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사진이 아니다. 오늘 전북과 포항 경기 사진이다. ⓒ프로축구연맹

[스포츠니어스 | 김현회 기자] KEB하나은행 K리그 클래식 2017 7라운드의 가장 큰 화두는 심판의 오심 문제였다. 그리고 하나가 더 있다. 바로 유니폼이다. 이번 라운드에서는 심판의 오심 논란 못지 않게 유니폼에 관한 여러 이야기가 쏟아져 나왔다. 누군가에게는 유니폼이 그냥 단순한 ‘옷쪼가리’에 불과할지 몰라도 스포츠에서 이 유니폼이라는 건 정체성을 상징하기도 하고 우리를 추억으로 이끌기도 한다. 다 큰 어른들이 똑같은 옷을 맞춰 입고 얼굴도 모르는 사람과 충돌하기도 하고 친구가 되기도 한다는 건 참 신기한 일이다.

라이벌 팀 유니폼 입고 응원석으로?

FC서울과 인천유나이티드의 어제(22일) 경기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장면이 펼쳐졌다. 서울 서포터스석에 라이벌인 수원삼성 유니폼을 입은 관중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서울 팬들은 당연히 이를 제지했고 이 관중에게 항의했다. 다른 팀도 아니고 라이벌 팀 유니폼을 입고, 그것도 일반 관중석도 아닌 서포터스석으로 향했다는 건 기본적인 예의가 없는 행동이었다. 일반 관중석에서도 라이벌 팀 유니폼을 입고 앉아 있는 건 눈총을 받을 일인데 서울을 응원하는 팬들이 있는 곳으로 라이벌 팀 유니폼을 입고 입장하는 건 도발에 가까운 행위다. 이유야 어찌 됐건 이는 이 관중이 잘못한 일이다. 서울의 보호색(?)과도 같은 포항 유니폼이라면 몰라도 파란 수원 유니폼은 너무 했다.

지난 2009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2009년 5월 수원삼성과 광주상무의 경기가 열린 수원월드컵경기장 N석에 서울 유니폼을 입은 한 관중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결국 이 관중은 수원 팬들의 제지로 N석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아니 그 ‘옷쪼가리’가 뭐라고 도대체 그렇게까지 민감하게 반응하느냐”고 할 수도 있지만 적어도 스포츠에서 만큼은, 그리고 그 팀 팬이 운집한 응원석에서 만큼은 이런 말이 안 통한다. 그 곳은 열정적인 응원단이 자리한 곳이고 그들만의 규칙이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스포츠 경기장에서 만큼은 단순한 ‘옷쪼가리’가 아니라 이 유니폼 하나로 얼굴을 모르는 사람들과도 하나가 될 수도, 적이 될 수도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그런데 어제 수원 유니폼을 입고 서울 서포터스석으로 들어간 관중의 일행은 SNS로 해명을 하면서 더 논란을 키웠다. 이 퍼포먼스를 주도했다는 이는 “본인이 좋아하는 K리그 혹은 해외 팀 유니폼을 입고 만나서 경기를 보기로 했다”면서 “수원 팬이 서울 경기에 돈을 내고 경기를 봤는데 예의가 없는 건가”라는 글을 남겨 논란은 더 커지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건 돈을 내고 경기장에 간 게 아니라 왜 하필이면 라이벌 팀 유니폼을 입고 응원석으로 향했냐는 것이다. 나도 물론 어릴 적 ‘디씨인사이드’ 횽아들과 축구장에서 정모를 많이 해봤다. 각자의 유니폼을 입고 만났는데 관중이 아무도 없는 2층 구석에서 우리끼리 맥주나 한 잔 하며 친목을 다졌을 뿐이다. 이런 건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는다. 응원석으로 가는 건 도발 행위다.

