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2TV <청춘FC-헝그리 베스트일레븐>을 보다보면 이런 장면이 나온다. 프로 무대에서 선택받지 못한 선수들의 말이다. “프로팀 테스트에 가면 이미 뽑힐 선수가 정해져 있으면서 형식적인 테스트를 하는 경우도 있었어요.” 나는 한국 축구가 자랑스럽지만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부끄러운 것도 사실이다. 좁디 좁은 축구판에서 자신이 잘 아는 선수를 챙기고 또 실력 외적인 배경이 없어 부당하게 기회를 받지 못하는 선수들도 꽤 있다. 이건 한국 축구의 고질적인 문제 중 하나다. 일부 열악한 시도민구단 중에는 과거 정치적인 입김에 의해 전력과는 상관 없는 선수들을 대거 영입해 선수단이 50명에 육박하기도 했었다. 이들은 실력이 부족했지만 누군가의 이해관계에 의해 프로 무대에 입성했고 결국 경기에 나서지 못해도 프로 출신이라는 간판을 달고 또 다시 지도자가 돼 누군가의 ‘빽’이 되지만 결국 누군가는 이런 이들 때문에 좋은 실력을 갖추고도 축구를 일찌감치 포기할 수밖에 없다.

국내파는 더 이상 들러리가 아니다

한국 축구의 이 같은 문제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최근 들어서는 이런 입김까지는 아니더라도 선수 선발에 실력 외적인 요소가 여전히 작용하고 있다. 다소 민감한 이야기이니 오해의 소지를 줄이고 싶다. 돈을 받고 누군가를 밀어 주는 정도는 아니지만 제로 베이스에서 오로지 지금의 실력 만을 놓고 선수를 평가하지 못한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부분이다. 이는 대표팀 역시 마찬가지다. 그동안 대표팀은 지도자가 바뀔 때마다 자신의 입맛에 맞는 선수들로 채워졌다. 누구보다 그 선수들을 잘 안다는 장점도 있고 선수 선발은 감독의 고유권한이라는 그럴싸한 핑계도 있지만 사실 이건 올바른 대표팀의 모습이 아니었다. 실력에 의문 부호가 붙는 선수나 컨디션이 좋지 않은 선수들도 대표팀 단골손님이 돼 태극마크를 단 채 컨디션을 끌어올리는 경우도 많았다. 대표팀은 재활하는 곳이 아닌데도 말이다.

어느 한 감독을 지칭하는 게 아니다. 조광래 감독은 해외파를 끔찍이도 사랑했고 최강희 감독은 부임하자마자 선수 틀을 싹 다 바꿨다. 홍명보 감독은 청소년 대표팀 시절부터 자신이 아끼던 선수들을 대거 데려왔다. 그 누구도 이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물론 이들의 입장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다. 어린 선수들에게 기회를 줘 경험을 쌓아 경쟁력을 높이려던 조광래 감독의 입장도 충분히 수긍이 가고 위기의 상황에서 결국 신뢰하는 선수들을 긴급 수혈해 그 위기를 넘기려던 최강희 감독의 입장도 이해가 간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결국 자신이 오랜 시간 지켜본 선수들에게 논란 속에서도 기회를 줬던 홍명보 감독 역시 성공만 했더라면 ‘신뢰의 리더십’이라는 평가를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한국 축구를 길게 내다봤을 때는 오히려 독이 될 가능성이 컸다.

그런데 슈틸리케 감독이 부임한 뒤에는 이런 풍토가 사라졌다. 대표팀에 와 컨디션을 끌어 올리거나 재활을 하는 선수는 없다. 현재 경기력이 좋지 않은데 이름값만으로 대표팀에 올 수 없다는 걸 실천하는 중이다. 또한 한 가지 긍정적인 점은 이제 국내파가 해외파의 들러리(?) 취급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과거 대표팀이 국내파 위주로 소집될 경우 선수들 사이에서도 의욕이 떨어지는 경우가 잦았다. “어차피 해외파가 오면 우리는 밀려날 것”이라는 자조 섞인 이야기들이 오가면서 스스로 집중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적어도 내가 아는 슈틸리케 감독이라면 명함이 그럴싸하다고 해 기회를 주는 스타일이 아니다. 오로지 실력과 현재 컨디션이 슈틸리케 감독의 잣대다. 이번 동아시안컵에 나선 대표팀의 중국전을 보고 많은 이들이 찬사를 보내는데 나는 이게 무슨 전술로 마법을 부린 게 아니라 결국에는 동기부여와 경쟁을 통한 경기력 향상이라고 본다.

