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번 큰 대회에 나갈 때마다 붙는 수식어가 있다. ‘역대 최강.’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 나갈 때도 그랬고 1994년 미국 월드컵에 나갈 때도 그랬고 이후에도 매번 그랬다. 청소년 월드컵도 마찬가지였다. 1997년에도, 1999년에도 우리는 항상 “이번 대표팀이 역대 최강”이라고 기대했다. 이대로 가다간 2100년 쯤에는 어떤 대표팀이 구성될지 무척 궁금해진다. 하지만 ‘역대 최강’이라는 수식어가 성적까지 보장해 준 건 아니다.

‘역대 최강’은 아닌 이광종호

그런데 지금 콜롬비아에서 열리는 국제축구연맹(FIFA) U-20 청소년 월드컵에 나서고 있는 대표팀에는 ‘역대 최강’이라는 수식어가 붙지 않는다. 지금까지 대회에 나설 때마다 진정으로 역대 최강 전력이 아니더라도 간판스타 몇 명만 있으면 그럴싸한 포장용으로 이런 수식어를 붙였지만 이번 대표팀은 ‘역대 최강’이라는 수식어를 달아주기에는 한참 무리가 있다. 이번 대표팀은 ‘역대 최강’이 아니라 그냥 ‘이광종호’다.

지동원(선덜랜드)과 손흥민(함부르크), 석현준(흐로닝언), 남태희(발렝시엔) 등 유럽파들이 대거 소속팀의 차출 반대로 대표팀에 뽑히지 못했다. 아마 이들이 포함됐다면 어김없이 ‘역대 최강’이라는 소리가 나왔을 것이다. 이들의 소속팀은 차출 의무가 없는 청소년 월드컵에 이들을 내주지 않았다. 유럽파라고는 프랑스 2부리그에서 뛰는 이용재(낭트)가 유일하다. 이용재와 J2리그 가이나레 돗토리에서 뛰고 있는 김선민을 제외하고는 전원 국내에서 뛰는 선수들이다. 김선민도 이민수(한남대)의 부상으로 대회 직전 합류한 선수다.

그렇다고 2007년 캐나다 U-20 청소년 월드컵에 나선 선수들처럼 대거 K리거가 포함된 것도 아니다. 당시 청소년 대표팀 주축 선수들 중에는 K리그에서 뛰는 이들이 상당수 포함돼 있었다. 신영록과 하태균(당시 수원), 기성용과 이청용, 김동석(당시 서울), 심영성(제주), 이상호(울산), 최철순(전북), 신광훈(포항) 등이 주축 멤버였다. 그런데 이번 대표팀은 그렇지도 않다. 지난 말리전에서 맹활약한 백성동(연세대)과 김경중(고려대), 이기제(동국대) 등은 모두 아마추어 무대에서 뛰는 선수들이다.

그들의 도전이 반가운 이유

이번 대회에 나선 21명의 선수 중 대학생이 무려 11명이다. K리거가 8명이고 해외파는 단 두 명뿐이다. K리그에서 꾸준히 경기에 나서고 있는 이는 윤일록(경남)과 황도연, 김영욱, 이종호(전남) 정도뿐이다. 나머지는 주로 2군에서 활약하고 있다. 두 명뿐인 해외파도 그리 강렬하지 않다. 과거의 선수 구성과 비교해보면 초라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큰 대회를 치를 때마다 등장하는 ‘역대 최강’이라는 수식어를 가져다 쓰기 민망한 수준이다.

하지만 이번 대표팀의 선수 면면만 놓고 보면서 실망하지 말자. 선수 구성은 ‘역대 최강’이 아니지만 충분히 그 이상의 가치가 있는 팀이다. 축구는 선수 한 두 명이 하는 개인 종목이 아니라 11명이 모여서 하는 경기다. 팀보다 위대한 선수는 아무도 없다. 그런 의미를 이번 대표팀은 잘 표현하고 있다. 지난 말리전에서 이들이 펼친 멋진 경기력은 축구의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 보여줬다. 유럽 클럽 소속이 아니어도, K리그 주축 선수가 아니어도 세계무대에서 경쟁력이 있다는 걸 보여준 경기였다.

이번 대표팀은 K리거와 아마추어 선수들이 적절히 섞였다. 선수단이 이동할 때 어느 한 명이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지도 않고 특정 선수 한 명의 컨디션이 경기력에 큰 영향을 받지도 않을 정도로 전력이 고르다. 비록 특급 스타는 없지만 난 이래서 오히려 이들의 도전이 더 반갑다. 이번 청소년 대표팀이 ‘역대 최강’은 아니어도 더 흥미롭다. 오히려 ‘역대 최강’이라는 수식어는 항상 찜찜한 결과를 동반하지 않았나. 과연 말리를 격파한 이들이 프랑스와 콜롬비아라는 만만치 않은 팀들을 상대로 얼마나 더 날아오를 수 있을지 궁금하다.

