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25일) 이광종 감독이 이끄는 한국은 2014 인천아시안게임 남자축구 16강전에서 홍콩과 맞붙을 예정이다. 금메달을 향해 전진하는 한국으로서는 그저 목표를 위한 관문 중 하나일 뿐일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그 상대는 워낙 약체여서 우리의 주목을 끌지도 못한다. 축구계에서 홍콩이라는 존재는 참 생소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경기를 우리의 관점이 아니라 홍콩의 관점에서 놓고 본다면 어떨까. 홍콩을 이끌고 고국으로 돌아와 한국을 적으로 맞서 싸우는 김판곤 홍콩 감독의 심정은 어떨까. 오늘은 한국-홍콩전을 앞두고 홍콩을 이끌고 있는 김판곤 감독에 대해 조명해 보려 한다. 그는 왜 축구 개발도상국(?) 홍콩과 인연을 맺게 됐을까. 지금부터 그의 특별한 이야기에 대해 시작한다.

초라한 성적 남긴 김판곤의 조용했던 홍콩 진출

김판곤은 현역 시절 그리 주목받는 선수는 아니었다. 호남대학교를 졸업하고 1992년 현대에 입단한 그는 첫해에 10경기에 나섰고 이듬해 29경기에 나서며 준수한 활약을 펼쳤지만 그뿐이었다. 1995년 정강이 부상까지 당하면서 네 번의 수술을 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벤치 멤버로 전락한 그는 이후 1997년 전북현대 다이노스로 이적해 6경기에 나선 게 프로 경력의 전부다. 5년 동안 K리그에서 53경기 출장 1도움이라는 초라한 성적만을 남긴 채 김판곤은 현역 무대를 떠나야 했다. 김판곤은 그렇게 축구계에서 잊혀지는 듯했다. 하지만 그는 서른 살의 젊은 나이에 김강남 감독을 따라 중경고등학교 축구부 코치로 활동하며 지도자 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선수로서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지도자로서의 의미 있는 첫 출발이었다.

중경고에서 2년간 지도자 경험을 쌓은 김판곤은 큰 모험을 걸었다. 지도자 수업 중 우연히 만난 홍콩축구협회 기술위원장 콕카밍의 초청으로 홍콩 세미프로 리그 소속 더블플라워라는 팀에서 플레잉코치직로 활약할 기회를 얻었기 때문이다. 한 수 아래인 홍콩에서라면 지도자 생활을 겸해 그라운드에서 선수들과 땀 흘릴 수 있다는 게 김판곤에게는 참 매력적인 일이었다.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서도 홍콩행은 현명한 선택이라고 판단했다. 그렇게 김판곤은 2000년 월봉 1000달러(약 100만 원)의 조건으로 자신과 떼려야 뗄 수 없는 홍콩과의 인연을 시작하게 됐다. 더블플라워에서 1년간 활약한 그는 이듬해 같은 홍콩 리그 소속인 불러 레인저스 플레잉 감독을 맡으며 생애 첫 감독직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당시 김판곤은 홍콩 진출 후 한국에는 해당 과정이 없어 인식조차 부족했던 지도자 라이선스 중 가장 상급인 P라이선스까지 땄다. 이는 국내 지도자 중 당시까지만 해도 유일했다. 비록 선수로서는 실패했지만 지도자로서는 남들보다 출발이 빨랐다.

김판곤 감독은 곧장 2002년부터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리그에서 하위권을 전전하며 약체로 평가받던 팀을 1부리그 3위에 올려 놓았고 FA컵에서는 결승까지 진출하는 등 눈에 띄는 성적표를 받아든 것이다. 또한 간판 공격수 쳉시오위를 비롯해 홍콩 올림픽 대표팀에 레인저스 소속 선수를 무려 한꺼번에 10명이나 배출하는 등 홍콩에서는 일약 명장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2005년 1월 김판곤 감독이 故이안 포터필드 감독의 부름을 받고 부산아이파크 코치에 선임돼 홍콩을 떠나게 되자 콕카밍 기술위원장은 이렇게 말했다. “김판곤 감독은 홍콩 축구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다. 앞으로도 그가 홍콩 축구 발전에 도움을 주길 기대한다. 언젠가 다시 그와 함께 일했으면 좋겠다.” 그렇게 김판곤 감독은 약 5년간의 홍콩 생활을 마치고 K리그 코치직을 수행하게 됐다. 무명에 가까웠던 선수가 홍콩에서 성공적인 지도자 생활을 하며 그 능력을 인정받고 돌아온 것이다.

