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세 개 달렸다는 평가를 들었던 울산의 슬라브코. ⓒ울산현대

10년을 한결 같이 잘하는 선수도 있다. 이런 이들을 우리는 ‘전설’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도 있다. 꾸준한 활약은 아니었지만 한 시즌 동안 모든 걸 쏟아 부어 지금도 회자되는 이들이 바로 그런 경우다. 이런 선수들도 다른 의미의 ‘전설’로 우리에게 남아있다. 비록 반짝하고 떨어졌지만 그래서 더 인상 깊었던 선수들을 꼽아봤다. 오랜 시간 빛나지는 못했지만 한 순간 가장 찬란하게 빛났던 바로 그 별들에 대한 이야기다. K리그에서 한 시즌 임팩트로는 최고의 선수였던 10명을 지금부터 소개하려 한다.

슬라브코 (2009년 울산, 29경기 3골 3도움)

슬라브코는 2008년 중국 저자 뤼청에서 6개월 임대로 뛰었지만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하고 팀을 떠나야 했다. 그런 그가 2009년 울산에 입단할 때만 하더라도 많은 이들이 주목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슬라브코는 울산 유니폼을 입고 치른 나고야와의 AFC 챔피언스리그 조별예선 첫 경기에서 모두를 놀라게 하는 플레이를 선보이며 혜성처럼 등장했다. 수비형 미드필더로 상대 공격을 끊는 역할은 물론 기가 막힌 패스로 동료들에게 공을 연결하는 능력은 가히 역대급이었다. 없는 공간을 비집고 들어가는 그의 패스에 상대 수비는 그저 넋 놓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비록 그가 울산에서 2009년 기록한 공격 포인트는 29경기 출장 3골 3도움에 머물렀지만 그는 공격 포인트로는 설명할 수 없는 대단한 ‘패스 마스터’였다. 그에게 팬들은 ‘눈이 세 개 달린 선수’라는 칭호를 붙여주기도 했고 마케도니아 대표팀에 발탁돼 유럽 무대에서도 밀리지 않는 활약을 이어갔다.

하지만 문제는 울산 공격진이었다. 아무리 좋은 패스를 찔러 넣어줘도 골을 넣을 선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염기훈과 루이지뉴 등 주축 선수들이 부상을 당했고 다른 동료들도 부진에 부진을 이어갔다. 한 울산 관계자는 슬라브코 혼자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보며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우리 팀에서 가장 불행한 선수가 바로 슬라브코다.” 슬라브코는 성남과의 경기에서는 상대 미드필더 두 명을 제친 뒤 기가 막힌 침투 패스를 연결했지만 공격수가 골키퍼와의 일대일 찬스를 놓치기도 하는 등 한 시즌 내내 울산 공격수들은 슬라브코의 창의적인 플레이에 전혀 보탬을 주지 못하며 플레이오프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결국 그는 한 시즌이 끝난 뒤 도무지 답이 보이지 않는 울산을 떠나 키프로스로 이적했고 현재는 아제르바이잔에서 뛰고 있다. 나는 그의 플레이를 볼 때마다 지나치게 패스에 집착하는 ‘패스성애자’라고 생각한 적도 있지만 그가 2009년 한 시즌 동안 보여준 패싱 플레이 만큼은 입이 쩍 벌어지는 수준이었다.

산드로 히로시 (2005년 대구, 36경기 17골 3도움)

