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2015 호주 아시안컵에 나서 55년 만의 우승에 도전한다. 한국은 내일 오만을 상대로 첫 경기를 치를 예정이다. 며칠 전 칼럼을 통해 이번 우승이 쉽지 않다는 이야기를 했지만 그래도 나는 한국이 악조건을 무릅쓰고 55년 만에 한을 풀었으면 한다. 하지만 우승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우승이라는 건 실력은 물론 여기에 운까지 따라야 가능한 법이다. 오늘은 한국이 아시안컵 우승을 위해 필요한 조건들에 대해 한 번 꼽아보자.

1. 첫 경기 승리

강팀 코스프레(?)일까. 브라질이나 독일 등 세계적인 강호들이 월드컵 초반에 다소 흔들리다 이후 조직력을 찾아가는 것처럼 한국도 아시안컵에만 나서면 유독 첫 경기에서 실망스러운 모습을 자주 보였다. 역대 12차례 대회에 나선 한국은 첫 경기에서 3승 8무 1패라는 창피한 성적에 머물렀다. 그나마 거둔 3승 중 2승도 1960년 베트남을 5-1로 제압한 것과 1988년 아랍에미리트를 1-0으로 꺾은 것이다. 1996년 아랍에미리트전(1-1)과 2000년 중국전(2-2), 2004년 요르단전(0-0), 2007년 사우디아라비아전(1-1) 등에서는 연속적으로 무승부를 기록했고 지난 2011년 아시안컵에서 바레인에 2-1로 이기며 지긋지긋한 무승 터널에서 겨우 벗어났다. 세 경기가 전부인 조별예선에서 첫 경기의 중요성은 말할 필요도 없다. 첫 경기를 어떻게 치르느냐에 따라 남은 경기에 임하는 자세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일단 내일(10일) 오만을 가볍게 제압해야 기나긴 대회 기간 동안 수월하게 전략을 짤 수 있다.

2. 체력 안배 필요한 3차전

나는 가장 부러운 게 월드컵 조별예선에서 일찌감치 2승을 따내고 16강 진출을 확정짓는 팀들이다. 마지막 3차전을 남의 집 불 구경하듯 지켜보는 이들의 심정이 어떤지 나도 한 번 느껴보고 싶다. 우리는 지금껏 월드컵은커녕 아시안컵에서도 늘 조별예선 3차전까지 지켜봐야 하는 위태로운 순간을 자주 겪었다. 2007년 대회에서는 1무 1패에 그친 상황에서 3차전 인도네시아전에 가까스로 1-0 승리를 거둔 뒤 사우디가 바레인을 잡아줘 겨우 8강에 턱걸이할 수 있었고 2004년 대회에서도 1승 1무에서 마지막 경기를 치러 자칫 쿠웨이트에 패했으면 조별예선에서 탈락할 위기까지 맞기도 했었다. 일찌감치 2차전에서 2연승을 거둬 8강을 확정짓고 3차전에서는 백업 선수들을 기용하며 체력 안배도 하고 다른 전술도 실험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전혀 없었다. 이렇게 8강에도 겨우 겨우 올라가니 다음 계획을 세우는 건 늘 불가능했다.

물론 한국이 여유 있게 조1위를 확정지으려면 약간의 행운이 필요하긴 하다. 우리와 조1위를 다툴 것으로 보이는 호주가 쿠웨이트나 오만 중 한 팀에 승리를 따내지 못하고 우리와 3차전에서 맞붙는 것이다. 이미 2승을 거두고 호주를 상대로 무승부만 거둬도 조1위를 확정짓는 유리한 상황에서 체력을 안배하며 경기를 치를 수 있어야 이후 8강전이 수월하다. 조1위로 8강에 가는 것과 조2위로 8강에 진출하는 건 천지차이인데 1,2차전까지 호주에 승점이나 골득실이 밀려 무조건 호주를 잡아야 조1위를 확정짓는 불리한 상황에 놓인다면 이 경기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이긴다고 해도 이후 8강이 무척이나 불안해진다. 한국은 1,2차전에서 최대한 많은 골을 넣고 여기에 호주가 한 차례 삐끗해 우리가 유리한 상황에서 3차전을 치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나는 3차전을 치킨을 먹으며 누워서 한가롭게 지켜보고 싶다. 여기에서도 경우의 수 따지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3. 이란과 일본이 8강에서 붙길

