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축구에는 지금 딱 두 가지 이슈만 있다. 에닝요의 귀화와 박주영의 대표팀 발탁 뿐이다. 찬반양론이 뜨겁다. 언론에서도 서로 주장이 다르고 이를 받아들이는 축구팬들의 입장도 각기 다르다. 건전한 토론 문화가 형성되는 건 좋지만 한국 축구가 딱 이 두 가지 이슈만 놓고 며칠째 되풀이되고 있다는 사실은 아쉽다. 특히 에닝요의 귀화에 관한 문제는 더 그렇다. 찬성과 반대쪽 모두 나름대로의 논리를 갖추고 있지만 해결의 실마리는 보이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외국인 선수의 귀화는 찬성한다. 이제는 조금 더 유연한 자세로 대표팀을 꾸릴 필요가 있다. 하지만 과연 지금 이 상황에서 에닝요가 귀화 요건을 갖췄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토론이 필요하다. 에닝요는 역사적인 한국 축구 대표팀 1호 귀화 선수가 되기에는 한국에 대한 애정이 그리 특별하지 않다. 역사상 첫 귀화한 대표팀 선수가 되려면 실력은 물론 조금 더 한국에 대한 강한 애착이 필요하다. 당장 대표팀에 에닝요가 필요한 게 아니라면 조금 더 시간을 가지고 지켜볼 필요가 있다.

대한축구협회는 에닝요 귀화를 위해 힘을 총동원하고 있다. 특별귀화를 통해 귀화 시험을 치르지 않고 한국 국적을 얻을 수 있도록 한다는 방침이다. 하지만 협회가 에닝요를 챙기는 것만큼 다른 외국인 선수들에게도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나는 에닝요의 팬이지만 지금 이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아 보인다. 모든 언론이 에닝요와 박주영을 주목할 때 나는 오히려 다른 한 선수를 주목하고 싶다. 에닝요 귀화를 놓고 갑론을박하는 이 상황에서 정작 우리가 주목해야 할 선수는 바로 제리 카카다. 여기에 어느 정도 해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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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에닝요 귀화 논란으로 뜨거운 이때 제리 카카의 이야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진=부천FC1995)

의류공장으로 간 콩고의 축구 유망주

생소한 이들이 많을 것이다. 카카는 카카인데 우리가 아는 축구선수 카카가 아니라 제리 카카다. 아프리카 중앙 서부 지대에 앙골라와 우간다, 르완다 등과 인접한 콩고민주공화국에서 태어난 카카는 11살에 축구를 시작하면서 유망주로 기대를 모았다. 16세에 프로팀의 스카우트 대상이 됐고 콩고 U-17 청소년 대표팀에 뽑히기도 했다. 카카는 콩고에서 축구를 더 배워 유럽으로 날아갈 꿈에 부풀어 있었다. 축구가 있고 가족이 있고 꿈이 있어 하루 하루가 행복했다. 이때만 하더라도 카카에게는 어떻게 하면 축구를 더 잘할 수 있을지 말고는 걱정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콩고 내전이 그의 꿈을 앗아갔다. 1998년 시작된 제2차 콩고 내전은 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많은 인명피해를 낸 지역 분쟁으로 집단학살과 집단강간, 고문 등으로 4백만 명 이상이 사망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로랑데지레 카빌라 반군에 끌려가 내전에 참천해야 하는 젊은이들이 숱하게 많았다. 카카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학생이던 그는 “반군이 학교 주변까지 점령했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이대로 있다가 강제 징집을 당하게 되면 꼼짝 없이 목숨을 잃을 처지에 놓이기 때문이다. 카카는 목숨을 걸고 친구와 함께 콩고를 탈출했다.

프랑스와 중국을 거쳐 평생 전혀 들어본 적 없는 생소한 나라 한국으로 날아왔다. 그와 함께 콩고를 탈출했던 친구는 결국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카카는 홀로 남았다. 한국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문맹률이 무척 높은 콩고 출신이지만 머리가 똑똑하고 정규 교육을 받아 영어와 프랑스어, 중국어, 콩고어 등을 자유자재로 구사하지만 아프리카에서 날아온 젊은이가 한국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결국 그는 수소문 끝에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직장을 구했다. 의류공장이었다. 한 때 축구선수를 꿈꾸며 공을 차던 소년은 이제 떠돌이 신세가 돼 한국의 허름한 의류공장에서 밤낮 없이 일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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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카는 챌린저스리그 팀에서 훈련하고 있지만 경기에 나설 수는 없다. 외국인은 챌린저스리그에서 뛸 수 없다는 규정 때문이다. (사진=부천FC1995)

뛸 수 있는 그라운드가 없던 카카

외로운 한국 땅에서 그가 의지할 수 있는 건 축구뿐이었다. 축구선수의 꿈을 키워가던 그는 강남TNT라는 생활 축구팀에서 공을 차면서 외로움을 달랬다. 하지만 강남TNT가 부천FC1995로 재탄생하고 K3리그(현 챌린저스리그)에 입성할 때 모두가 기뻐했지만 그는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대한축구협회 규정상 K3리그에는 외국인 선수가 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부천 측은 카카와 분데스리가 바이에른 뮌헨 U-17팀에서 선수 생활을 했던 독일계 프랑스인 세바스티안 노이만을 K3리그에서 뛸 수 있도록 백방으로 수소문했지만 결국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대한축구협회 산하 K3리그 운영위원회는 다른 구단과의 형평성 문제를 들어 카카가 그라운드에 서는 걸 막았다.