노나또와 훼이종으로 2004년 재미를 톡톡히 본 대구는 2005년 일본계 브라질 선수 산드로 히로시를 영입했다. 찌아고와 함께 최전방에서 투톱을 형성한 산드로는 테크닉, 드리블, 슈팅 등 공격수가 갖춰야 할 모든 능력을 골고루 갖춘 만능형 공격수로 평가 받았다. 산드로는 2005년 리그컵에서 무려 7골을 뽑아내며 득점왕에 올랐다. 팀 성적은 13개 팀 중 7위에 불과했지만 산드로의 능력은 대단했다. 정규리그에서도 시즌 초반부터 득점포를 가동한 산드로는 특히 2005년 5월 수원과의 경기에서는 3골 1도움을 기록하며 팀의 4-3 승리를 이끌었다. 이 승리는 대구가 창단한 후 처음으로 수원을 상대로 거둔 승리였다. 산드로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다 한 경기였다. 2005년 당시는 박주영이 혜성처럼 등장했고 울산의 마차도도 무시무시한 골 결정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정규리그에서 박주영이 12골을 넣었고 그 뒤를 산드로와 마차도가 10골로 추격했다. 플레이오프와 챔피언결정전 득점도 포함하는 규정상 플레이오프와 챔피언결정적에서 세 골을 기록한 마차도가 득점왕에 올랐지만 상대적으로 전력이 약한 대구에서 정규리그 10골을 기록한 산드로의 활약은 놀라웠다.

하지만 2006년 대구를 떠나 전남으로 이적한 그는 무릎 인대를 다쳐 세 경기에 나선 게 전부였다. 무려 8개월 동안이나 재활에 매달려야 했다. 이듬해 다시 8골을 넣으며 부활하는 듯했지만 2008년 또 다시 부상을 당한 뒤 치료와 재활 방법을 놓고 전남과 갈등을 빚다가 계약 기간이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독단적으로 브라질로 건너가 계약을 해지 당했다. 부상 중에도 늘 전남과의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것으로 알려진 그가 돌연 브라질로 떠나자 많은 이들은 충격에 빠졌다. 그 후 산드로는 전남을 상대로 잔여 연봉 등을 지급하라며 국제축구연맹(FIFA)에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지만 이후 전남에서 공시를 철회해 다시 수원 유니폼을 입게 됐다. 하지만 수원에서 그는 8경기에 나서 단 한 골도 넣지 못하고 K리그 무대를 완전히 떠나게 됐다. 2005년 무려 17골을 몰아치며 득점왕 경쟁까지 펼쳤던 산드로의 초라한 퇴장이었다. 하지만 2005년 그의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양현정 (2000년 전북, 32경기 6골 7도움)

2000년 K리그는 이영표와 이관우. 김남일, 김대의라는 당대 최고의 선수들이 등장했던 시즌이었다. 하지만 신인왕은 이영표도, 이관우도, 그렇다고 김남일과 김대의도 아니었다. 바로 양현정의 몫이었다. 2000년 전북에 1순위로 입단한 양현정은 곧바로 주전 미드필더가 돼 그라운드를 누볐다. 주로 측면 미드필더로 나서는 그였지만 양현정은 가공할 득점력까지 갖춘 선수였다. 그는 데뷔 시즌 32경기에 나서 6득점 7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소속팀 전북을 사상 처음으로 정규리그 3위까지 끌어 올리면서 이영표와 이관우를 밀어내고 생애 한 번뿐인 신인왕의 주인공이 됐다. 특히 양현정은 세 경기 연속골을 기록하는 등 중요한 시기마다 득점포를 가동하며 시즌 내내 전북이 선두 싸움을 하는데 큰 힘을 보탰다. 그의 강력한 왼발은 K리그에서도 위협적인 존재로 떠올랐다. 첫 시즌을 대성공으로 마친 양현정의 미래는 무척이나 밝아보였다. 하지만 2001년 2년차 징크스를 겪으며 2골 2도움으로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성적에 머물렀던 그는 2002년에도 꾸준히 출장했지만 이렇다 할 임팩트를 보여주지 못했다. 그래도 전북에서는 워낙 능력이 뛰어나 다시 시동이 걸리면 무섭게 치고 올라올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양현정의 축구 인생은 더 이상 빛나지 못했다. 부상으로 2003년 한 경기 출장에 그쳤던 그는 완전하지 못한 몸을 이끌고 2004년 상무에 입대했지만 더 큰 시련을 겪어야 했다. 또 다시 큰 부상을 당해 의가사 제대를 하고 만 것이다. 온전한 몸으로 경쟁을 해도 쉽지 않은 상황에서 의가사 제대를 한 이가 다시 경쟁을 펼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결국 양현정은 2005년 대구에 입단했지만 제대로 된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고 1년 만에 방출됐고 이후 뛸 곳을 찾아 베트남리그로 떠났지만 결국 베트남에서도 꿈을 이루지 못한 채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2008년에는 내셔널리그 수원시청을 통해 복귀를 타진했지만 이마저도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신인왕 징크스와 2년차 징크스를 동시에 겪어야 했던 양현정은 여기에 치명적인 부상을 당해 더 이상 선수 생활을 이어갈 수 없었다. 그가 2000년 데뷔 시즌 이후 기록한 공격 포인트(5골 6도움)를 다 합쳐도 2000년 한 시즌 동안 기록한 공격 포인트(6골 7도움)에 미치지 못한다.

