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축구선수가 있었다. 지긋지긋한 부상으로 3년 동안 아무 것도 보여주지 못한 이 선수는 K리그 무대에서 10년 동안 175경기에 나선 게 전부였다. K리그에서 단 한 경기라도 뛰고 싶은 무명의 선수들에게는 많다면 많을 수도 경기 출장수지만 훨씬 더 이보다 K리그에서 더 많은 경기에 나선 선수도 많았다. 하지만 아직도 팬들은 그의 이름을 잊지 않고 있다. 울산과 전북, 대전, 그리고 경남에서 뛰었던 김형범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에닝요가 등장하기 전까지 K리그에서 가장 많은 프리킥 득점을 기록했던 그를 잊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는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과연 김형범은 어디에서 뭘하고 있었던 걸까. 어렵게 수소문해 그를 만났다. 지금부터 김형범과의 단독 인터뷰 내용을 공개한다. 그는 “이 자리에서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이 인터뷰는 김형범 선수 본인의 의견이라는 점을 미리 밝힙니다. 사실과 다른 주관이 들어간 내용이 포함돼 있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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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가운 얼굴 김형범을 직접 만났다. 원래도 우여곡절이 많았던 그는 최근 2년 사이에도 우리가 모르는 많은 일들을 겪었다.

반갑다. 정말 오랜 만에 본다. 그 동안 어떻게 지냈나.

가족들과 시간을 보냈다. 아내가 임신을 하고 아이를 낳고 그 기간 동안 나는 선수로서 해야할 일이 많아서 같이 시간을 보내지 못했었다. 선수 생활을 하면서 가족과 명절도 제대로 보내본 적도 없었고 1년에 한두 번 만나는 친척들과도 늘 거리감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가족과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고 가평에서 펜션을 운영하면서 남양주시에서 스크린 골프연습장도 운영 중이다. 펜션을 차린 지는 5년 정도 됐다. 직접 운영을 하기보다는 가족들과 친척분들이 함께 운영해 주신다.

펜션은 어떻게 싸게 좀 안 되나. 놀러 가고 싶다.

커플들이나 친구들끼리 올 만한 펜션은 아니고 수중 스포츠를 즐기는 분들이 몇 달씩 방을 잡아 숙식을 해결하는 공간 같은 곳이다. 절대 할인을 해주지 않으려고 거짓말 하는 게 아니다. 오려면 와라. 대신 안락함은 책임 못 진다.

알겠다. 어차피 같이 갈 친구도 없다. 스크린 골프연습장을 운영하는 것도 특이하다.

사실 골프를 배운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선수 생활 하면서 골프채를 한 번씩 잡아보긴 했는데 집중할 수가 없었다. 내가 얼마나 재활하느라 바빴는지 알지 않나. 그런데 전북 시절부터 친해진 (조)재진이 형이 요즘은 골프 용품 사업을 한다. 재진이형하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도 7개월 전부터 골프를 시작했고 이 기회에 스크린 골프연습장도 운영하게 됐다. 요새도 가까운 곳에 사는 재진이 형이 일주일에 두세 번은 우리 연습장에 놀러온다. 나에게 여러 가지로 도움을 많이 주고 있다.

2013년 시즌을 마치고 경남을 떠나 태국 부리람 유나이티드로 갔다는 소식까지는 알고 있다. 갑작스러운 태국행이 조금 의외였다.

2013년 11월 경남에 있을 때 태국 부리람에서 연락이 왔다. 나를 영입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일단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아직 K리그 클래식 시즌이 끝나지도 않았고 더군다나 해외로 나간다는 걸 생각해 본 적도 없기 때문이다. 2013년 7월에 허리뼈가 부러져 시즌 아웃될 뻔한 위기도 있었는데 다행이도 재활이 잘 됐고 뼈가 빨리 붙어 후반기 들어 골도 넣고 잔류에 힘을 쏟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시즌이 끝나고 새로운 팀을 찾는 상황에서 컨디션을 유지하려고 운동을 하다가 또 다시 부상을 당하고 말았다. 팀을 찾아야 하는 시기에서 발등에 부상을 당했는데 이걸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빨리 치료해서 완벽한 몸을 만들어야 나를 원하는 팀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발등에 통증이 너무 심해 병원에 갔더니 믿을 수 없는 소식이 전해졌다.

어떤 소식이었나.

발등 쪽에 인대가 끊어지는 부상을 당한 것이다. 병원에서 그런 말을 했다. “수술을 받아야 하는데 평생 동안 후유증에 시달릴 수도 있다.” 발가락을 움직이는 관절이 발등에 있는데 뼈와 뼈를 잡아주는 인대가 거기에 있다. 걷기 위해서는 반드시 있어야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부위로 ‘리스프랑 인대’라고 한다. 그런데 이 인대를 다친 거였다. 자칫하면 평생 다리를 절어야 할 정도로 위험한 부상이었다. 그런데 그때도 내 머리 속에는 오로지 새 팀을 찾기 위해서 빨리 이 부상을 치료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수술을 하면 발을 땅에 딛지도 못하고 8~9개월 동안이나 재활로만 보내야 한다는 진단을 받았는데 사실 이게 수술을 하고 핀을 박아 놓아도 사후 경과가 좋지 않을 가능성이 굉장히 컸다. 계속 움직여야 하는 발가락 관절 사이에 핀을 박는 수술이기 때문에 수술을 하면 선수 생활이 끝난다고 봐야 했다. 더군다나 슈팅을 할 때 디딤발로 쓰는 왼발이어서 더 그랬다. 나이도 있고 몸도 성치 않은 상황에서 8~9개월 재활하고 다시 몸을 만들려면 1년은 쉬어야 하는데 어떤 팀에서 나를 찾겠나. 그래서 수술을 하지 않고 치료와 재활만으로 버틸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의사 분께서는 아마도 버티기 어려울 거라고 하셨지만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치료와 재활에만 매달렸다. 이미 발등의 통증은 극심했지만 근육을 만들어 이걸 보완하려고 한 거다.

당신은 참 운도 없다. 어떻게 이런 부상을 달고 사나.