감독대행만 세 번, 이루지 못한 K리그 감독의 꿈

그는 부산 코치로 부임하자마자 2005년 부산의 K리그 전기리그 우승과 함께 했다. 하지만 부산은 2006년 무승 행진이라는 치욕적인 행보가 무려 22경기나 이어졌다. 부산은 故포터필드 감독이 성적 부진에 책임을 지고 전격 사퇴하자 김판곤 수석코치를 감독대행으로 선임했다. 이후 김판곤 감독대행은 빠르게 팀을 수습했고 결국 지긋지긋한 무승 행진을 끊을 수 있게 됐다. 부산은 당시 리그 2위였던 포항을 2-1로 제압했고 수원과의 원정경기에서도 4-2 승리를 따내는 등 4연승을 거두며 완전히 달라진 경기력을 선보였다. 김판곤 감독도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지도자로서 K리그에 이름을 날리게 된 순간이었다. 그렇게 3개월 동안 소방수를 자처해 급한 불을 끈 부산은 이어 스위스 출신 앤디 에글리 감독을 선임했고 김판곤 감독대행은 다시 수석코치로서 새 감독을 보좌하게 됐다. 하지만 에글리 감독은 결국 1년 만에 팀을 떠나고 말았다.

또 다시 김판곤 수석코치가 감독대행이 됐다. 그는 미국 전지훈련지에서 이 소식을 접한 뒤 당황하지 않고 제자들을 독려했다. 그렇게 2주 동안 감독대행을 맡은 그는 박성화 감독이 새롭게 부산 지휘봉을 잡게 되자 다시 본연의 위치인 수석코치로 돌아갔다. 하지만 이번에도 문제가 생겼다. 박성화 감독이 부산 지휘봉을 잡은지 불과 17일 만에 올림픽 축구 대표팀 감독직을 수락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기 때문이다. 결국 부산은 또 한 번 김판곤 수석코치를 감독대행으로 앉혔다. 무려 세 번이나 감독대행을 수행한 건 K리그 역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는 2007년 말 황선홍 감독이 부임하기 전까지 또 다시 감독대행 역할을 수행했고 2008년 시즌이 시작됐다. 그런데 황선홍 감독과 함께 땀 흘리고 있을 때 홍콩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홍콩 최고 명문인 사우스차이나에서 김판곤 수석코치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 팀 감독을 맡아주세요. 당신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는 고민할 것도 없이 이 제안을 거절했다. 황선홍 감독이 부임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자신이 팀을 떠나면 팀에 좋지 않은 영향이 끼칠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사우스차이나 측에서는 “직접 부산 구단에 당신의 영입에 대해 묻겠다”고 했지만 그는 이런 사우스차이나 구단을 설득했다. 하지만 몇 달 뒤 그에게 믿기 어려운 소식이 날아들었다. 부산 구단이 코치진 개편을 하면서 결국 김판곤 수석코치도 팀을 떠나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결국 김판곤 수석코치는 갈 곳 없는 떠돌이 신세가 됐다. 당시 그는 이렇게 말했었다. “축구 지도자의 길을 포기할지 심각하게 고민했었죠.” 하지만 이 순간 사우스차이나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우리와 함께 하시죠.” 더 반가운 건 2000년 레인저스에서 지도했던 선수들이 잘 성장해 홍콩 리그 강팀이자 1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사우스차이나의 주축으로 활약 중이라는 사실이었다. 과거의 제자들도 그를 원하고 있었다.