노나또 (2004년 대구, 32경기 19골 3도움)

나는 과거 칼럼을 통해 역대 K리그 외국인 선수 중 브라질리그 득점왕 출신이 대부분 지역 리그 출신이라는 점을 밝힌 적이 있다. 하지만 노나또는 K리그에 몇 안 되는 진짜 브라질리그 득점왕 출신이었다. 2003년 브라질컵 득점왕에 올랐던 그는 2004년 야심차게 영입을 추진한 대구 유니폼을 입게 됐다. 이적료 50만 달러에 연봉도 24만 달러에 이르는 그의 몸값은 시민구단인 대구가 지불하기에는 상당한 부담이었다. 하지만 노나또는 이런 기대에 제대로 부응했다. 2004년 한 시즌 동안 무려 19골을 뽑아내며 대활약을 이어간 것이다. 당시 정규리그에서는 모따에 이어 득점 2위를 기록했고 리그컵에서는 제칼로에 밀려 마찬가지로 득점 2위에 머물렀지만 리그컵과 정규리그를 모두 합칠 경우 노나또의 득점이 가장 많았다. 176cm로 공격수 치고는 상당히 작은 신장이었지만 상대 공간을 침투해 들어가는 탁월한 능력으로 2004년 가장 빛나는 외국인 선수가 됐다.

하지만 당시 대구 박종환 감독은 그런 노나또를 한 시즌이 끝난 뒤 서울로 임대이적을 시켰다. 공격수 기근 현상에 시달리던 서울은 노나또를 임대하기 위해 임대료만 4억 원을 지불할 만큼 그에게 큰 기대를 걸었다. 그리고 2005년 시즌 개막전에서 노나또는 전남을 상대로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기대에 부응하는 듯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이후 노나또는 16경기에서 네 골에 머물며 대구 시절의 강력한 경기력을 발휘하지 못한 채 다시 대구로 돌아갔고 결국 대구는 또 다시 이적료를 받고 그를 브라질로 이적시켰다. 서울로서는 제대로 재미도 보지 못한 임대 영입이었지만 대구는 쓸 만큼 다 쓰고 이적료까지 안겨준 복덩이였다. 서울 시절 그는 불성실한 훈련 자세로 이장수 감독과 마찰을 빚기도 했고 갑자기 불은 체중 때문에 대구 유니폼을 입었을 당시의 기량이 전혀 나오지 않았다. 2004년 노나또와 2005년 노나또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박양하 (1986년 대우, 20경기 1골 6도움)

1980년대 초 한국은 가장 공을 잘 차는 선수가 공격수를 하던 시대였다. 플레이 메이커라는 개념이 없던 이 시기 독특한 선수가 세상에 등장했다. 바로 박양하다. 창신공고 시절 박양하가 공을 잡으면 상대팀 11명이 모두 따라다녀야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그의 능력은 대단했다. 공을 발에 달고 드리블 돌파를 한 뒤 동료 공격수 발 앞에 떨궈주는 패스는 지금껏 본 적 없는 새로운 축구의 등장이었다. 공을 측면으로 연결하지 않고 조금만 끌어도 감독이 불호령을 내리던 시기에 박양하의 등장은 무척이나 충격적인 일이었다. ‘뻥축구’가 아니면 인정받지 못하던 시기였다. 박양하는 박종환식 축구가 꽃을 피우던 1980년대 국가대표의 산실 고려대 소속이면서도 플레이 스타일이 맞지 않아 늘 대표팀으로부터 외면 받았다. 하지만 그는 고려대 졸업 후 대우에 입단한 1986년 그의 능력을 믿었던 장운수 감독으로부터 “네 마음대로 한 번 뛰어보라”는 믿음 속에 엄청난 활약을 펼쳤다. 20경기 출장 1골 7도움이라는 기록 자체는 그리 대단하지 않은 것처럼 보여도 경기장에서 그가 보여주는 플레이는 신기에 가까웠다.

