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 대표팀을 한두 명이 이끌었나

1990년대 초·중반 일본 배구 대표 중 나까가이치라는 선수가 있었다. 이 선수는 참 얄밉게 잘했다. 하지만 문제는 이 선수에 대한 의존도가 너무 높았다는 점이었다. 일본 공격은 전부 나까가이치에게로 몰린 반면 한국에는 다양한 공격수들이 불을 뿜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아직도 당시 해설자의 말이 기억난다. “일본은 나까가이치 때문에 이기기도 하지만 나까가이치 때문에 지는 경기가 더 많습니다.” 아마 내 또래에 스포츠에 관심 있는 이들이라면 나까가이치에서 시작해서 나까가이치로 끝나던 당시 한·일전 배구 경기를 기억할 것이다.

박지성과 박주영, 한국 축구의 불사조가 아니다

박주영이 아스널에서 경기에 나서지 못하고 있다. 박주영은 아스널에 입단한 후 6개월 동안 정규리그 경기에 딱 6분간 모습을 드러낸 게 전부다. 새벽 늦게까지 박주영이 경기에 나서는 모습을 지켜보기 위해 텔레비전 앞에 앉은 우리도 참 애가 타는데 다가올 쿠웨이트전을 준비해야 하는 대표팀 최강희 감독 마음이야 오죽할까. 최강희 감독은 유럽파의 컨디션 점검을 위해 영국으로 날아갔지만 결국 박주영이 뛰는 모습도 보지 못하고 돌아왔다. 여자와 데이트 나가서 바람 맞는 것도 짜증나는데 유럽까지 가 박주영이 경기에 나서는 모습도 보지 못하고 귀국한 최강희 감독은 얼마나 짜증이 났을까. 아마 비행기에서 예쁜 스튜어디스 누나의 얼굴도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최근 대표팀은 한두 선수에 대한 의존도가 무척 높다. 박주영도 마찬가지지만 얼마 전 대표팀 은퇴를 선언한 박지성 역시 그랬다. 박지성의 능력이야 두 말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박지성 한 명이 빠진다고 해서 대표팀이 급격히 흔들린다는 건 큰 문제다. 박지성의 대표팀 은퇴 이후 한 동안 맥을 못 추던 대표팀은 우리가 얼마나 특정 선수에게 의존하고 있었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지난 한일전 0-3 참패 이후 가장 많이 나왔던 말이 바로 “박지성만 있었으면…”이었다. 이거 참 내가 여자한테 차이고 “내가 키만 조금 더 컸으면…”이라고 하는 것과 다를 게 없다. 그만큼 박지성의 능력이 뛰어나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우리가 지금껏 얼마나 특정 선수의 능력에 기댔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최근의 박주영 역시 마찬가지다. 박주영이 난조에 빠지니 대표팀 전체가 위기에 봉착했다. 그동안 박주영을 붙박이로 써오던 대표팀으로서는 오랜 시간 경기에 나서지 못해 감각이 떨어진 박주영의 기용 여부에 대한 큰 고민을 하고 있다. 최강희 감독은 “박주영의 의지는 높이 사지만 정신적인 문제도 있다. 박주영의 차출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고 밝혔다. 박주영도 분명 뛰어난 선수이지만 대한민국에 축구선수가 몇 명인데 특정 선수 한 명 빠진다고 이리도 큰 고민이 생길까. 대표팀에서 박주영에 대한 의존도는 유재석의 안경이나 황현희의 키높이 깔창보다 더 크다. 한 선수의 컨디션에 대표팀 전체의 운명이 달렸다는 건 참 불안하다.

황선홍과 최용수, 그리고 김도훈

황선홍과 최용수, 김도훈.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한국 축구의 공격을 이끈 선수들이다. 벌써 이름만 들어도 든든하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이 세 선수가 한 그라운드에서 호흡을 맞춘 일은 별로 없다는 점이다. 한 선수가 부상을 당하면 다른 한 선수가 이를 대신했고 전술에 따라서도 다른 선수가 경기에 나서는 상황이 이어졌다. 혹자는 이 세 선수가 한 시대에 동시에 등장했다는 게 불행이라고 하지만 한국 축구 전체를 놓고 봤을 때는 무척 긍정적인 현상이었다. 나는 이 세 선수의 유기적인 기용을 지금의 대표팀이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거 거의 김태희와 이민정, 그리고 한가인이 한 드라마에 주인공 놓고 오디션 펼치는 셈이다.

