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이분법적으로 ‘좋으신 분’과 ‘나쁜 놈’으로 나눌 수 있을까. 요새 인터넷을 보면 대체적으로 그렇게 흘러가는 것 같다. 하지만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 다른 이들에게는 한 없이 나쁘게 비춰지는 사람도 나에게는 좋으신 분이 될 수도 있고 그 반대가 될 수도 있다. 인성과 성품 등 사람을 평가할 수 있는 요소는 수도 없이 많은데 이걸 그냥 뭉뚱그려 ‘좋으신 분’ 또는 ‘나쁜 놈’으로 평가하는 일은 있어선 안 된다. 오늘은 한 쪽에선 배신자로, 또 다른 한 쪽에서는 영웅으로 평가받는 염기훈에 관한 이야기다.

염기훈이 울산에서 한 일

전북에서 뛰던 염기훈은 2007년 울산으로 이적했다. 이적 과정에서 진통도 적지 않았다. 전북 측은 “우리 선수인 염기훈이 노골적으로 수원행을 원하고 있다”며 불쾌해했고 염기훈 측에서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면서 반박했다. 결국 수원이 염기훈 영입에 관심을 가졌던 건 사실이지만 전북은 그를 울산으로 보내면서 일을 마무리했다. 수원이라면 이를 가는 전북 최강희 감독이 염기훈의 수원행을 막기 위해 울산으로 그를 이적시켰다는 소문도 파다했다. 어찌됐건 염기훈은 자의반 타의반 전북을 떠나 울산 유니폼을 입게 됐다.

울산으로 이적한 염기훈은 그라운드에 있는 시간보다 병상에 있는 시간이 훨씬 많았다. 2007년 후반기에는 세 경기에 나서 한 골을 넣은 게 전부였고 2008년에는 개막 후 여섯 경기 만에 고질적인 왼쪽 새끼발가락 부상을 당해 재활에 매달려야 했다. 2006년부터 매년 찾아온 부상이었다. 결국 5개월 동안 그라운드에 서지 못한 염기훈은 후반기가 되어서야 경기에 나설 수 있었다. 거액의 몸값을 받고 울산으로 옮긴 염기훈이 부상으로 많은 시간을 허비하자 울산 팬들의 실망은 갈수록 커졌다.

제대로 된 활약도 하지 못한 염기훈이 울산 팬들에게 결정적으로 미움을 산 건 2009년 1월이었다. 당시 염기훈은 에이전트의 말만 믿고 프리미어리그 웨스트브롬위치알비온(WBA) 테스트를 위해 잉글랜드로 날아갔다. 에이전트는 “울산과 이야기가 잘 됐다. 가서 테스트만 받으면 된다”고 했다. 하지만 에이전트의 말은 거짓이었다. 이 사실을 몰랐던 울산에서는 뉴스 보도를 통해 염기훈이 잉글랜드로 날아갔다는 소식을 접한 뒤 분노하고 있었다. 울산은 WBA에 공식적으로 항의했고 WBA도 문제가 될 것을 우려해 염기훈을 돌려보냈다.

무리한 유럽 진출 추진, 등 돌린 팬들

결국 당시 염기훈의 에이전트사였던 일레븐 매니지먼트 김기훈 대표는 대한축구협회로부터 기피 대상자 선언과 함께 K리그 전 구단 1년간 출입금지라는 징계를 받았고 울산은 자체적으로 이 에이전트에 대해 향후 2년간 구단 출입금지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물의를 일으킨 에이전트의 잘못이 컸지만 제대로 알아보지 않고 그의 말을 믿은 염기훈에 대한 질타가 이어졌다. 염기훈은 구단에 2천만 원의 벌금을 물었다. 전북에서 울산으로 옮길 때도 잡음을 일으켰던 염기훈은 이 일로 인해 이기적인 선수로 낙인 찍혔다.