죽어라 뛰는 게 전부였던 시절 박양하는 몸싸움이 능하지도 않았고 골 결정력이 탁월한 선수도 아니었지만 드리블과 패스로 상대 수비를 한 번에 무너뜨리는 능력이 탁월했다. 이 시기 많은 이들은 박양하가 속한 대우의 축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대우의 축구는 뭔가 달라도 확실히 다르다.” 박양하에게는 ‘한국의 조지 베스트’라는 별명이 붙었다. 하지만 데뷔 시즌에서 맹활약을 펼친 그는 게으른 천재였다. 불성실한 훈련 태도와 음주, 숙소 이탈 등으로 엇나가기 시작했다. 첫 시즌이 끝난 뒤 마음을 다잡고 1987년 시즌을 준비했지만 인대를 다쳐 좌절해야 했던 그는 3개월 간 재활을 마친 뒤 복귀를 준비하다 또 다시 잠적해 버리고 말았다. 이후 박양하는 다시 팀에 복귀해 재기를 노렸지만 또 다시 일탈을 일삼다가 임의탈퇴 선수로 공시되기도 했고 1990년 현역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1986년 K리그에 등장해 모두를 충격에 빠트리며 대활약을 펼쳤던 그는 이후 1989년과 1990년 두 시즌 동안 10경기에 나선 게 전부였을 정도로 추락했다. ‘박제된 천재’ 박양하의 쓸쓸한 퇴장이었다.

마차도 (2005년 울산, 17경기 13골 1도움)

마차도는 2005년 시즌이 한창 진행 중인 6월 영입됐다. 그런데 입국한 뒤 하루 만에 치른 동아대와의 연습경기에서부터 마차도는 대단했다. 비록 대학생이지만 상대 수비수들 네 명을 한 번에 제치며 골을 넣는 모습은 김정남 감독의 입을 쩍 벌어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공식 데뷔전이었던 2005년 7월 대구와의 경기에서 마차도는 후반 36분 데뷔골을 뽑아내며 K리그 팬들에게 이름을 알렸다. 이때부터 남은 넉 달 동안은 마차도를 위한 시간이었다. 시즌 중반에 영입돼 17경기에 나선 게 전부였지만 무려 13골을 뽑아내며 득점왕에 올랐기 때문이다. 특히 마차도는 챔피언결정전 1차전에서 두 골을 기록하며 인천의 꿈을 완전히 꺾으면서 울산의 우승을 이끌었다. 무려 9년 만의 우승이었다. 울산은 6개월 단발로 영입한 마차도와 곧바로 제계약을 맺고 장밋빛 미래를 꿈꿨다. 하지만 마차도의 맹활약은 이게 다였다. 이때부터 마차도는 끝없는 부진을 겪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면서 마음 고생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기를 살려주기 위해 페널티킥을 맡겼지만 두 차례나 실축을 하며 자신감은 더욱 떨어졌고 결국 9월이 돼서야 리그 첫 골을 신고할 만큼 부진은 깊었다. 무려 22경기 만에 넣은 골이었다. 하지만 울산은 이미 2005년 입증된 마차도를 한 번 더 믿기로 했다. 2007년에도 그와 함께 하기로 한 것이었다. 그런데 마차도의 2007년 역시 비참했다. 시즌 개막 후 5개월 동안 침묵하더니 2007년 8월 성남전에서 시즌 첫 골을 기록하고 너무 기쁜 나머지 유니폼을 벗어 제쳤다. 그런데 그는 자신에게 경고가 한 장 있다는 걸 깜빡하고 말았다. 그렇게 2005년 절반의 시즌만 뛰고도 득점왕에 올랐던 마차도는 2007년 5개월 만의 첫 골이 기뻐하며 웃통을 벗었다가 퇴장까지 당하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가 2007년 기록한 골은 딱 두 골이었고 그렇게 울산과의 인연도 끝을 맺게 됐다.