김판곤이 홍콩으로 돌아가 이뤄낸 성과들

그렇게 그는 2008년 11월 부산에서 감독대행만 세 번을 하고 다시 홍콩으로 돌아가게 됐다. 김판곤 감독이 사우스차이나 지휘봉을 잡은 뒤 팀을 분석해 보니 팀은 엉망이 돼 있었다. 체력과 정신력이 모두 밑바닥이었고 여기에 김판곤 감독을 경계하는 선수들도 있었다. 그러자 김판곤 감독은 부산 시절 외국인 감독 밑에서 경험한 선진 기술과 자신의 체력 훈련 노하우를 접목해 강한 훈련 프로그램을 짰다. 반항하는 선수들에게는 칭찬과 따끔한 질책을 적절히 제시하며 팀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었다. 그러자 사우스차이나는 쾌속 질주를 시작했다. 2009년 2월 홍콩 신년축구대회 결승전에서는 체코 명문 스파르타 프라하를 2-1로 꺾고 우승하는 등 무서운 팀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이해 사우스차이나는 25라운드만에 일찌감치 정규리그 우승을 확정지었고 홍콩 클럽으로는 처음으로 2009 AFC컵 준결승에 진출시켰다. 그러자 홍콩 축구계는 한목소리를 냈다. “김판곤을 대표팀 감독으로 선임하자.”

홍콩 축구계의 거물이자 미디어 재벌로 사우스차이나를 운영하고 있는 스티븐 로 회장은 공식적으로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홍콩 축구를 이끌어 주세요. 대표팀을 맡아주셨으면 합니다.” 그렇게 김판곤 감독은 홍콩에 처음 진출한지 9년 만에 홍콩 최고 클럽 사우스차이나와 함께 홍콩 대표팀 감독직을 함께 수행하게 됐다. 하지만 홍콩 축구계의 요구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23세 이하 대표팀까지 맡아달라는 요구가 이어졌다. 결국 김판곤 감독은 사우스차이나와 홍콩 성인대표팀, 홍콩 올림픽 대표팀 감독까지 겸임하며 홍콩 축구의 최고 지도자로 평가받기 시작했다. 그에게는 엄청난 부담감이었지만 그만큼 홍콩 축구가 김판곤 감독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대표팀 선수의 80%가 자신이 지도하는 사우스차이나 소속이라는 점도 그가 세 팀이나 겸임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였다. 이때쯤 중동 여러 구단에서도 김판곤 감독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하지만 김판곤 감독은 오로지 자신에게 기회를 준 홍콩 축구의 발전만을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연이어 홍콩 축구계를 깜짝 놀랄 만한 대형사고를 쳤다. 2009년 8월 그가 이끄는 사우스차이나가 친선경기에서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토트넘을 상대로 2-0 완승을 거둔 것이다. 비록 친선경기였지만 당시 토트넘은 프리시즌 경기에서 바르셀로나와 1-1로 비기는 등 6경기를 통해 5승 1무를 거두고 있던 상황이었다. 토트넘은 로비 킨을 비롯해 로만 파블류첸코와 저메인 제나스 등 주축 선수들을 모두 기용했음에도 사우스차이나에 완패를 당하고 말았다. 이날 사우스차이나의 찬슈키와 리하이창 등은 프리미어리그 정상급 선수들에게도 밀리지 않는 경기력으로 홍콩 축구계를 경악케 했다. 이게 전부가 아니었다. 2010 동아시아대회 최종예선에서는 북한까지 제압하며 본선 무대에 오르는 등 더 이상 홍콩이 아시아 축구의 변방이 아니라는 점을 제대로 각인시켰다. 홍콩은 북한이 이전까지 2005년 한국 대회와 2008년 중국 대회까지 이어온 대회 결선 연속진출 기록을 멈춰 세웠다. 그러자 김판곤 감독을 향한 홍콩 축구의 열광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동아시안게임 우승, 홍콩은 ‘김판곤 열풍’

