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은성이 현역에서 물러났다. 전북 골문을 지키던 그는 어제(20일) 전주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전북현대와 상주상무의 2014 현대오일뱅크 K리그 클래식 경기를 끝으로 골키퍼 장갑을 벗었다. 무려 18년 동안 이어오던 현역 생활을 마감한 그에게 많은 이들은 박수를 보냈다. 그는 늘 화려한 위치에서 조명을 받는 선수는 아니었지만 묵묵히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던 선수로 기억될 것이다. 오늘은 모든 축구인들에게 존경 받아 마땅한 ‘전설’ 최은성의 18년 프로 생활을 재조명해보고자 한다. 그에 관한 추억 하나 하나를 살펴보면 그가 얼마나 대단했던 선수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최은성과 함께 했던 18년의 추억을 되돌아 보자.

프로 1년차 - 1997년

인천대를 졸업한 최은성은 갈 곳이 없었다. 대학 졸업 시기에 프로팀에서 먼저 연락이 와야 계약하는 줄 알고 있다가 드래프트 신청 시기를 놓친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황당한 일이지만 그만큼 최은성은 K리그에 대해 잘 몰랐다. 결국 프로 팀에 갈 수 없는 상황에서 실업팀 국민은행에 입단한 그는 7개월 만에 사표를 내고 상무에 입대해 병역 의무를 마쳤다. 그리고 1997년 K리그 드래프트를 앞둔 1996년 11월 유공과 입단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강철(현 포항 코치)이 유공에 최은성을 소개했고 유공에서도 최은성의 기량을 검토한 뒤 “드래프트 신청서를 넣으면 널 뽑겠다”고 했다. 그런데 이때 최은성의 운명을 바꾼 일이 벌어졌다. 대전시티즌이 창단하면서 우선지명권을 얻어 최은성을 선택한 것이었다. 대전은 대학과 실업 팀에서 각각 6명씩의 선수를 먼저 선발할 수 있었고 이렇다 할 대어가 없던 상황에서 최은성을 지명했다.

당초 대전은 기존 9개 K리그 팀으로부터 베스트11을 제외한 나머지 선수들 가운데 한 명씩을 데려올 수 있었고 울산이 김병지를 베스트11에 포함시킬 것이라고 판단해 올림픽 대표 출신인 울산 서동명을 수문장으로 낙점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울산은 서동명을 대전에 빼앗기지 않기 위해 “서동명도 베스트11에 포함돼 있다”고 전했다. 베스트11에 골키퍼를 두 명이나 포함한 것이었다. 결국 연맹도 고민 끝에 포지션별 구분에 대해서는 명문화돼 있지 않아 울산의 손을 들어줬고 대전은 그나마 상무에서 활약한 최은성을 대신 선택해야 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최은성과 대전의 15년 역사가 시작됐다. 최은성은 선수층이 두텁지 못한 신생팀 대전에서 첫 시즌 35경기에 나서며 서서히 팬들에게 존재를 알리기 시작했다. 대전의 역사와 최은성의 역사는 이렇게 그 시작점이 일치한다.

프로 2년차 - 1998년

최은성은 K리그 전체는 물론 대전에서도 그리 주목받는 선수가 아니었다. 대전의 스타는 1997년 신인왕을 받은 신진원과 김은중이었고 1998년에는 서동원과 강정훈 등이 가세하면서 이들에게 이목이 쏠렸다. 또한 대전은 1997년 홀로 골문을 지킨 최은성과 경쟁 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골키퍼 황세하까지 영입했다. 건국대 출신으로 192cm의 좋은 체격 조건을 갖춘 황세하의 가세로 최은성의 자리는 위태로운 듯 보였다. 하지만 최은성은 황세하와의 주전 경쟁에서 소리 없이 강한 모습을 보이며 완벽하게 승리했다. 최은성은 1998년 33경기에 나섰고 황세하는 최은성에게 밀려 세 경기에 출장하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워낙 대전의 전체적인 전력이 약한 탓에 최은성은 1998년을 호되게 보냈다. 33경기에서 무려 56골이나 내준 것이다. 그는 그렇게 실점을 하고 아쉬워하는 모습이 익숙한 선수로 팬들에게 각인됐다. K리그 10개 팀 중 9위에 머문 대전이 10위 천안일화보다도 실점이 더 많았다. 여기에 리그 최고 골키퍼인 김병지와 이운재 등이 주목받았고 특히 김병지는 1998년 프랑스월드컵에 나서 한국이 대패하는 와중에도 신들린 선방을 선보이며 전국적인 스타 반열에 올랐다. 최은성을 주목하는 이는 없었다.