까보레가 경남에서 한 시즌 동안 보여준 임팩트는 어마어마했다. ⓒ경남FC

까보레 (2007년 경남, 31경기 18골 8도움)

2007년을 앞둔 경남 박항서 감독의 머리 속은 복잡했다. 브라질 선수를 찾기 위해 현지로 날아갔지만 마음에 드는 선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연히 튼 텔레비전에서 한 선수를 보고 반하고 말았다. 뛰어난 신체 조건에서 나오는 유연한 플레이가 눈에 확 들어온 것이다. 곧장 박항서 감독은 이 선수에 대해 알아본 뒤 직접 그를 만나 임대 계약을 체결했다. 바로 까보레다. 까보레는 개막전부터 펄펄 날았다. 울산과의 첫 경기에서 데뷔골을 터트린 그는 경남 돌풍의 주역이었다. 뽀뽀와 함께 팀을 이끌며 도민구단 경남을 4위까지 끌어 올리면서 플레이오프행을 확정지었다. 챔피언십 포항과의 경기에서도 경기 종료 직전 극적인 결승골을 뽑아냈지만 결국 승부차기에서 아쉬운 실축을 한 뒤 뜨거운 눈물을 쏟기도 했다. 그가 2007년 기록한 공격 포인트는 무시무시했다. 31경기 출장 18골 8도움이었다. 2007년 K리그는 까보레를 위한 시즌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2008년 시즌을 앞두고 경남은 까보레의 원소속팀이 이뚜아누와 완전 이적 협상을 체결하며 새 시즌에 대해 기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까보레는 FC도쿄로 가겠다는 마음이 강했다. 경남은 FIFA에 제소할 것을 불사하고서라도 까보레의 J리그행을 막겠다는 의지를 보였지만 결국에는 선수의 앞길을 위해 그를 떠나보내야 했다. 한 시즌 경남과 뜨겁게 사랑했다 떠난 까보레는 워낙 소유권이 복잡하게 얽혀 있어 경남도 이적료 수입을 많이 챙기지는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참고로 당시 까보레는 2007년 4월 8라운드 서울전부터 14라운드 포항전까지 7경기 연속 공격 포인트를 기록했고 15라운드 인천전에서 잠시 침묵한 뒤 또 다시 9경기 연속 공격 포인트를 올렸다. 만약 15라운드 인천전에서 공격 포인트를 하나만 올렸더라면 K리그 역사에 다시는 없을 17경기 연속 공격 포인트라는 엄청난 기록을 세울 뻔했다. 비록 까보레와의 작별은 영 시원치 않은 구석이 있었지만 그가 2007년 보여준 대단한 경기력은 아마도 K리그 역사에 오랜 시간 기억되지 않을까. 추하게 이별했어도 시간이 흐르면 그녀와의 좋은 추억들만 떠오르는 것처럼 말이다.

도도 (2003년 울산, 44경기 27골 3도움)

