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여름도 서서히 지나고 있다. 8월도 며칠 남지 않았다. 하지만 뭔가 허전하다. 이쯤이면 K리그를 들썩이게 했던 올스타전이 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프로축구연맹은 승부조작 여파로 올 시즌 올스타전을 개최하지 않고 올스타 선수들을 선발해 축구 클리닉을 개최하는 걸로 대신했다. 현명한 선택이었지만 그래도 올스타전이 열리지 않아 아쉬운 마음은 감출 수 없다. K리그의 축제, 올스타전에 대한 즐거웠던 추억을 떠올리며 아쉬움을 달래보자.

1. 대표팀 평가전이 된 올스타전

1991년 처음 개최된 올스타전은 1992년에도 성황리에 열렸지만 이후 2년 간 중지됐다가 1995년 재개됐다. 사상 최초로 시즌 중반에 개최된 1995년 올스타전은 축제라기보다는 평가전에 가까웠다. 대표팀과 브라질의 평가전을 앞두고 열린 이 올스타전은 국가대표로 구성된 청룡과 외국인 선수로 구성된 백호의 대결로 펼쳐졌다. 청룡에는 김병지와 유상철, 하석주, 홍명보, 고정운, 황선홍 등 현직 국가대표가 모두 포함돼 있었고 백호팀에는 라데와 샤샤가 투톱으로 나서 맞불을 놨다. 축제를 즐기려다 피 튀기는 혈전을 지켜본 부산 구덕운동장의 2만 5천여 관중은 뜻하지 않은 명승부에 환호했다. 청룡이 노상래의 결승골로 1-0 승리를 챙겼다. 거친 태클이 난무하는 올스타전은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2. 손 안 대고 코 푼 김남일

2002 한일월드컵이 끝난 후 K리그 인기는 상종가를 쳤다. 그 중 김남일의 인기는 압도적이었다. 그는 수 많은 오빠부대를 거느리고 있었다. 팬들을 상대로 한 올스타 투표에서도 김남일은 홍명보(38만 433표)에 이어 2위를 기록했다. 하지만 문제는 김남일이 월드컵 이후 부상으로 단 한 경기도 나서지 못했다는 점이다. 일부에서는 올스타 선정이 인기 투표가 된 것 아니냐는 지적도 했다. 더 재미있는 사실은 이때 김남일이 얻은 37만 315표는 아직도 역대 득표수에서 역대 2위라는 점이다. 김남일은 이후 2004년과 2006년에는 당당히 부상 없이 올스타 투표에서 1위로 선정되기도 했다. 이 형이 왕년에는 어마어마했다.

3. 고종수의 “나도 가수다”

1999년 당시 고종수와 안정환, 이동국은 최고의 신세대 스타로 급부상했다. 요새로 치면 2PM도 울고 갈 인기였다. 물론 그 해 올스타전도 이들의 출전으로 경기 전부터 시끌벅적했다. 연맹에서는 팬들에게 어떤 특별한 서비스를 제공해줄지 고민하다가 무릎을 쳤다. 하프타임을 이용해 이 세 선수의 노래 대결을 펼치기로 한 것이다. 대대적으로 홍보도 했다. 하지만 내성적인 안정환과 이동국은 손사레를 쳤고 결국 대결을 포기했다. 이미 홍보를 마친 연맹은 난리가 났다. 고종수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그때 고종수가 말했다. “노래 한 곡 하는 거 뭐 어렵나요.” 결국 고종수는 6만여 관중 앞에서 노래를 불렀다. 컨츄리꼬꼬의 <오! 해피>였다. 이 노래를 감상하던 청중평가단, 아니 관중들은 눈물을 흘리고 장기호 교수, 아니 김호 감독은 “마치 나만 가수다”라는 느낌이라고 말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는 않았다. 다함께 합창하며 즐겼다.