그래도 하나 희망은 있었다. 내가 원래 평발이기 때문에 발바닥을 지면에 댈 때 발이 남들보다 덜 움직여 다행스럽게도 통증을 덜 느낀다는 거였다. 원래는 나를 원하는 국내팀이 있었다. 모 감독님하고도 다 얘기가 돼 “무조건 아본 시즌 끝나면 들어와서 같이 내년 시즌 준비하자”는 약속도 받았다. 그런데 부상을 당한 뒤 그분께 전화를 드려 상황을 설명했다.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 입단하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가서 월급만 타먹는 ‘먹튀’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는 “완벽한 상태를 만들어 다시 연락드리겠다”고 했고 동료들과도 연락을 끊은 채 그렇게 치료에만 전념했다. 그렇게 경남에서 시즌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은둔 생활에 들어갔다. 통증을 줄이고 붓기를 빼고 그렇게 1월 달부터 4개월 동안 매달렸고 통증이 남아 있긴 하지만 그래도 조깅이 가능한 수준까지 만들었다. 사실 원래 선수 생활 하는 동안 안 아팠던 적이 없으니까 아픈 걸 참고 하는 게 당연한 거라고 받아들였다. 그런데 그 사이 나를 원했던 국내팀은 감독님이 바뀐 상황이었고 나도 새로운 팀을 찾아야 했다. 하지만 2013시즌을 마치고 무적으로 6개월 가량을 쉰 내가 새 팀을 찾는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다시 부리람 쪽을 두드린 건가.

아니다. 그 상황에서 부리람이 먼저 나에게 다시 연락을 해왔다. “아직 팀을 구하지 못한 거 같은데 다시 한 번 생각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때 이흥실 감독님이 한 이야기가 생각났다. 경남에서 2013년 시즌이 끝나고 마무리 훈련을 하는데 이흥실 감독님께서 수석코치로 경남에 합류하셨다. 나는 팀을 나가려고 준비하는 상황이었고 이흥실 수석코치님은 이제 새로운 시즌을 준비하는 입장이었다. 내가 워낙 부상을 많이 당하니까 그때 이흥실 수석코치님이 그런 말씀을 해주셨다. “부상이 많은 선수는 따뜻한 나라에서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생각해 보니 내가 항상 부상을 당할 때는 시즌 초나 시즌 막판 등 추울 때가 많았다. 이 상황에서 다시 부리람으로부터 연락을 받고는 이흥실 수석코치님의 이야기가 떠올라 긍정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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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리람 유나이티드 입단 당시의 김형범. 그는 부리람 유니폼을 입고 그라운드를 누비는 꿈을 꿨다. (사진=부리람 유나이티드)

당신의 그 몸상태로 부리람 입단은 가능했나. 메디컬 테스트 통과도 쉽지 않았을 것 같다.

계약서에 서명하기 전에 일단 구단 답사를 해봤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팀 여건도 좋고 태국에서는 명문이라고 하더라. 클럽하우스에 직접 가 꼼꼼하게 체크해 봤는데 나처럼 부상을 달고 사는 사람들은 재활 시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수영장도 있고 재활 시절이 무척 잘 돼 있었고 스페인에서 온 코치진이 직접 몸관리도 해주는 모습을 보고 인상 깊었다. 모든 시스템이 다 지문 인식을 통해서 이뤄질 정도로 시설이 훌륭했고 따뜻한 날씨도 마음에 들었다. 계약서에 사인하고 메디컬 테스트를 받는데 문제 없이 다 통과했다. 통증이 있긴 했지만 참을 수 있는 수준이었고 단거리 전력 질주부터 MRI 촬영까지 다 했는데도 문제가 없었다. 발목과 무릎, 허리 등 주요 부위마다 MRI를 두 시간씩 찍어서 6시간 동안 검사를 받았는데 나는 내가 너무 부상을 달고 살아 나한테만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알고 봤더니 거기는 실수를 줄이기 위해 모든 선수들이 MRI를 6시간 동안 찍는다더라.

그 큰 부상을 당하고도 수술 없이 치료에 성공했다는 건 인간 승리 아닌가. 부리람에서의 생활은 좋았을 것 같다.

계속 들어보라. 내가 지금 왜 운동장에 있지 않고 스크린 골프연습장을 운영하는지 궁금하지 않은가.

알겠다. 계속 이야기 해달라.

당시에 나는 결혼식을 앞두고 있었다. 월드컵 기간을 맞아 선수단 휴식기인 2014년 7월에 결혼식을 잡은 거다. 태국에서 메디컬 테스트를 받고 계약을 체결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결혼식을 일주일 앞두고 있었는데 부리람 구단 측에 한국은 결혼식 후 바로 신혼여행을 가는 게 전통이라고 했더니 구단에서 모든 걸 지원하겠다면서 대신 태국으로 신혼여행을 오면 안 되겠느냐고 했다. 대신 신혼여행이 끝나면 곧바로 훈련에 합류해 달라면서 모든 지원을 구단 측에서 다 해줬다. 푸켓의 고급 리조트부터 비행기 티켓까지도 다 지원 받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참 좋았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부터다.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 건가.

일단은 구단에 한국어 통역사가 없었다. 영어 통역사 한 명뿐이었다. 의사 소통에 불편함이 있었고 나는 어떤 식으로 상황이 흘러가는지 전혀 구단과 커뮤니케이션이 되질 않았다. 한국 에이전트에 전화를 하면 그 분이 구단 쪽에 연락을 해 다시 나한테 알려주는 식이었다. 아내는 한국에 있고 나 혼자만 태국에 그렇게 남아 첫 경기를 준비했다. 컵대회였는데 부리람의 최대 라이벌인 무앙통 유나이티드와의 경기였다. 태국에서는 가장 손에 꼽는 매치였다. 합류하고 2주 만에 나선 경기였는데 그날 내가 공격수로 나가서 골대도 맞추고 팀 승리를 도왔다. 구단 관계자들도 다 엄지 손가락을 들어주며 인정해줬다. 그런데 다음 경기를 준비하는데 통역이 나한테 무슨 말을 전달하는 거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내가 이번 경기 엔트리에서는 빠졌다는 내용이었다. 그때만 하더라도 ‘아, 내가 신혼여행을 다녀 와서 적응 기간이 짧아 컨디션을 더 끌어올리라는 구단의 배려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다음 경기에서도 내가 엔트리에 없는 거다. 구단에서 자꾸 나에 대해 무슨 이야기를 하는데 난 알아 들을 수가 없고 나를 연결해준 에이전트에게 전화를 해 상황을 물어봤는데 느낌이 이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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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리람에서 팀 동료와 함께 기념촬영을 한 김형범. 하지만 그에게 부리람은 또 다른 시련의 시작이었다. (사진=부리람 유나이티드)>

난 당신이 태국에서만큼은 행복하길 바랐다.

