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현대와 세레소 오사카의 2011 AFC 챔피언스리그 8강 1차전을 보고 세 번 놀랐다. 일단은 이런 빅매치를 생중계 하는 방송사가 없다는 사실에 처음 놀랐다. 새벽 한 시에 스포츠 전문 케이블 채널 두 군데에서 동시에 녹화중계를 하면 무슨 소용일까. 사람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전북의 ‘닥공’에 놀랐다. 3-3이면 원정에서 꽤 괜찮은 결과였지만 전북 최강희 감독은 이 상황에서도 이기기 위해 공격수를 투입했다. 오사카 경기장을 전주성으로 착각한 게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 아닌가. 비록 전북이 3-4로 패했지만 ‘닥공’ 정신은 높이 살 만했다.

마지막으로 놀란 건 세레소의 김보경과 김진현의 활약이었다. 아니 어떻게 전주 최고의 분식집 ‘베테랑’에서 한 번쯤은 쫄면을 먹으며 그 맛에 감탄해봤을 김보경이, 전주 막걸리 타운에서 막걸리를 한 병 시킬 때마다 달라지는 안주 맛에 감격했을 김진현이 이럴 수 있단 말인가. 김보경은 측면을 돌파해 왼발로 가볍게 크로스를 연결해 팀의 첫 번째 골을 이끌었고 프리킥 상황에서는 직접 핸드볼 파울을 유도해 침착하게 득점에 성공하기도 했다. 김진현 역시 결정적인 전북의 공격을 수도 없이 막아 냈다. K리그 팀을 상대로 얄밉게도 잘한 이들을 보고 있자니 참 기분이 묘하다.

상하이 골문에 비수 꽂은 리웨이펑
하지만 나는 언짢게 생각하지 않으련다. 이 둘을 매국노 취급도 하지 않으련다. 김보경과 김진현은 할 일을 했을 뿐이다. 지역 연고를 앞세워 펼치는 프로축구 클럽 대항전에서는 국경이 없다. 전북과 오사카만 있을 뿐이다. 흥행을 위해 한일전이라는 명분을 내세우기도 하지만 그렇게 확대해석할 경기는 아니다. 김보경과 김진현은 자신을 응원하는 세레소 팬들 앞에서 최선을 다했고 멋진 결과를 얻어냈다. 전북 팬들 입장에서는 속이 쓰릴 테지만 축구란 게 이런 법이다. 경기력 외에 친정팀 관계와 숙적, 먹이사슬 등 여러 복합적인 요소들은 이런 빅매치를 더욱 살찌운다.

2009년 4월이었다. 상하이 선화에서 팬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던 리웨이펑은 수원 소속으로 챔피언스리그 경기에 나서기 위해 오랜 만에 상하이를 찾았다. 팬들 역시 새로운 상하이 경기장에 처음 등장한 리웨이펑에게 큰 박수를 보냈다. 하지만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 리웨이펑은 이날 경기에서 멋진 헤딩 슈팅으로 수원의 첫 번째 골을 기록했다.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이는 골 세레모니로 친정팀 팬들에게 죄송하다는 의미를 전할 정도로 리웨이펑과 상하이는 특별한 관계였다. 선수들은 현재 소속된 팀에서 최선을 다하는 게 진정한 프로의 모습이다. 리웨이펑의 ‘절친’이 상하이에 살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건 경기가 끝나고 생각할 일이다. 리웨이펑은 경기가 끝날 때까지는 수원의 대표다.

지난해 챔피언스리그에서는 묘한 장면이 연출되기도 했다. 한국 선수 이세인이 장춘 야타이 유니폼을 입고 전북 유니폼을 입은 중국 선수 펑샤오팅과 맞대결을 펼친 것이다. 장춘 팬들은 이세인을 연호했고 전북 팬들은 펑샤오팅의 이름을 외쳤다. 그리고 하루 뒤 한국 선수 송태림은 허난 잰예 소속으로, 중국 선수 리웨이펑은 수원 삼성 소속으로 격돌했다. 허난 팬들은 “챔피언스리그 본선에 나서게 해준 게 바로 송태림이다. 리웨이펑도 좋아하지만 오늘은 우리 선수 송태림을 응원하겠다”고 밝혔었다. 클럽 대항전이 같은 국적의 선수들로 구성된 A매치와는 다른 매력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라운드에는 선후배도 없고 국경도 없다
얼마 전 성남 홍철은 수원과의 맞대결에서 박종진을 팔꿈치로 밀쳤고 박종진은 그라운드에 누워 한 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홍철은 이 행동으로 퇴장을 당했다. 하지만 이 둘은 경기가 끝난 뒤 트위터를 통해 서로 화해했다. 홍철이 염기훈에게 “종진이형한테 죄송하다고 전해주세요. 절대 일부러 한 게 아니었어요”라고 하자 박종진은 홍철에게 “일부러 한 게 아닌 거 알아. 살짝 맞은건데 판정이 그렇게 나서 아쉽네. 수고했어”라고 답변했다. 홍철은 마지막으로 “이긴 거 축하드려요. 추석 잘 지내세요”라는 말로 퇴장 사건(?)을 마무리했다.

