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10년 전 가장 주된 스트레스와 고민은 무엇이었나. 나는 10년 전 딱 이맘때 군대에서 분대장이 됐다. 흔히 말하는 풀린 군번이어서 상병이었지만 분대를 통솔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그때 내 고민은 오로지 어떻게 하면 연대 전투력 측정에서 우리 분대가 좋은 평가를 받느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우리 분대는 이 측정에서 최악의 실수를 범했고 결국 모든 책임을 져야 하는 분대장인 나는 몇 달 간 휴가 및 외박 금지를 당하고 말았다. 당시에는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휴가 나갈 생각에 달력만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이걸 금지당하니 당장이라도 세상이 끝날 것만 같았다. 그때는 마치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고민이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참 웃긴 일이다. 군대에서 10년 전 휴가를 통제 당했다고 해도 10년 후 지금 내 생활에 달라진 건 전혀 없다. 이 칼럼을 읽기 전에 독자 여러분들도 10년 전 어떤 고민과 스트레스, 걱정에 시달렸는지 한 번 떠올려 보시라. 지금 생각하면 ‘내가 그런 걸로 고민하고 있었어?’라며 미소부터 지어지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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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지는 2001년 골문을 벗어나 황당한 드리블을 하다가 결국 히딩크 감독 눈밖에 나고 말았다.

13년 전 실수 유쾌하게 재연한 김병지

지난 주말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벌어진 ‘팀 K리그’와 ‘팀 박지성’의 K리그 올스타전은 여러 모로 의미가 있었다. 주객이 전도돼 다소 아쉬운 것도 사실이지만 박지성의 은퇴경기라는 점과 이 경기를 보기 위해 5만 명이 넘는 관중이 폭우 속에서도 자리를 지켰다는 점은 큰 의미다. 선수들의 세리머니 또한 개성이 넘쳤고 거스 히딩크 감독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점 또한 인상적이었다. 하나 하나가 다 의미 있던 경기였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웃고 떠드는 올스타전에서도 우리가 인생에 교훈을 느낄 만한 중요한 메시지가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의 아픔도 언젠가는 우리가 웃으며 말할 순간이 온다는 것이다. 그저 다들 웃고 떠드는 올스타전이라는 ‘예능’을 혼자서 진지하게 너무 ‘다큐’로 받아들이는 것 같기도 하지만 나는 이날 축구라는 종목을 통해 우리의 인생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됐다. 10년 전 군대에서 휴가 통제로 잠도 못자고 고민하던 그때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날 올스타전에서 김병지는 13년 전 아픔을 유쾌하게 풀어냈다. 김병지는 경기 도중 골문을 비우고 드리블을 하며 팬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했다. 2001년 홍콩 칼스버그컵 파라과이전에서의 실수를 다시 한 번 재연한 것이다. 13년 전만 하더라도 이건 엄청난 사건이었다. 이전까지 김병지에게 신뢰를 보냈던 히딩크 감독은 황당한 행동을 한 김병지에게 잔뜩 화가 나 이후 그를 교체해 버렸고 이는 향후 이운재와 김병지의 주전경쟁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김병지는 시간이 한참 지난 후 나와의 인터뷰에서도 히딩크 감독에 대한 아쉬움을 솔직하게 털어놓은 적도 있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아마 김병지가 13년 전 황당한 드리블만 하지 않았더라면 2002년 월드컵 당시 대표팀의 주전 수문장은 이운재가 아니라 김병지가 됐을 수도 있다. 김병지에게 있어 13년 전 단 한 번의 행동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실수가 됐다. 아마도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김병지는 파라과이와의 경기에서 공을 몰고 페널티 박스를 벗어나기 전으로 돌리고 싶지 않을까.