도도는 K리그에서 뛰었던 역대 외국인 선수 중 해외에서 가장 인지도가 높은 선수였다. 1998년 이적료 1300만 달러에 유럽행을 타진했지만 협상 결렬로 포기했던 그는 2003년 한국과 일본을 놓고 고민하다가 한국행을 택했다. 브라질 경기가 좋지 않았고 한국이 2002년 월드컵 개최 후 축구 열기가 뜨거운 상태여서 가능한 일이었다. K리그에 진출한 역대 브라질 공격수 가운데 유일한 대표급 선수로 1998프랑스월드컵 남미예선 때 상비군으로 선발된 적이 있고 상파울루와 산토스, 보타포고 등 브라질 내에서도 명문 팀에서만 뛰던 선수였다. 울산 유니폼을 입기 바로 전인 2002년에는 보타포고에서 15경기에 나서 17골을 기록하며 호마리우를 제치고 브라질 상파울루리그 득점왕에 차지하기도 했고 브라질 축구팬들이 선정한 역대 브라질 공격수 투표에서 펠레, 호나우두, 히바우두, 베베토 등에 이어 8위에 오를 만큼 대단한 인기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런 도도가 한국행을 택했다는 건 당시로서는 무척이나 충격적인 일이었다.

도도는 시즌 초반부터 펄펄 날았다. 여기에 유상철과 이천수 등까지 포진한 울산은 성남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팀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또한 광주와의 경기에서는 4분 동안 내리 세 골을 몰아치는 등 혼자 네 골을 기록하며 무시무시한 득점력을 뽐내기도 했다. 그가 2003년 한 시즌 동안 기록한 골은 무려 27골이었다. 통합리그로 치러져 많은 경기를 펼쳤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엄청난 득점력이었다. 비록 우승은 성남에 내줬지만 울산은 도도의 활약을 앞세워 리그 준우승을 차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도도는 이듬해 전반기에서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활약에 머물다 결국 J리그로 이적하게 됐다. 2002년 월드컵 열기와 브라질의 경기 침체, 유럽 구단과의 이적 협상 결렬 등이 절묘하게 겹쳐 한국 땅을 밟았던 도도의 2003년은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아마 이런 선수가 다시 K리그 그라운드를 밟는 건 또 다시 이런 절묘한 경우의 수가 완성되기 전까지는 힘들지도 모른다.

마그노 (2003년 전북, 44경기 27골 8도움)

마그노는 2003년 영입 당시부터 논란을 일으켰다. 전북과 전남이 마그노를 놓고 마찰을 빚었기 때문이다. 2002년 12월 30일 전남이 마그노 영입을 발표했지만 2003년 2월 1일 마그노가 전북과 공식 입단 계약을 체결했다는 보도가 흘러 나온 것이다. 전남이 마그노와 직접 계약하지 않고 에이전트를 통해 구두로 합의한 상황에서 전북이 마그노와 직접적인 계약을 체결하면서 이 문제는 양 구단의 자존심 싸움으로 번지기도 했다. 결국 마그노는 이 험난한 과정을 통해 전북 유니폼을 입게 됐다. 그런데 전북으로서는 전남과의 마찰을 감수할 만큼 그를 꼭 영입했어야 했는지 의아한 시선으로 마그노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마그노가 개인 훈련은 물론 단체 훈련도 제대로 하지 않고 혼자 시간을 보내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다. 전남과 마찰을 빚으면서까지 데려온 선수인데 너무나도 태평한 그의 모습을 보고 조윤환 감독도 걱정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시즌이 개막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엄청난 활약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3월 부산과의 경기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한 마그노는 연속골 퍼레이드를 이어가며 김도훈, 도도와의 득점왕 경쟁을 이어갔다. 무엇보다 가장 관심을 끌었던 건 윤상철의 기존 K리그 한 시즌 최다골 기록이었던 21골 고지를 누가 먼저 넘어 22호골을 뽑아내느냐는 것이었다. 그런데 마그노가 먼저 해냈다. 2003년 10월 성남과의 경기에 나선 마그노는 남궁도의 패스를 이어 받아 22호골을 뽑아내며 기록을 9년 만에 갈아치웠다. 비록 리그 막판 김도훈에 밀려 득점왕 등극에는 실패했지만 마그노는 2003년 44경기에 나서 무려 27골 8도움이라는 믿기지 않는 성적을 거뒀다. 그는 늘 경기가 끝난 뒤 라커룸으로 들어와 득점왕 경쟁 라이벌이자 같은 브라질 국적의 도도를 의식해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오늘 도도는 몇 골 넣었어?” 마그노는 이렇게 한 시즌 동안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강력한 기록을 남기고 이듬해 일본으로 떠났다.