울산 팬들은 염기훈에게서 등을 돌렸다. 이적 과정에서부터 울산에 대한 충성심을 보이지 않은 그는 부상으로 제대로 된 활약을 펼치지도 못했고 거기에 유럽 진출을 위해 규정까지 어겼으니 팬들로서는 그가 예뻐 보일 리가 없었다. 울산 팬들은 염기훈이 경기에 나서면 야유를 보낼 정도로 그를 울산 선수로 인정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염기훈은 2009년 개막전에서 다시 한 번 부상을 당했다. 염기훈은 울산 소속으로 좋지 않은 일은 다 겪은 선수로 기억된다. 그는 울산에서 두 시즌 반 동안 42경기에 나서 9골 4도움을 올리는 데 그쳤다.

2010년 말 울산과의 계약 종료를 앞두고 있던 염기훈은 2010년 초 구단과 재계약 협상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 받던 중 구단에 이런 말을 했다. “울산과 재계약을 할 의사가 없다. 수원으로 가고 싶으니 그렇게 일을 추진해 달라.” 전북 시절부터 수원행에 애착을 가지고 있다는 소문이 솔솔 풍겼지만 그가 직접 이런 발언을 한 건 이때가 처음이었다. 구단에 애착이 없다는 걸 확인한 울산도 이적료나 트레이드 선수를 받을 수 있을 때 염기훈을 수원으로 넘기는 것이 이득이었다. 그렇게 울산과 수원은 염기훈의 이적을 놓고 협상 테이블에 앉았다.

울산과 수원, 협상 테이블에 앉다

하지만 진척이 없었다. 이미 염기훈이 전북 소속이던 시절부터 수원은 그에게 관심이 있었지만 이적 방식을 놓고 울산과 대립했다. 수원은 염기훈을 데려가는 조건으로 현금 15억 원 이상을 주려고 했지만 울산은 현금이 아닌 중앙 수비수와 트레이드하길 원했다. 자금력이라면 수원 못지 않은 울산이 돈이 필요해 그를 팔려는 것은 아니었다. 울산은 수원에 “현금과 함께 이재성이나 곽희주를 얹어 달라”고 했지만 수원 측에서는 “이재성과 곽희주는 안 된다. 박현범을 트레이드 카드로 내놓겠다”고 못 박았다. 하지만 울산은 박현범을 거절했다.

차범근 당시 수원 감독은 대대적으로 언론에 이 이야기를 흘렸다. 협상 과정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는 “측면 공격수가 필요하다. 염기훈도 수원으로 오고 싶다고 했다. 울산이 입장 정리를 해줬으면 좋겠다”면서 “염기훈을 위해 등번호 26번을 비워놓고 있다”고 덧붙였다. 김대의가 플레잉코치로 보직을 바꾸게 돼 수원으로서는 염기훈이 반드시 필요한 상황이었다. 결국 울산과 수원은 오랜 협상 끝에 이적을 확정지었다. 수원 수비수 이재성을 울산으로 1년 임대 뒤 완전이적 시키면서 현금 6~7억 원을 얹어주고 염기훈을 데려오는 방식이었다.

수원으로서는 이재성이 버리기 아까운 카드였다. 신인 드래프트 1라운드에서 수원 유니폼을 입은 이재성은 차세대 국가대표 수비수로 각광받고 있었다. 비록 많은 경기에 나서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 충분히 수원의 중앙 수비를 책임질만한 재목이었다. 당시 허정무 대표팀 감독도 남아공-스페인 전지훈련 예비 명단에 이재성을 올릴 정도로 장래가 밝았다. 하지만 차범근 감독은 염기훈 영입을 위해 과감하게 이재성을 울산으로 보내는 어려운 선택을 내렸다. 그렇게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염기훈의 수원 이적은 마무리되는 듯했다.

부상 달고 이적한 염기훈의 10초 데뷔골

하지만 양 구단이 트레이드를 확정하고 최종 서명만 남겨두고 있던 시점에서 염기훈은 또 다시 부상을 당했다. 대표팀 연습경기에 나서 고질적인 왼쪽 새끼발가락이 도진 것이다. 일본 교토로 날아가 수술을 받을 정도로 문제가 작지 않았다. 일부에서는 염기훈의 수원행이 물거품이 될 것이라고 예상하기도 했다. 부상을 당해 당장 쓸 수 없는 선수를 영입하기 위해 유망주 수비수와 현금까지 얹어 주는 게 상식 밖의 일이라는 주장이었다. 그렇지만 몇 년 동안 염기훈을 원했던 차범근 감독의 입장은 확고했다. “내가 책임질 테니 최종 서명해 달라.”