자세히 보니 우리팀에만 외국인 선수가 7~8명이 있는 거다. 아니 한 팀에 이렇게 외국인 선수가 많은 거 봤나. 그런데 에이전트를 통해 돌아온 대답은 충격적이었다. 내가 정규리그에 선수 등록이 돼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컵대회만 뛸 수 있다고 했다. 결혼식을 하러 자리를 비운 사이 새로운 외국인 선수 한 명이 입단 테스트를 받으러 왔는데 이 선수를 구단에서 괜찮게 본 모양이다. 브라질 출신에 키가 상당히 크고 덩치가 좋은 선수였다. 태국 선수들이 덩치가 작다보니 이런 유형의 선수들을 좋아했다. 나는 이미 계약서까지 쓴 상태인데 내가 지금 당장 눈 앞에 없고 그 선수가 마음에 드니 그 브라질 선수를 리그에 출전할 수 있도록 등록을 시켜버린 거다. 내가 그걸 이미 데뷔전을 치르고 한 달이나 선수들과 함께 훈련하다가 나중에 알게 됐으니 얼마나 충격이 컸을까. “앞으로 컵대회가 몇 경기나 남았느냐”고 물어봤더니 그런 대답이 돌아왔다. “결승까지 올라가면 5경기 남았다.” 현실적으로 나설 수 있는 경기는 네 경기 정도였다. 너무 황당하고 어이가 없어서 에이전트를 통해 계약을 취소하겠다고 했지만 구단 측에서는 그건 안 된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참 황당한 일이다. 도대체 그럼 당신을 왜 영입한 건가.

거기 일본 선수가 한 명 있어서 가깝게 지냈는데 실제로 그 팀은 리그용 외국인 선수가 따로 있고 컵대회용 외국인 선수가 따로 존재한다고 이야기 해주더라. 리그에서 뛸 수 있는 외국인 선수 네 명이 있고 나머지 서너 명은 컵대회만 나서는 외국인 선수였는데 후자 중 한 명이 바로 나였다. 원래 나를 정규리그용 선수로 영입했지만 나는 체구도 왜소한데 브라질 선수를 보고 구단주가 반한 모양이다. 그냥 구단주가 “나 쟤 마음에 들어”라고 하면 돈 주고 사다 쓰는 스타일이더라. 계약 파기를 요청했지만 내가 또 무앙통과의 컵대회 데뷔전에서 활약을 하니 구단 측에서는 계약 파기는 안 된다고 했다. 자기네들이 월급을 다 지급하는데 계약 위반은 아니라고 주장했고 사실 그들의 말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월급은 꼬박꼬박 나오니 말이다. 그런데 현지에서 의사소통도 되지 않는 내가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건 전화통을 붙잡고 한국의 에이전트와 통화하는 것 뿐이었다. 부리람에서 방콕까지는 차로 5시간을 달려야 하는데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어도 방콕까지 어떻게 가야하는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가끔씩 컵대회에만 나서는 신세가 됐다.

이건 부상과는 또 다른 스트레스였을 것 같다.

내가 태국으로 가면서 원했던 건 따뜻한 곳에서 마지막 불꽃을 태우는 것이었다. 혹시나 태국에서 잘 풀리면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한 번 더 도전해 보는 것까지도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무리 프로선수여서 몸 관리에 신경을 써도 경기에 나서지 못하면 동기부여가 되지 않고 그 생활에 지치게 돼 있다. 친구도 없고 내가 태국에서 할 수 있는 건 집에 혼자 있다가 운동하고 들어와 라면을 끓여 먹고 인터넷으로 한국 기사를 보고 영화를 다운 받아 보다가 멍 때리는 것 뿐이었다. 6개월을 이렇게 보냈다.

당신은 부리람과 1년 6개월 계약을 했는데 그 계약대로라면 지금도 여기 한국이 아니라 부리람에서 라면을 끓여 먹고 있어야 하는 상황 아닌가.

그쪽에서는 2015년에는 나를 리그용 외국인 선수로 등록시켜주겠다고 했지만 더는 그런 생활을 이어갈 자신이 없었다. 첫 번째로는 한국 음식 공수가 전혀 되질 않았다. 한국 음식을 먹으려면 방콕에서 음식을 가져와야 하는데 택배도 따로 없다. 내가 5시간 동안 운전을 해 방콕에 가 음식을 사서 돌아온 뒤 냉장고에 넣는 시간을 다 계산하면 11시간은 걸린다. 더운 나라에서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운동선수로서 음식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었다. 편의점에서 빵 사먹고 한국에서 보내준 보관 기간이 긴 삼분 카레와 즉석밥, 참치 통조림으로 연명했다. 또한 마지막 한 달은 아내와 아이가 함께 들어와 있었는데 너무 시골이다보니 병원 등 시설이 전혀 없었다. 아이가 조금만 아프면 차를 타고 5시간을 달려 방콕으로 가야 하는 상황이어서 가족과 함께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곳 사람들은 다 좋고 훈련 여건도 훌륭했지만 내가 더 1년을 참고 있기에는 너무도 스트레스가 많았다. 그래서 결국 계약 해지를 요청했고 6개월 만에 태국을 떠날 수 있게 됐다.

집으로 오는 길은 참으로 험난했다. 당분간은 태국 여행은 가지 않을 것 같다.

어휴, 지긋지긋하다. 또한 따뜻한 나라에 가서 정식 경기가 아닌 훈련 위주의 자체 경기만 소화해도 역시나 발등이 문제더라. 무릎이나 발목은 아파도 테이핑을 하고 억지로 뛸 수 있지만 발등은 그렇지 않다. 그 통증하고는 차원이 달랐다.

다시 국내로 돌아와서는 영입 제의가 없었나. 당신이라면 충분히 언제든 멋진 플레이를 펼칠 수 있는 선수 아닌가.