프로 3년차 - 1999년

1999년은 최은성에게 있어 가장 악몽과도 같은 한해였다. 32경기에 나서 무려 55골이나 허용한 것이다. 당시 리그 8위였던 대전은 우승팀 수원의 24실점보다 두 배가 훨씬 더 넘는 골을 내줄 만큼 수비력이 좋지 않았다. 또한 최은성은 1999년 6월 포항과의 경기에서는 후반 44분 상대의 결정적인 공격 상황에서 이를 막다 퇴장을 당해 김은중이 대신 골문을 지키는 일도 있었다. 당시 이동국과 김은중, 안정환, 고종수를 비롯해 화려한 신세대 스타들이 주목을 받을 때 참 멋없고 평범한 최은성을 주목하는 이들은 없었다. 그저 최은성은 약체 팀에서 골 많이 먹는 골키퍼 정도였다. 당시 최은성이 골문을 지킨 대전은 18패를 당하며 리그 최다패의 불명예를 안기도 했다. 하지만 대전에서 최은성 외에는 대안이 없었다. 가장 헌신적이고 성실한 선수였기 때문이다.

프로 4년차 - 2000년

최은성은 2000시즌 개막을 앞두고 대전의 부주장에 선임됐다. 주장 장철우와 함께 리더십을 인정 받았다. 또한 K리그 통산 100경기를 돌파하며 팀에서도 확실한 존재로 인정 받고 있었다. 하지만 최은성은 2000년 또 하나의 불명예스러운 기록을 남겼다. 바로 역대 최단 시간 퇴장이다. 2000년 7월 성남과의 원정경기에서 경기 시작 48초 만에 상대 공격을 막다 퇴장을 당했고 이는 K리그 역사상 최단 시간 퇴장이었다. 하지만 최은성은 이때쯤부터 대전 팬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는 선수로 성장해 있었다. 비록 전국적인 스타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대전 팬이라면 묵묵히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최은성을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최은성은 2000년 K리그에서 33경기에 나서며 대전의 상징적인 선수가 돼 가고 있었다. 열악한 대전에서 이렇게 다른 팀으로 이적하지 않고 헌신하는 선수를 보며 대전 팬들은 최은성에게 박수를 보내기 시작했다.

프로 5년차 - 2001년

최은성에게 있어 가장 잊을 수 없는 한해가 바로 2001년일 것이다. 당시 ‘만년 하위권’이었던 대전은 FA컵에서 믿을 수 없는 기적을 써 내려 가고 있었다. 특히 최은성은 전북과의 준결승전에서도 120분 내내 김도훈을 앞세운 상대 공격을 완벽하게 막아냈고 승부차기에서도 선방을 이어가며 팀을 결승으로 올려 놓았다. 그리고 FA컵 결승전에서 포항을 만났다. 최은성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경기였다. 하지만 최은성은 전반 14분 상대와 강하게 충돌한 뒤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광대뼈가 골절되는 큰 부상을 당해 곧바로 구급차에 실려 응급실로 향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최은성은 병원에 가서도 텔레비전을 통해 동료들의 모습을 응원했다. 결국 대전은 김은중의 결승골로 감격적인 우승을 차지했지만 최은성은 현장이 아닌 병실에서 이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고 최은성은 지금도 그때 현장에서 함께 하지 못했던 걸 가장 아쉬운 순간으로 꼽는다.

