003년 1월 1일 팀이 아주 중요한 경기를 앞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일왕배 결승전이었다. 박지성은 계약 기간이 만료돼 교토 선수도 아니었지만 이날 출전을 강행해 극적인 동점골을 기록하며 팀의 일왕배 우승을 이끌었다. 계약 기간과 상관 없이 마지막까지 팀을 위해 헌신하는 그를 보며 많은 이들은 박수를 보냈다. 교토 구단에서는 계약 기간이 끝난 뒤에도 팀의 우승을 위해 헌신한 박지성에게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우린 박지성이 절름발이가 돼 돌아와도 받아줄 것이다.” 나는 실력과 경력 등을 떠나 박지성을 존경하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그는 늘 팀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할 줄 아는 선수였다.

지난 3일 충격적인 이야기가 전해졌다. 앞서 언급한 박지성과는 전혀 다른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인천유나이티드 소속 설기현이 갑작스럽게 은퇴를 발표했다는 소식이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이제 K리그 클래식 개막이 나흘 앞으로 다가온 상황에서 돌연 팀내 최다 연봉을 받는 간판 선수가 은퇴를 했다는 건 쉽게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이유가 더 실망스러웠다. 설기현이 곧바로 성균관대에서 감독직을 수행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인천 구단은 설기현이 일방적인 통보를 할 때까지 이 같은 사실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하루 아침에 가장 중요한 선수를 잃은 셈이다. 뭘 해도 용서가 되는 2002년의 영웅이 훌륭한 지도자가 되기 위해 떠난다는데 여기에서 인천 구단은 ‘을’이 될 수밖에 없었다. 언제나 2002년 월드컵 영웅은 ‘슈퍼 갑’ 아닌가. K리그 클래식 개막 나흘 전 인천은 이렇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접했다.

황당하고 충격적인 설기현의 은퇴

나는 설기현의 이 같은 행동이 너무나도 안타깝고 아쉽다. 그는 참으로 이기적인 행동을 했다. 올 시즌을 앞두고 인천은 K리그 클래식에서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전력상 잔류를 위해 싸워야 하는 인천은 부족한 자금 때문에 선수를 지키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결국 가까스로 케빈을 영입했지만 이보와 문상윤, 구본상, 남준재, 이석현 등 지난 시즌 좋은 활약을 펼쳤던 선수 상당수가 팀을 떠났다. 그래도 희망을 품을 수 있었던 건 케빈과 설기현을 활용한 공격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케빈을 최전방에 두면 설기현을 윙포워드로 돌려 보다 효과적인 공격을 할 수 있었다. 지난 시즌 교체 투입돼 나쁘지 않은 활약을 선보였던 이효균을 FC안양으로 임대 보낸 것도 케빈과 설기현, 그리고 진성욱이라는 자원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설기현이 갑자기 은퇴를 선언해 버리는 바람에 이제 인천에는 케빈과 진성욱 만이 남게 됐다. 인천은 이 공격수 두 명으로 한 시즌을 버텨야 한다.

설기현의 은퇴를 막는 건 아니다. 이제 나이가 있고 제2의 축구 인생을 그려야 할 그가 아름답게 퇴장하는 건 축구팬의 한 사람인 나로서도 바라는 바다. 하지만 시기가 너무나 이기적이었다. 만약 설기현이 지난 시즌이 끝난 뒤 구단과 상의해 은퇴를 결정했더라면 이런 차질도 없었을 것이다. 고액 연봉자인 설기현을 정리했다면 중국으로 떠난 이보를 잡을 수 있지 않았을까. 더군다나 설기현은 최근까지도 구단 동계 전지훈련에 합류해 몸을 만들고 있었다. 구단의 지원으로 의식주를 해결하며 컨디션을 관리했다. 만약 그가 일찌감치 현역에서 물러나겠다고 했으면 그의 자리에 프로 데뷔를 꿈꾸는 신예 선수 한 명이 새로운 기회를 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 설기현이 한 자리를 떡하니 차지하고 있는 동안 그 자리에 있어야 할 누군가는 결국 1군 전지훈련이라는 소중한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더군다나 설기현은 과거에도 포항에서 울산으로 옮기면서 비슷한 물의를 일으켰던 전적(?)이 있다.