결국 염기훈은 그토록 그리던 수원 유니폼을 입었다. 그리고 재활에 4개월이 걸릴 것이라던 예상과 달리 두 달 만에 그라운드로 돌아왔다. 그가 수원의 푸른 유니폼을 입고 치른 첫 경기는 지난해 4월 27일 암드포스와의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 조별예선 마지막 경기였다. 상대가 약체였지만 수원은 이전까지 정규리그에서 5연패를 당하면서 분위기가 가라 앉을 대로 가라 앉아 있던 상태였다. 벤치 멤버로 몸을 풀던 염기훈은 후반 시작과 동시에 호세모따를 대신해 경기에 투입됐다.

그리고는 교체 투입 10초 만에 왼발로 첫 번째 슈팅을 날렸고 이는 데뷔골로 연결됐다. 염기훈의 장밋빛 수원 시대가 활짝 열린 것이었다. 그는 골을 넣자마자 수원 서포터스에 달려가 인사를 했다. 그의 영입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차범근 감독은 경기가 끝난 뒤 “한 선수의 힘이 참 크다는 것을 오늘 염기훈의 플레이를 보면서 깨달았다. 오늘 굉장히 신선한 활약을 펼쳤다”고 염기훈을 극찬했다. 염기훈은 이후 지금까지 수원 공격의 에이스 역할을 하고 있다. 지난해 수원이 부산을 꺾고 FA컵 우승을 차지한 것도 염기훈의 결승골 덕분이었다. 이제 염기훈은 그 누구보다 수원의 푸른 유니폼이 잘 어울리는 선수다.

울산의 배신자, 그리고 수원의 영웅

그는 수원의 영웅이다. 올 시즌 전술 부재로 수원이 위태로울 때 혼자 힘으로 팀을 구해낸 것도 염기훈이었다. 벌써부터 수원 팬들은 염기훈이 경찰청에 입대하게 될 내년 시즌을 걱정하기도 한다. 이제 염기훈 없는 수원은 상상할 수도 없다. 2010 남아공 월드컵 이후 국가대표팀 팬들의 호된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염기훈이 K리그에서 보여주고 있는 능력은 가히 폭발적이다. 그는 날카로운 왼발 프리킥으로 수원 공격의 시발점이 되기도 하고 직접 왼발로 슈팅을 꽂아 넣어 마무리 짓는 역할까지 도맡아 하고 있다.

반대로 그는 울산에서는 배신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전북에서 울산으로 건너올 때도 잡음을 일으켰고 무리한 유럽 진출 욕심으로 팬들에게 큰 상처를 주기도 했다. 부상으로 제대로 된 활약을 펼치지도 못했고 본인의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울산 선수이면서 수원행에 대한 소문을 여기저기 흘리고 다녔었다. 울산 팬들은 아직도 이런 염기훈을 배신자라고 부른다. 수원으로 이적해 맹활약하며 충성심 높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에도 분노한다. 적어도 울산 입장에서는 염기훈이 좋게 보일 리 없다.

그런 그가 수원 유니폼을 입고 울산 골문을 노리는 얄궂은 운명과 마주했다. 염기훈은 단판 승부인 준플레이오프에서 수원 소속으로 울산을 상대할 예정이다. 또한 염기훈과 트레이드 된 이재성은 어느덧 국가대표로 성장해 울산 유니폼을 입고 염기훈을 막아야 한다. 이 경기에서 승리를 거두는 팀이 우승을 향해 계속 진군할 수 있고 내년 시즌 AFC 챔피언스리그에도 나갈 자격을 얻게 된다. 반대로 패하는 팀은 그대로 끝이다. 한 팀에서는 영웅으로, 또 다른 한 팀에서는 배신자로 평가받는 그가 과연 이 무대에서 어떤 경기를 펼칠 것인가. 오는 23일 오후 7시 반 수원월드컵경기장에서 영웅이자 배신자인 한 선수가 그라운드에 모습을 드러낼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