4. 평생 머리를 공짜로 자를 수 있는 영광

준오헤어는 2003년부터 K리그 올스타전이 J리그 팀과의 맞대결로 바뀌기 전인 2007년까지 올스타 선정 선수들에게 평생 무료 이용권을 선물했다. 현역 올스타 선수들은 물론 올드스타로 선정된 차범근, 허정무, 최순호, 황선홍, 김주성 등도 이 선물의 주인공이 됐다. 약 100여 명에 가까운 이들이 지금까지 평생 무료 이용권의 주인이 됐다. 이들은 전국 40여개 준오헤어숍에 가 커팅, 트리트먼트, 컬러링, 퍼머 등 20여 가지 서비스를 평생 무료로 받을 수 있다. 돈으로 환산하면 1인당 2천만 원에서 5천만 원 정도의 가치가 있다는 평가다. 축구만 잘하면 평생 머리를 공짜로 만질 수 있는 세상이었다. 하지만 이 선물을 받은 모두가 기쁨에 겨워하는 동안 구석에서 울고 있는 한 남자가 있었으니 바로 박항서 감독이었다.

5. 올스타전 시축의 의미

1999년 올스타전 킥오프 휘슬이 울리기에 앞서 한 노인이 그라운드로 들어섰다. 거동이 불편해 부축을 받으며 등장한 이에게 관중들은 호기심 어린 시선을 보냈다. 그리고는 장내 아나운서의 소개가 있자 큰 박수를 보냈다. 바로 당시 92세로 국내 최고령 축구인이었던 김화집 옹이었다. 광복 직후 대표팀 코치를 맡기도 했던 김화집 옹은 이날 올스타전에서 시축을 하며 진한 감동을 선사했다. 2004년에는 당시 본프레레 성인대표팀 감독과 김호곤 올림픽대표팀 감독이 나란히 시축을 하기도 했다. 이들은 아시안컵과 올림픽 선전을 기원하며 서로 꽃다발을 주고받았다. “감독님이 오시기 전에 미리 와일드카드를 뽑아 죄송합니다”라고 김호곤 감독이 인사하자 본프레레 감독은 “괜찮아요. 꼭 우승하세요”라고 화답했다. 조광래 성인대표팀 감독과 홍명보 올림픽 대표팀 감독의 선수 차출 문제로 인한 갈등의 해법은 바로 여기에 있다. 올스타전 시축은 특별한 의미를 지녔다.

6. 돈 되는 상품 올스타전

시청률 20.4%. <무한도전>이나 <1박2일> 시청률이 아니다. 그렇다고 A매치 축구경기 시청률도 아니다. 바로 2002년 K리그 올스타전 시청률(AC닐슨 집계)이다. 전국민 5명 중 한 명이 K리그 올스타전을 시청한 셈이다. 2005년 올스타전 역시 12.9%의 시청률을 기록해 그 해 모든 프로스포츠 중계방송 시청률 중 최고를 기록하기도 했다. 또한 스포츠 리서치 업체인 ‘스포츠마케팅서베이’는 2005년 올스타전의 광고효과가 무려 116억 원에 달한다는 발표를 하기도 했다. 2003년과 2004년에도 8%가 넘는 시청률로 대박을 쳤다. 지난 주 <1박 2일> 시청률이 14.7%였으니 2002년 올스타전 열기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가나.

7. 올스타전의 백미 캐논슛 콘테스트

K리그 올스타전의 하이라이트는 90분의 경기가 아닌 하프타임에 치러지는 캐논슛 콘테스트였다. 관중들은 한 선수 한 선수씩 차례로 나와 강력한 슈팅을 날리면 전광판에 찍히는 시속을 보며 감탄하기도 했고 마음껏 비웃기도 했다. 캐논슛 콘테스트는 올스타전의 백미였다. 특히 2000년 올스타전에서는 모두를 경악하게 할 만한 일이 벌어졌다. 한 선수가 무려 133km/h의 슈팅을 날려 1위를 차지했는데 그 주인공이 다름 아닌 골키퍼 김병지였기 때문이다. 올스타전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김병지의 슈팅이 130km/h가 넘는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골도 잘 막고 헤딩슛도 잘 하고 대포알 슈팅까지 잘 하는 김병지는 까도 까도 뭔가 새로운 게 나오는 양파 같은 남자다.