더 충격적인 사건이 이어졌다. 2009년 12월 동아시아 경기대회에서 홍콩 대표팀이 내셔널리그 선수들이 주축이 된 한국을 무려 4-1로 대파한 것이다. 비록 내셔널리그 선발팀이었지만 한국이 홍콩에 질 것이라고, 그것도 대패할 것이라고 예상하는 이들은 없었다. 아무리 내셔널리그 선발이라고 하더라도 한국과 홍콩의 축구 수준 차이는 엄청나기 때문이다. 이 승리 이후 홍콩은 축제 분위기였다. 모든 홍콩 신문이 이 소식을 1면을 통해 보도했다.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홍콩 축구팀이 월드컵 출전 자격을 가진 한국팀에 충격을 안겼다”면서 “홍콩 축구팀이 한국을 꺾은 것은 30여년 만에 처음”이라고 흥분했다. 이날 승리를 만끽한 팬들도 거리로 쏟아져 나와 한국을 제압한 기적 같은 일에 밤새 파티를 열기도 했다. 경기가 끝난 뒤 김판곤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한국 대표팀은 불과 몇 주일 전에 구성됐다. 하지만 홍콩 대표팀 선수들은 최선을 다했으며 승리에 자부심을 가질 만하다. 나도 믿을 수 없는 결과다.”

이후 홍콩은 승승장구했다. 북한과의 4강전에서 1-1 무승부를 거둔 뒤 승부차기에서 4-2로 승리하며 결승 진출에 성공한 홍콩은 결승전에서 20세 이하 대표팀을 내보낸 일본과 만났다. 결승전이 열린 홍콩 스타디움에는 3만 명이 넘는 관중이 들어차 홍콩의 축구 열기를 실감케 했다. 홍콩 행정수반인 도널드 창 행정장관도 직접 경기장에 나왔다. 또한 거리와 술집 등에서는 홍콩과 일본의 경기를 지켜보기 위해 입장권을 구하지 못한 시민들이 모여 들었다. 그리고 이 경기에서 김판곤 감독이 이끄는 홍콩 대표팀은 승부차기 끝에 4-2로 일본을 다시 한 번 제압하고 감격적인 우승을 차지했다. 이는 그동안 약체로만 분류되고 이기는 것보다 지는 게 더 익숙했던 홍콩 축구 역사에 기념비적인 우승이었다. 홍콩은 온통 축제 분위기로 물들었고 사람들은 김판곤을 연호했다. 또한 그는 2010년 5월에는 17라운드만에 사우스차이나의 홍콩 리그 우승을 확정지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홍콩에서 가장 행복한 한 시즌을 보냈다.”

하지만 그는 6개월 뒤 대표팀 감독직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대표팀 전임 감독제를 도입하기로 한 상황에서 가장 먼저 대표팀 감독직 제안을 받은 건 당연히 김판곤 감독이었다. 하지만 사우스차이나 구단을 운영하고 있는 스티븐 로 회장은 그가 팀을 떠나는 걸 원치 않았다. 워낙 홍콩 축구계에서 입김이 막강한 인물이라 그는 김판곤 감독이 대표팀 전임 지도자로 가는 대신 사우스차이나 감독에 집중해주길 원했다. 결국 아쉽지만 홍콩 대표팀 감독직을 내려 놓은 뒤 사우스차이나에 전념하기로 했던 그는 얼마 후 전격 K리그 복귀를 선언했다. 사우스차이나에 대한 애정도 있었지만 이미 한 번 발을 담궈 감독대행만 세 번을 했던 K리그에 다시 도전해 보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홍콩리그에서 최강팀을 이끄는 것보다는 새로운 도전이 필요했다. 그는 2010년 12월 K리그 경남FC 수석코치직을 수락하며 다시 한국 땅을 밟았다. 경남은 조광래 감독을 따라 브라질 출신 가마 코치가 대표팀으로 떠나자 최진한 감독과 함께 김판곤 수석코치를 영입했다.