까보레가 경남에서 한 시즌 동안 보여준 임팩트는 어마어마했다. ⓒ경남FC

백승철 (1998년 포항, 35경기 12골 3도움)

1998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4순위로 포항에 입단하게 된 백승철은 의외로 기회를 일찍 잡았다. 이동국이 청소년 대표팀에 차출돼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 것이다. 1998년 아디다스컵과 필립모리스컵에서 2골 2도움을 기록하며 가능성을 인정 받은 백승철은 1998년 7월 개막한 정규리그에서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1998년 프랑스월드컵이 끝난 뒤 불어 닥친 축구 열풍 속에서 이동국과 고종수, 안정환 등 어린 선수들이 주목을 끌었지만 활약도 만큼은 백승철이 이들을 능가했다. 35경기에 나선 그는 무려 12골 3어시스트를 기록하며 포항의 스타로 떠올랐다. 특히 상대의 허를 찌르는 강력한 벼락 슈팅은 그의 전매특허였다. 당시 포항 박성화 감독은 백승철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내가 지금까지 본 선수 중에 발목 힘이 가장 좋다.” 무엇보다 그를 논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건 1998년 플레이오프 1차전 울산과의 경기다. 박태하와 고정운이 경고누적으로 빠졌고 이동국도 청소년 대표팀 차출로 경기에 나서지 못한 상황에서 포항은 1-1로 팽팽하던 후반 44분 최문식이 극적인 역전골을 터트리며 승부에 마침표를 찍는 듯했다. 하지만 후반 48분 울산 김종건이 다시 헤딩골로 따라 붙었다. 다 잡았던 경기를 2-2 무승부로 마치기 직전의 허탈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때 백승철이 해결사로 등장했다. 후반 50분 서효원이 밀어준 프리킥을 백승철이 강력한 중거리슛으로 연결했고 이 공은 그대로 울산 골문으로 빨려 들어갔다. 지금도 백승철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언급되어야 하는 K리그 역사상 최고의 명장면이었다. 백승철은 시즌이 끝난 뒤 K리그 베스트11에 이름을 올리며 전국적인 스타로 급부상했다. 하지만 이후 그는 다시 포효하지 못했다. 새 시즌을 앞두고 발목을 다친 그는 1999년 코리아컵에 참가하는 대표팀에 발탁됐지만 결국 부상이 악화되고 말았다. 그런데 재앙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반월판이 완전히 찢어지고 무릎인대도 정상이 아니라 자칫하면 휠체어에 의존해야 한다는 선고를 받은 것이다. 진통제 없이는 잠을 잘 수 없는 상황에서 무릎 붓기가 빠지질 않아 쇠바늘을 일주일 동안 무릎에 꽂아 넣고 생활했고 경기에까지 나섰으니 몸 상태는 심각했다. 이후 다시 한 번 수술을 시도했지만 외부 병균 감염으로 무릎 전체에 문제가 생기고 말았고 병원 측에서 실수를 인정했지만 이미 되돌릴 수 없었다. 결국 그는 2년 동안 긴 재활을 이어갔고 일본까지 건너가 치료를 받았지만 다시 그라운드에 설 수 없었다. 1998년 가장 짜릿한 순간을 선사했던 백승철은 이렇게 1년 만에 K리그 무대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오랜 시간 좋은 활약을 펼치는 선수들에 대한 이야기만큼이나 한 시즌 반짝했던 선수들을 정리해 보는 것도 K리그 역사를 위해서는 필요한 일이다. 의도치 않은 부상으로 활약을 더 이어가지 못했던 선수도 있고 징크스에 빠지거나 스스로 나태한 생활을 해 더 오랜 시간 사랑받지 못했던 선수도 있다. 이유는 각기 다르지만 이렇게 가장 짧은 시간 가장 화려하게 빛났던 별들이 있었기에 K리그가 더 풍성해 진 건 아닐까. 앞으로는 많은 선수들이 짧게 빛나는 게 아니라 오랜 시간 K리그를 비춰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