8. 라디오와 함께한 올스타전

“사랑하는 남자친구와 함께 K리그 올스타전을 보러 가고 싶어요. 꼭 당첨되게 해 주실 거죠?” 옥주현이 <별이 빛나는 밤에>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통해 사연을 읽는다. 꿈만 같은 이야기가 아니다. 실제로 2005년과 2006년 올스타전을 앞두고 연맹에서는 <옥주현의 별이 빛나는 밤에>를 비롯해 6개의 라디오 프로그램을 통해 사연을 신청 받고 이들에게 입장권을 선물하는 이벤트를 했었다. 이 이벤트는 반응이 괜찮았었다. 개성 넘치는 사연들도 많았다. 고등학교 3학년 학생부터 조기축구에 여념이 없는 40대 남편을 둔 아주머니까지 다양한 사연들이 K리그와 만났다. 나도 <황정민의 FM대행진>에 사연을 보냈었는데 결국 당첨에는 실패했다. ‘티팬티를 입고 논두렁에서 태닝을 하고 있다’는 말을 빼놓아서 그런 걸까.

9. 최용수 출전 자격 논란

1998년 최용수는 최고의 스타였다. 비록 프랑스 월드컵에서는 부진했지만 대표팀이 월드컵에 나가기까지 최용수의 활약은 대단했다. 그가 1998년 올스타전에 빠지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1996년 12월 군에 입대한 최용수가 프로팀 소속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가 올스타전에 출전한다면 부정 선수라는 지적이 일기 시작했다. 최용수가 빠지면 흥행에 빨간불이 켜질 상황에서 연맹은 머리를 쥐어짰다. 그리고는 “최용수가 전LG 소속이므로 번외로 나서면 문제가 없다”는 해석을 내놓은 끝에 그는 올스타전에 나설 수 있었다. 결국 최용수가 올스타전에 나서면서 LG 제용삼이 올스타에서 제외돼 적지 않은 논란이 생기기도 했다.

10. 배꼽 빠지게 즐거웠던 계주 경기

하프타임은 관중들이 화장실도 가고 간식도 사 먹고 담배도 피울 수 있는 시간이다. 하지만 올스타전 하프타임에는 절대 그럴 수 없었다. 바로 계주 경기가 열렸기 때문이다. 선수는 물론 구단 직원, 팬, 심판 등이 구단별로 팀을 짜 나서는 이 경기는 모두의 축제, 서로 편 가르지 않는 것이 숙제, 소리 못 지르는 사람이 술래라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한 이벤트였다. 구단 닥터들은 응급 처치함을 들고 뛰었고 배 나온 심판들도 전력 질주를 했다. 2002년 올스타전에서는 당시 부산 소속이던 마니치가 계주에 나서 총알처럼 빠른 스피드를 자랑하다가 결국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시즌을 마감하고 고국으로 돌아가는 일도 있었다. 프리미어리그에 이런 올스타전이 있고 계주 이벤트가 있다면 정말 우사인 볼트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입단할 수도 있을 것이다.

11. 김현석의 아름다운 은퇴

운동선수라면 누구나 멋진 은퇴식을 꿈꾼다. 그런 면에서 김현석은 무척 복 받은 선수다. 그는 소속팀 동료뿐 아니라 K리그의 모든 이들로부터 멋진 은퇴식을 선물 받았다. 2003년 당시 K리그 최다경기 출장 기록 보유자이면서 최초 50-50 클럽 가입 선수였던 김현석은 올스타전을 통해 은퇴식을 치렀다. 대선배의 은퇴 경기에 후배들은 이 팀 저 팀 할 것 없이 모두 박수를 보냈고 경기가 끝난 뒤에는 헹가레를 하며 존경의 뜻을 표했다. 이날 경기에서 1골 1도움을 기록한 그는 경기가 끝난 뒤 단상에 올라 소감을 전했고 관중들은 김현석을 연호하기도 했다. 2001년 올스타전에서도 고정운이 은퇴식을 치렀었다. 올스타전이 아니었다면 김현석과 고정운은 이렇게 성대한 마지막 무대를 갖지 못했을 것이다.