국내파의 활약, 그래서 더 자극받을 해외파

사실 대표팀 감독이라면 해외로 나가 해외파의 몸 상태를 살피는 정도만 해도 많은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슈틸리케 감독이 이렇게 국내파로도 대단한 경기를 펼칠 수 있었던 건 그가 국내 축구 경기를 빠지지 않고 보기 때문이다. K리그 클래식은 물론 K리그 챌린지와 대학 축구 등까지 그는 경기의 수준을 따지지 않고 늘 축구장으로 간다. 그러니 오래 지켜보고 좋은 선수를 뽑을 수밖에 없다. 자기가 많은 경기를 지켜보고 확신이 든다면 그 선수가 무명이라도 상관없지 않은가. 그렇게 탄생한 게 바로 이정협이다. 아마도 슈틸리케 감독이 부임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지금도 이동국이냐, 박주영이냐를 놓고 수 없이 싸우고 있었을 것이다. 슈틸리케 감독이 와 한국 대표팀 공격수는 이 둘뿐이 아니라는 걸 인식시켜줘서 고맙고 경쟁을 붙여줘서 고맙다. 심지어 대학 선수들까지 불러 대표팀 훈련에 합류시키기도 했을 정도로 슈틸리케 감독은 국내 선수들을 모두 파악하고 있다. 이렇게 발품을 팔지 않으면 그 어떤 지도자가 무명의 선수들을 대표팀에 뽑을 수 있겠는가.

이번 대표팀은 활력이 넘친다. 스스로도 “잘만 하면 나도 해외파 대신 경기에 나설 수 있다”는 분위기다. 중국전에서 이종호가 죽어라 뛴 것도, 김승대가 열심히 라인을 타는 것도, 권창훈이 중앙에서 과감하게 돌파를 보여준 것도 같은 맥락이다. 어차피 기성용과 이청용, 구자철이 대표팀에 오면 벤치나 지키거나 아예 대표팀에 뽑히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던 때와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진 모습이다. 이정협처럼 K리그 챌린지에서 뛰는 선수들도 실력만 보여주면 대표팀에 올 수 있고 주민규와 같은 공격수 역시 대표팀 예비 엔트리에까지 이름을 올릴 만큼 대표팀으로 가는 문은 열려있다. 물론 아무리 이름이 난 선수라도 경기력이 부족하면 밖으로 나가는 문도 활짝 열려있다는 건 함정이다. 이번 대표팀에서 A매치 데뷔전을 치른 권창훈과 이종호, 김승대 등이 활력 넘치는 플레이를 보여준 건 이전 대표팀에서 뛰던 국내파 선수들보다 실력이 월등해서가 아니다. 그만큼 경쟁 구조를 갖추고 문을 열어놨기 때문이다.

단순히 국내파 선수들을 옹호하려는 게 아니다. 슈틸리케 감독이 이렇게 무한경쟁과 실력 위주의 선수 선발을 하게 되면서 이제 유럽에서 뛰는 선수들도 긴장할 수밖에 없다. 일단 대표팀 선발 명단을 짤 때면 기성용과 구자철, 손흥민, 이청용을 담당 포지션에 당연히 가장 먼저 놓고 선수를 구상하던 때도 있었지만 이제는 그 누구도 안심할 수 없다. 지금 경기력만 같아서는 이재성과 권창훈, 김승대도 선발 명단에서 빼기에는 너무 아까운 선수들이기 때문이다. 이청용이나 구자철이 경기력을 더 끌어 올리지 않는다면 그 자리를 이재성이 꿰찰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이재성은 더 이상 그들의 대체자가 아니라 그 스스로의 이름을 널리 알리고 있다. 기성용과 함께 중원을 책임지던 박주호를 예로 들어도 마찬가지다. 권창훈이 등장하면서 박주호의 자리가 위태로워질 수도 있고 박주호가 왼쪽 측면으로 갈 수도 있다. 그런데 이 자리에는 김진수와 홍철이 또 경쟁을 펼치고 있다. 말 그대로 무한경쟁이다. 아마도 과거 대표팀에서 부동의 주전 자리를 꿰차던 유럽파들도 이제는 훨씬 더 치열하게 주전 경쟁을 펼쳐야 할 것이다.

‘밀당의 고수’ 슈틸리케 감독

결국에는 이게 다 같이 사는 길이다. 국내에서 뛰는 선수들이 치고 올라오면 해외에서 뛰는 선수들도 안주할 수가 없다. 나는 다음 소집에서 기성용과 이청용, 구자철, 박주호 등이 더 집중력을 발휘해 과거보다 좋은 경기를 펼칠 것이라고 믿는다. 이게 바로 시너지 효과다. 여기에 K리그 무대에서 김승대나 이정협에 비해 전혀 뒤질 게 없는 황의조 같은 선수들도 경쟁자들이 신임을 받는 걸 보고 리그에서 더 집중력을 발휘할 수밖에 없다. 비록 안타깝게도 대표팀에서 잠시 멀어졌지만 강수일 역시 마찬가지다. 자국 리그가 살고 자국 리그에서 뛰는 대표팀 선수가 살면 당연히 그들과 경쟁하는 해외파 선수들도 더 살아날 수밖에 없다. 편의상 국내파와 해외파라는 표현을 썼지만 이런 경쟁 체제가 계속되면 국내파와 해외파라는 벽도 허물어질 것이다. 그때가 되면 잘하는파와 그렇지 못한파로 나뉘지 않을까. 그게 결국 대표팀이 궁극적으로 가야하는 길이고 슈틸리케 감독은 그걸 제대로 하고 있는 중이다. 나는 앞으로 잠시 성적이 주춤한다고 하더라도 그래서 슈틸리케 감독을 더욱 응원할 참이다.