우리가 호주와 이란, 그리고 일본을 연파하며 55년 만에 아시안컵 우승을 차지한다면 참 짜릿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런 멋진 장면보다 행운의 대진을 기대한다. 이렇게 강호들을 상대한다는 건 축구팬의 한 사람으로서 참 즐거운 일이지만 상당히 부담스러운 일정이다. 특히나 C조의 이란과 D조의 일본이 알아서 서로 치고 받고 싸우다가 한 팀이 장렬히 탈락하면 참 좋겠다. 가능성이 그리 높은 건 아니지만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특히 가장 아름다운 시나리오는 우리가 A조 1위를 차지하고 일본이 D조 1위, 이란이 C조 2위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우즈벡이 조1위가 유력한 B조에서 2위로 꼽히는 사우디나 북한과 8강전을 치르는 동안 일본과 이란은 8강에서 맞붙게 된다. 물론 이렇게 되면 4강에 가도 이란을 C조 2위로 밀어낸 팀(카타르가 유력할 것으로 보인다)과 D조 2위(이라크나 요르단)의 승자와 4강전을 치른다. 그 사이 반대쪽에서는 우즈벡-호주전 승자가 일본-이란전 승자와 4강에서 격돌한다. 그러면 호주와 일본, 이란 등 우승후보들끼리 알아서 치고 받고 싸워 한 팀만 살아남는다.

한국이 결승에서 이들 중 한 팀과 격돌해 이기면 된다. 어렵게 갈 필요가 없다. 이러면 우승이다. 반대로 우리가 조2위로 8강에 오를 경우 이란이 C조 1위, 일본이 D조 2위를 하면 똑같이 결승까지 이들을 만날 수 없다. 2004년 대회 당시 우승팀 일본은 8강에서 요르단을 승부차기 끝에 이긴 뒤 4강에서 바레인을 4-3으로 이겼고 결승에서는 중국을 제압했다. 대진운이 참 좋았다. 반대로 한국은 지난 2011년 대회에서 8강에는 이란을 만나 연장 승부를 펼친 뒤 4강에서는 일본과 격돌해 120분 연장 승부에 이어 승부차기까지 간 끝에 패했다. 일본을 이겼어도 결승에서는 호주가 기다리고 있었다. 8강에서 이란과 일본이 같이 묶이고 우리는 이 반대쪽 사다리를 타면 아주 깔끔하다. 이 상황에서 이란과 일본, 호주가 연이어 120분 연장전에 승부차기까지 해주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아시안컵 우승은 우리 능력만으로 되는 게 아니라 이런 대진운까지 따라줘야 한다.

4. 수비

유명한 말이 있다. 공격을 잘하면 승리할 수 있지만 수비를 잘하면 우승할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 지난 2014 인천아시안게임 남자축구에서 이광종호는 이같은 말을 우승으로 입증했다. 한국은 이 대회에서 7경기를 치러 13골을 기록했다. 수치상으로는 나쁘지 않은 공격력이었지만 사실 라오스와 말레이시아, 홍콩 등 약체를 상대로 한 경기도 많았다는 점에서 공격력은 다소 답답한 편이었다. 하지만 주목할 만한 건 수비였다. 한국은 이 7경기에서 단 한 골도 내주지 않았다. 경기에서 한 골만 넣어도 90분 내에 승리를 확정지을 수 있었단 이야기다. 아무리 공격을 못해도 일단 승부차기까지 경기를 끌고 가 50대 50의 확률 싸움으로 이어갈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국은 이 아시안게임에서 수비가 우승을 위해 얼마나 중요한지 제대로 보여줬다. 2011년 아시안컵 우승팀 일본도 6경기에서 6골만을 내줬고 2007년 대회 우승팀 이라크는 6경기에서 단 두 골만을 허용했다. 그것도 조별예선에서 2실점 후 8강부터는 단 한 골도 내주지 않았다.

그만큼 수비는 우승을 위한 필수조건이다. 특히나 나는 이번 대표팀의 공격력은 그리 강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동국과 김신욱, 박주영 등 무게감 있는 공격수들이 저마다 이유가 있어 발탁되지 못했고 정통 포워드가 부족한 상황에서 강력한 공격력을 뽐내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본다. 그러면 결국 경기는 한 골 싸움으로 갈 수밖에 없다. 난타전을 펼쳐 4-3이나 3-2 승리로 가는 게 아니라 1-0 승부가 우리의 현실적인 방법이다. 수비진의 조직력도 중요하지만 골키퍼의 눈부신 선방도 필요하다. 경기마다 ‘이건 완벽한 실점이다’라고 느끼는 순간에서 슈퍼세이브가 한두 번 정도는 나와줘야 한다. 우리의 공격력이 8강 이후 토너먼트 승부에서 3골씩 뽑아낼 만큼 화끈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8강에서 결승까지 가면 세 경기를 치르는데 여기에서 실점을 한 골, 정말 많이 먹어도 두 골로 줄여야 한다. 그러면 공격진이 아무리 답답해도 충분히 승산이 있다.