1997 프랑스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 당시 황선홍은 부상과 컨디션 난조로 아예 대표팀에도 이름을 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황선홍을 그리워하지 않았다. 최용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최용수는 당시 아시아지역 최종예선에서 무지막지한 골 퍼레이드를 펼쳤다. 광고판을 빼고는 아무도 최용수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하지만 최용수도 붙박이는 아니었다. 본선에 진출한 뒤 차범근 감독은 변칙적으로 김도훈을 기용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전술적 실패라는 의견도 있지만 최용수가 아닌 다른 선수를 월드컵 본선에 기용할 수 있을 정도로 공격진이 다양했다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다. 황선홍이 본선에 나서지 못한 건 아쉬웠지만 그렇다고 아예 공격진을 꾸리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최용수가 부상을 당한 1999년에 치러진 브라질과의 평가전에서는 황선홍이 선발로 나섰고 후반 막판 김도훈이 교체로 투입돼 극적인 결승골을 기록하기도 했다.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주전 공격수가 부상 당했다고 한숨 쉬고 있겠지만 당시에는 최용수가 없으면 황선홍이 있었고 황선홍이 부진하면 김도훈이 있었다. 세 선수는 2002년 한일월드컵을 앞두고도 치열한 주전 경쟁을 펼친 끝에 결국 황선홍과 최용수가 최종적으로 본선에 합류했다. 개인적으로는 이 세 선수가 공격진에서 주전 경쟁을 펼치던 이때가 한국 축구 역사상 가장 풍족했던 때라고 생각한다. 완벽한 선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또 모자란 선수도 없었다.

조지 웨아의 라이베리아는 어땠나

2002년 한일월드컵 당시에도 비슷한 상황이 있었다. 당시 왼쪽 측면의 이영표는 개막을 앞두고 부상을 당해 출전 여부가 불투명했었다. 하지만 개막 전부터 치열한 주전 경쟁을 펼친 대표팀에는 이을용이 있었다. 당초 선발로는 이영표가 예상됐지만 그의 부상으로 대신 기회를 잡은 이을용은 폴란드와의 첫 경기에서 황선홍의 골을 도왔고 미국전에서는 안정환의 동점골을 어시스트했다. 그리고 이영표는 두 경기를 쉰 뒤 포르투갈전에 처음으로 선발 출전해 박지성의 골을 도왔다. 만약 특정 선수 한 명에게 의존했다면 아마 월드컵 4강신화는커녕 일찌감치 조별예선 세 경기만 치르고 짐을 싸야 했을지도 모른다.

한두 선수에게 의존하는 건 무척 위험한 일이다. 당장 치러질 경기는 편하게 갈 수 있지만 세상 일은 모르는 법이다. 우리는 박주영이 이렇게 벤치만 지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박주영을 줄기차게 대표팀 최전방에 기용하는 동안 그를 대체할 만한 선수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았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대표팀에서도 치열한 주전 경쟁을 펼쳐야 한다는 이야기보다는 특정 선수 의존도를 낮추자는 쪽에 가깝다. 박주영이 단연 대표팀에서도 돋보이는 스트라이커지만 그가 부진하거나 부상을 당했을 때 대체 자원으로 쓸 공격수에 대한 고민이 전혀 없었다. 솔직히 내가 지금 만나는 여자보다 마음에는 조금 덜 들지만 만일에 대비하기 위해 다른 여자 한 명 보험으로 들어놓는 남자 많지 않나. 나는 안 그래서 모르겠는데 그런 남자들 꽤 있는 걸로 알고 있다. 이것도 똑같은 거다.