2001년은 최은성에게 또 하나의 잊지 못할 사건을 안겨줬다. 거스 히딩크 감독이 2002년 한일월드컵을 앞두고 그를 전격적으로 대표팀에 발탁했기 때문이다. 당시 만년 하위팀 골키퍼를 대표팀에 뽑자 모두가 놀라는 눈치였다. 최은성은 2001년 9월 자신의 부산아시아드에서 열린 나이지리아와의 평가전에서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태극 마크를 달고 골문을 지키기도 했다. 김병지와 이운재, 김용대 등의 기량이 이미 검증됐기 때문에 가볍게 테스트 차원에서 최은성을 깜짝 발탁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지만 무명의 하위팀 골키퍼가 태극 마크를 단 것 자체만으로도 굉장한 충격이었다. 대표팀 발탁과 FA컵 우승, 그리고 우승 현장에 함께 있을 수 없던 큰 부상 등 2001년은 최은성에게 있어 잊을 수 없는 한해였다.

프로 6년차 - 2002년

최은성에게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2002년 한일월드컵 대표팀 최종 엔트리에 그가 발탁됐기 때문이다. 히딩크 감독은 마지막까지 최은성과 김용대를 놓고 저울질하다가 이운재, 김병지와 함께 할 골키퍼로 최은성을 낙점했다. 비록 그는 본선 무대에서 단 한 경기도 나서지 못했지만 불평 없이 끝까지 최선을 다했다. 비록 월드컵 본선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친 이운재가 모든 관심을 독식했지만 최은성은 이렇게 말했다. “경기에 나서지 못해도 괜찮아요. 이런 영광스러운 자리에 함께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저는 행복합니다.” 최은성은 비록 주목을 받지는 못했지만 소속팀 대전에서 그랬던 것처럼 성실하고 묵묵하게 자신이 할 일을 다했다. 또한 월드컵이 끝나고 2002년 10월 열린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 몬테 카를로(마카오)와의 경기에서는 프리킥으로 직접 골을 넣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에게 2002년이 영광스러운 해였던 것만은 아니다. 2002년 시즌이 끝나고 대전은 창단 이후 최대 위기를 맞았다. 1997년 IMF 위기 때 동아건설과 동양 백화점 등이 구단 운영에서 손을 떼고 팀의 재정을 도맡았던 계룡건설이 2002년 11월 경영난을 이유로 팀 운영을 포기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손을 쓰지 않는다면 대전은 해체 수순을 밟아야 했다. 그런데 최은성은 시즌이 끝난 뒤 추운 겨울 동료들을 이끌고 서포터스와 함께 거리로 나갔다. 대전을 살려달라고 호소하며 모금 운동까지 벌였다. 만약 최은성 같은 선수들이 없었더라면 지금쯤 대전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단순히 최은성은 기량만 좋은 선수가 아니라 대전을 그 누구보다도 사랑하고 이 팀을 위해 헌신하는 선수였다.

프로 7년차 - 2003년

성실함의 대명사가 된 최은성은 2003년 드디어 대전의 주장 완장을 차게 됐다. 또한 2002년 8천 5백만 원이었던 연봉이 2003년 1억 원으로 올라 마침내 억대 연봉자 대열에 합류하기도 했다. 여기에 생애 처음으로 올스타전 무대에까지 서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최은성은 올스타 선정과 억대 연봉자 등극에 대해 실력으로 화답했다. 대전은 최윤겸 감독이 새롭게 부임한 2003년 44경기 중 18경기를 승리로 이끌며 12개 팀이 치르는 리그에서 6위를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고 최은성은 37경기에 나서 39골만을 내주며 대전의 돌풍을 이끌었다. 당시 대전은 평균 관중 19,092명을 기록하며 K리그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끄는 구단이 됐고 최은성은 이 팀의 주장으로 ‘수호천왕’이라는 별명을 얻으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프로 8년차 - 2004년

만년 하위팀에서 수도 없는 실점을 내줘야 했던 최은성은 2004년 프로 입성 후 처음으로 0점대 실점률에 진입했다. 32경기에서 30골만을 허용한 것이었다. 또한 2년 연속 올스타에 선정됐고 전년도에 이어 팀에서는 주장을 맡았다. 하지만 2004년 당시 최은성의 나이는 33세로 이제 선수 생활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평가를 받기 시작했다.