떠나는 황도연, 남은 자들의 약속

황도연(전남)의 조기 귀국도 아쉽지만 남은 선수들에게는 촉매제가 될 것이다. 말리전에서 중앙수비수로 나선 황도연은 전반 시작 20분 만에 말리 공격수와 충돌한 뒤 코를 감싸 쥐고 그라운드에 쓰러졌다. 출혈이 심해 응급처치를 받고 다시 그라운드로 들어갔지만 경기 도중에도 계속 코에서 피가 흘렀다. 황도연은 의무팀이 걱정하고 있는 와중에도 머리 위로 동그라미를 그리면서 “계속 뛰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코뼈와 광대뼈 사이를 잇는 연골이 부러진 상태였다. 결국 그는 전반전이 끝난 뒤 교체되고 말았다.

황도연은 눈물을 흘렸다. 이 대회 준비를 위해 지난 시간 땀과 눈물을 흘리며 노력했던 그의 도전은 단 45분 만에 끝났다. 수비력은 물력 공격력까지 겸비한 황도연의 결장으로 중앙수비의 재편이 필요해 전력누수도 피할 수 없게 됐다. 이 자리는 김진수(경희대)나 민상기(수원)이 대신한다. 부상당한 황도연은 오늘(2일) 오전 홀로 콜롬비아에서 한국으로 날아온다. 함께 땀 흘리던 동료들은 모두 콜롬비아에 남았지만 혼자 먼저 귀국해 병원으로 직행해야 한다. 황도연의 생애 단 한 번뿐인 U-20 청소년 월드컵은 이렇게 끝났다.

그의 조기 귀국은 대표팀으로서는 악재다. 주축 수비수를 잃었다. 하지만 이번 대표팀은 ‘팀 스피릿’이 강하다. 황도연이 콜롬비아를 떠나던 순간 팀 동료들은 그와 눈물의 인사를 나눴다. 함께 한 동료를 먼저 한국으로 보내야 하는 이들은 황도연과 작별하면서 약속했다. “네 몫까지 뛸게.” 황도연도 화답했다. “너희들이 있어서 걱정하지 않는다.” 비록 황도연은 먼저 한국으로 돌아오지만 남은 선수들의 정신력은 오히려 더 강해졌다. 이게 바로 이번 대표팀의 장점이다.

이들의 도전을 응원하자

남들은 ‘역대 최강’이 아니라 실망할 수도 있다. 이번 대표팀 선수들도 “스타가 없다”는 세간의 평가에 무척 속상해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그 어떤 대표팀보다 정신적으로 강하다. 한 두 명의 스타 선수가 없어 ‘역대 최강’이라는 수식어를 달지는 못했지만 충분히 그 이상 멋진 능력을 가진 팀이다. 이들은 아시아 예선에서 4강에 진출해 청소년 월드컵 참가 자격을 얻은 당당한 팀이다. 태극마크를 달고 그라운드를 누비는 선수들이다. 충분히 박수를 보낼 만한 자격이 있다.

앞으로 지금처럼 어린 선수들이 대거 유럽으로 진출하는 추세라면 이런 경향이 더욱 잦아질 것이다. 우리는 100%의 전력이 아닌 상태에서 싸우는 일이 많아질 것으로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도 이번 이광종호의 도전을 유심히 지켜볼 필요가 있다. 진정한 축구 강국이 되려면 유럽파를 차출하지 않고도 이러한 대회에서 경쟁력을 갖출 정도로 성장해야 한다. 한국 축구는 지금 발전을 거듭하면서 유럽 진출 선수들이 많아져 새로운 시험대에 서야 한다.

아마 다가올 프랑스전과 콜롬비아전은 말리전보다 쉽지 않은 승부가 될 것이다. 말리전 승리로 16강 진출에 발판을 마련했지만 남은 두 경기의 상대가 만만치 않다. 프랑스에는 카쿠타라는 스타선수가 있고 홈팀 콜롬비아는 이런 프랑스를 첫 경기에서 4-1로 대파한 강팀이다. 하지만 나는 믿는다. 이번 청소년 대표팀은 ‘역대 최강’ 전력은 아니지만 ‘역대 최강’ 투혼을 보여줄 것이다. 팀보다 위대한 선수는 없다는 사실을 이번 이광종호가 보여주길 바란다. 이번 대표팀이 ‘역대 최강’이 아니어도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