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대를 풍미했던 두 명의 축구천재는 이제 감독이 돼 만났다. ⓒ스포츠니어스

[스포츠니어스 | 김현회 기자] 한국 축구 역사상 가장 천재적이면서도 불운했던 선수는 누구일까. 단연 두 명의 이름이 떠오른다. 바로 김종부와 김병수다. 이 둘은 한국 축구 역사상 가장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저마다의 이유 때문에 결국 선수로서는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한 명은 이적 파동으로 가장 빛나야 했던 시절을 방황해야 했고 또 한 명은 부상으로 마음껏 뛰지도 못한 채 계속해서 수술대에 올라야 했다. 하지만 이 두 명의 축구 천재는 결국 돌고 돌아 다시 그라운드에 돌아왔다. 이제는 감독이 된 이 두 명의 축구 천재가 지난 13일 창원축구센터에서 만났다. 참으로 극적이고 운명적인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오늘은 김종부 감독과 김병수 감독의 과거와 현재에 대해 소개하려 한다.

“원하는 모든 걸 들어주겠다”

김종부는 한국 축구 역사상 가장 기대를 많이 모았던 선수였다. 1983년 대한민국을 축구 열풍에 휩싸이게 했던 멕시코 세계청소년선수권대회에서 맹활약한 김종부는 국민적인 영웅으로 떠올랐다. 청소년 대표팀은 이 대회에서 4강이라는 위업을 달성했고 그 중 특히 김종부는 군계일학이었다. 그리고 3년이 흐른 1986년 대학교 4학년이 된 김종부는 졸업과 함께 프로 입성의 꿈에 부풀었다. 스페인에서 영입 제의가 왔지만 군대 문제 때문에 해외 진출은 꿈도 꾸지 못했던 김종부는 프로축구 구단 스카우트 1순위로 지목받는 선수였다. 김종부는 대학교 스승인 이차만 감독이 코치로 있는 대우로 가고 싶어 했지만 고려대 측에서는 시설 투자를 받은 현대로 가길 원했다.

결국 현대는 1986년 3월 29일 현대와 대우의 프로축구 경기가 열리던 날 모든 신경이 이 경기에 쏠린 틈을 타 김종부와 만났다. 대우 측에서는 정태현 단장과 안종복 사무국장이 경기 준비를 위해 청주로 내려가 있던 상황이었다. 현대는 휴가를 받아 고려대학교 정문을 빠져 나오던 김종부를 서울 시내 모 호텔로 모셔왔다. 이 자리에서 김종부는 현대의 계약 제안을 거절했다. 현대 측에서 “원하는 모든 걸 들어주겠다”고 했지만 이차만 감독을 배신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김종부의 매형이 대리인 자격으로 협상 시작 10시간 만에 현대와 계약에 합의했다. 계약 조건은 파격적이었다. 계약금 1억 5천만 원(공식발표로는 8천만 원), 연봉 2천 4백만 원, 졸업까지 매월 장학금 2백만 원, 별도의 경기 수당, 현대자동차 광고 모델로 별도의 수익 제공 등 당시에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파격적인 계약 조건이었다.

현대는 아예 쐐기를 박았다. 이튿날 곧바로 언론을 통해 김종부 영입 사실을 만천하에 알린 것이다. ‘대우행 유력하던 김종부, 전격 현대행’ 이같은 보도에 세상이 발칵 뒤집혔다. 이전까지 대우로 가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던 김종부가 돌연 현대로 가게 됐으니 놀랄 만도 했다. 하지만 대우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대우는 현대행 보도가 나간 이튿날 곧바로 언론 플레이에 들어갔다. 일부러 언론에 “김종부가 대우로 유턴했다”고 흘린 것이다. 그리고는 대우 이차만 코치와 안종복 사무국장이 김종부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이차만 코치는 “너는 내 밑에서 축구를 하는 게 더 성장할 수 있는 길”이라면서 고려대 시절 인연을 강조했고 김종부는 이에 흔들리기 시작했다. 결국 김종부는 4월 11일 서울의 한 호텔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이렇게 말했다. 지금까지의 정황을 한꺼번에 뒤집는 폭탄 발언이었다. “저와 현대의 계약은 무효입니다. 저는 원래 제가 가고 싶었던 대우로 가겠습니다.”

