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청용이 충격적인 부상을 당했다. 프리시즌 경기에서 상대팀 선수의 거친 태클로 인해 시즌 개막전도 치르기 전에 시즌 아웃을 당할 것이라는 소식이 흘러나온다. 최대 9개월 동안 재활에 매달려야 할 수도 있다니 우리는 한 동안 이청용을 그라운드에서 보지 못할 것이다. 안타깝고 가슴 아픈 일이다. 이제 그는 부상 치유와 재활이라는 외롭고 고통스러운 긴 터널을 지나야 한다. 하지만 낙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청용보다 더한 부상을 당하고도 기적 같은 재기에 성공한 사례가 많기 때문이다. 오늘은 이청용의 오랜 친구이자 아픔을 딛고 다시 일어선 심영성의 이야기를 전하려 한다.

무릎뼈 100조각 난 축구선수

심영성은 한국 축구를 이끌 기대주였다. 2006년 U-19 아시아선수권 대회에서 5골을 기록하며 득점왕에 올랐던 그는 이듬해 열린 U-20 청소년 월드컵 본선 무대에서도 브라질을 상대로 골을 기록하는 등 차세대 스트라이커로 각광 받았다. 당시 대회에서 주목 받은 건 기성용도 이청용도 아닌 심영성과 신영록이었다. K리그에서도 꾸준한 활약을 펼친 그는 2007년부터 제주유나이티드에서 3년간 73경기에 나서 14골을 뽑아내며 득점력을 과시했다.

하지만 탄탄대로를 걷던 심영성은 2010년 1월 믿을 수 없는 사고를 당했다. 늦은 저녁 자가용을 직접 운전해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깜빡 졸다가 차가 인도를 넘어 가로수를 들이 받는 대형 교통사고를 낸 것이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가까스로 차에서 기어 나왔지만 오른쪽 무릎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축구를 계속하기는커녕 살아난 게 다행일 정도로 엄청난 사고였다. 곧바로 인근 병원으로 후송돼 전해들은 소식은 청천벽력이었다. “오른쪽 무릎뼈가 100조각이 났습니다. 완전히 으스러졌어요.”

주위에서는 “축구는 고사하고 일상생활도 힘들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사실상 축구선수로서의 생명은 끝난 것과 다름없었다. 당시 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해 제주도에 머물고 있던 무릎 수술 분야의 대가 김진구 명동 백병원 부원장을 급히 수소문해 이튿날 곧바로 함께 서울로 올라가 수술대에 올랐다. 무릎 뼈가 산산조각이 나 있어 붙이기도 제대로 쉽지 않았다. 결국 골반 뼈를 절개해 무릎에 가져다 붙이는 5시간에 걸친 대수술을 해야 했다. 한 번에 수술이 끝나자 않아 무릎 뼈를 붙이는 수술만 한 번을 더 했다.

수술보다 고통스러운 재활훈련

이렇게 총 5차례의 수술이 이어졌다. 불과 3년 전 브라질을 상대로 펄펄 날던 한국 축구의 기대주는 이제 발가락을 겨우 까딱거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었다. 병원에만 총 5개월을 누워 있었고 모두는 그를 잊어갔다. 사실상의 은퇴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병실에 누워 매일을 고통과 싸워야 했다. 하지만 이때 담당 의사는 이런 말을 했다. “죽어라 노력하면 1년 후에는 기적적으로 그라운드에 설 수도 있다.” 심영성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는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을 동반한 재활을 택했다. 가장 노릇을 했던 그에게 집안이 달려있었기 때문이다.

재활은 수술보다 더 고통스러웠다. 강원도 평창으로 가 지옥 같은 재활훈련을 시작했다. 무릎에 찾아오는 극심한 고통과 싸워야했고 외로움과 싸워야했다. 복귀에 대한 확신도 없어 불안감도 엄습했다. 그러던 중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또 다시 전해 들었다. 폐암으로 투병 중이던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이다. 하늘이 무너지는 소식이었다. 목발을 짚고 빈소를 지킨 그는 “사고만 아니었다면 어머니가 더 사셨을 것”이라면서 한 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가 프로 선수가 된 뒤 어느 정도 가정 형편이 나아지자 일을 그만두었던 아버지는 아파트 경비원으로 다시 생업 전선에 뛰어 들어야 했다.