K리그 클래식에서는 더 이상 경쟁할 상황이 아니었고 K리그 챌린지 쪽에서는 영입 제의가 있었다.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며 플레잉 코치처럼 편하게 해줬으면 좋겠다는 제안이었다. 한국에 돌아와 두 달 정도는 운동도 해보고 생각도 많이 했다. 그런데 그게 싫었다. 운동선수라면 팀에 들어가서 죽을 만큼 뛰며 확실히 끝을 봐야 하는데 설렁 설렁 편하게 운동하는 걸 어떻게 받아들이나. 가족들은 내가 K리그 챌린지 팀의 제안을 거절한 게 자존심 문제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하부리그로 가는 것에 대해 자존심이 상해 가지 않겠다고 한 걸로 받아들인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절대 자존심 문제가 아니었다. 내가 100%의 능력을 발휘할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거절했다. 뛸 수만 있다면 K리그 챌린지보다 더 낮은 무대도 갈 생각이 있었지만 태국에서 돌아와 잠깐 몸을 만드는 와중에도 허벅지 근육 파열을 당할 만큼 몸이 좋지 않았다. 한 군데가 좋지 않으면 정상적으로 뛰지 못하고 다른 쪽에도 무리가 온다. 왼쪽 무릎을 보호하려고 하다보면 오른쪽 무릎을 다치게 된다. 그런 식으로 온몸이 만신창이가 돼 이제는 힘들겠구나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다면 이제는 현역 생활에서 물러나겠다는 뜻인가.

지금까지 재진이 형을 비롯한 몇몇 주변 사람들에게만 이야기 했었고 공식적인 의사를 밝힌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오늘 이 자리를 통해 공식적으로 은퇴한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대단한 선수 생활을 한 것도 아니고 잠시 활약한 선수라 공식 은퇴를 발표한다는 것도 쑥스럽지만 그래도 나를 응원했던 분들이 지금도 내 근황을 궁금해 하고 돌아오길 바란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이 인터뷰를 통해서라도 입장을 확실하게 정리하려 한다. 축구선수 김형범으로서의 생활은 이제 마무리할 생각이다.

너무나도 아쉽다. 이제 당신의 멋진 프리킥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됐다고 생각하니 두고 두고 아쉬움이 남을 것 같다.

사실 가족들은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계신다. 내가 더 할 수 있는 데도 포기한다고 생각하신다. 하지만 나는 내가 더 이상은 축구선수로서 안 된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정말 축구를 했던 시간들이 행복했고 좋았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가족들도 힘들어하고 나도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며 축구가 밉기도 하더라. 선수 생활을 하면서 무릎 수술만 세 번을 했다. 왼쪽 무릎은 바깥쪽 연골이 다 없고 오른쪽 무릎은 전방 십자인대와 외측, 내측, 후방 연골도 다 수술을 했다. 십자인대 수술을 하면 보통 한 시간 반에서 두 시간 정도가 걸리는데 나는 한 번에 다 손을 대는 바람에 수술만 네 시간이 걸리기도 했다. 요즘에는 십자인대가 파열돼도 재활까지 4~5달이면 되는데 나는 회복까지 8개월이 걸릴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다. 아직도 내 무릎에는 핀이 박혀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 쭉 숨겨 왔지만 지난 2009년 오른쪽 무릎 부상 이후 국가에서 지체장애 6급 판정을 받고 장애인증과 복지 카드까지 나왔는데 선수가 이런 상태라는 걸 팬들이 알면 실망할까봐 숨기고 살았다.

그 오른쪽 다리로 그렇게도 많은 골을 넣었다는 게 경이롭기까지 하다.

사실 오른쪽 무릎보다는 왼쪽 무릎이 더 성치 않다. 오른쪽 무릎은 큰 수술을 한 번 받은 거고 왼쪽 무릎은 여러 번 다쳤다. 어느 정도였냐면 한 경기를 치르면 무릎에 물이 차서 병원에 가 물을 빼고 이틀 정도는 쉬었다가 다시 정비를 해야 할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예를 들어 주말에 경기를 하고 수요일에 또 경기가 있으면 이 수요일 경기는 쉬고 그 다음 주말 경기를 뛰는 식으로 쉬어야 했다. 대전에 있을 때도 유상철 감독님이 엄청난 배려를 해주셨다. 정규리그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휴식을 부여해 32경기에 나설 수 있었다. 현실적으로 내가 뛸 수 있는 경기는 1년에 20경기 남짓이고 이것도 병원에 가 무릎에 찬 물을 빼고 휴식을 취하면서 소화 가능한 일이었다. 지금은 그때보다 나이를 더 먹었고 상태가 더 좋지 않을 텐데 내가 어떻게 염치 불구하고 팀에 들어가 믿고 데려와 주신 감독님과 팬들에게 실망감을 안겨드릴 수 있을까. 그래서 아쉽지만 은퇴를 선택하게 됐다. 하루 아침에 은퇴를 결정한 게 아니라 치료도 받아보고 다시 운동도 해보고 하면서 자연스레 더 이상은 안 되겠다고 선택한 것이다. 선수로서 팀에 들어가 편하게 운동한다는 건 용납이 안 된다.

원래 학창시절부터 이렇게 부상이 많은 선수였나.

원래 체격이 왜소해 이걸 보충하려고 어릴 때부터 웨이트 트레이닝도 많이 했고 슈팅력을 키우고 싶어서 허벅지도 많이 키웠다. 체력 훈련에서도 지지 않기 위해 가장 열심히 했다. 그런데 당시 환경이 좋지 않았다. 맨땅에서 중,고등학교는 물론 대학교 때까지 플레이했다. 내가 원래 좀 역동적인 움직임을 자주하는 편이었는데 이때부터 지속적으로 몸에 부하가 걸린 것 같다. 그리고 학창시절에는 경기에서 지면 축구화를 신고 아스팔트 도로를 뛰어서 숙소까지 복귀하는 일도 많았다. 중,고등학교 때까지만 하더라도 괜찮았지만 이런 게 쌓이면서 대학교 때부터 조금씩 부상이 찾아오기 시작하더니 프로에 와서는 심해지더라. 그런데 누굴 원망하겠나. 당시에는 환경이 그렇게 밖에 되질 않았고 지도자분들의 잘못도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특히나 나는 당신의 2009년 수원전 부상이 여전히 잊혀지질 않는다. 8개월 재활 후 복귀 10분 만에 또 다시 부상을 당했던 그 순간 말이다.

나도 아직 그때 상황이 가끔씩 떠오른다. 2008년 성남과의 플레이오프 때 왼쪽 발목을 다쳐서 재활로만 4개월을 보내다가 왼쪽 무릎을 또 다쳐서 복귀도 하지 못하고 무릎 수술을 했었다. 이렇게 재활로 8개월을 허비했고 겨우 겨우 다시 몸을 만들어 처음으로 엔트리에 든 날이었다. 당시 비가 오고 있었고 최강희 감독님께서 나를 오늘 엔트리에는 넣었지만 경기에는 나가지 않는 걸로 생각하고 있으라고 하셨다. 설령 나가게 되더라도 15분에도 20분 정도 뛸 수도 있지만 날씨와 경기 상황을 보고 판단하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후반이 시작되자마자 팬들이 내 이름을 연호하는 것이다. 아마 내가 당시 전북에서 인기가 아주 조금 있었던 것 같다. 계속 몸을 푸는데 감독님으로부터 콜이 딱 온 거다. 벤치 쪽으로 가면서 교체 투입 준비를 하는데 내가 들어가기 전부터 팬들이 내 이름을 외치고 있었고 나도 좀 흥분했던 것 같다. 경기를 10분 동안 어떻게 뛰었는지 기억도 안 난다.