인천의 피해는 이것만이 아니다. 인천은 오는 7일 광주와의 개막전을 앞두고 대대적인 홍보에 돌입했다. 그런데 모든 홍보물에 설기현의 얼굴이 다 박혀있다. 인천 시내에 걸린 홍보 현수막에서도 설기현은 비장한 표정을 하고 있다. 갑작스런 은퇴 통보에 인천 구단은 새로 제작한 홍보물을 전부 폐기해야 한다. 살림살이가 빠듯한 인천으로서는 이 돈도 너무 아깝다. 인천은 올 시즌 선수 등록을 하면서 설기현에게 공격수로는 상징적인 의미인 등번호 9번을 부여하기도 했지만 올 시즌 인천의 9번은 공석으로 남아 있게 됐다. 설기현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하루 아침에 갑작스럽게 은퇴를 선언하고 팀을 떠났지만 남겨진 인천이 감당해야 할 짐은 너무나도 무겁다. 올 시즌 내내 인천은 케빈과 진성욱 단 둘로 공격진을 꾸려야 하는데 심지어 진성욱은 부상을 당해 컨디션 난조에 빠져 있다. 어려운 사정에도 선수를 팔면서 고액 연봉자 대우를 해줬지만 설기현은 뜬금 없이 팀을 떠나고 말았다.

인천팬들의 상처는 누가 치유해 주나

설기현의 은퇴 관련 기자회견도 실망스러웠다. 나는 사실 설기현이 황당하고 충격적인 은퇴를 선언한 지난 3일 곧바로 이와 관련한 칼럼을 쓰려다가 마지막으로 그의 이야기를 한 번은 들어보고 판단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틀을 더 기다렸다. 하지만 은퇴 기자회견에서 그의 발언은 더 큰 실망감만을 안겨줬다. 설기현은 기자회견 도중 이런 말을 하며 웃었다. “사실 내가 인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크지 않다. 전력 공백은 특별히 없을 것이다.” 그가 인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지 않았다는 건 사실이지만 왜 팀 내 최다 연봉자인 그가 구단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지 않았는지는 본인 스스로가 잘 알 것이다. 설기현은 지난 시즌 부상과 컨디션 난조로 7경기에 나서 단 한 골도 넣지 못하고 시즌을 마무리했다. 지난 시즌 나는 인천축구전용구장 2층 한 구석에서 경기를 자주 지켜봤는데 늘 내 앞자리에는 설기현이 앉아 있었다. 그만큼 그는 지난 시즌 그라운드보다 관중석이 더 어울리는 선수였다. 고액 연봉자이면서도 그 대우에 걸맞은 활약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죄송함이 더 커야 하지 않을까. 이걸 그저 “나는 원래 인천에서 비중이 없었다”고 농담처럼 말하기에는 인천 팬들의 상처가 너무나도 크다.

설기현은 멋지게 은퇴할 수 있는 선수였다. 올 시즌 많은 경기에 나서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후배들을 위해 조금만 더 헌신하면 그걸로도 충분한 선수였다. “이번 시즌이 끝나면 선수 생활을 그만두고 지도자로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다”고 미리 예고했더라면 어땠을까. 그의 은퇴를 말릴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니, 적어도 지난 시즌이 마무리된 뒤 “이제 선수로서의 생활을 마감하고 싶다”고 은퇴를 선언했어도 충분했다. 그런데 시즌 개막을 불과 나흘 앞둔 상황에서의 은퇴는 구단은 물론 팬들, 동료들까지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차두리가 “올 시즌이 끝나면 현역에서 물러나 지도자 공부를 위해 독일로 가고 싶다”고 했던 것과는 참으로 비교가 된다. 미리 구단과 팬들, 동료에게 알리는 게 마지막 예의다. 설기현이 아무리 인천에서 보여준 게 없는 선수였다고 하더라도 이런 방식이었더라면 2002년 월드컵 영웅을 구단에서는 헌신짝처럼 내팽개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설기현은 스스로 아름다운 은퇴식을 차버렸다. 멋지게 박수를 받으며 떠날 수 있던 선수가 스스로 눈앞의 이익 때문에 지탄을 받아야 한다는 게 안타깝기도 하다.

