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어떤 선수의 골보다도 의미 있고 값진 골이었다. 바로 이근호에 관한 이야기다. 어제(18일) 열린 2014 브라질월드컵 러시아와의 H조 조별예선 첫 경기에서 한국의 선취골을 뽑아낸 이근호(상주상무)를 바라보며 여러 생각이 들었다. 선수 생활을 이어가면서 누구보다도 힘든 시기를 많이 겪었던 이근호는 충분히 월드컵이라는 큰 무대에서 주목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선수다. 월드컵에서 행운의 골을 넣고 화려하게 빛나는 이근호를 보며 부러워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남몰래 지금까지 고통을 참아온 이근호에 대해서는 많이 이들이 관심을 두지 않는다. 지금부터 그저 연봉 178만 원짜리 선수라는 가벼운 그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에 이르기까지 축구선수로서 겪어온 이근호의 역경을 공개하려 한다.

K리그 2군이 된 고교 최고의 스타

이근호는 어린 시절부터 남다른 운동 신경을 자랑했다. 육상부에서 활약할 만큼 발이 빨랐던 그는 초등학교 시절 축구부에 가입한 뒤 돋보이는 실력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는 학창시절 내내 어려움 없이 꿈을 키워나갔다. 쾌활한 이근호는 남들이 다 기피하는 숙소 생활도 즐거운 마음으로 임했다. 이근호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하대성과 함께 국가대표로 그라운드를 누비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특히 부평동중을 거쳐 ‘축구 명문’ 부평고에 진학한 그는 고교 최고의 선수로 이름을 날렸다. 고등학교 3학년 시절에는 주장 완장을 차고 최전방 공격수로 전국체전 우승을 비롯해 전국대회 3관왕을 휩쓰는 등 실력을 인정 받아 프로와 대학의 구애를 동시에 받기도 했다. 축구계에서는 최고의 학교인 고려대에서도 이근호에게 러브콜을 보냈다. 하지만 그는 하루라도 빨리 프로 무대에 입성하고 싶은 마음에 고려대의 제의를 거절하고 2005년 신생팀인 K리그 인천유나이티드행을 확정지었다.

하지만 장밋빛일 것이라는 기대와 달리 이근호는 프로 무대에서 좌절을 맛봐야 했다. 인천 출신으로 고향팀에 입단한 고교 최고의 스타였지만 K리그의 높은 벽에 부딪히고 만 것이다. 고등학교 무대와 K리그는 확실히 달랐다. 또래들과 경쟁하다 경험이 풍부한 선배들과 경쟁하게 된 현실에 쉽게 적응하지 못했고 2군을 벗어날 수 없었다. 벤치가 아니라 관중석에서 동료들의 플레이를 지켜봐야 하는 신세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같은 시기에 입단한 친구 이요한은 1군에서도 주전으로 뛰며 승승장구했지만 이근호는 늘 이런 친구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자신감이 바닥을 친 이근호는 결국 2군에서도 후보로 밀리는 신세가 됐고 2군 경기가 열리는 날에도 경기장에 가지 못하고 숙소에 남아 있어야 했다. 이대로 축구 인생이 끝나고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그렇게 아무에게도 주목받지 못했던 이근호의 2005년이 막을 내렸다. 고교 최고의 스타였던 그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나마 2006년이 되자 이근호에게 뛸 기회가 주어졌다. 하지만 그 무대는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는 1군 무대가 아니라 철저하게 소외된 2군 무대였다. 그런데 주전 경쟁에 대한 마음을 비우고 운동에만 전념하자 조금씩 고등학교 시절 기량이 나오기 시작했고 2006년 2군리그에서 7골 7도움을 기록하며 2군리그 우승과 함께 MVP에 올랐다. 처음 프로에 입단할 때 품었던 꿈에는 한참 미치지 못했지만 그래도 2군 무대에서나마 뛸 수 있다는 사실이 행복했다. 2군리그에서 인정받은 그는 시즌이 끝난 뒤 그를 눈여겨 보던 대구FC의 선택을 받아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게 됐다. 윤주일에 현금을 얹어 이근호와 맞바꾸는 트레이드였다. 하지만 당시 일부에서는 이런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즉시 전력감인 윤주일을 영입한 인천이 훨씬 이득인 트레이드다.” 그렇지만 이근호는 이런 평가에 신경 쓰지 않았다. 자신의 가치를 인정해 주고 뛸 기회를 준 팀이 생겼기 때문이다.