부상 당시 상황을 자세히 떠올릴 수 있나.

롱패스가 나에게 왔는데 수원의 (곽)희주 형이 나를 막으려고 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공을 잡으면서 희주 형 쪽으로 치고 들어간 거다. (박)지성이 형이 잘 하는 그런 플레이다. 반대 방향으로 확 꺾어 상대 수비를 제치는 동작인데 몸상태가 100%로 아닌 내가 무리하긴 했다. 몸은 이미 희주 형 방향으로 틀었지만 하체의 무게 중심은 반대에 있는 상황에서 희주 형이 몸으로 툭 미는 순간 무릎이 그대로 빠져버렸다. 이 이후 희주 형에 대한 비난도 많았는데 이제야 말씀드리자면 희주 형의 플레이는 정상적이었다.

기억난다. 당시 곽희주는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부상 이후 그와 대화를 나눠본 적이 있나.

사실 희주 형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건 아니었다. 경기장에서 자주 마주치니까 보면 인사하는 정도였다. 그런데 그 부상 이후 희주 형이 곧장 경기가 끝난 뒤 라커룸까지 찾아와서 나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더라. “미안해. 고의가 아니었어”라고 연신 말을 했는데 사실 그때는 솔직히 말하면 희주 형을 원망하기도 했다. 8개월 동안 정말 힘들게 재활을 해 복귀했는데 10분 만에 그런 일을 겪으니 화가 났다. 그리고 정신도 없었다. 오른쪽 무릎이 쭉 빠질 정도였고 왼발로만 의지해 콩콩 뛰면 오른쪽 무릎이 출렁거리면서 빠졌다. 인대가 무릎을 잡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부상인지 잘 아니까 자포자기한 상태였다. 당시 희주 형이 직접 찾아와 미안하다고 했지만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아무 말도 안 했다. 그냥 고개를 쳐박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희주 형한테 참 미안하다. “괜찮아요. 일부러 그런 거 아닌 거 알아요”라고 말해줬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던 게 마음에 걸린다.

그렇게 당신은 또 기나긴 재활에 돌입했다. 하그리브스도 울고 갈 재활이었다.

아직 할 게 너무 많은데 이걸로 또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힘들어해야 하는지 무서웠다. 그런데 나는 종교가 없지만 그때 그 말을 새겼다. “신께서는 참을 수 있을 만큼의 고통만 주신다.” 팬들의 성원도 받고 ‘비바 K리그’에서도 영상을 만들어 주셔서 그 응원을 받고 다시 시작했다. 그때 오른쪽 무릎을 수술한 뒤 재활에만 또 다시 7~8개월이 걸렸다. 1년 반 넘게 쉰 셈이다. 이때는 정말 조급해 하지 않고 천천히 다시 시작해 보기로 했다. 2군에서부터 조금씩 경기에 나서며 몸 상태를 끌어 올렸고 1군으로 복귀해 마침내 경기에 나섰다.

복귀를 축하한다.

그런데 이때부터 다시 왼쪽 무릎이 아파오기 시작하는 거다. 오른쪽 무릎을 다치기 전에 수술했던 왼쪽 무릎이 조금씩 따끔거리더니 물이 차기 시작했다. 매일 치료실에서 살면서 무릎을 원망하며 ‘이러면 안돼’라는 말만 중얼거렸다. 그리고 병원에 가 MRI를 찍었는데 또 다시 믿을 수 없는 말을 들었다. “무릎 연골이 또 찢어졌다”는 것이었다. 이미 한 번 무릎 연골을 도려낸 상태에서 또 다시 남은 분위를 도려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또 다시 재활에 들어갔고 결국에는 세 시즌을 날려 먹었다. 오른쪽 무릎을 보호하려다 보니 왼쪽 무릎에 또 다시 과부하가 걸린 것이다. 이 왼쪽 무릎이 지금도 빠져서 안쪽으로 돌아갈 정도다. 내측인대가 없어서 그렇다. 자고 일어나면 빠져 있는 무릎을 맞춰야 할 만큼 어긋나 있다. 아내가 장난 삼아 “마흔 살 되고도 걸어 다닐 수는 있느냐”고 묻기도 한다.

이거 뭐 여러 축구선수를 인터뷰 해봤지만 이만큼 부상으로 고생한 선수 이야기는 처음 들어본다. 너무나 안타깝다. 이제 좋았던 시절 이야기를 조금 해보자. 선수 생활을 하면 가장 행복했던 때는 언제였나.

얼마 전 (이)동국이 형 인터뷰를 봤다. 자신의 축구 인생은 전북 입단 전과 후로 나뉜다는 내용이었다. 나 역시 전북에서 힘든 시간을 많이 보내기는 했지만 그래도 가장 즐겁고 행복했던 것 역시 전북 시절이었다. 내가 2006년 울산에서 전북으로 갈 때만 하더라도 전북은 지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하위권의 성적이었고 K리그 선수들이 별로 가고 싶어하지 않는 구단이었다. 박동혁, 박규선을 묶어 나와 트레이드하는 형식이었는데 울산에서 짐을 싸서 나왔을 때 솔직히 기분이 그렇지 좋지는 않았다. 당시 울산이 전북보다는 훨씬 더 좋은 팀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때 최강희 감독님께서 전화를 해주셨다. “네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다 안다”면서 “그래도 이렇게 어려운 팀을 좋은 팀으로 만드는 것도 재미있지 않겠느냐. 같이 해보자”고 하셨다. 내가 울산에서는 그렇게 특출난 선수가 아니었는데 믿어주시는 모습에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다음 날 전주로 내려가니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울산은 좋은 클럽하우스에서 생활했고 지하에 가면 선수들 별로 세탁된 빨래가 싹 다 정리돼 있는데 전북은 현대자동차 사원 아파트에 얹혀 살고 있었고 선수들 방마다 빨래 건조대에 빨래가 널려 있었다. 선수들이 직접 빨래를 하는 모습을 보고는 굉장히 낯설었다. 하지만 이런 팀이 지금의 명문 구단이 되는 과정을 함께 할 수 있었다는 게 축구선수로서는 엄청난 영광 아닌가. 전북에서의 모든 일들이 나에게는 다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다.