프로 9년차 - 2005년

34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대전의 골문을 든든히 지키며 제몫을 다했다. 오히려 전년도 보다 훨씬 더 좋은 선방 능력을 선보였고 2년 연속 0점대 실점률을 기록했다. 최은성은 2005년 K리그 33경기에 나서 26골만을 허용하며 뒤늦은 전성기를 맞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호화군단’ 수원을 맞아 신들린 선방을 펼치며 수원의 ‘대전징크스’를 이어가는데 일등공신이 됐고 손가락 부상으로 쉬어야 하는 상황에서도 팀 사정이 좋지 않아 부상 투혼을 발휘해 감동을 선사하기도 했다. 청소년 대표팀 출신인 골키퍼 유망주 양동원이 대전 유니폼을 입었지만 최은성은 양동원과의 주전 경쟁에서도 승리하며 줄곧 대전의 골문을 지켰다.

프로 10년차 - 2006년

대전에서만 10년을 뛰게 된 최은성은 시즌을 앞두고 중국 전지훈련을 떠나 팔뚝에 문신 하나를 새겼다. 바로 대전 엠블럼이었다. 이유는 간단했지만 감동적이었다. “지금의 저를 키워준 제 가족과도 같은 대전의 상징을 새기고 싶었어요.” 대전에서 10년 동안 헌신했지만 35세가 된 최은성의 주전 경쟁은 쉽지 않아 보였다. 대전이 양동원에 이어 울산대에서 전국체전 우승을 이끌었던 유재훈까지 영입했기 때문이다. 한참 어린 동생들과 경쟁을 펼쳐야 했다. 하지만 여전히 대전의 주전 골키퍼는 ‘노장’ 최은성이었다. 오히려 최은성은 2006년 프로 데뷔 후 한 시즌 동안 가장 많은 39경기에 나서며 노익장(?)을 과시했다. 최은성은 2006년 4월 국내 프로축구 통산 12번째, 현역 선수 중에는 다섯 번째로 300경기 출전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했다.

또한 최은성은 주장으로서 동료들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승리 수당 중 5만원씩을 회비로 걷고 자체 규율을 만들어 벌금을 매겨 모은 돈으로 선수들이 직접 뽑는 이달의 최우수 선수상을 신설한 것이다. 비록 적은 상금이지만 자신처럼 묵묵히 팀을 위해 희생하는 선수들을 위해 최은성이 아이디어를 낸 것이다. 또한 수당 일부는 숙소 생활 뒷바라지를 해주는 아주머니들과 버스 기사 등을 위해 쓰기도 했다. 대전이 열악한 환경에서도 끈끈한 팀이 될 수 있었던 건 최은성과 같은 성실하고 훌륭한 리더가 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최은성은 단순히 기량이 훌륭하고 자기 관리에만 뛰어난 선수가 아니라 음지에 있는 이들까지도 챙기는 마음 따뜻한 주장으로 팬은 물론 동료들에게도 많은 사랑을 받는 선수였다.

프로 11년차 - 2007년

2003년부터 2006년까지 4년간 맡았던 대전의 주장을 2007년 강정훈에게 물려준 최은성은 그해 5월 큰 부상을 당했다. 무릎 인대 파열로 석 달 가까운 기간 동안 경기에 나서지 못한 것이었다. 36세의 최은성이 곧 은퇴할 것이라는 의견도 많았다. 하지만 그는 독하게 재활에 매달렸고 2007년 8월 다시 그라운드로 돌아왔다. 그리고 기적적인 대전의 6강 플레이오프 진출을 함께했다. 시즌 막판 극적인 4연승을 기록하며 실낱 같은 6강행 불씨를 살린 대전은 마지막 라운드에서 수원을 1-0으로 제압했고 대구가 서울을 1-0으로 이겨주는 바람에 거짓말처럼 6강 플레이오프에 진출할 수 있었다. 특히 최은성은 이 마지막 다섯 경기에서 눈부신 활약을 선보이며 부상으로 석 달 가까운 기간 동안 그라운드에 서지 못했던 아픔을 날려버렸다. 대전의 가장 극적인 순간 최은성은 든든히 대전의 골문을 지키고 있었다.