더 큰 무대를 노리던 ‘태양의 아들’

이근호는 대구FC 유니폼을 입고 펄펄 날았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단짝 친구로 함께 공을 차던 하대성이 이미 대구에서 자리를 잡은 터라 적응에도 큰 어려움이 없었다. 2007년 시즌이 시작되자 이근호는 1군 경기에 선발 출장해 놀라운 활약을 펼치기 시작했다. 화끈한 공격 축구를 펼치는 대구에서 이근호의 진가가 발휘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근호는 2007년 K리그에서 10골 3도움을 기록하며 불과 지난 해까지 2군리그를 전전하던 선수라고는 믿기지 않는 플레이를 펼쳤고 마침내 국가대표에 발탁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프로 무대 입성 후 자신감을 잃고 좌절만 하던 이근호의 전성시대가 열린 것이다. 더군다나 이근호는 2007년 6월 열린 이라크와의 A매치 데뷔전에서 데뷔골을 기록했고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예선에서도 좋은 활약을 펼쳤다. 어느덧 국가대표 유니폼이 익숙한 선수로 성장했다. 그는 대구 소속으로 2008년 K리그에서는 무려 13골과 6도움을 기록하며 ‘태양의 아들’이라는 별명까지 얻게 됐다.

그러자 더 큰 무대를 향한 도전 의식이 생겼다. 자유계약(FA) 신분이 된 이근호를 노리는 팀은 많았다. K리그 수원과 성남, 전북 등에서 이근호 영입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저 그라운드에 서는 게 목포였던 이 선수는 1년 연봉으로 10억 원은 족히 받을 수 있는 스타로 성장했다. 대구에서는 이근호의 몸값이 워낙 치솟아 잡고 싶어도 잡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근호는 K리그 어떤 팀에 가더라도 최고 대우를 받으며 어렵지 않은 생활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해외 무대에 도전해 보고 싶어요. 다만 일본 J리그에 갈 생각은 없습니다.” 프랑스와 그리스, 터키, 덴마크 등 유럽 다수의 리그에서 이근호에게 큰 관심을 보였고 잉글랜드 블랙번 또한 이근호를 눈여겨 보고 있었다. 국내에서는 이근호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쏟았다. 그가 선택만 하면 금방이라도 유럽 유명 구단과 계약서에 사인을 할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에이전트 측에서는 여러 차례 “계약이 임박했다”는 소식을 흘렸고 “프랑스 낭트와는 계약이 90%까지 확정이 됐다”고도 했다.

하지만 결국 낭트 이적이 물거품이 되자 이근호는 에이전트와 함께 자신에게 관심을 보인 네덜란드로 날아갔다. “국내에서 잘 만들어진 영상과 화려한 이력서만 보내 우리가 누군지도 모를 유럽 구단에 어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느낀 이근호가 선뜻 네덜란드 빌렘II 입단 테스트에 응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일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입단 테스트에서도 합격점을 받았고 계약 제안이 바로 이어졌다. 하지만 네덜란드 리그에서 비유럽 선수는 40만 8천 유로를 들여야 등록할 수 있어 현실적인 제약이 있었고 빌렘II는 국내 중계권과 후원사를 연계하려고 했지만 이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일이었다. 빌렘II의 중계권을 구입할 만한 국내 방송사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후 이근호는 프랑스 리그1 파리생제르맹으로 발길을 돌려 입단 테스트에서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지만 이번에는 프랑스 국적자만이 FA(자유계약선수)로 등록할 수 있다는 규정 때문에 입단이 무산되는 아픔을 겪었다. 파리생제르망 측은 이근호의 영입 실패를 아쉬워하며 이렇게 말했다. “여름 이적 시장이 개방 되는대로 다시 영입에 착수할 테니 기다려달라.”