심영성은 이를 악 물었다. 하늘에 계신 어머니를 위해, 자신을 위해 적지 않은 나이에도 다시 일터로 나가신 아버지를 위해, 그리고 자기 자신을 위해 고통스러운 재활을 참았다. 잠시 어머니 49재 때 고향에 내려갔던 걸 제외하고는 거의 매일을 강원도 재활 센터에서 살았다. 그러자 서서히 통증도 줄어들었고 거동도 가능해졌다. 정신적으로 의지할 곳을 잃은 그는 오히려 더 강해졌다. 선수들은 흔히 무릎 십자인대 파열이라는 큰 부상을 당하면 재활이 너무 고통스럽다고들 하는데 그에게 십자인대 파열은 부상도 아니었다.

1년 7개월 만의 기적적인 복귀

제주 구단에서는 심영성을 위해 많은 배려를 해줬다. 사실 심영성은 사고 당시 제주를 떠날 생각을 하기도 했다. FA 상태였고 그를 원하는 팀도 있었다. 그런데 그가 사고를 당하자 제주 구단은 축구선수로는 사실상 생명이 끝난 그와 오히려 1년 재계약을 맺어줬고 수술비를 전액 지원하기도 했다. 연봉이 조금 깎이기는 했지만 심영성으로서는 너무도 고마운 일이었다. 심영성은 그 돈으로 생활비를 충당할 수 있었다. 심영성은 구단의 배려에 복귀로 화답하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해 죽어라 재활에만 매달렸다. 그리고 그의 상태를 면밀히 지켜본 제주 구단 의무팀은 지난 4월 드디어 ‘OK’ 사인을 냈다. 짧은 시간이나마 그라운드를 밟을 수 있다는 의미였다.

그렇게 그는 지난 4월 17일 부상 이후 처음으로 자체 연습경기에 나섰다. 목숨을 겨우 구한 대형 교통사고를 당한지 15개월 만의 일이었다. 그런데 그는 놀라운 활약을 펼쳤다. 그는 이 경기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하면서 자신감을 되찾았다. 그리고 한남대와의 연습경기에서 70분 동안 두 골을 뽑아내며 감각을 이어갔고 R리그(2군리그) 상주상무전에서도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지난 6월 29일 수원과의 러시앤캐시컵 2011 8강전에서 심영성은 극적인 공식 복귀전을 치렀다. 비록 제주는 이날 경기에서 승부차기 끝에 수원에 패했지만 심영성의 복귀는 희망의 메시지를 던져줬다.

박경훈 감독 역시 경기 전 그를 향해 “잘하고 못 하고를 떠나 그라운드를 다시 밟았다는 것 자체가 무척 고맙다. 좋은 경기는 나중에 보여줘도 좋으니 오늘은 경기 그 자체를 즐기라”면서 뿌듯해했다. 장내 아나운서가 그를 소개하면서 “제주의 아들 심영성 선수가 오랜 만에 돌아왔습니다”라고 외치자 여기 저기에서 박수가 쏟아졌다. 그렇게 심영성은 무릎뼈가 100조각 난지 1년 7개월 만에 다시 그라운드로 돌아왔다. 모두가 끝났다고 회의적인 시선을 보냈지만 그는 기적적으로 다시 돌아왔다. 모두가 잊었던 과거의 유망주는 그렇게 다시 그라운드에 복귀했다.

심영성이 전하는 메시지

심영성과 이청용은 한국 청소년 대표팀이 2007년 세계 최강 브라질을 상대로 대등하게 싸울 때 함께 뛴 주인공이다. 당시 한국은 세 골을 먼저 실점하고도 후반 막판 극적으로 두 골을 따라 붙는 저력을 보여줬다. 종료 휘슬이 울리기 직전 파투와 마르셀루를 비롯한 브라질 선수들은 한국의 막판 대공세에 적지 않게 당황했었다. 포기를 모르는 우리의 태극전사들은 비록 경기에서 패했지만 진한 감동을 선사했다. 심영성이 그랬던 것처럼 당시 드라마를 함께 썼던 이청용 역시 이 위기에서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설 것이라 믿는다.

심영성의 기적적인 복귀는 많은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비단 지금 큰 부상을 당해 고통스러워하는 이청용뿐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던지는 메시지다. 지금도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아 괴로워하고 있는 이들에게 심영성의 이야기는 큰 힘이 될 것이라 믿는다. 그는 1년 7개월 만의 복귀전을 마치고 이런 말을 남겼다. “참고 또 참으니 조금씩 아픔이 사라지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