13년 전 당시 김병지의 어이없는 플레이를 보고 그를 교체해 버린 히딩크 감독은 공교롭게도 지난 주말 올스타전에서도 터치라인 앞 벤치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13년 전과 마찬가지로 김병지는 히딩크 감독이 보는 바로 앞에서 드리블을 하다가 공을 빼앗기고 말았다. 하지만 반응은 13년 전과 달랐다. 김병지도 웃었고 히딩크 감독도 즐거워했다. 히딩크 감독은 경기가 끝난 뒤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김병지를 교체하지 않기 위해 내 자신을 컨트롤해야 했다. 13년 전 칼스버그컵에서 김병지가 어이없는 드리블을 해 ‘오 마이 갓~ 쟤 뭐하는 거야?’라면서 교체를 했는데 김병지는 아직까지도 현역으로 뛰고 있다. 그를 다시 그라운드에서 볼 수 있게 돼 즐거웠다.” 13년 전 단 한 번의 실수로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던 김병지는 시간이 흐른 뒤 이제는 이 사건을 유쾌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성숙해졌다. 개인적으로 그 사건 이후 자신에게 신뢰를 보내지 않은 히딩크 감독에게 섭섭할 수도 있지만 이제는 다 지난 일일 뿐이다. 13년 동안 세월도 흘렀고 세상도 변했으며 이 둘도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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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3 : 하석주는 1998년 프랑스월드컵 멕시코전에서 득점에 성공한 뒤 퇴장 당하며 순식간에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졌다. (사진=국제축구연맹)>

하석주와 이동국, 성숙해진 그들의 모습

이날 전반전 주심으로 나선 하석주 감독의 판정도 즐거운 이벤트였다. 하석주 감독은 전반 문전 혼전 상황에서 엉뚱하게도 박지성의 파울을 지적하며 ‘팀 K리그’의 페널티킥을 선언했다. 그러면서 카드를 꺼내려하자 ‘팀 박지성’ 선수들은 거세게 항의했고 하석주 감독은 옐로우 카드를 꺼낸다는 게 실수로 레드 카드를 꺼내들고 말았다. 이 순간 하석주 감독은 물론 양 팀 선수들과 관중 모두 폭소를 터트렸다. 16년 전 프랑스월드컵 멕시코전에서 귀중한 첫 골을 넣은 뒤 불과 몇 분 지나지 않아 레드 카드를 받고 퇴장 당해 ‘영웅’에서 ‘역적’으로 전락하고 만 하석주 감독은 늘 ‘레드 카드 공포증’을 가지고 있다. 경기 종료 후에도 “레드 카드는 나와 악연이 있는데 실수로 잘못 꺼내 깜짝 놀라고 말았다”고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이런 16년 전의 큰 실수도 웃으며 말할 수 있다. 시간이 흘렀고 이제는 16년 전 그의 실수도 가끔 올드팬들의 술자리 안주거리 정도로 무겁지 않아졌기 때문이다. 16년 전 모든 지탄을 한 몸에 받던 이 ‘역적(?)’도 더욱 단단해지고 성숙해져 이를 유쾌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

이동국 또한 과거였다면 이 자리가 무척이나 불편했을 것이다. 2002년 한일월드컵을 앞두고 꾸준히 대표팀의 부름을 받았던 그는 최종 엔트리 선발 과정에서 히딩크 감독의 선택을 받는데 실패했다. 이후 그는 무척이나 방황했다. 남들은 다 빨간 티셔츠를 입고 거리로 나와 이 역사적인 순간을 즐겼지만 이동국만큼은 그럴 수가 없었다. 모든 국민들에게 아직도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아 있던 2002년 6월 한 달 동안 이동국은 차마 맨 정신으로 지낼 수가 없어 늘 술에 취해 있었다. 그리고 그는 12년이 지난 뒤 당시에 자신을 외면한 히딩크 감독과 다시 올스타전에서 만났다. 하지만 이동국은 12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과거의 상처는 잊은 채 더욱 멋진 선수로 성장해 있었고 히딩크 감독과 반갑게 악수를 했다. 히딩크 감독도 그런 이동국의 어깨를 두드렸다. 올스타전이 시작되자 이동국은 멋진 발리 슈팅으로 골을 뽑아내며 12년 전 아픔을 완전히 털어냈다. 이동국은 이날 경기에서 펄펄 날았고 ‘팀 K리그’의 주축 공격수로 후반전을 이끌었다. 그에게서 12년 전 상처는 찾아볼 수 없었다.