12. 왕년의 스타들과 함께

차범근 감독이 현역으로 뛴다면 어떨까. 황선홍과 홍명보가 다시 한 그라운드에서 뛰면 어떤 모습일까. 이 꿈같은 일은 올스타전에서 현실이 됐다. 2003년과 2005년 올스타전에서는 본 경기에 앞서 오픈경기로 ‘홈커밍매치’를 열었었다. 차범근을 비롯해 허정무, 최순호, 황선홍, 홍명보, 김학범, 이장수, 최윤겸, 장외룡, 정해성, 고정운, 신의손, 최강희, 김정남 등 일일이 열거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많은 왕년의 스타들이 그라운드를 수놓았다. 비록 전성기 시절의 실력은 아니지만 팬들은 배가 잔뜩 나온 이들의 플레이를 올스타전 본 경기보다 더 재미있게 지켜봤다. 포터필드 당시 부산 감독도 ‘용병’으로 경기에 참여했다. 정해성 감독은 경기를 앞두고 격렬하게 개인훈련을 하다 부상을 당할 정도로 열의에 넘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고 조병득 수원 골키퍼 코치도 몰래 볼캐칭 연습을 하다 이운재에게 발각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창피를 당하는 건 죽어도 싫었던 모양이다.

13. 팬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 경기

2003년 올스타전에 앞서 서울월드컵경기장에는 서명 운동을 벌이는 이들로 북적였다. 서울프로축구팀 창단 촉구 100만 명 서명 운동 때문이었다. 올스타전이 아니면 이렇게 많은 팬들 앞에 설 기회가 없는 터라 이들은 올스타전을 통해 활발한 운동을 펼치고 있었다. 경기장에는 “아빠! 왜 서울에는 프로축구팀이 없는 거야?”라는 대형 현수막이 걸렸다. 2006년 올스타전에서는 부천SK가 제주도로 연고이전을 감행한 사태로 인해 K리그 상당수 서포터스가 모여 “연고이전 반대”를 외치기도 했다. 부천팬 뿐 아니라 평소 이들과 사이가 좋지 않던 다른팀 팬들 역시 한 목소리를 내며 거꾸로 가는 K리그의 현실을 꼬집었다. 나도 여기에 참석했다가 경호원한테 한 대 맞을 뻔했다.

14. 몸개그와 특별한 세레모니

올스타전에는 비록 다른 경기만큼 박진감은 없지만 특별함이 있다. 드리블하던 선수가 갑자기 축구화를 벗어 전화하는 시늉을 하기도 했고 가발을 쓴 민머리 선수 김용희가 경기 도중 대머리 부심에게 가발을 선물하기도 했다. 공오균은 골을 터뜨린 뒤 그라운드 옆에 있던 방송용 마이크를 들고 차범근 감독에게 달려가 기관총 세례를 퍼붓기도 했다. 다른 경기에서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 올스타전에서는 벌어진다. 선수들은 골을 넣으면 춤을 추고 팬들은 이 모습을 박장대소하며 지켜본다. 이게 바로 올스타전의 묘미 아닐까.

15. 오늘의 동지가 된 어제의 적

수원 팬들이 안양 응원가를 부른다. 울산 팬들과 포항 팬들이 어깨동무를 한다.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올스타전에서는 가능했다. 중부와 남부로 나뉘어 치러진 올스타전에서는 서포터스도 두 팀으로 나눠 응원전을 펼쳤다. 평소 경기장에서 죽고 못사는 이들이었지만 이날 만큼은 하나가 돼 서로의 응원가를 함께 부르며 축제를 즐겼다. 그러면서도 최대한 많은 인원을 자랑하려는 기 싸움도 있었다. 어떤 유니폼 색이 더 많이 관중석을 수놓느냐에 따라 그 서포터스의 평가가 달라지기 때문에 K리그 서포터라면 반드시 이 경기에 참여해야 했다. 지금은 연고이전 팀들이 생겨나면서 이런 진풍경도 더 이상은 볼 수가 없다. 어찌됐건 그땐 그랬다.

올스타전이 없는 아쉬운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고 있다. 올해 올스타전은 접었지만 내년에는 다시 이 K리그 팬들의 축제가 화려하게 돌아왔으면 좋겠다. 올스타전이 과거의 추억으로만 끝날 게 아니라 앞으로도 영원히 별들의 잔치로 자리 잡아 우리들을 즐겁게 해주길 기원한다. 우리는 몇 년 째 제대로 된 올스타전을 하지 못했다. 나는 J리그 선수들이 나오고 메시가 나오는 K리그 올스타전보다 심판이 계주에 나서고 캐논슛 콘테스트가 펼쳐지는 올스타전이 더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