김종부 감독은 경남을 돌풍의 팀으로 만들었다. ⓒ프로축구연맹

“김종부는 우리 선수다”

난리가 났다. 사태가 일파만파로 번지자 이를 지켜보던 고려대 측에서도 무언가 대책을 마련해야 했고 결국 체육위원회 전체회의를 소집했다. 3시간 가까운 회의 끝에 내려진 결론은 하나였다. 고려대의 결정은 충격적이었다. “김종부를 축구부에서 제명시키겠습니다.” 회의를 마친 다음 날 곧바로 고려대는 대한축구협회에 김종부의 선수등록 말소를 통보했다. 고려대에서 징계를 받아 제때 졸업도 하지 못했고 현대와 대우는 1년 6개월이 지난 1987년 8월까지도 대립하고 있었다. 현대는 “김종부와 우리가 먼저 가계약을 맺었다”고 주장했고 대우는 “김종부가 우리 팀을 택했다. 우리 선수다”라면서 첨예하게 맞섰다. 축구계에서는 어떤 식으로건 김종부를 다시 그라운드에 서게 하려고 머리를 맞댔지만 이미 현대와 대우의 싸움은 자존심 대결로까지 번져 있어 손 쓸 방법이 없었다. 시간이 흘러 1987년 겨울이 되자 이듬해 올림픽을 앞둔 축구계는 김종부 살리기에 나섰다.

고려대학교에서 졸업하지 못한 김종부는 학점을 다 채워 1987년 가을에 졸업했고 대우 측은 현대보다 먼저 김종부를 자신의 소속으로 협회에 등록해 버렸다. 김종부는 곧바로 대우 선수단에 합류해 훈련을 시작했다. 김종부는 이 일로 파동이 마무리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현대가 이 사실을 알고 분노하며 대대적인 반격에 나섰음은 물론이다. 현대는 강경했다. “이런 식의 처사를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우리는 축구단을 해체하겠다.” 누구보다도 축구에 대한 투자가 전폭적이었던 현대가 해체되는 건 한국 축구가 몰락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회택을 비롯해 김정남, 김기복, 김재한, 김삼락 등 축구인들이 모여 최순영 회장의 퇴진과 현대 해체 철회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체육부장관도 현대의 축구단 해체를 막기 위해 대한체육회장과 축구협회장, 현대자동차사장 등을 불러 모아 긴급 간담회를 열 정도로 분위기가 험악했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포항제철과 럭키금성, 유공 등 나머지 구단들도 입을 모았다. “김종부를 제3구단으로 보내야 이 문제가 해결된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든 이런 충돌은 또 일어난다.” 결국 최순영 대한축구협회장이 모든 책임을 떠안으며 사퇴했고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이 새로운 협회 수장으로 자리 잡았다. 김종부는 이렇게 1988년 현대와 대우의 유니폼이 아닌 포항제철의 유니폼을 입게 됐다. 김우중 대우 회장과 박태준 포항제철 회장이 직접 만나 김종부의 이적에 협의했을 정도로 김종부의 영향력은 엄청났다. 하지만 김종부는 이미 예전의 김종부가 아니었다. 그는 포철에서 두 시즌 동안 64경기 중 33경기에 나서 1골 7어시스트를 올리는 데 머물렀다. 33경기 중 21경기를 교체로 나설 정도로 체력적으로도 준비가 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후 대우와 일화를 거친 그는 결국 1995년 쓸쓸히 은퇴했다.

“내가 한 번 키워보겠다”

김종부를 잇는 또 한 명의 축구 천재 김병수는 강원도 홍천 산골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시절 혼자 서울로 축구유학을 왔다. 당시 그가 서울에 입성하자 순식간에 전국에 소문이 났다. “이런 천재를 본 적이 없다”고 했다.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포항제철 한홍기 감독은 김병수를 찾아가 플레이를 지켜보고는 곧바로 김병수의 어머니를 만나 이렇게 말했다. “당장 제가 키워보겠습니다.” 초등학생이던 김병수는 곧바로 포항에 가 박창선과 최순호 등 당대 최고의 스타 앞에서 개인기 시범을 보이고 골까지 넣어 보였다. 초등학생이 프로 선수들과 함께 훈련하는 보기 드문 장면이 연출된 것이다. 그의 연습상대는 당시 최고의 프로선수들이었다. 포항은 이 축구 신동을 브라질로 보내 키우려고 했지만 당시 문교부에서는 브라질 축구학교를 국내학적으로 인정하지 않아 꿈을 접어야 했다.

