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라는 도시에 대한 기억은 다들 비슷할 것이다. 경주하면 수학여행이고, 수학여행하면 경주다. 나 역시 중·고등학교 시절 경주로 떠났던 수학여행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몰래 마시는 맥주 한 모금에 뭐가 그리도 필사적이었는지, 가장 먼저 잠든 친구에게 치약 바르는 일에도 뭐가 그리 필사적이었는지 지금 생각하면 참 웃기다. 장기자랑 때는 꼭 여장을 해야 했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꼭 효자손을 하나 사 부모님께 선물해야했다. 지금도 가끔 업무 때문에 경주를 지나갈 때면 수학여행에 대한 기억부터 떠오른다.

하지만 요새 아이들이 성인이 된다면 경주를 수학여행의 성지로 기억하기 보다는 축구 때문에 즐거웠던 기억의 장소로 떠올릴 지도 모르겠다. 경주는 더 이상 수학여행지로만 기억되지 않는다. 그리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세계적으로도 인정받을 만한 초대형 규모의 축구대회가 이곳에서 열리기 때문이다. 바로 화랑대기 전국초등학교 유소년 축구대회가 경주에서 매년 성대하게 치러진다. 그냥 애들 몇 명 모여서 공차는 수준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오늘은 기네스북도 인정한 최고의 축구 축제에 대해 이야기 해볼까 한다.

‘기네스 기록’ 11일 동안 1,012경기

이 대회의 전신은 눈높이컵 초등연맹 전국 남녀축구대회였다. 2000년부터 경남 남해 스포츠파크에서 열린 이 대회는 첫 해에 남자부 172개, 여자부 8개, 저학년부 54개 등 모두 234개 팀, 6천여 명의 선수가 참가해 총 686경기를 치렀다. 남해에서 3년간 열린 이 대회는 2003년부터 경주에서 열리기 시작했고 2007년 지금의 화랑대기 전국초등학교 유소년 축구대회로 이름을 바꿨다. 그리고는 지금까지 엄청난 양적, 질적 성장을 이루며 올해 대회를 앞두고 경주의 영구 개최가 확정됐다. 이제 수학여행뿐 아니라 화랑대기도 경주의 상징이 됐다.

올해 화랑대기는 지난 4일부터 15일까지 열렸다. 187개 초등학교에서 471개 팀(U-12 181개 팀, U-11 150개 팀, U-10 136개 팀, 외국 팀 4개 팀) 5천여 명이 참가한 이번 대회는 11일 동안 경주에서 성황리에 치러졌다. 이 기간 동안 열린 경기는 무려 1,012경기에 이르렀다. 이어 16일부터 화랑대기 기간 동안 선발된 우수 선수들의 국가대표 상비군 선발전이 열렸고 17일부터 22일까지 엿새 동안은 호주와 브라질, 스페인, 네덜란드 등 10개국 14개 팀이 참가한 2011 경주 국제 유소년(U-12) 축구대회로 이어졌다. 19일 동안 경주는 축구를 위한 도시였다.

대회 첫날에만 무려 225경기가 열려 알천축구장 등 경주시내 11개 축구장에서 쉴 새 없이 경기를 소화해야 했다. 이 모습은 장관이었다. 한 학부형은 “여기에 사흘만 있으면 축구전문가가 될 것 같다”면서 엄청난 경기수에 감탄했다. 한국기록원은 이번 행사를 ‘한국 최대 유소년 축구대회’로 공식 인증, 한국 기네스북에 등록하기로 했고 경주시는 기록 영상과 경기 기록지, 확인서 등의 자료를 보완해 세계 기네스북에도 도전할 계획을 세웠다. 단일대회에서 1,000경기 넘게 소화하는 건 전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일이어서 세계 기네스북 등재도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다.

규모만 대단한 대회가 아니다

화랑대기가 단순히 대회 규모로만 돋보이는 건 아니다. 화랑대기는 무식하게 규모만 큰 대회도, 선수들을 혹사하는 대회도 아니다. 이 대회는 큰 의미를 가지고 있고 준비 과정도 무척 훌륭하다. 일단 대회 참가 자격을 부여하는 예선전이 따로 없다는 점이 무척 참신하다. 누구든지 희망하면 곧바로 대회에 참가할 수 있고 한 초등학교에서 최대 네 팀까지 보낼 수 있어 진정한 축구 축제로 자리매김 할 수 있었다. 단순히 성적을 가리는 대회가 아니라 함께 모여 즐겁게 축구를 하고 추억을 만들 수 있는 대회인 셈이다. 우승팀은 한 팀이 아니라 연령별, 지역별로 15개 팀에 이른다.

경주시의 지원도 전폭적이다. 황성공원 안에 축구경기장을 신설해 인조잔디구장 2면과 주차장을 추가, 11개 구장 22개 잔디면에서 동시에 경기를 치를 수 있도록 준비했다. 참가 팀들이 잔디 적응 훈련을 할 수 있도록 따로 서천둔지 잔디광장을 연습장소로 제공하기도 했다. 이 잔디광장에 가면 누구의 통제도 없이 잔디에서 마음껏 공을 찰 수 있다. 이 자체로도 도시 아이들은 행복해 한다. 잔디는 출입금지의 대상이라고 배우고 자란 아이들에게 경주만큼은 예외다. 마음껏 잔디밭에서 뛰어 놀 수 있는 환경 자체가 이 대회의 의미를 말해준다.