프로12년차 - 2008년

2008년 시즌을 앞두고 최은성은 김호 감독으로부터 플레잉 코치 제의를 받았다. 직접 그라운드에 나서기 보다는 이제 후배들을 위해 노하우를 전수하는 역할을 해주길 기대한 것이다. 하지만 고민 끝에 최은성은 김호 감독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하고 후배들과의 경쟁을 택한 뒤 2008년에도 31경기에 나서며 변함없이 대전의 주전 수문장으로 활약했다. 비록 대전은 14개 팀 중 13위에 머물며 최악의 시즌을 보냈지만 그 누구도 최은성을 손가락질 할 수는 없었다. 최은성이 2008년 시즌을 마감할 때까지 소화한 경기는 무려 395경기로 한 팀에서 이렇게 활약하는 이가 드문 K리그에서 최은성은 ‘진정한 전설’이 돼 가고 있었다.

프로 13년차 - 2009년

2년 간 후배에게 주장 완장을 물려줬던 최은성은 2009년 다시 대전의 주장에 선임됐다. 역시나 대전의 주장은 최은성이 가장 잘 어울렸다. 또한 그에게 있어 2009년은 기록의 역사였다. 2009년 4월 전남과의 경기를 통해 K리그 역사상 5번째로 프로 통산 400경기 출장이라는 대기록을 세웠고 바로 다음 울산전에 선발 출장해서는 401경기 출전으로 신태용이 가지고 있던 단일팀 개인 통산 최다 출장 기록과 타이를 이뤘다. 또한 이후 치러진 성남전을 통해서는 402경기 출장을 기록하며 단일팀으로는 개인 통산 최다 출장 신기록을 세우며 매 경기 본인 스스로 기록을 갱신해 나갔다. 최은성의 역사는 여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대전 구단은 최은성의 등번호 21번을 따 그가 은퇴하면 21년 동안 이 번호를 결번으로 남겨두겠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그는 장수 비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지금도 매일 한 시간씩 근력 운동을 하고 있어요. 노력은 거짓말을 하지 않거든요.” 최은성은 모두의 존경을 받는 선수가 돼 있었다.

프로 14년차 - 2010년

최은성은 2010년 시즌을 앞두고 대전 구단과 새 계약을 맺었다. 본인은 현역 생활을 더 희망했지만 구단의 강력한 요청에 따라 후배들에게 길을 터주기 위해 플레잉코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다. 훈련장에서도 자신의 훈련보다는 후배들을 지도하는 일에 더 집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양동원과 신준배 등에게 기회가 돌아갔지만 그들이 지키는 골문이 무척이나 불안했고 왕선재 감독은 다시 최은성을 중용하기 시작했다. 경기를 앞두고 최은성은 외국인 선수들을 포함한 모든 선수들을 모아 놓고 파이팅을 독려했다. 그리고 개막 후 한 동안 후배들의 플레이를 벤치에서 지켜봤던 최은성은 8경기 만에 첫 승을 거두던 순간 든든히 골문을 지키고 있었다. 그렇게 최은성은 2010년 13경기에 나서며 나이가 무색한 활약을 펼쳤다.

프로 15년차 - 2011년

승부조작이라는 믿기 싫은 사건이 벌어진 2011년 5월 대전은 엄청난 충격에 빠졌다. 상당 선수가 승부조작에 가담했다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K리그, 특히 대전을 응원하던 팬들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배신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최은성이 나섰다. 최은성은 승부조작 여파로 모두가 충격에 빠진 상황에서 전북과의 경기를 마친 뒤 기자회견장에 나와 이렇게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 “오늘 경기는 이기는 게 목적이 아니었다. 살려고 뛰었다.” 그의 진심 어린 눈물에 돌아섰던 팬들의 마음도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절박함이 담긴 최은성의 눈물은 승부조작이라는 위기를 겪은 K리그를 다시 일으키는 힘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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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성이 이렇게 전북 유니폼을 입을 것이라고 상상했던 이는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사진=전북현대)