카카는 함께 그라운드를 누볐던 동료들이 부천 유니폼을 입고 팬들의 박수를 받는 동안 이 모습을 부러운 눈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팀을 떠나지 않고 남았다. 대한축구협회에 등록할 수는 없었지만 부천 선수들과 함께 훈련하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누구보다 그라운드에 서고 싶은 열망이 강했던 카카는 부천 합류 2년 만에 의미 있는 데뷔전을 치를 수 있었다. 2009년 부천과 잉글랜드 7부리그 팀인 유나이티드 오브 맨체스터의 친선전을 통해서였다. 카카는 비록 뛰어난 기량을 선보이지는 못했지만 그가 공을 잡을 때면 호기심 어린 팬들의 열띤 응원이 이어졌다. 하지만 이 경기는 공식 경기가 아닌 친선전이었다.

한국을 너무 사랑한 카카는 한국 국적을 얻기 위해 준비하기 시작했다. 내전을 피해 잠시 한국에 머물렀다가 돌아가려는 것이 아니라 아예 한국인이 돼 이 땅에 살고 싶었다. 한국 국적을 얻으면 그라운드에 나가 마음껏 뛸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다. 그는 2009년 출입국관리사무소에 난민 인정 신청서를 냈다. 난민으로 인정을 받으면 한국에서 합법적으로 체류가 가능하고 5년 후에는 일반 귀화 자격을 얻을 수가 있다. 또한 건강보험이나 기초생활수급 기회도 주어지기 때문에 카카는 한국 국적을 얻기 위해 일단 안정적으로 체류할 수 있는 난민 자격을 얻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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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나이티드 오브 맨체스터와의 친선전에서 모습을 드러낸 카카는 많은 이들의 박수를 받았다. (사진=부천FC1995)

카카, 사랑에 빠지다

하지만 난민으로 인정받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난민 신청자 10명 중 한두 명만이 난민으로 인정받을 정도로 그 문턱이 높기 때문이다. 편법을 통해 난민 신청을 하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난민으로 인정받기 위한 조건이 무척 까다로워졌다. 또한 난민 신청을 하고 재판을 통해 결과가 나오지까지는 무려 6개월 가까운 시간이 필요했고 돈도 많이 들었다. 카카는 두 번이나 난민 신청을 했지만 결국 난민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는 유일하게 한국 국적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놓쳐 절망했다. 한국에서 축구를 하는 꿈은 물론 한국 체류 자체가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는 한국을 떠나야했다.

이 와중에 내셔널리그 안산할렐루야 입단 테스트에 응했다. 과거 여수FC를 인수한 비전21이라는 내셔널리그 팀에 합류해 훈련한 적이 있었지만 이 팀의 리그 참가가 승인되지 못해 다시 부천으로 돌아간 적이 있는 카카는 안산 입단 테스트에서 혼신의 힘을 다했다. 내셔널리그에 외국인 선수 제도가 도입되면서 그에게도 희망이 있었고 결국 안산은 카카의 손을 잡았다. 입단 테스트를 유심히 지켜본 안산 측은 카카에게 구체적인 계약 조건까지 제시했고 카카도 흔쾌히 이를 받아들이려 했다. 하지만 난민 인정 신청서를 내고 그 결과를 기다리고 있던 카카는 비자를 발급 받을 수 없었다. 차라리 그냥 외국인 신분이라면 모를까 그의 난민 신청이 오히려 발목을 잡았다. 결국 그는 내셔널리그에 입성하지 못했다.

방황하던 그에게 힘을 준 건 장성훈 서울 적십자 사업발전회장이었다. 카카의 양아버지를 자처하는 장성훈 회장은 언제나 그에게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 생활비를 지원하기도 했고 축구에 전념할 수 있도록 용품을 전달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힘들어하던 카카에게 이때쯤 한 여성을 소개해 준 것도 장성훈 회장이었다. 등 떠밀려 소개팅 자리에 나간 카카는 이 자리에서 만난 여성을 보고 한 눈에 반했다. 그녀는 친절함과 따뜻한 미소가 매력적이었다. 카카가 사랑에 빠진 것이었다. 이 여성도 순박하면서 배려심 많은 카카에게 호감을 느꼈고 그렇게 교제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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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카는 한국어와 한국 음식에도 익숙하다. 이제는 한국 생활이 무척 편하단다. (사진=부천FC1995)

극적인 그의 결혼과 1년 후의 기대

6개월 정도 만났다. 하지만 카카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날아들었다. 출입국관리사무소에서 한 장의 편지를 받은 것이었다. 바로 추방 날짜 통보였다. 이제 막 한국에서 축구를 하며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카카에게는 더 시간이 없었다. 추방 날짜는 한 달 뒤였다. 지금 이대로 떠나면 영영 한국에서 사랑하는 그녀도, 그의 전부인 축구도 사라지는 것이었다. 한 달이라면 정리를 하기에도 모자란 시간이었다. 그래서 카카는 마음을 굳혔다. 그녀와 결혼하겠다고 다짐했다. 한국인과 결혼하면 시민권을 얻게 돼 체류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장성훈 회장과 팀 동료였던 김태륭이 007 작전을 방불케하는 프로포즈 작전에 동참했다.