다시 돌아간 홍콩, 김판곤의 도전은 계속된다

하지만 그의 K리그 생활은 1년 만에 막을 내렸다. 지도 방식에도 차이가 있었고 김판곤 수석코치 스스로도 “인연이 아닌 것 같다. 내 꿈을 펼칠 조건이 허락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렇게 김판곤 수석코치는 1년 만에 다시 가족이 생활하고 있는 홍콩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홍콩 축구계는 또 다시 난리가 났다. 곧바로 그에게 연락을 해 홍콩 청소년 대표팀을 맡아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이때 김판곤 감독은 단 한 가지만 요구했다. “연령별 대표팀 운영에 대한 전권을 달라.” 그러자 홍콩축구협회도 이 요구에 한 가지만을 부탁하며 응했다. “홍콩 축구의 미래를 위해 노력해 주세요.” 그렇게 김판곤 감독은 다시 홍콩에서 지도자의 꿈을 이어가게 됐다. 당시 홍콩은 2009년 동아시안게임 우승 이후 정부 차원에서 ‘피닉스 프로젝트’라는 장기 축구 발전 프로젝트를 시작했고 연령별 대표팀 관리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김판곤 감독이 이를 총지휘하게 되면서 이 프로젝트는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홍콩은 당장의 성적보다는 향후 5~10년을 내다보고 있었다. 김판곤 감독에게 전적으로 신뢰를 보내는 홍콩 측은 이후 그에게 성인 대표팀 지휘 권한까지 맡겼다.

2009년부터 김판곤 감독은 홍콩 유소년 선수들의 훈련량을 급격히 늘렸다. 기본적인 체력과 기술이 떨어진다는 판단에서다. 그러면서 점점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변화가 바로 이번 2014 인천아시안게임이다. 그가 유소년 선수들을 지도하고 4년 만에 성장한 이 선수들은 이번 대회에서 ‘중앙아시아의 강호’ 우즈베키스탄과 1-1 무승부를 거두며 모두를 깜짝 놀라게 했고 이후 아프가니스탄과 방글라데시를 2-1로 제압하고 2승 1무의 좋은 성적을 기록했다. 비록 골득실에서 밀려 우즈베키스탄에 이어 조2위를 기록했지만 홍콩은 16강에 어렵지 않게 진출할 수 있었다. 김판곤 감독이 열과 성을 다해 키워낸 선수들은 어느덧 이만큼 성장해 있었다. 비록 현역 선수 시절과 K리그에서의 지도자 생활은 그리 성공적이지 않았지만 그는 홍콩에서 지도자로서는 능력을 인정 받으며 그 꿈을 이뤄나가고 있다. 홍콩 축구가 우즈베키스탄을 상대로도 이렇게 패하지 않을 만큼 성장할 것이라고 예상했던 이들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운명의 장난일까. B조 2위로 16강에 진출한 홍콩의 상대가 바로 A조 1위인 한국이다. 김판곤 감독은 내일(25일) 조국을 상대로 운명적인 한판 승부를 펼칠 예정이다. 비록 전력 면에서는 여전히 한국에 한참 미치지 못하지만 김판곤 감독의 홍콩은 이 위대한 도전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아시아에서도 축구 변방으로 평가받던 홍콩의 성장을 이끌어 내고 있는 김판곤 감독은 우즈베키스탄과의 경기가 끝난 뒤 이런 말을 했다. “우즈벡은 우승권이지만 우린 아니다. 그럼에도 기대이상의 성과를 냈다. 우리 아이들이 자랑스럽다. 자긍심과 긍지를 느낄 만하다.” 누군가에게는 홍콩이 그저 금메달을 향해 가는 어렵지 않은 관문 중 하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한 번쯤은 홍콩 입장에서 이 경기를 바라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또한 한국 선수들이 상대를 존중하고 끝까지 최선을 다하길 바란다. 김판곤 감독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김판곤의 아이들’은 내일 한국을 상대로 어떤 경기를 펼칠까. 마음 속으로는 한국을 응원하지만 그들의 도전에도 진심으로 박수를 보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