여름에 열리는 대회라 선수들이 체력적으로 힘들다는 지적을 받자 경기장에 야간 조명시설까지 설치했다. 해가 진 밤 8시에도 조명 아래에서 초등학교 선수들이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다. 경주의 8월은 불이 꺼지지 않는다. 더위에 대비하기 위해 각 경기장에는 그늘막을 따로 설치하는 등의 배려도 잊지 않았다. 자원봉사자와 공무원, 의료인 등 1,500여 명이 대회 진행을 도울 정도로 배려도 세심하다. 선수와 학부모, 자원봉사자, 대회 관계자 등으로 경주시내 전체가 활기를 띈다.

“축구의 천국이 여기에 있다”

경주시로서는 투자 이상의 효과를 보고 있다. 대회 기간 동안 매일 4만여 명의 선수와 학부모가 경주를 찾았고 48만 명이 경기 관람은 물론 인근 유적지에도 들렀다. 수학여행이 지역 산업의 대다수를 차지했던 경주로서는 수학여행 비수기인 한 여름에 화랑대기로 인해 무려 350억 원 이상의 경제적 효과를 낸 것으로 분석됐다. 이제는 오히려 한 여름이 성수기로 분류될 정도다. 이 기간에 경주 시내에서 빈 숙박업소를 찾는 게 더 어려운 일이 됐고 경주시내에 교통체증도 빈번해 질 정도로 시 전체가 들썩인다. 학부모들은 아예 대회 기간에 맞춰 여름휴가 계획을 세워 가족 모두와 함께 경주를 찾고 있다.

인심도 훈훈하다. 경주시에 자리 잡은 사회단체가 대회에 참가한 학교를 각각 하나씩 맡아 응원은 물론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어린 선수들은 경주에 도착하자마자 환영 현수막과 사물놀이패의 흥겨운 환영 공연에 신기해한다. 자신들도 서포터스가 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갖고 경기에 나선다. 경기가 열리는 날이면 자매결연단체에서 떡과 음료수, 과일 등을 챙겨 직접 서포터스로 변신한다. 경주시는 학교별로 안내공무원 한 명씩을 전담으로 배치해 관광안내와 각종 불편사항 해소에도 적극적으로 임하고 있다. 지역내 축구 동호회도 사회단체로 인정받아 자매결연단체로 활약했다.

화랑대기가 끝나고 치러지는 2011 경주 국제 유소년(U-12) 축구대회에 나서는 팀들도 대회 규모와 수준에 놀라기는 마찬가지다. 대회에 참가한 스페인 비야레알 U-12 관계자는 “꿈에서만 그려오던 축구의 천국이 여기 있다”면서 찬사를 보냈고 PSV에인트호벤 U-12 관계자도 “유럽에서도 볼 수 없는 축구 열기”라며 혀를 내둘렀을 정도다. 화랑대기와 국가대표 상비군 선발전을 통해 선발된 국내 초등학교 선수들은 화랑과 충무, 신라 등 세 개 팀으로 구성돼 세계 각지에서 날아온 선수들과 소중한 경험을 쌓았다.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축구대회

화랑대기에 나선 선수들은 어린 나이에 경험하기 쉽지 않은 잔디에서 성적에 대한 부담감 없이 마음껏 축구를 즐겼고 경기가 끝나면 부모님과 함께 인근 유적지를 찾아 역사 공부도 함께 했다. 학부모들 역시 아이들의 살아있는 공부에 무척 뿌듯해했다. 대한축구협회 산하 유소년축구연맹도 이 대회를 통해 유소년 축구 인프라 구축에 힘을 쏟았고 그 효과를 보고 있다. 경제적으로 대박을 친 경주시는 말할 것도 없다. 대회에 관련된 모든 일들이 즐거울 수밖에 없는 이 멋진 화랑대기는 앞으로도 경주에서 꾸준히 지속될 것이다.

이 대회에 나선 많은 선수 중에 성인이 되고도 축구선수로 활약하는 이가 과연 몇이나 될까. 아예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화랑대기는 이 선수들 중에서 단 한 명의 훌륭한 선수를 발굴해 내는 것보다 더 위대한 가치를 쫓고 있다. 모두가 축구로 즐거워 질 수 있는 바로 그 가치 말이다. “경기 때마다 한 선수가 점수판 앞에 앉아 점수 집계를 담당해야 해 출전 기회가 줄어든다”는 지적이 있었다. 그러자 화랑대기 측은 올해부터 전자득점판을 설치했다. 이런 세심한 준비가 지금의 화랑대기를 만들었다. 화랑대기는 ‘최대 유소년 축구대회’라는 이유뿐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축구대회’라는 이유로도 기네스북에 올라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