이근호는 유럽에 머물면서 언제나 준비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홀로 노력했다. 아무도 계획을 세워주지 않았지만 숙소에 있는 러닝머신 위를 달렸고 혼자 체육관에 가 운동을 했다. 또한 잔디를 밟지 않으면 감각이 떨어진다는 생각에 혼자 숙소 근처 잔디 구장에 가 공을 찼다. 이근호는 “군 문제와 이적료 발생 문제 때문에 지금이 아니면 유럽에 진출할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다”면서 “힘이 닿는 데까지 노력하겠다. 무적 신분도 각오하고 있다”고 했다. 네덜란드와 프랑스 진출이 무산된 뒤 비록 해외 유명 리그는 아니었지만 이후 덴마크 오덴세BK와도 계약이 성사 단계에 이르렀다. 하지만 오덴세 측에서 장기 계약을 원하는 바람에 기간에 대한 이견으로 계약이 성사되지 못했다. 그러면서 점점 그가 갈 수 있는 곳의 이적시장의 문은 닫히고 있었다. 그나마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이적 시장이 열려 있었지만 그곳은 워크퍼밋(취업비자) 문제로 입단 자체가 불가능했다. 국내에서는 “이근호가 유럽 배낭여행을 떠났다”는 비아냥이 들려왔다.

그가 절대 가지 않겠다던 일본으로 간 이유는?

이근호는 결국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한 채 국내로 돌아와야 했다. 하지만 좌절할 틈이 없었다. 2010 남아공월드컵 아시아 예선을 앞두고 국가대표팀에 합류해야 했기 때문이다. 유럽에서도 꾸준히 개인 훈련을 해온 이근호는 귀국 후 곧바로 국내 모 아마추어 팀 훈련에 합류한 뒤 연습경기를 통해 실전감각도 유지했다. 파주트레이닝센터에 임시 소집돼 치른 국가대표 체력 테스트에서는 다른 선수들과 견주어도 손색없는 체력을 자랑하며 합격점을 받았다. 무적 선수의 국가대표 발탁 논란이 있었지만 대표팀 코치진은 이근호를 직접 본 뒤 그의 몸 상태가 떨어지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또한 이근호는 자기가 더 아플 텐데도 유럽 진출 실패로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는 자신의 에이전트를 위로하기도 했다. “그런 이야기에는 신경 쓰지 않을 테니 사장님도 신경 쓰지 마세요. 우리가 유럽에 가 무슨 노력을 했고 무얼 느꼈는지 아무도 모르잖아요.” 이근호는 아팠지만 금방 다시 일어났다. 아니, 아파할 시간도 없었다. 그런 무적 신세인 그가 이제 선택할 수 있는 곳은 단 한 군데 뿐이었다.

바로 호기롭게 그가 “가지 않겠다”던 J리그였다. ‘시즌의 4분의 3 시점이 되기 전에는 무적 선수와 언제든 계약이 가능하다’는 규정이 있는 J리그로의 입단만 가능한 상황이었다. 결국 유럽에 가 온몸으로 부딪혔지만 유럽 진출에 실패한 이근호는 자신과의 약속을 여길 수밖에 없었다. J리그 사무국은 각 구단에 “유럽 진출을 위한 수단으로 J리그를 이용하려는 이근호를 웬만하면 영입하지 말아달라”는 공문을 보냈지만 그를 강력하게 원했던 주빌로 이와타의 계약 조건은 파격적이었다. 계약금 없이 9개월 단기 계약을 맺고 선수가 유럽 진출을 원할 경우 언제든 이적료를 받지 않고 풀어주기로 하는 엄청난 조건이었다. 그렇게 이근호는 20년과도 같은 기나긴 두 달가량을 유럽 진출에 매달리다 실패하고 이와타 유니폼을 입게 됐다. 언제든 다시 유럽 무대에 도전할 생각으로 이와타와의 단기 계약에 사인을 한 것이다. 그런데 이때부터 이근호의 놀라운 활약이 시작됐다. 이근호는 70여 일 남짓한 기간에 J리그에서 6골 4도움을 기록하는 맹활약을 펼치며 이와타를 리그 9위까지 끌어올렸고 이근호 영입 전 2무 3패로 최악의 출발을 보인 이와타는 그의 합류 후 5승 1무 3패라는 만족스러운 성적을 냈다.