이상호도 이제 이 수원 유니폼을 입었다가는 팬들에게 혼이 날 것이다. 그만큼 서울과 수원은 엄청난 라이벌이다. ⓒ프로축구연맹

유니폼이 가진 힘을 무시할 수 없다

유니폼이라는 게 이렇다. 다른 유니폼을 입은 이들에게 ‘위 아 더 월드’, ‘우리는 다 같은 K리그 팬이니 함께 놀자’고 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이런 ‘위 아 더 월드’가 이뤄지지 않는다고 해서 섭섭해 할 것도 없다. 원래 이게 맞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수원이 AFC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J리그 팀과 격돌한다고 가정해 보자. 서울 팬이라면 대다수가 수원이 우승하는 꼴은 죽어도 볼 수 없다면서 J리그 팀을 응원할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을 매국노라고 할 수도 없다. K리그에서 이미 ‘위 아 더 월드’는 깨졌고 다른 유니폼을 입은 이가 응원석으로 들어오는 것도 웃으며 받아줄 사람은 없다. 수원 유니폼을 입고 서울 응원석으로 향하는 건 리버풀 유니폼을 입고 맨체스터유나이티드 관중석 한 가운데 앉아 있는 것과 다를 게 없다.

굳이 이 논란을 떠나서 다른 관중도 약간의 예의를 차릴 필요가 있어 드리는 말이다. 나는 취재를 위해 경기장을 찾을 때 옷 색깔에 신경을 쓰는 편이다. 서울의 안방에서 서울과 수원이 경기를 하는데 굳이 파란색을 입고 기자석에 앉아 있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건 양 팀 중 누군가를 응원하는 입장을 떠나 그저 취재를 하는데 필요한 예의다. 꼭 홈 팀의 색깔에 맞추지는 않더라도 원정팀 색깔의 옷은 피하려 한다. 그런데 지난 2013년 성남시민구단 창단촉구 범시민궐기대회 때는 일부러 성남일화의 상징인 노란색 옷을 입고 갔다. 몇 년 전에 산 촌스러운 노란 티셔츠였지만 이날 만큼은 성남에 힘을 실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꼭 유니폼이 아니더라도 이렇게 상황에 따라 옷 색깔에 최소한의 신경을 써야 하지 않을까.

누군가에게는 다 큰 어른들이 뭐 ‘옷쪼가리’ 하나나 옷 색깔 하나 때문에 으르렁거리고 예의를 운운하는 게 우스워 보일 수도 있지만 이 유니폼이 가진 상징성이라는 건 무시할 수 없다. 2006년 독일월드컵 당시 나는 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일행과 독일 라이프치히 시내를 활보하다가 건장한 프랑스 유니폼을 입은 흑인 8명과 마주한 적이 있다. 그 순간 뒤를 돌아보니 우리 일행은 다 도망간 뒤였고 나는 그 프랑스인 8명에게 둘러싸여 온갖 욕설을 들어야 했다. 그때 내가 지은 죄(?)라면 한국과 프랑스전을 앞두고 프랑스인들 앞에서 한국 대표팀 유니폼을 입은 것뿐이었다. 누군가에게는 유니폼 하나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게 유치할지 몰라도 유니폼은 아군(?)과 적군(?)을 구분해 주는 ‘피아 식별띠’ 같은 거다. 나는 그날 적군에 포위되고 말았다.

이상호도 이제 이 수원 유니폼을 입었다가는 팬들에게 혼이 날 것이다. 그만큼 서울과 수원은 엄청난 라이벌이다. ⓒ프로축구연맹

‘레트로 매치’의 향수에 젖다

유니폼 논란이 있고 하루가 지난 오늘(23일) 전주월드컵경기장에서는 또 한 번 유니폼이 관심을 끌었다. 전북현대와 포항스틸러스가 나란히 1999년 입었던 유니폼을 입고 ‘레트로 매치’를 치른 것이다. 어떻게 보면 촌스러운 디자인의 과거 유니폼을 입고 경기하는 게 세련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들은 2017년 선수 구성임에도 불구하고 1999년 유니폼을 입었다는 이유 하나로 향수를 선사했다. 선수 명단에는 그때 선수가 이동국 뿐이었지만 1990년생 포항 서보민과 1996년생 전북 김민재 등은 예전 유니폼을 입었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과거로의 추억 여행을 팬들에게 선물했다. 갑자기 밀레니엄 버그를 걱정하던 그때로 돌아간 듯했다. 단순한 ‘옷쪼가리’ 하나 바꿔 입었다고 해 아재들은 순진하게도 고딩 시절로 돌아간다.