프로 16년차 - 2012년

최은성의 축구 인생에서 가장 험난했던 해가 바로 2012년이었다. 대전 구단은 2012년 2월 29일 K리그 선수 등록 기한 마감을 코앞에 둔 시점에서 최은성과의 재계약을 포기해 버렸다. 사실상 강제 은퇴나 다름 없는 일이었다. 결국 대전팬들은 구단의 이같은 행동에 강력하게 반발하기 시작했다. 팀을 위해 15년이나 희생한 선수를 한 순간 내치는 행태에 불만을 나타내기 위해 경기장에서 걸개를 모두 거꾸로 걸어놓고 항의했다. ‘최은성이 대전이고 대전이 최은성이다’라는 걸개도 내걸렸다. 대전 시장까지 최은성을 잡기 위해 나섰지만 모두 허사로 돌아갔고 이 사건으로 인해 대전 구단 사장이 사퇴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전설’의 씁쓸한 퇴장에 팬들은 대전 구단을 향해 분노했다. K리그 역사에서 손 꼽을만한 충격적이고 안타까운 사건이었다.

하지만 은퇴 위기에까지 내몰렸던 그는 극적으로 전북 유니폼을 입게 됐다. 자유계약선수 이적 마감 시한을 사흘 남겨둔 시점에서 전북이 최은성에게 입단을 제안한 것이었다. 최은성은 대전을 떠나는 게 가슴 아팠지만 자신을 원하는 구단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했다. 결국 전북에 연봉을 백지위임했고 극적으로 전북 선수가 될 수 있었다. 최은성의 축구 인생에 있어 가장 위기였고 가장 극적이었던 순간이었다. 대전월드컵경기장 한 켠에 걸려 있던 그의 경기 출장수도 ‘464경기’에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최은성은 전북으로 이적해 2012년 34경기에 나서며 보란 듯이 멋진 활약을 이어갔다. 1년 단기 계약이었지만 적지 않은 나이에도 맹활약하는 최은성을 보고 전북 구단은 시즌이 끝나자마자 최은성과 재계약을 하면서 전폭적인 믿음을 보여줬다.

프로 17년차 - 2013년

전북 유니폼을 입은 최은성은 2013년 3월 울산과의 경기에서 500경기 출장이라는 엄청난 기록을 세웠다. 이는 김병지와 김기동에 이어 K리그 역사상 세 번째 대기록이었다. 최은성은 2013년 상무에서 돌아온 권순태와의 주전 경쟁에서도 앞서는 모습을 보이며 여전히 골문을 지켰다. 또한 2013년 7월 성남과의 경기에서는 페어플레이 정신이 빛나는 아름다운(?) 자책골을 기록해 박수를 받기도 했다. 부상 선수 발생으로 성남이 밖으로 걷어낸 공을 이동국이 다시 성남에 넘겨주는 과정에서 골로 연결돼 소동이 벌어졌고 최은성은 경기가 속개되자 자신의 골문에 스스로 공을 차 넣어 매너를 지켰다. 자신의 골대에 골을 넣는 최은성의 모습은 진정 페어플레이가 뭔지 잘 보여주는 감동적인 장면이었다. 결국 이 경기에서 전북은 성남에 2-3으로 패했지만 최은성은 페어플레이 정신에 위배되는 승리보다는 아름다운 패배를 택했다.

프로 18년차 - 2014년

18년 동안 늘 성실하고 묵묵하게 골문을 지켰던 최은성은 바로 어제(20일) 이 길고도 험난했던 현역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자신의 출장 경기수인 532번의 등번호를 달고 경기에 나서 전반전을 무실점으로 막아내고 18년 간의 프로 선수 생활을 마감한 것이다. 최은성은 이 경기 하프타임에 열린 은퇴식에서 뜨거운 눈물을 흘렸고 팬들은 그의 이름을 연호하며 박수를 보냈다. 늘 빛나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땀 흘렸던 그는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래서 더 아름다웠던 선수였다. 이운재처럼 대표팀에서 주목받은 적도 없고 김병지처럼 개성 넘치는 선수도 아니었지만 최은성은 늘 묵묵히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했다. 그래서 그가 더 대단한 게 아닐까. 그는 선수 생활 내내 우승 트로피 한 번 들어보지 못한 선수였지만 우승이라는 경력,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닌 대단한 선수였다. 18년 동안 묵묵히 최선을 다했던 최은성이야말로 평범해서 더 위대했던 우리의 영웅이었다. 그에게 진심으로 머리 숙여 존경의 마음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