처음 그를 영입할 때 “잠시 머물다 갈 선수”라고 좋지 않은 시선을 보냈던 이와타 팬들은 불과 3개월 만에 8경기에서 6골을 뽑아내며 헌신적인 활약을 펼친 이근호의 열렬한 팬이 돼 있었다. 이근호가 다시 3개월 만에 유럽행을 추진하자 이와타 클럽 역사상 처음으로 팬들의 요청에 따라 사장과 부사장 그리고 강화부장까지 나서서 잔류를 요청했을 만큼 이근호의 존재감은 대단했다. 하지만 이근호는 멋지게 작별을 고했다. 그는 2009년 6월 이와타 홈 경기에서 팬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전하고 다시 유럽행을 타진했고 그를 향해 팬들은 “꼭 유럽에서 성공하라”고 격려했다. 이근호는 겨울 이적시장에서 자신을 영입하지 못한 뒤 “여름에는 너를 꼭 영입하겠다”고 약속한 파리생제르망을 떠올렸다. 그의 에이전트 역시 “파리생제르망 이적이 확정됐다고 보면 된다. 다른 유럽 구단들의 영입 제안이 있더라도 파리생제르망과의 의리를 생각해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다”고 할 만큼 유럽 진출에는 자신이 있었다. 금방 파리로 건너가 메디컬 테스트를 마치고 입단식을 치를 계획이라는 보도도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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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는 J리그에 진출해 최고 외국인 선수라는 평가를 받을 만큼 좋은 활약을 펼쳤다. (사진=주빌로 이와타 공식 홈페이지)

남아공행 좌절, 믿지 못할 충격

하지만 이근호는 약속된 7월 초에 프랑스 파리로 가지도 못한 채 한국에 남아 있었다. 파리생제르망이 준비 중이라는 계약서는 보지도 못했다. 점점 일이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한 것이다. 파리생제르망 알랭 로슈 사무국장이 직접 전화로 “영입 선수가 많아 이근호의 이적이 늦어지는 부분에 대해 미안하다”면서 “금방 구체적인 계약서를 작성해 보내겠다”고 했지만 프랑스 현지에서는 전혀 다른 소식이 흘러나왔다. 프랑스 언론은 파리생제르망 알랭 로슈 사무국장의 말을 빌려 “한국에서는 이근호의 파리생제르망 이적이 기정사실화돼 있지만 아직 구단 일정에 그의 입단식이 잡혀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보도를 내보냈다. 당시 마테야 케즈만, 루도빅 지울리, 페기 루인둘라 등 공격수가 넘치던 파리생제르망이 이 와중에 공격수 메블뤼 에딩을 영입했고 기욤 오아로와도 재계약을 마쳤고 이근호는 그들의 관심 밖이었다. 결국 이근호가 국내에 남아 기다리는 동안 앙투앙 콤부아레 당시 파리생제르망 감독은 언론을 통해 이렇게 말했다. “올여름 선수 영입은 끝났다. 구단이 보유한 공격수 가운데 한 명이 이적 또는 임대로 떠나야 이근호를 데리고 올 수 있다.”

이근호의 유럽 진출은 또 다시 물거품이 됐다. 철썩 같이 믿었던 파리생제르망이 결국 간만 보다 다른 공격수를 택하면서 오로지 그들의 말만 믿고 있던 이근호는 또 다시 갈 곳 없는 신세가 됐다. 결국 그는 다시 J리그로 돌아가야 했다. 이미 한 달 전 성대한 고별식까지 치렀던 이와타에 한 달 만에 다시 돌아가는 머쓱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근호는 이와타와 다시 1년 계약을 맺으면서 종전 연봉의 세 배에 이르는 약 10억 원에 계약을 마쳤고 이와타 팬들도 한 달 만에 다시 돌아온 이근호에게 뜨거운 환영의 박수를 보냈다. 하지만 고액 연봉자가 됐음에도 그는 많은 돈을 벌어 기쁜 마음보다도 유럽으로 날아가지 못한 걸 더 아쉬워했다. 그는 남모르게 눈물을 흘려야 했다. 이근호로서는 군 문제가 눈 앞에 닥쳐 다시 유럽 진출 기회가 언제 또 올지, 영원히 없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사람들은 “J리그에는 가지 않겠다던 이근호가 말을 바꿔 J리그로 가더니 이번에는 고별식까지 치러놓고 또 J리그로 복귀했다”며 조롱하기도 했다. 하지만 여러 번 좌절했던 이근호는 다시 일어섰다. 그의 가슴에는 태극마크가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유럽 진출 문제로 고민에 빠졌던 시기에도 그는 대표팀에만 오면 펄펄 날았다. 2010년 남아공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6경기에서 세 골을 넣으며 허정무호의 간판 공격수로 자리 잡은 것이다. 특히 사우디아라비아를 상대로 19년 만에 승리를 따낸 2008년 11월 당시 결승골을 기록한 것도 바로 이근호였다. 이근호는 허정무호의 월드컵 본선 진출에 일등 공신이었다. 평가전에서도 두 골을 뽑아내며 펄펄 날았다. 하지만 막상 남아공월드컵이 다가오자 그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A매치에서 10경기 연속 무득점에 머무른 것이다. 결국 이근호는 두 차례 유럽 진출 실패 충격을 넘어서는 믿을 수 없는 소식을 접하고 말았다. 남아공월드컵 최종 엔트리에서 그의 이름이 제외됐다는 소식이었다. 대표팀의 남아공행을 가장 앞에서 이끌었던 이근호의 충격적인 엔트리 탈락이었다. 이근호는 이 소식을 접하고 동료들이 남아공으로 갈 짐을 싸는 동안 파주트레이닝 센터를 떠나 집으로 갈 짐을 싸야했다. 마지막으로 방에서 펑펑 울었다. 허정무호가 원정 첫 16강 진출에 성공해 전국이 환호성으로 물들 때 이근호는 그 모습을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지켜만 봐야 했다.