김신욱이 앞으로 보여줄 모습도 기대가 된다. 중국전에서 후반 막판 교체돼 10여분을 뛴 김신욱으로서는 자존심이 상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더 다음이 기대된다. 앞으로 열릴 경기에서 김신욱은 기회가 생기면 이종호나 이정협 이상의 능력을 보여주기 위해 죽기 살기로 뛸 것이다. 사실 나는 짧은 시간 발을 맞출 수밖에 없는 대표팀 감독이라면 전술보다는 심리적인 부분을 훨씬 더 잘 다뤄야 한다고 생각한다. 2002년 한일월드컵 당시 천하의 홍명보나 황선홍, 안정환도 한때는 대표팀에서 제외됐을 만큼 히딩크 감독의 선수 다루는 능력은 대단했다. 그 어떤 감독이 오더라도 이들을 대표팀에 부르지 않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히딩크 감독은 파격적으로 이들을 대표팀에서 제외하는 등 선수들을 자극했다. 스리백이냐 포백이냐보다 더 중요한 게 나는 이런 감독의 심리전이라고 생각하는데 아마도 지금쯤 김신욱도 칼을 갈고 있을 테고 유럽의 손흥민이나 대표팀에 오지 못한 황의조, 주민규도 칼을 갈고 있을 것이다. 다들 독기를 품고 덤길 수밖에 없다.

아직 슈틸리케 감독이 동아시안컵에서 경쟁을 위해 쓸 수 있는 카드는 많이 남아있다. 앞서 말한 김신욱 외에도 주세종, 이찬동, 이주용, 정동호 등도 언제든 기회를 부여 받으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뛸 태세다. 경쟁하는 입장에서는 괴로울지 몰라도 지켜보는 팬들은 즐겁다. 사실 지금의 대표팀이 중국전 한 번으로 좋은 평가를 받고 있지만 새로 투입될 선수들이 남은 일본전과 북한전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다고 해도 별로 큰 상관은 없다. 이건 어디까지나 과정이고 이 과정을 통해 옥석을 가려내면 되기 때문이다. 실력 있는 선수들에게 공정하게 기회를 부여한다는 것만으로도 슈틸리케 감독은 충분히 잘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살아남은 선수들은 또 다시 새로운 선수들과 경쟁하고 그래도 살아남은 이들이 결국에는 월드컵이라는 큰 무대에 서게 되면 그게 바로 강팀으로 가는 길이니 말이다. 한두 선수에 의존하는 게 아니라 누가 나서건 좋은 경기력을 발휘하는 팀이 진정한 강팀인데 슈틸리케 감독은 지금 모두의 능력을 끌어올리는 중이다.

당연한 원칙이 만들어낸 놀라운 경기력

기존 국내 감독에 대한 성토만으로 칼럼을 마무리하고 싶지는 않다. 왜 지금까지 국내 감독들이 무한 경쟁보다는 특정 선수 위주로 조직력을 쌓는데 주력했는지부터가 이 문제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사실 기존 대표팀의 국내 감독보다는 오히려 협회에 더 큰 책임이 있었다고 보는 게 맞다. 월드컵을 준비하는 4년 동안 세 번이나 감독을 바꿨는데 이 와중에 무한 경쟁을 펼칠 시간은 없었다.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 동안 모험보다는 안정을 택해야 해 잘 아는 선수들을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번 슈틸리케 감독에게 그랬던 것처럼 한 감독에게 온전히 4년이라는 시간을 주고 이 4년 동안 무한 경쟁을 펼칠 수 있는 여유로움을 주는 게 맞다. 조광래 감독이건 최강희 감독이건 홍명보 감독이건 4년이라는 긴 시간이 주어졌더라면 그들 역시 이런 무한 경쟁에 한 번쯤은 돌입해 보지 않았을까.

KBS 2TV <청춘FC-헝그리 베스트일레븐>을 보면서 참으로 안타까움을 느낄 때가 많다. 부상이나 에이전트 문제 등으로 축구를 그만둬야 했던 이들도 있지만 누군가는 제대로 된 경쟁 한 번 해보지 못하고 좌절해야 했다. 멀쩡한 자국 리그가 있는데도 마지막 기회를 잡아보기 위해 동유럽이나 동남아시아에 가 죽어라 고생하고 눈물 흘리는 이들을 보며 이 사회가 조금만 더 공정하게, 오로지 능력 위주로 경쟁하면 어떨까 싶은 생각이 든다. 슈틸리케 감독을 응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상식적이고 당연한 원칙이 놀라운 경기력으로 나타나는걸 보며 단순히 열광만 하는 게 아니라 왜 지금껏 우리는 이렇게 하지 못했는가를 반성해 보는 게 어떨까. 대표팀의 문은 지금처럼 누구에게나 열려 있어야 하고 또 누구에게나 능력이 있다면 도전의 기회를 줘야 한다. 우리는 독일인 슈틸리케 감독에게 맛있는 맥주를 선물하지는 못하지만 슈틸리케 감독은 우리에게 당연한 원칙이 결국에는 성공비결이라는 메시지를 선물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