이후 경신고등학교에 진학한 김병수는 1987년 추계중고축구대회에서 팀을 첫 우승으로 이끌며 최우수선수에 뽑혔다. 1988년 고려대학교에 진학한 뒤에는 카타르에서 열린 제26회 U-19 아시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에 참가하기도 했다. 하지만 김병수는 이때부터 부상을 달고 살았다. 물론 체계적인 선수 관리가 없던 시절 김병수는 워낙 뛰어난 실력 때문에 아파도 꾹 참고 경기에 나서야 했다. 인대가 0.5인치만 늘어나도 큰 부상이지만 김병수는 인대 1인치가 늘어난 상황에서도 이를 악물고 뛰었다. 체계적인 선수관리가 없던 시절 큰 부상에도 얼음찜질 몇 번에 주사 한 두 대 맞고 경기에 나섰다. 그의 몸은 점점 만신창이가 되어갔다. 몸이 너무 아파 한 달 이상 꾸준히 운동을 해본 적이 없었다.

1989년 대표팀 이회택 감독은 소문만 무성한 김병수를 대표팀에서 테스트했다. 처음에는 다들 김병수를 극찬해 한 번 실력이나 확인해 보자고 부정적인 마음으로 김병수를 불렀다. 그런데 김병수의 실력을 지켜본 이회택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무조건 이탈리아 월드컵에 데려갈 테니 바고 수술을 받아라.” 김병수의 실력에 감탄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병원에 가 수술을 받을 돈이 없었고 결국 1990년 1월 선배인 최순호가 수술비를 부담해 오른쪽 발목 수술을 할 수 있었다. 6개월 뒤에는 일본에서 또 다시 왼쪽 발목 수술을 받았다. 김병수는 수술 후 다시 고연전에 나섰다. 그는 약 1년여 만에 나선 이 경기에서 1골 1어시스트를 기록하며 고려대의 3-2 승리를 이끌었다. 하지만 또 다시 부상이 재발했고 결국 다시 수술대에 올라야 했다. 그저 쉬는 게 김병수의 유일한 치료 방법이었다. 아파서 계속 쉬다가 중요한 경기가 있으면 불려나가 며칠 연습한 뒤 경기에 나서는 신세가 된 것이다.

김종부 감독은 경남을 돌풍의 팀으로 만들었다. ⓒ프로축구연맹

“축구 인생 50년 만에 만난 천재”

김병수는 고려대 유니폼을 입고 4년 동안 딱 네 경기를 뛰었는데 이 중 세 번이 고연전이었다. 그 정도로 몸 상태가 엉망이었지만 중요한 경기에는 불려 나갔다. 그러면서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아시아 예선에서는 후반 막판 극적인 결승골로 명승부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김병수를 본 크라머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축구 인생 50년 만에 만난 천재다. 당장 독일로 데려가고 싶다.” 하지만 김병수는 한국을 올림픽 본선으로 이끌어 놓고도 부상으로 결국 올림픽 무대에 서지 못했다. 이게 태극마크를 달고 마지막으로 나선 공식경기였다. 김병수는 결국 그렇게 그라운드에서 사라졌다. J리그 출범을 앞두고 일본 실업축구 팀에서 그를 영입할 계획을 세웠다가 결국 재기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해 물거품이 되기도 했다. 김병수는 누나 집에서 술로 매일을 보내며 방황했다. 그러다 작은 고무공 하나를 들고 집 앞으로 나가 리프팅을 하기 시작했다. 몸이 근질근질한 김병수가 시간이라도 때울 생각으로 발재간을 부린 것이다.

그런데 김병수의 묘기를 지켜보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늘어나기 시작했고 결국 거리를 지나던 차들도 멈춰 서 김병수의 리프팅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공으로 재주를 부리는 한 남자 때문에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고 결국 주변 일대의 교통 체증까지 일으킬 정도의 엄청난 사건이었다. 그러다 방황하던 김병수는 가까스로 일본 실업축구 코스모 석유의 연락을 받았다. 부상 부위의 재수술을 돕기로 했고 재활 훈련까지도 체계적으로 시켜주겠다는 조건이었다. 비록 부상으로 정상적인 몸상태가 아니었지만 김병수의 천재적인 재능에 기대를 건 것이다. “훈련 없이 경기에만 나서달라”면서 수술과 재활치료를 전액 지원하는 건 물론 연봉도 2억 원이나 제시했다. 당시 한국 프로축구에서도 최고의 선수들만 받을 수 있는 대우였다.