ACL 우승과 올해의 선수상, 그리고 병역의 의무

대표팀에서 큰 좌절을 맛본 이근호는 새로운 환경이 필요했다. 이때쯤 주빌로 이와타를 떠나 감바 오사카로의 이적을 확정지었다. 비록 월드컵 무대에는 나서지 못했지만 2011년 감바에서 15골 7도움을 기록하며 최고의 활약을 선보였다. 월드컵 엔트리 탈락의 분풀이를 제대로 한 셈이다. 이근호는 날고 긴다는 외국인 선수가 즐비한 J리그에서도 특급 외국인 선수로 분류됐다. 이근호는 2011년 J리그 최종전에서도 혼자 두 골 한 개의 도움을 기록하는 등 감바를 리그 3위로 올려 놓는데 일등공신이 됐다. 하지만 J리그에서 최고의 선수라 평가받던 이근호에게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일이 있었다. 바로 군대 문제였다. 대한민국 남자라면 피할 수 없는 병역의 의무를 이행해야 할 시기가 온 것이다. 더군다나 규정상 국내 리그에서 뛰는 선수들만이 상무나 경찰축구단에 입대할 수 있어 이근호는 자의와 상관없이 국내로 복귀해야 했다. K리그 ‘전통의 명문’ 울산이 바로 그의 새 둥지였다. 이근호는 울산에서 1년간 뛴 뒤 상무에 가겠다고 마음 먹었다.

하지만 그에게 울산은 그저 잠시 군 입대를 위해 스쳐지나가는 팀이 아니었다. 주빌로 이와타와 감바 오사카에서 그런 것처럼 짧지만 역사에 남을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2012년 이근호는 K리그에서 8골 6도움을 기록했고 특히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에서 네 골을 기록하며 김신욱과 함께 팀의 역사적인 아시아 정상 등극을 이끌었다. AFC 올해의 선수상 역시 당연히 그의 몫이었다. 다시 돌아간 대표팀에서도 펄펄 날았다. 남아공월드컵 아시아 예선에서 활약하고 정작 본선 무대를 밟지 못했던 그는 2014 브라질월드컵 아시아 예선에서도 강렬한 인상을 보여줬다. UAE와의 원정 경기에서 결승골을 뽑아내는 등 흔들리던 대표팀의 에이스 역할을 다시 시작하게 됐다. 언제나 그렇듯 그는 자신의 소속팀에서 최선을 다해 팬들을 감동시켰고 언제나 그렇듯 시련을 딛고 대표팀에서도 자신의 역할을 다했다. 그렇게 이근호는 울산에 챔피언스리그 우승 트로피를 안긴 뒤 상무로 떠나게 됐다.

호기롭게 유럽 진출을 노렸던 어린 선수는 어느덧 맞은 전성기를 군대에서 보내는 신세가 됐다. 하지만 그는 상주 상무에 입단해 2013년 K리그 챌린지 무대에서 단연 돋보이는 활약을 펼쳤다. 9경기 연속 공격 포인트를 뽑아내는 등 15골 6도움을 기록하며 상주의 K리그 챌린지 우승과 함께 K리그 클래식 승격을 이끌었다. 베스트11 공격수 부문, 득점왕, MVP 3관왕도 모두 그의 차지였다. 비록 한 단계 낮은 K리그 챌린지였지만 그는 리그내 다른 선수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독보적인 활약을 선보였고 대표팀에도 꾸준히 기여했다. 하지만 아무리 대표팀에서 좋은 활약을 펼쳤다고 해도 4년 전 엔트리 탈락으로 아픔을 겪었던 이근호는 브라질월드컵 최종 엔트리 발표 때까지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2014년 들어 부상으로 소속팀 경기에 나서지 못하는 등 4년 전 아픔을 또 겪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하지만 지난 5월 홍명보 감독은 고민 끝에 이근호를 브라질에 데려가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수 없이 돌고 돌아 이근호는 그의 오랜 친구인 하대성과 함께 생애 첫 월드컵 무대에 설 기회를 잡았다.