감독대행이라는 꼼수 쓴 성균관대

설기현의 갑작스러운 은퇴에 대해 감독 제의를 한 성균관대의 경솔한 행동도 꼬집고 싶다. 지금 상황에서 모든 포커스가 설기현에게 집중돼 있지만 사실 성균관대의 잘못도 상당하기 때문이다. 성균관대는 1월 30일부터 2월 22일까지 신임 감독 채용 공고를 냈고 실제로 많은 지도자들이 이에 응시했다. 지난달 26일 서류전형을 합격한 다섯 명이 최종 면접까지 치렀다. 하지만 여기에 설기현은 없었다. 설기현이 응시 자격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축구 경기지도자 1급 자격증 소지자이면서 축구부 감독 유경험자에 한해 응시 자격을 부여했는데 설기현은 중·고등학생만 지도할 수 있는 2급 자격증이 전부다. 여기에 축구부 감독을 경험한 적도 없다. 그런데 성균관대는 돌연 이 응시 자격도 없던 설기현을 감독으로 뽑았다. 물론 자격이 없으니 감독이 아닌 ‘감독대행’ 꼬리표를 달아줬다. 하지만 사실상 이건 자격증 미달인 이를 감독으로 앉히려는 꼼수에 불과하다. 설기현은 감독대행을 하면서 1급 자격증을 따 대행 꼬리표를 뗄 계획이다. 이거 운전 먼저 한 뒤 운전면허 따러 가는 꼴이다.

이게 바로 편법이다. 응시 자격을 떡하니 정해 놓고 채용 공고를 낸 성균관대에서 스스로 응시 자격을 깬 채 설기현을 이런 식으로 데려가는 건 상식에서 어긋난 행동이고 정당하지 못한 꼼수다. 말 그대로 감독대행은 감독이 부재 중인 상황에서 임시적으로 이를 대체하기 위한 직책인데 성균관대는 자격이 부족한 이가 자격 요건을 갖출 때까지 감독대행이라는 직함을 줘 활용할 계획이다. 정당함과 공정함을 가르쳐야 할 아마추어 축구에서 이런 식으로 꼼수이자 편법을 쓰는 건 참으로 씁쓸한 일이다. 더군다나 멀쩡히 현역에서 뛰고 있는 선수를 이렇게 하루 아침에 감독이라는 직책으로 유혹해 빼가는 건 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이런 식이라면 성균관대에서 뛰는 선수를 중요한 대회를 앞두고 누군가가 하루 아침에 빼가도 그들로서는 할 말이 없다. 또한 설기현은 감독은커녕 아직 코치도 한 번 해보지 않은 선수다. 그런 그에게 하루 아침에 팀 운영의 전권을 내주는 건 너무나도 큰 모험이다.

우리는 지금껏 순리에 어긋난 특혜로 사회 전체가 건강하지 못한 방향으로 흐르는 걸 본 적이 많다. 스타 선수가 현역 은퇴 후 부족한 지도자 경험에도 불구하고 초고속 승진하는 모습을 보며 많은 비판을 해왔다. 그런데 이런 편법을 이제는 보란 듯이 아마추어리즘에 입각해야 하는 대학 팀도 버젓이 행하게 됐다. 아예 처음부터 설기현을 감독으로 내정했으면 응시 자격을 명문화 해 채용 공고를 내지 말았어야 한다. 대학교 감독이 되기 위해 서류를 갖추고 최종 면접에까지 임하면서 희망을 품었던 이들은 설기현 감독대행 선임 소식을 듣고 얼마나 허탈했을까. 감독대행이라는 꼼수로 자격증도 없이 감독 역할을 수행하게 될 성균관대에 대해 대한축구협회는 반드시 규정대로 처리해야 한다. 대한축구협회 징계 규정상 1급 자격증을 소지하지 않고 대학팀을 지도하는 건 지도자 교육 규정 위반으로 무기한 자격 정지와 제명까지도 내릴 수 있다. 응시 자격과 자격증 취득, 규정은 그냥 형식적으로 만들어 놓은 절차가 아니다.