5. 버저비터와 승부차기

앞서 대진운을 이야기하며 8강 이후 행운을 기대한다고 했지만 사실 현재 아시아 축구는 많이 평준화 됐다. 우즈벡이나 카타르, 요르단, 이라크, 바레인, 쿠웨이트 등 그 어떤 팀이라도 우승권에 근접할 수 있다. 대진운이 따라 일본이나 호주, 이란을 8강 이후 피한다고 하더라도 결국에는 쉽지 않은 승부가 기다리고 있다. 한국이 우즈벡을 압도하며 승리할 것이라는 자신이 있나. 나는 상당히 힘든 경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막판 집중력, 흔히 말하는 버저비터가 한 번 이상은 터져줘야 한다. 2014 인천아시안게임 때도 한국은 8강 일본전과 결승 북한전에서 종료 직전 극적인 골로 승리를 따냈다. 결국 우승하는 팀은 한두 방의 버저비터가 반드시 필요하다. 경기를 압도하며 여유 있게 승리하면 좋겠지만 전력이 평준화 된 아시아 무대에서 이는 현실성이 별로 없다. 8강 이후 한 번 이상은 버저비터가 터져줘야 우리는 다음 라운드로 갈 수 있다. 같은 의미에서 한 번 이상은 승부차기까지 가 벼랑 끝까지 몰렸다가 살아나야 할 것이다. 8강 이후 버저비터와 승부차기는 우리에게 피할 수 없는 일이다.

6. 오심의 행운

월드컵이라는 큰 무대에서도 오심은 빈번하다. 아시안컵 역시 마찬가지다. 오심까지는 아니지만 논란의 판정도 많다. 한국은 2011년 아시안컵 때도 첫 경기 바레인전에서 곽태휘가 석연찮은 퇴장을 당해 부담을 안고 이후 경기를 준비해야 했고 준결승 일본전에서 상대의 페널티킥 역시 페널티킥보다는 프리킥을 줬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단지 우리만 심판 판정의 피해자가 되는 건 아니다. 일본도 2011년 대회에서 시리아를 상대로 논란의 페널티킥을 허용하기도 했다. 결국 우승을 위해서는 단순히 실력만 있어서 되는 게 아니라 이렇게 심판 덕도 어느 정도는 필요한 법이다. 일부러 심판의 오심을 바라는 건 아니지만 본의 아닌 오심으로 한국이 조금이라도 유리한 상황을 맞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왕 오심이 나온다면 한국이 오심의 피해자가 아니라 수혜자가 되길 바란다. 우승에는 이런 행운도 어느 정도는 필요하다.

7. 룸살롱에 가지 않는다

선배들은 아시안컵 도중 음주파문을 일으켜 많은 이들을 실망시켰다. 2007년 대회 대중 술을 마시며 안이한 자세를 보인 한국은 조별예선도 가까스로 통과하더니 8강에서부터 3,4위전까지 무려 세 경기에서 360분 동안 단 한 골도 넣지 못하는 최악의 경기력에 머물고 말았다. 다시는 이런 음주 파문은 없어야 한다. 술은 우승을 확정지은 뒤 우승컵에 따라 마시자. 우승을 거두고 우승 트로피에 양주를 따라 마시건 맥주를 따라 마시건 ‘쏘맥’을 부어 마시건 그러면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다. 대회 기간 내내 컨디션 관리를 잘 해주길 바란다.

우승을 위한 필수조건들을 알아 봤다. 반대로 생각하면 쉽다. 첫 경기에서부터 그르쳐 조별예선 마지막 경기까지 경우의 수를 따져야해 전력을 120% 가동한 채 체력이 방전된 불리한 입장으로 토너먼트에서 이란과 일본, 호주 등을 만나 수비가 무너져 난타전을 펼치다가 오심에 의한 버저비터를 허용하거나 승부차기에서 패하는 게 우리가 가장 원치 않는 시나리오다. 나는 며칠 전 한국의 이번 아시안컵 우승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칼럼을 썼지만 그래도 이런 예상을 뒤집고 보란 듯이 한국이 우승을 차지했으면 좋겠다. 첫 경기부터 수월하게 치러 3차전에서 체력 안배를 하고 대진과 심판 판정까지 운이 작용해 짜릿한 버저비터와 승부차기 승리를 거두며 55년 만에 우승 트로피에 입을 맞추는 모습이 꼭 현실로 이뤄졌으면 한다.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다. 슈틸리케호여, 행운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