월드컵 데뷔전에서의 거짓말 같은 골

물론 그는 대표팀에서 주전 공격수가 아니었다. 박주영도 있었고 김신욱도 있었다. 사람들은 이 둘을 놓고 누가 선발로 기용될지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근호는 아예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는 대표팀의 최종 모의고사였던 튀니지전과 가나전에서도 후반 들어 교체 투입되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이근호는 4년 전 아픔을 잊지 않았다. “엔트리 탈락 경험이 있어서 하루하루가 너무나 소중하고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마음 뿐”이라고 했다. “언제 투입되건 90분을 뛴 것처럼 다 태우고 나오겠다”는 생각으로 월드컵을 준비했다. 그리고 그는 늘 그랬던 것처럼 러시아와의 운명적인 브라질월드컵 첫 경기를 벤치에서 시작했다. 월드컵 무대에서 벤치에 앉아 있는 것, 몸을 푸는 것에도 감사한 마음이었다. 그런데 홍명보 감독이 예상보다 일찍 이근호를 불렀다. 박주영이 부진한 모습을 보이자 후반 11분 조금 이른 시기에 이근호에게 교체 투입을 지시한 것이었다. 이제 서른을 바라보는 나이에 처음으로 밟는 월드컵 무대였다. 이근호는 박주영을 대신해 그렇게 그라운드에 들어섰다.

그리고 12분 뒤인 후반 23분 이근호에게 기회가 왔다. 한국영이 중원에서 찔러준 공을 잡고 질주하기 시작했다. 이근호 앞을 지키고 있던 러시아 수비수들이 뒷걸음질 치자 그는 과감하게 슈팅을 날렸고 이 공은 러시아 골키퍼 이고르 아킨페프 정면으로 날아갔다. 그런데 이때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아킨페프가 잡았다 놓친 공이 거짓말처럼 러시아 골문 안으로 들어간 것이었다. 월드컵 데뷔전에서 터진 이근호의 골이었다. 소치 동례올림픽 당시 억울하게 금메달을 빼앗긴 김연아를 위한 세리머니를 준비했지만 순간 머리 속에 하얗게 변했고 믿을 수 없는 골을 넣은 이근호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내달리다 동료들과 뒤엉켜 축하를 받았다. 세상에서 가장 촌스러운 세리머니였지만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동료들과 기쁨을 나눈 이근호는 멋지게 거수 경례를 하며 군인다운 늠름한 모습을 보여줬다. 비록 이후 한 골을 내줘 한국은 러시아와 1-1 무승부를 기록했지만 이근호는 경기가 끝난 뒤 이렇게 말했다. “오랫동안 꿈꿔 왔던 골입니다. 그런데 막상 현실이 되니 아직 실감이 나질 않네요.”

누군가는 이게 상대 골키퍼의 실수에 의한 골이라고 폄하한다. 하지만 이근호는 이 무대에 서 이 슈팅을 날리기 위해 그동안 숱한 좌절을 딛고 일어났다. 만약 그가 중간에 포기했다면 그에게 이런 기회도 오지 않았을 것이다. 유럽으로 가 더 빛나는 선수 생활을 하고 싶었던 이 어린 선수는 이제 군대에서 1년에 2백만 원이 채 되지 않는 돈을 받으며 전성기를 보내는 선수가 됐다. 하지만 나는 그래서 이근호의 이 골이 더 자랑스럽다. 2군 중에서도 후보로 전락해 벤치에도 앉지 못하고 관중석에서 동료들의 경기를 부럽게 지켜보던 볼품 없던 선수가 월드컵이라는 최고의 무대에서 주인공이 됐으니 이보다 더 드라마 같은 이야기가 또 있을까. 포기하지 않고 월드컵 무대에서 그토록 기다리던 골을 뽑아낸 이근호의 ‘불사조 정신’에 진심으로 박수를 보낸다. 그는 지금 연봉 178만 원짜리 선수가 아니라 우리에게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감동을 주는 가장 값어치 있는 선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