무엇보다 2006년 전북의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 우승이 기억에 남는다. 당시에 당신은 염기훈, 제칼로 등과 함께 최고의 활약을 펼쳤다.

박동혁과 박규선 등 국가대표급 선수들을 울산에 내주고 내가 전북에 왔으니 처음에는 팬들이 “저 듣보잡은 뭔데 우리 선수를 둘이나 보내고 영입했어?”라며 좋지 않게 바라보셨다. 하지만 전북 데뷔전이었던 감바오사카와의 AFC 챔피언스리그 예산 1차전에서 후반에 들어가 내가 두 골을 넣었고 팬들이 조금씩 나를 기억해 주기 시작했다. 그런데 사실은 당시 AFC 챔피언스리그가 뭔지도 잘 몰랐다. 프로에 갓 데뷔해서 하우젠컵, FA컵, K리그, AFC 챔피언스리그 뭐 이런 걸 구분할 만큼 여유가 있지도 않았고 그냥 어떤 경기든 들어가면 잘 하자는 생각 뿐이었다. 감바전도 그냥 일본 팀하고 무슨 아시아 대회 조예선에서 붙는다는 것 정도만 알고 들어갔고 AFC 챔피언스리그 규모가 얼마나 큰지도 잘 몰랐다. 당시 우승하고 돌아왔을 때도 방송국에서 카메라가 한 대만 달랑 나올 정도로 이슈도 되지 않았다. 뭐 그런 상황 속에서 계속 경기를 치렀는데 우리팀 분위기가 너무 좋았고 나도 컨디션이 최고였다. AFC 챔피언스리그에서만 5골을 넣었다. 팀도 역전으로 이기면서 승승장구했고 뭘 해도 될 분위기였다. 감독님도 전혀 흔들리는 모습이 없었다. “져도 돼. 마음껏 해. 이거 잘못되면 내가 짐 싸서 나가면 돼.” 감독님에 대한 믿음이 컸고 선수들끼리도 너무 행복하게 축구를 하던 시절이었다.

이적 첫해 AFC 챔피언스리그 우승은 지금도 엄청난 일이었다. 아직도 그때의 소중한 추억이 많을 것 같다.

시리아에서 알카라마와 결승 2차전을 치르고 우승을 확정한 다음 호텔에서 다같이 맥주를 마시면서 회포를 풀고 있었다. 이철근 단장님도 와 있었는데 뒤풀이 이야기가 나왔다. 단장님께서 “한국에 가면 전주로 내려가 우승 뒤풀이를 하자”고 하셨는데 감독님이 갑자기 선수들을 다 한 자리로 모으더니 단장님한테 다 들리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저 양반이 지금 감을 못 잡고 있는 거 같아. 우승 뒤풀이는 혼자 전주에서 하시라고 하고 우리는 한양으로 간다.” 사실 전주도 좋지만 젊은 선수들은 서울에서 화끈하게 놀고 싶어하지 않나. 이때 최강희 감독님 말씀을 듣고는 정말 멋진 분이라고 느꼈다. 그러면서 자꾸 “단장님은 혼자 전주 내려가세요. 얘들아 구단에서 뒤풀이 안 해주면 내가 한양에서 쏠게”라고 말씀하시는데 이때 감독님께 반하고 말았다. 단장님한테 그럴 수 있는 감독님이 또 있을까. 아마 단장님도 당시 이런 대회에서 우승해 본 경험이 없으셔서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감이 오질 않으신 모양이다.

하긴. 당시에 전북이 아시아 정상에 오를 것이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

그리고 일주일간 휴가를 받아서 신나게 놀고 있는데 또 할 일이 있었다. 클럽월드컵이란 걸 나가야 한다는 거다. 뭐 바르셀로나도 나오고 그런다는데 사실 우리는 우승의 기분이나 더 만끽하고 싶었다. 클럽월드컵이란 게 있는지도 잘 모를 때였다. 첫 경기를 멕시코 클럽 아메리카와 붙었는데 이 팀에 카니자랑 블랑코랑 다 있었고 결국 우리가 졌다. 그리고 5,6위전에 나가서 승리를 거둬 클럽월드컵을 5위로 마치고 시상식에 참석해서 기념 사진을 한 장 찍었다. 상금 적힌 걸 들고 찍는데 뭐 15만 엔인가 얼마인가 써 있는 거다. 속으로 ‘상금이 얼마 되지도 않네’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봤더니 5위한 상금이 15억 원이었다. 아니, 당시 K리그 우승 상금이 3억 원이었는데 두 경기 했다고 15억 원을 주는 거다. 정말 아무 것도 모르고 그냥 겁 없이 패기로 뛰어다닐 때였다. 금전적인 걸 바라고 뛰는 게 아니라 그냥 경기에서 이기고 동료들과 얼싸 안고 그런 것만으로도 행복했던 때다.

나도 그런 때가 있었는데 지금은 일을 할 때마다 일단은 돈부터 따지게 된다. 어쩔 수 없나보다.

최강희 감독님께서 늘 그런 말씀을 하셨다. 열심히 하다보면 돈을 알아서 따라온다고 돈을 쫓지 말라고 하신다. 2006년 AFC 챔피언스리그에서 우승하고 2008년에는 대표팀에도 뽑히고 절정을 맞았다. 수도권의 여러 빅클럽으로부터 좋은 연봉과 대우를 제시받은 것도 2008년이었다. 하지만 나는 전북에 남았다. 처음에는 2년 계약을 했고 그 다음에는 3년 재계약을 했고 또 다시 2년 계약을 더 맺었다.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한 팀도 있었지만 전북에서 뛰는 게 행복했다. 그 행복한 시간을 만들어 주신 게 바로 최강희 감독님이었다. 내가 이런 인터뷰를 할 수 있는 것도 그분 덕분이다. 훈련하러 나갈 때 축구화 끈을 묵는 게 행복하고 즐거웠던 시절이었다. ‘다음 경기에서는 이렇게 해봐야지’라며 다가올 경기를 기대했고 그래서 더 전북에 지금도 애착이 많이 간다. 전북이 대한민국 최고의 팀이 됐는데 내가 지금의 이 팀이 되기까지 0.1%라도 기여했다고 생각하니 참으로 영광이다.