16년 전 레드 카드의 아픔을 겪었던 하석주가 16년 후 심판으로 레드 카드를 잘못 꺼내고 모두에게 웃음을 줄 거라 생각하는 이들은 없었을 것이다. 13년 전 히딩크 감독 앞에서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벤치로 물러나야 했던 김병지가 13년 뒤 다시 히딩크 감독을 앞에 두고 그때의 아픔을 유쾌하게 패러디 할 것이라고 상상했던 이들도 없었을 것이다. 이동국은 12년 전만 하더라도 다시 히딩크 감독 앞에서 웃으며 골을 넣는 모습을 상상할 수 없었겠지만 12년 뒤인 지난 주말 이는 현실이 됐다. 누군가에게나 마찬가지다. 시간이 흐르고 나면 정성룡의 ‘퐈이아’나 박주영의 ‘따봉’도 당사자와 팬들 모두 유쾌하게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지금 정서상으로는 절대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하석주의 레드 카드나 김병지의 드리블, 이동국의 활약이 곁들여진 이번 올스타전을 떠올려 본다면 언젠가는 정성룡이나 박주영도 지금의 아픔과 좌절을 유쾌하게 받아들이는 날이 올 것이다. 정성룡과 박주영뿐 아니라 모든 선수들이 마찬가지일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지금의 아픔도 언젠가는 웃으며 말할 수 있다. 물론 이들이 더욱 노력해 멋진 선수로 성숙한다는 전제 하에서다.

지금의 아픔도 언젠간 웃으며 추억할 날이 온다

이는 꼭 축구에서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다. 누군가는 이 모습을 보며 그저 유쾌한 이벤트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지만 조금만 생각을 바꿔 보면 이들에게서 인생의 교훈을 느낄 수 있다. 지금 이 순간 애인과 헤어져 밥도 못 먹고 잠도 못자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녀가 아니면 인생을 사는 의미가 없다고 느낄 수도 있다. 나도 물론 그런 적이 있다. 성적이 좋지 않아 재수를 고민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고 경제적인 문제로 스트레스 받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김병지와 하석주, 이동국의 올스타전에서 볼 수 있듯 시간이 지나면 지금의 상처와 아픔, 그리고 고민도 언제 그랬냐며 웃고 넘길 때가 오지 않을까. 10년 전 내 인생 최대 고민은 전투력 측정에서 좋은 성적을 얻어 휴가를 나가는 것이었는데 10년이 지난 지금은 그때 그런 고민을 했었는지 가만히 세월을 거슬러 봐야 떠오를 만큼 잊고 있다. 모두에게나 마찬가지다. 지금의 아픔은 10년 뒤 ‘그때 내가 그런 문제로 고민했었나?’라고 할 만큼 아무 것도 아닐 수 있다.

나는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젊다고 해서 아픔을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요하는 듯한 분위기가 싫다. 아프지 않고 아름답게 청춘을 보내면 더 좋을 텐데 ‘아직 청춘이니 아픈 것 쯤은 참으라’고 하는 건 어른으로서 할 말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뜨겁게 누군가를 사랑하고 자신의 꿈을 열정적으로 쫓다 상처받는 건 어쩔 수 없다. 대신 당장의 그 상처와 아픔이 내 인생 전부를 지배할 것이라고 걱정하거나 고민하지는 말자. 아름답게 청춘을 보내지 못하고 피치 못하게 아파하는 이들이 있다면 이번 K리그 올스타전을 통해 희망을 얻었으면 한다. 10년 전에 밥도 못 먹고 잠도 못자고 했던 고민을 아직까지 하고 있는 이들이 있는가. 지금의 상처와 아픔, 그리고 고민도 언제 그랬냐며 웃고 넘길 때가 분명히 온다. 물론 이는 K리그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하석주 감독이나 K리그 최다 출장의 기록을 쓰고 있는 김병지, K리그 역대 최다 공격 포인트를 올리고 있는 이동국처럼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단단해져야 한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한 순간 실수로 일생일대의 기회를 날리고 좌절했던 김병지가 다시 웃으며 히딩크 감독 앞에서 웃으며 드리블을 하는 날이 올 줄 누가 알았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