배가 나온 아재들이 예전 유니폼을 입는다고 해 18년 전처럼 배가 쏙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시간을 되돌려 고등학교 시절 그녀와의 이별을 무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유니폼 하나 바꿔 입었다고 우리는 추억을 떠올리고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간다. 이게 바로 스포츠에서 유니폼이 가진 힘이다. 나는 오늘 전북과 포항의 경기가 끝난 뒤 유승준의 <열정>과 핑클의 <영원한 사랑>을 들으며 그때 그 친구들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지훈아. 1999년에 우리 참 좋았어. 그치?” 이 유니폼 쪼가리 하나가 뭐라고 나는 1999년 추억으로 돌아갔다. 지금은 ‘소리바다’에서 그 다음 노래가 흘러 나온다. Y2K의 <헤어진 후에>다. 그때를 살았던 아재들에게는 추억을 선사하고 어린 친구들에게는 신기한 경험을 선물하니 이런 ‘레트로 매치’는 참 좋은 기획인 것 같다.

새삼 유니폼의 힘을 느끼게 된다. 옷 하나 바꿔 입었다고 시계를 18년 전으로 돌릴 수 있다는 건 엄청난 힘 아닌가. 세련되고 첨단이 아니면 뒤처지는 시대에 촌스럽지만 순수했던 그 시절이 더 그리워지는 건 왜일까. 아재가 돼 그런 걸 수도 있지만 이렇게 유니폼 하나 바꿔 입었다고 해 마치 시간을 거꾸로 돌린 것 같은 느낌을 받으니 유니폼이 단순한 ‘옷쪼가리’는 아닌 것 같다. 이 유니폼 하나엔 그때 그 시절 향수가 녹아있고 그때 그 시절 선수들의 얼굴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그때 그 시절 내가 했던 고민, 풋풋했던 첫사랑, 막연했던 꿈이 담겨져 있다. 그깟 유니폼이 뭐라고 우리를 이렇게 추억으로 이끄는가. 내가 오래된 전북이나 포항 팬이었더라면 아마도 그 추억은 더 깊이 새겨질 것 같다.

이상호도 이제 이 수원 유니폼을 입었다가는 팬들에게 혼이 날 것이다. 그만큼 서울과 수원은 엄청난 라이벌이다. ⓒ프로축구연맹

유니폼은 단순한 ‘옷쪼가리’가 아니다

유니폼은 이렇게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라이벌 팀 유니폼을 입고 응원석에 들어갔다가는 온갖 욕을 먹어야 할 만큼 유니폼이 가진 상징성은 엄청나다. 대화 한 번 해보지 않은 사람들과 같은 유니폼을 입었다는 이유로 친구가 되기도 하고 또 누군가와는 적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게 뭐라고 유니폼 하나 바꿔 입으니 또 우리를 추억 속으로 되돌려 주기도 한다. 이번 라운드 K리그 클래식에서는 유니폼이 가진 힘이 얼마나 위대한지 잘 보여줬다. 누군가에게는 단순한 그깟 ‘옷쪼가리’일 수도 있지만 다 큰 사람들이 이 유니폼 하나 때문에 추억에 젖기도 하고 싸우기도 한다. 칼럼을 마무리할 때쯤 방금 전에 친구 지훈이에게 보낸 문자 메시지에 답장이 왔다. “죄송한데 저 지훈이 아닙니다. 번호가 바뀐 것 같네요.” 유니폼이 시간을 되돌려 줄 수는 있어도 친구는 되돌려 주지 못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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