전북에서 뛰었었다는 자부심이 여전히 대단한 것 같다.

물론이다. 지금 스크린 골프연습장 손님들 중에는 “축구선수였다면서요? 어디에서 뛰었어요?”라고 묻는 분들이 있다. 그러면 “그냥 뭐 축구 잠깐 했었어요”라고 얼버무리는데 “요즘 전북현대가 그렇게 잘한다던데”라는 답변이 돌아오는 경우도 있더라. 그러면 되게 뿌듯하다. 언젠가 어디에서 그런 글을 본 적이 있다. “이동국은 전북의 99%를 채울 만큼 위대한 선수다. 하지만 나머지 1%를 채울 수는 없다. 그 나머지 1%를 김형범은 채울 수 있다.” 그 글을 봤을 때 참 행복했다.

2009년에는 최강희 감독이 챔피언결정전 2차전 당시 당신의 유니폼을 양복 안에 입고 벤치를 지켜 화제가 되기도 했다. 당시 심정이 어땠나.

그 해 나는 한 시즌 동안 딱 10분만을 뛰고 시즌을 마감했다. 한 경기 10분이 아니라 한 시즌 10분이다. 그리고 챔피언결정전에서 동료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데 우승이 확정된 후 감독님이 서포터스석 앞에서 우리 유니폼을 입고 뭔가를 하고 계시더라. 내 유니폼이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다. 그리고 다시 벤치 쪽으로 돌아오시면서 나에게 한 마디 했다. “오늘 너도 같이 뛴 거야. 내가 네 유니폼 입고 있었으니까.”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을 느꼈다. 내가 일찌감치 시즌을 마감한 걸 감독님께서 너무 안타까워하셨는데 이런 식으로 나를 울릴지는 몰랐다. 그리고 우승 뒤풀이 자리에서 선수단 전원이 감독님께 술을 한 잔씩 다 따라드렸는데 그 자리에서 최강희 감독님이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 “아침부터 형범이 유니폼 구해서 아무도 모르게 몰래 입고 있는데 셔츠에 비칠까봐 더운데도 자켓도 못 벗고 있었다”고. “우승 못했으면 어쩔 뻔했냐”고. 참 유머 감각도 있으시지만 너무나도 따뜻하고 멋진 분이다.

그렇다면 당신이 생각하는 최고의 시즌은 언제였나.

2008년이었다. 국가대표팀에 뽑혔고 K리그 베스트11에도 선정됐다. 2006년에는 멋도 모르고 열심히 했는데 2008년에는 최강희 감독과 3년을 지내면서 어느 정도 물이 오르기 시작했다. 서서히 그 분의 축구를 이해한 것이다. 사실 평범한 선수에서 대표급 선수로 성장하려면 나 혼자만 하는 플레이에만 집중하는 게 아니라 팀의 밸런스도 생각하는 축구를 해야 하는데 그런 것에도 조금씩 눈을 뜨고 있었다. 땅만 보고 공을 차다가 고개를 들기 시작한 시절이었고 대표팀에서도 어시스트를 기록하는 등 조금씩 인정받고 있었다.

그렇다면 가장 최악의 시즌은 언제였나. 시간을 돌려 다시 돌아가 무언가를 바꾸고 싶은 시기도 있었을 것 같다.

그것 역시 2008년이다. 성남과의 플레이오프 때 정말 멍청한 행동을 했다. 당시 대표팀의 사우디 원정도 다녀오고 한껏 건방을 떨 때였다. 너무나도 자신 있었는데 성남전에서 내가 후보 명단으로 밀려난 것이었다. 아마도 대표팀 원정도 다녀온 내 상태를 고려한 감독님의 판단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때는 오만했다. 중요한 경기인데 선발로 나서지 못하고 경기를 지켜보는 게 기분도 언짢고 화도 났다. 대표팀에서는 허정무 감독도 나를 인정해 주고 있었고 언론에서도 나를 주목하는데 왜 내가 우리 경기를 뒤에서 바라봐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날 후반 20여분을 남기고 투입됐는데 패스를 해야할 타이밍에서 무리하게 뭔가를 하려고 하다가 결국 3년간 기나긴 부상 터널에 들어가는 첫 부상을 당하게 됐다. 이때 왼쪽 발목을 다치면서 내 긴 부상이 시작된 것이다. 프로선수로서는 가져서는 안 될 자세로 경기에 임했다가 어리석게 당하고 말았다고 생각한다. 왜 나에게는 그날 20분의 시간이 주어졌는지 알았어야 했고 거기에 집중하고 감독님 의도에 따랐어야 했는데 내가 중요한 경기에서 해결을 하겠다고 아마추어적인 생각을 했다가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정말 그때로 다시 시간을 돌리고 싶을 것 같다. 만약 그때 조금 더 겸손했다면 어땠을까.

나도 그 생각을 많이 한다. 그 부상을 당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축구가 잘 보이기 시작할 때였는데 그때 내려오기 시작했다. 2006년부터 2008년까지 쭉 올라가다가 조금만 더 올라가면 더 큰 게 보일 시기였는데 이 부상 이후 3년 동안 하염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가장 성장해야 할 시기에 꺾이기 시작한 거다. 이때 발목을 다쳐 재활을 4개월 정도 하다가 왼쪽 무릎을 다쳐 수술대에 올랐다. 조금 더 겸손했으면 더 많은 걸 이룰 수 있었을 텐데 어리석었다.

원래 사람이란 게 다 시간이 지나고 느끼는 것 같다. 요새는 가끔씩 조기축구회에 나간다는 제보가 여기저기에서 들려오고 있다. 어떻게 된 건가.

일주일에 한 번씩 가볍게 20분 정도 소화하는 조기축구 정도는 뛸 수 있다. 몇 번 나가 봤는데 나를 알아봐 주시는 분들이 있더라. 상대편으로 만났는데 영광이었다고 하시고 잘 배웠다고 하시더라. 내가 선수 생활을 명예롭게 마무리하지 못했는데 이렇게라도 한 분 한 분께 인사를 드릴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우리 팀이 재진이 형도 있다. 내가 크로스를 올리면 재진이 형이 여전히 해결한다. 조기축구회 치고는 상당히 강한 팀 아닌가. 또한 축구를 좋아하는 분들과 함께 땀 흘리고 앉아서 대화도 하고 그런 게 참 좋아서 계속 나가고 있다. 그런데 누가 이 이야기를 듣고는 이상하게 해석을 하더라. 김형범이 갈 팀이 없어서 혼자 몸을 만들면서 팀을 찾으려고 조기축구회도 나간다고 받아들이시는 분이 있다. 하지만 나는 전혀 그런 의도가 아니다. 그런 곳에서 누군가와 함께 공을 차며 내가 인사를 드릴 수 있다는 게 좋기 때문에 조기축구회에도 나가는 거다. 누구를 만나건 반갑게 인사해 주시면 나는 강력한 오른발로 화답할 생각이다.