그렇게 김병수는 1992년 6월 일본으로 떠났다. 이미 양쪽 발목이 만신창이가 된 그는 이번에는 무릎에 칼을 댔고 이듬해부터 코스모 석유 소속으로 그라운드에 다시 섰다. 하지만 김병수는 부상으로 팀 훈련을 거의 하지 못한 채 개인 운동 후 휴식을 취해야 했고 경기에만 겨우 나설 수 있었다. 그렇게 김병수는 이후 1997년 오이타 트리니타를 잠시 거친 뒤 공식적인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김병수는 늘 이런 이야기를 듣고 경기에 나섰다. “오른발을 다쳤으면 왼발로만 차라.” 결국 오른발이 다치면 왼발로만 공을 차던 이 천재 축구선수는 제대로 꽃을 피워보지도 못한 채 쓸쓸히 그라운드를 떠나야 했다. 김병수는 성인대표팀 경기에 단 한 번도 출장하지 못했고 국내 프로축구 무대에도 얼굴을 내밀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그는 역사상 최고의 천재로 기억돼 있다.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한 두 감독

비운의 축구천재 두 명은 공교롭게도 지도자로서도 비슷한 길을 걸었다. 기대에 비해 선수로서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한 김종부 감독과 김병수 감독은 밑바닥에서부터 다시 시작했다. 김종부 감독은 1997년 거제고등학교에서 처음으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고 2002년 동의대학교 감독을 맡았다. 그는 대학 무대에서 32강 진출도 힘겨웠던 동의대를 부임 8개월 만에 추계대학연맹전 준우승으로 이끌었고 이후 FA컵에서 포항을 제압하고 16강에 오르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2011년에는 지도자들이 꺼려하는 K3리그에 진출했다. 양주시민축구단 감독으로 첫 시즌 준우승을 이끈 김종부 감독은 2013년 화성FC 감독으로 부임해 이 팀을 이듬해 K리그 우승으로 이끌었다. 고등학교와 대학 무대를 거쳐 K3리그라는 성인 축구 하부리그에서 지도력을 인정받기 시작한 것이다. 비운의 천재 축구선수에서 학원축구의 최고 지도자로 우뚝 섰다.

김병수 감독도 선수 시절 보여주지 못한 능력을 지도자가 돼 보여주기 시작했다. 1998년 고려대 축구부 코치로 부임한 그는 이듬해 포항스틸러스 산하 유소년 팀인 포철공고 코치를 거친 뒤 2008년에는 영남대 축구 감독으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영남대는 축구부 운영을 놓고 고민할 정도로 팀이 망가져 있었다. 1년 가까이 운동을 쉰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김병수 감독은 2009년 영남대를 춘계대학연맹전과 전국대학축구대회 8강으로 이끌었고 2010년에는 춘계대학연맹전 우승으로 대학 무대 최정상 지도자로 이름을 올렸다. 2012년에는 추계대학연맹전 우승을 차지했고 2013년에는 지방 대학 최초로 U리그 우승을 이끌기도 했다. 2014년 FA컵에서는 8강에 올랐고 신진호와 이명주, 김승대, 손준호 등 실력 있는 선수들을 배출하기도 했다. 비운의 축구천재는 이렇게 대학 무대 최고의 감독이 됐다.

그리고 이 둘은 운명처럼 K리그 챌린지 무대에서 만났다. 비록 5살 차이로 한 시대에 같이 뛰지는 못했지만 고려대 선후배 사이였던 이 둘은 학원 축구 무대에서 능력을 입증 받은 뒤 프로 무대에 입성했다. 김종부 감독은 2016년 시즌을 앞두고 경남FC 감독이 됐고 김병수 감독은 2017년 서울이랜드FC 지휘봉을 잡았다. 시대가 엇갈린 두 축구 천재가 한 무대에 나란히 서게 된 것이다. 한국 축구 역사상 가장 불운했던 천재 선수 두 명은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흐르고 밑바닥부터 다진 끝에 K리그 챌린지 팀의 감독이 됐다. 물론 상황은 조금 다르다. 김종부 감독은 올 시즌 K리그 챌린지에서 무려 11경기 무패 행진을 이어나가며 돌풍을 일으키고 있었고 리그 1위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하지만 김병수 감독은 고생 중이다. 2승 4무 5패로 10개 팀 중 8위에 머물러 있었다.