김보경과 김진현은 한국에서 대학교까지 마치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전북 선수들과는 이미 중·고등학교를 거치면서 다 알고 지내는 이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경기장 밖에서는 선후배일지 몰라도 경기장에 들어서면 서로 막고 뚫어야 하는 존재일 뿐이다. 경기장에서는 선후배도 없는데 국적이 있을 리도 없다. 설령 그들이 세레소 유니폼을 입고 일본인들의 응원을 받을 지라도 그건 당연한 일이다. 이들이 전북의 골문에 비수를 꽂고 후반 막판 팀의 승리를 위해 시간을 지연했어도 마찬가지다. 전북 선수들이 간절히 승리를 원했던 만큼 이 둘도 팀 동료들과 함께 K리그 최강 전북을 이기기 위해 수 많은 땀을 흘렸을 것이다.

이제 앞으로 이런 일이 잦아질 것이다. 한국 선수들이 아시아 각국에 진출하면서 챔피언스리그 무대를 통해 고국 클럽팀에 비수를 꽂는 선수들도 늘어날 것이다. 일본과 중국은 물론 이제 중동에도 우리의 자랑스러운 선수들이 진출해 한국 축구를 빛내고 있다. 이정수가 뛰고 있는 알 사드 역시 현재 8강에서 세파한과 맞대결 중이다. 이렇게 한국 선수들이 챔피언스리그 무대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건 환영할 일이다. 브라질 선수들이 세계 어느 프로 무대건 점령하고 있는 것처럼 흐뭇하게 바라보면 된다. 전북의 패배는 아쉽지만 나는 앞으로도 국적도 잊은 채 아시아 각국 클럽팀에서 주축 선수로 성장해 K리그 구단에 비수를 꽂는 선수가 많아지는 것도 환영한다.

김보경과 김진현, 2차전에서도 잘하길
만약 김보경과 김진현이 결정적인 실수를 범해 전북에 승리를 헌납했다고 한다면 이게 더 찝찝한 일이다. 일장기를 달고 뛴 것도 아닌데 경기 막판에 부상을 이유로 시간을 지연했다고 비난하는 것도 입장을 뒤바꿔 놓고 생각하면 이해될 일이다. 황보원이 중국 클럽과의 경기에서 경기 막판 쓰러졌는데 벌떡 일어난다면 전북 팬들로서는 어떤 기분이 들까. 결과적으로 전북은 1차전에서 패했지만 나쁘지 않은 상황이다. ‘사실상’ 이긴 거다. 원정에서 세 골이나 기록했으니 1패를 안고 있음에도 2차전에서 세레소보다 더 여유 있는 경기를 펼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 전북은 과연 이 상황에서 어떤 전술을 들고 나올지도 흥미롭다.

즐겁지 아니한가. 루이스와 에닝요, 황보원이 전북을 위해 뛰고 이들을 저지하기 위해 김보경과 김진현이 오사카 대표로 나선 상황이 재미있지 않나. 전북 팬들이 김보경과 김진현에게 야유를 보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이제 2차전 홈 경기에서 전북이 김보경과 김진현을 어떻게 막고 뚫어야 할지 지켜보는 것도 기대된다. 나는 김보경과 김진현이 어제 열린 1차전처럼 2차전에서도 최고의 플레이를 펼쳐줬으면 좋겠다. 김보경이 한 골 넣고 김진현이 페널티킥 하나 막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전북이 ‘우리 선수’ 루이스와 에닝요의 골로 2-1로 이기면 될 일 아닌가. 이보다 더 좋을 수 있을까. 김보경과 김진현이 잘하고 전북은 더 잘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