부상으로 아쉽게도 이른 나이에 은퇴를 하게 됐다. 하지만 당신의 축구 인생은 참으로 찬란했다. 혹시 본인 스스로 당신의 선수 생활에 점수를 매긴다면 몇 점을 줄 수 있겠나.

나는 K리그에서 175경기에 나서 35골 24도움을 기록했다. 20-20 클럽에는 가입했지만 30-30 클럽에는 들지 못했다. 부상으로 오래 쉬어서 경기수도 얼마 안 된다. 꾸준하게 리그에서 200경기, 300경기를 뛰면서도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하는 선수들도 많다. 내가 그 선수들보다도 훨씬 더 못한데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을까. 프로선수로서 크게 평가받을 만한 가치가 있을지도 잘 모르겠다. 2006년부터 2008년까지 잠깐 반짝했던 그런 선수 아닐까. 100점 만점에 45점 정도나 줄 수 있을 것 같다.

에이, 그래도 85점은 되지 않을까.

3년 동안 부상으로 고생하다가 대전으로 가 한 시즌 동안 5골 10도움을 기록했다. 전에는 득점이 도움보다 더 많았는데 대전에서 도움만 10개를 하며 어느 정도 팀 플레이에 눈을 떴다고 생각했다. 3년을 쉬면서도 끊임없이 축구를 보고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고 프리킥을 연구해 가면서 실력이 늘었다고 본다. 여기에 몸이 안 따르게 되면서 축구를 몸보다는 머리로 하는 법을 찾게 됐고 직접 올라가서 해결을 못하니까 어시스트를 하게 됐다. 아프지 않고 정상적인 몸 상태였더라면 얼마나 더 성장할 수 있었을까 나도 궁금하다. 그런데 현실은 내가 가지고 있는 능력을 절반도 발휘하지 못한 것 같다.

그렇다면 점수를 떠나 팬들에게는 어떤 선수로 기억되고 싶나.

늘 한 가지였다. 팬들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선수라는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2007년에 전북 소속으로 우라와레즈와 홈 경기를 했는데 이날 우리가 졌다. 심판 판정도 불만족스러웠고 너무 분하고 팬들에게 죄송스러웠는데 서포터스석에 인사를 하고 라커룸으로 들어가다가 다시 서포터스 앞으로 갔다. 죄송한 마음에 뭐라고 보답을 해드리고 싶어 유니폼 하의만 빼고 축구화까지 싹 다 벗어서 팬들에게 선물했다. 팬들을 누구보다 아끼는 선수라는 이야기를 늘 듣고 싶었다. 우리의 승리가 나만의 승리가 아닌 팬들과 함께 즐기는 승리라고 생각했고 팬들이 힘들 때 같이 하려고 했다. 또한 팬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려고도 했다. 팬들하고 따로 만나 밥도 사고 같이 노래방에도 종종 갔다. 경기력을 떠나 김형범은 늘 팬들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했던 선수로 기억됐으면 좋겠다.

당신이 팬들에게 선물해 준 건 유니폼과 축구화뿐 아니라 숱한 감동과 환희였다. 당신은 비록 부상으로 일찌감치 은퇴하지만 절대 실패한 선수가 아니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나.

아직 지도자 쪽으로 갈 시기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주변에 감독과 코치를 하는 선배들이 있는데 이야기를 들어보면 다들 비슷한 말을 한다. 금전적인 부분을 바라면 절대 할 수 없는 일이고 가르치는 게 좋고 선수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는 것에 만족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하더라. 그런데 억지로 하는 게 아니라 이런 시기가 자연스레 온다고 하는데 나는 아직 그 정도 성품이나 역량까지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아직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조기축구이긴 하지만 그냥 내가 하는 게 누군가를 가르치는 것보다는 더 좋기 때문이다. 물론 시간이 지나고 선수들의 플레이가 눈에 보이면서 나도 생각이 바뀌면 지도자로 도전해 보고 싶다. 일단 협회에서 하는 지도자 수업은 받아볼 계획이다. 3급 지도자 자격증부터 시작해야 한다.

웬만한 선수들은 나이를 먹으면서 현역 생활 도중에 3급 지도자 자격증 정도는 미리 따던데 당신은 그 시간에 자격증도 안 따고 뭐했나.

뭘하긴 뭘했나. 그 시간에 수술대에 누워 있고 병원에 입원해 있고 재활하고 있었지. 내가 자격증 딸 시간이 있었겠나.

그건 그렇다. 그렇다면 마지막 질문이다. 마지막으로 팬들에게 한 마디 해달라.

우선 너무나도 죄송스럽다는 말부터 전하고 싶다. 기대하신 것만큼 보여주지 못한 것에 대해서 죄송한 마음이다. 얼마 전 SNS에 예전 사진을 올리면서 유독 눈에 가는 사진 하나가 있었다. 서포터스석을 향해 인사하는 사진이었는데 허리를 숙여 90도로 인사하는 내 모습 발견했다. 그 사진을 보고 “고개를 숙이고 숙여도 모자랄 만큼 고마운 그대들”이라는 글을 남겼는데 어느 팬분께서 그걸 그대로 올리시면서 그런 글을 써주셨더라. “박수를 치고 또 쳐줘도 아깝지 않은 선수.” 정말 감사한 분들에게 어떻게 보답을 해야할지 모르겠지만 어떤 식으로건 보내주신 사랑을 돌려드리고 싶다. 또한 전북 팬들을 비롯해 대전과 경남, 그리고 울산에서 나에게 박수를 보내줬던 모든 이들을 평생 잊지 않고 살아가겠다. 오늘 이 인터뷰를 통해 현역 은퇴를 공식 발표했지만 조기축구에서 만나면 언제든 반갑게 맞아주셨으면 한다. 나 또한 언제나 강력한 오른발로 인사드리고 싶다. 고개를 숙이고 숙여도 모자랄 만큼 감사한 그대들을 평생 잊지 않고 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