김종부 감독은 경남을 돌풍의 팀으로 만들었다. ⓒ프로축구연맹

‘비운의 천재’ 두 명이 감독이 돼 만났다

그리고 이 둘은 바로 지난 13일 창원축구센터에서 맞대결을 펼쳤다. 역사적인 두 천재의 만남이었다. 김종부 감독은 천재 선수들의 지도력 맞대결을 앞두고 <스포츠니어스>와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선수 시절 가능성을 약간 보여줬던 것 뿐이고 (김)병수는 나보다 재능을 더 많이 보여준 선수였다.” 그는 ‘천재’라는 수식어를 꺼내는 것도 부끄러워했다. “(천재라는) 그런 수식어를 붙여준 건 고맙지만 선수로서 많은 걸 보여주지는 못했다.” 김병수 감독도 <스포츠니어스>와의 인터뷰에서 비슷한 말을 꺼냈다. “천재 선수들이 감독이 돼 만났는데 감회가 남다르지 않느냐”는 질문에 껄껄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천재요? 개뿔, 천재는 무슨…” 한국 축구 역사상 가장 빛났던 천재 두 명은 이렇게 서로 겸손한 자세로 경기를 준비했다. 드래프트 파동을 일으키며 프로 구단의 해체까지도 고려하게 만들고 한국 축구를 떠들썩하게 했던 김종부 감독과 부상으로 오른발이 다치면 왼발로 공을 차던 김병수 감독은 이렇게 맞대결을 앞두고 자세를 낮췄다.

그러면서도 상대에 대한 걱정과 존경심을 아끼지 않았다. 김종부 감독은 김병수 감독에 대한 걱정이 앞섰다. “(김)병수가 지난해 12월 서울이랜드 감독을 맡았다. “아직 팀을 만들려면 시간이 더 필요한데 결과물을 기다리는 이들은 인내심이 별로 없다”고 밝힌 김종부 감독은 “3년씩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1년 이상은 시간이 주어져야 한다. 김 감독은 이미 대학 무대에서 능력을 인정받았으니 사람들이 조금 더 여유를 가지고 기다려줬으면 한다”고 응원했다. 김병수 감독은 김종부 감독에게 존경심을 나타냈다. “대단하다. 경남도 그렇게 선수층이 두터운 건 아닌데 그런 성적을 내고 있다는 건 대단한 일이다. 감독으로서 충분히 인정받아야 하는 부분이다.” 이 둘은 서로에 대해 이렇게 걱정하고 인정했다. 프로 감독끼리 따로 연락을 주고 받는 것도 껄끄러워 안부 연락도 잘 하지 않는 사이지만 한 시대를 뒤흔들었던 이 두 천재는 서로를 너무나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이날 경기에서는 후반 중반까지 팽팽한 흐름을 보이다 결국 소나기골을 몰아친 김종부 감독의 승리로 끝났다. 경남이 서울이랜드에 3-0 대승을 거둔 것이다. 경기가 끝난 뒤 김종부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김병수 감독이 힘든 상황에 있는 건 맞지만 워낙 유능한 지도자이기 때문에 후반기가 되면 더 팀이 성장해 있을 것이다. 선수 생활 동안 힘든 시기를 겪은 것도 비슷하고 아마추어 무대를 함께 경험했다는 점도 마음이 많이 간다. 우리가 이겼지만 기쁜 마음만 있는 건 아니다.” 김병수 감독은 선배 지도자에 대한 존경을 표했다. “경남이 12경기 무패를 하고 있다. 김종부 감독님이 팀을 너무 잘 만들어 놓으신 것 같다. 1위를 하는 팀은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김종부 감독님께 진심으로 축하를 보낸다.” 이 둘은 서로 다른 팀에서 지도자를 하고 있어 속 깊은 이야기를 오랜 시간 나눌 수는 없지만 경기가 끝난 뒤 악수를 하며 눈인사를 나눴다.

한국 축구 역사상 가장 큰 기대를 모았던 천재 선수 두 명은 이렇게 오랜 세월이 흘러 한 그라운드에서 마주했다. 선수 시절 본의 아니게 방황하며 힘든 시기를 보냈던 두 천재 선수는 돌고 돌아 다시 팬들 앞에 섰다. 대단히 흥미로운 경기였고 역사에 남을 만한 만남이었다. 김종부 감독이 이끄는 경남은 이제 그 빛을 발하기 시작했고 김병수 감독이 지휘하는 서울이랜드는 아직 자리를 잡지 못했지만 제자들은 여전히 그를 믿고 있다. 천재 선수였던 이 두 감독이 훗날 K리그 클래식 무대에서 더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으며 맞대결하는 모습을 기대해 본다. 그날이 와야 아쉽게 선수 생활을 마감했던 이 둘의 한풀이가 제대로 될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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