우리는 한두 선수가 유럽 명문팀에 가면 그게 축구 강국인줄 안다. 물론 한국 축구를 이끌고 있는 이들이 유럽의 훌륭한 팀에서 뛰는 건 참 기분 좋은 일이다. 하지만 이게 전부는 아니다. 과거 조지 웨아는 유럽 최고 명문 구단인 AC밀란에서도 특출난 능력을 선보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의 조국 라이베리아가 축구 강국은 아니었다. 아무리 조지 웨아가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해도 라이베리아는 아프리카의 문턱도 제대로 넘지 못했다. 특정 선수 한 명이 세계 무대를 씹어 먹는 게 축구 강국으로 가는 길은 아니다. 지금 와서 조지 웨아는 기억해도 라이베리아 축구를 기억하는 이들은 없다.

한 명의 메시보다 더 필요한 건?

박지성이나 박주영처럼 훌륭한 선수 한두 명에 의존하면 이 선수들이 전성기를 누릴 때는 대표팀도 전성기를 누리지만 이들이 대표팀에서 빠질 경우에는 급격하게 흔들릴 수밖에 없다. 슈퍼스타가 등장해 혼자의 힘으로 경기 분위기를 바꾸는 건 그때만 좋을 뿐 길게 봤을 때는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 자꾸만 뛰어난 능력을 가진 선수 한두 명에 의존해서 편하게 가려고 하는 건 문제가 있다. 비싼 청바지 사서 매일 그 똑같은 청바지만 입는다고 옷 잘 입는다는 소리 못 듣는다. 비록 그 청바지보다는 저렴하지만 여러 벌로 다양하게 스타일을 내는 게 더 옷 잘 입는 비결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한 벌뿐인 비싼 청바지를 빨았는데 아직 다 마르지 않아서 집 밖에도 못 나가고 있다.

황선홍과 최용수, 김도훈의 능력을 합친 공격수가 한 명이 있는 것보다는 그 능력을 나눠가진 이 세 명의 공격수가 오히려 대표팀에는 큰 도움이 된다. 일단 다가올 쿠웨이트전에는 먼 미래를 내다볼 여력이 없다. 어떤 식으로건 이기는 게 중요하다. 하지만 이 경기 결과가 어떻게 나오건 앞으로는 한두 선수에 의존하는 현상을 해결해야 한다. 특정 선수 컨디션에 따라 대표팀의 경기력이 좌지우지 된다는 게 얼마나 쪽팔린 일인가. 이동국이나 김신욱 등 능력 있는 공격수들은 충분하다. 평소에 박주영을 비롯해 여러 공격수들로 전술을 꾸렸다면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쿠웨이트쯤은 캐리어가 마린 잡듯 쉽게 생각했을 수도 있다. 과거 황선홍, 최용수, 김도훈 시대에 비추어 봤을 때 박주영, 이동국, 김신욱이 능력에서 뒤처질 것도 없다.

한국 선수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도 가 있고 아스널에도 가 있다. 하지만 나는 과거 한국 대표팀 경기를 더 편하게 본 것 같다. 그들은 비록 유럽의 하찮은(?) 팀에 잠시 가 본 적이 있거나 아예 유럽 문턱도 밟지 못했지만 누가 부상을 당하고 컨디션 난조에 빠져도 꾸준한 경기력을 선보일 수 있었다. 언제부터 대표팀이 특정 선수 한두 명의 컨디션에 따라 운명이 갈렸나. 나는 한 명의 리오넬 메시보다 이 능력을 23명이 나눠가진 팀이 더 강하다고 생각한다. 메시가 예비군 훈련이라도 가거나 여자친구가 루저라고 놀려 기분이 언짢은 날에는 손 쓸 도리가 없지 않나. 나까가이치가 죽어라 스파이크해도 결국에는 한국이 일본 배구를 더 많이 이겼다. 왜? 우리에게는 개인 능력으로만 따지면 나까가이치에 밀릴지 몰라도 신진식과 임도헌, 하종화, 마낙길, 박희상 등 능력 있는 선수들이 많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