카카의 프로포즈를 받은 그녀는 고민했다. 한 달 안에 결혼을 하지 않으면 추방되는 애인의 입장이 마음 아팠지만 일생의 가장 중요한 선택인 결혼을 이렇게 급하게 결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또한 외국인이 한국인과 결혼해 시민권을 획득한 뒤 배신하거나 사기를 치는 일도 적지 않아 이용 당하는 게 아닌지 걱정도 됐다. 하지만 카카는 진심을 담았다. 영영 그녀를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눈물을 흘리며 청혼했고 그의 애인도 결국 마음을 열었다. 이렇게 둘은 극적으로 결혼에 골인했다. 후반 종료 휘슬을 입에 문 순간 터진 극적인 결승골과 같은 결혼이었다.

카카는 부천을 떠나 서울유나이티드로 옮겼다. 시민권을 얻었지만 아직 한국 국적을 취득하지 못해 협회에 등록을 할 수 없어 이적이라 보기에도 무리가 있다. 하지만 지난해부터 서울유나이티드에서 동료들과 함께 훈련을 하고 있다. 일주일에 두 번 서울유나이티드 훈련에 참석하고 TNT 소속으로 아마추어 리그인 아리수 리그에 나선다. 또한 TNT에서 자체적으로 창단한 유소년 축구교실 코치로 일주일에 두 번 아이들을 지도하는 일도 시작했다. 서울유나이티드 경기가 열리는 날이면 들것을 들고 동료들을 돕는다. 그리고 내년이 되면 결혼한 지 2년이 돼 한국 국적을 취득할 수 있다. 카카는 비록 많은 이들의 관심 밖에 있는 챌린저스리그지만 정식으로 그라운드에 설 수 있는 1년 뒤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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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카는 10년을 기다린 끝에 내년이면 한국 국적을 얻고 그라운드에 나설 수 있다. 에닝요의 특별귀화가 이슈가 되는 요즘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보는 건 어떨까. (사진=부천FC1995)

우리는 카카를 통해 무얼 느끼나

그는 올해 한국 나이로 29세다. 내년이면 30대에 접어든다. 당연히 한국 국적을 얻는다고 하더라도 한국 무대에서 뛸 수 있는 시간은 별로 없다. 또한 솔직히 평가하자면 그는 뛰어난 실력을 갖췄다고도 할 수 없다. 타고난 재능은 있지만 내전을 겪으면서 한창 기량을 꽃피울 나이에 오랜 시간 축구를 할 수 없었고 체계적인 지도도 받지 못했다. 냉정히 말해 챌린저스리그에서도 돋보이는 수준은 아니다. 하지만 그를 실력으로만 평가할 게 아니라 축구에 대한 열정과 한국에 대한 사랑으로 바라보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한국에서 오랜 시간 함께 하고 싶은 그의 마음이야말로 진정한 국가대표급이다.

나는 에닝요의 열렬한 팬이다. 그가 공을 잡으면 또 어떤 멋진 플레이를 펼칠지 기대하는 사람 중 하나다. 처한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에닝요에게 카카와 같은 선택을 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카카에 비해 풍족한 상황에서 축구를 하고 있는 에닝요를 비난할 이유도 없다. 에닝요는 자기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선수다. 하지만 그가 과연 태극마크를 달고 그라운드를 누빌 자격이 있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만약 역사적인 제1호 귀화 국가대표가 탄생해야 한다면 에닝요보다는 한 경기에 나서기 위해 한국에서 10년이라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 카카가 더 큰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을까.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사실 에닝요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협회의 결정에 관한 이야기다. 협회가 한 선수의 귀화를 위해 힘을 총동원하는 것도 좋지만 그에 앞서 그라운드에 나서고 싶어도 외국인 신분이라 나설 수 없는 이들의 힘겨운 상황도 해결해 줄 필요가 있다. 에닝요에 비한다면 카카 같은 선수는 그 존재가 미약할지 모르지만 이런 이방인을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지 않다면 귀화한 국가대표가 다 무슨 소용일까. 이태원에 사는 카카는 이상한 옷차림의 외국인들을 보면 이런 말을 한다. “쟤네 외국인들 정말 웃겨. 저건 우리나라 유행이 아니잖아. 우리 삼겹살이나 먹으러 가자.” 이제는 스스로를 한국인이라고 자부하는 카카가 그라운드에서 공식적인 데뷔전을 치를 수 있는 날은 언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