설기현, 감독으로서는 책임감 보이길

성균관대 감독대행을 맡게 된 설기현의 발언도 상당히 불편하다. 그는 은퇴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도자를 할 것이라면 감독을 먼저 해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나의 철학을 실현하고 검증 받기 위해서는 감독으로 시작해야 한다. 내 경험을 내 팀에 입힐 수 있는 역할을 하는 것이 감독이다. 코치로 시작하면 그런 축구를 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여기에서 첫 번째로 알 수 있는 건 본인 스스로도 자신을 ‘감독’이라고 못 박았다는 점이다. 성균관대는 설기현을 감독대행으로 선임했지만 설기현은 이미 자신이 성균관대 감독이 됐다고 믿는 모양이다. 성균관대가 편법을 썼다는 걸 설기현이 스스로 인정한 셈이다. 그런데 설기현의 발언이 불편한 건 이 때문이 아니다. 코치로 시작하면 원하는 축구를 하지 못하니 감독부터 시작하겠다는 발언이 나는 참 부적절했다고 생각한다. 이거 지금도 초·중·고등학교는 물론 대학교와 프로팀, 실업팀에서 코치를 하고 있는 많은 이들을 힘 빠지게 만드는 말이다.

지금 K리그와 연령대 대표팀 감독을 지낸 이들은 다 코치 시절을 겪고 성장한 이들이다. 그런데 설기현이 이렇게 “코치는 내가 원하는 축구를 하지 못하니 코치 자리는 건너뛰고 감독부터 하겠다”는 뉘앙스로 말해 버리면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올라간 선배 지도자들은 뭐가 되나. 황선홍 감독은 전남에서 코치부터 시작했고 설기현에게 울며 겨자먹기로 은퇴를 허락한 인천 김도훈 감독도 성남에서 코치로 지도자 수업을 받아왔다. 울산 윤정환 감독도 2008년 은퇴 후 사간 도스에 남아 코치 생활을 시작한 뒤 수석 코치와 감독 대행 등을 경험하고 정식 감독이 됐다. 그런데 이런 모든 과정을 다 ‘스킵’하고 감독부터 시작하겠다는 건 이기적인 발언이다. 순리대로 인천에서 플레잉코치를 거친 뒤 은퇴 후 정식 코치로 몇 년 간 경험을 쌓으면 설기현은 충분히 더 큰 무대에 도전할 큰 그릇이다. 2002년 월드컵 영웅은 축구계 어디에서도 대접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선수에서 하루 아침에 감독이 된 그가 “나는 감독부터 시작하고 싶었다”고 하는 건 너무 한치 앞만 바라본 행동인 것 같다. 이거 지금 청주대학교에서 코치 생활하고 있는 이을용 코치가 들으면 ‘을용타’ 날릴 발언일 수도 있다.

설기현은 한국 축구의 영웅 중 한 명이다. 아직도 그가 2002년 한일월드컵 이탈리아전에서 멋진 동점골을 넣었을 때를 잊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설기현은 그 동안 한국 축구를 위해 많은 일을 한 선수 임에는 틀림 없다. 하지만 그래서 더 그의 선택이 아쉽다. 많은 사랑을 받았던 선수인 만큼 마지막 이별도 아름다웠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우리를 울리고 웃겼던 그 멋진 영웅의 마지막에 존경과 경의의 박수만을 보낼 수 없다는 사실이 참으로 씁쓸하다. 박지성처럼 계약 기간이 끝난 뒤에도 팀을 위해 헌신해 달라는 기대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의 예의가 있었다면 그의 은퇴가 더 아름답지 않았을까. 어찌 됐건 오랜 현역 생활 동안 우리를 흥분시켰던 설기현에게 그동안 고생했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감독으로서는 보다 책임감 있는 행동으로 제자들에게 신뢰 받는 지도자가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