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장에서 응원을 보내는 이들을 우리는 ‘팬’이라는 말보다 ‘서포터스’라는 단어로 자주 표현한다. 단순히 이 팀을 좋아하는 단계를 넘어 도움을 주고 지지하는 역할까지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K리그 챌린지 부천FC1995의 서포터스 ‘헤르메스’는 지금껏 팀에 희생한 한 선수를 살리기 위해 감동적인 이벤트를 펼쳤고 결국 그 염원을 이뤄내고야 말았다. 진정한 부천FC의 지지자 역할을 하고 있는 그들에 대한 이야기를 준비했다. 그저 잘할 때 박수를 보내고 못할 때 야유를 퍼붓는 팬들은 많을지 몰라도 세상에 이런 서포터스는 아마도 또 없을 것이다. ‘헤르메스’가 직접 이뤄낸 감동적인 이야기를 지금부터 시작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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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 유니폼을 입고 그라운드를 누비는 허건의 모습. (사진=부천FC1995)

챌린저스리그부터 부천과 함께한 허건

허건은 부천이 프로에 입성하기 전부터 함께한 선수였다. 내셔널리그 용인시청과 천안시청 등에서 뛰었던 허건은 부천이 아마추어인 챌린저스리그에 속해 있던 2012년 부천 유니폼을 입게 됐다. 이전까지 그는 단 한 번도 누군가의 주목을 받던 선수도 아니었고 결국 당시 3부리그격인 챌린저스리그까지 내려 앉은 그저 그런 선수였다. 하지만 허건은 특유의 성실한 플레이를 바탕으로 부천 중원의 든든한 버팀목이 됐다. 비록 아마추어 리그였지만 열정 만큼은 그 어떤 팀의 서포터스보다 뜨거운 부천 팬들도 허건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허건은 2년 동안 챌린저스리그 소속 부천에서 가장 사랑 받는 선수로 성장했다. 그리고 K리그 챌린지가 출범하면서 부천은 드디어 프로화에 성공했다.

당시 아마추어에서 프로로 전향한 부천은 기존 선수들까지 모두 드래프트를 통해 다시 선발해야 했다. 부천은 프로에 입성한 뒤 이전보다 수준 높은 선수들을 대거 창단팀 우선지명으로 영입했지만 그러면서도 번외지명으로 허건을 뽑았다. 그간의 헌신도 있었고 충분히 K리그 챌린지에서도 통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챌린저스리그 시절부터 부천과 함께 한 선수는 허건을 비롯해 김태영, 한종우, 이순석, 안영진 등 5명에 불과했다. 허건 역시 이런 기대에 부응했다. 2013년 K리그 챌린지 첫 시즌 18경기에 나서 5골을 기록하는 등 미드필더로서 득점력까지 뽐낸 것이다. 시즌 초반 부천이 선두에 등극했을 때도 허건의 역할은 빛났고 그가 부상으로 쓰러지자 팀은 공교롭게도 13경기 연속 무승이라는 극심한 부진에 빠지고 말았다. 허건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분명했다.

하지만 그는 시즌이 끝난 뒤 난 데 없이 재계약 불가 통지를 받았다. 곽경근 감독이 2014 드래프트에서 신인을 대거 선발한 뒤 기존 선수단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허건까지 내보낸 것이다. 즉각 팬들은 반발했지만 곽경근 감독은 굽히지 않았고 결국 허건은 아마추어 시절부터 함께 한 이 팀을 떠나야 했다. 하지만 이후 곽경근 감독의 선수 선발 비리 의혹이 불거졌고 법적 공방까지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부천은 곽경근 감독 경질을 발표했다. 그래도 허건이 팀에 돌아올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재정이 넉넉지 않은 시민구단으로서 이미 선수단 영입이 모두 끝나 더 이상 허건을 잡는 데 쓸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팬들은 허건을 그리워했지만 잡을 수 없었고 허건 역시 소속팀 없이 하루 하루 시간이 흐를 때마다 안타까워했다. 그렇게 허건과 부천은 작별을 고하는 듯했다.

허건은 당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이미 부천을 떠난 상황에서 여러 팀과 이적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만 명쾌한 답변을 주는 구단은 없었다. “아직 기존 선수가 정리되지 않은 상황이니 우리 주전 선수가 이적하게 되면 다시 이야기 해보자”는 구단도 있었고 “2차 동계훈련 때 한 번 와서 테스트를 받아 보라”는 구단 정도가 전부였다. 다들 “일단 기다려 보라”는 반응이었고 허건은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걱정이 앞섰다. 부천 바로 옆인 경기도 시흥이 집인 허건으로서는 고향과도 같은 부천에서의 생활이 그리웠지만 그가 다시 부천으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남들은 새로운 시즌을 앞두고 동계훈련에 매진하고 있었지만 허건은 함께 할 팀도 없었고 동료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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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FC 서포터스인 ‘헤르메스’가 응원을 하고 있는 모습. (사진=부천FC1995)

재계약 불가, 그리고 팬들의 연봉 모금 운동

“우리가 한 번 모금 운동을 해보자.” ‘헤르메스’에서 허건을 잡기 위해 마지막으로 아이디어를 냈다. 2천만 원이 넘는 그의 연봉 전부를 모을 수는 없어도 어느 정도 자신들의 의지를 보여주기 위한 방법이었다. 지난 25일 ‘헤르메스’는 허건 재영입을 위한 모금 운동을 벌였다. 처음에는 이들도 반신반의했다. ‘헤르메스’ 안영호 대표는 불과 열흘 전이었던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많아 봐야 한 5백만 원 정도 모금을 기대했어요. 이 정도 돈을 모아 구단에 전달하면 우리의 의지는 충분히 전달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쉴 새 없이 ‘헤르메스’ 계좌로 팬들의 성금이 모이기 시작한 것이다. 팀에 헌신한 한 선수를 다시 잡기 위한 ‘헤르메스’의 감동적인 이벤트는 기대 이상의 반응을 얻었다.

새로운 팀을 찾으며 방황하던 허건도 이 소식을 접했다. KBS 대국민 토크쇼 <안녕하세요>에 부천FC 광팬으로 출연했던 정진이 씨가 걸어온 전화를 받고 허건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지금 허건을 다시 데려오기 위해 팬들이 직접 모금 운동에 나섰다”는 이야기를 듣고 온몸에 전율을 느낀 것이다. 허건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제가 얼마나 대단한 선수라고 그렇게 팬들이 나서 주셨는지 모르겠어요. 부끄럽기도 했죠.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는데 그래도 이렇게 저를 위해 힘써주시는 분들이 많다는 사실에 너무 감사하는 마음 뿐이었죠.” 허건은 어리둥절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팬들로부터 절대적인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에 재계약에 필요한 모금 운동 성공 여부를 떠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놀랍게도 무려 사흘 만에 1,130만 원 가까운 돈이 모였다. 회사원들은 ‘13월의 월급’이라는 연말정산으로 돌려받은 돈을 모두 이 모금 운동에 냈다. 돌려 받을 돈으로 계획했던 취미 활동도 포기했고 사고 싶었던 것들도 모두 포기했다. 한 팬은 올 겨울 일본 여행을 위해 1년 내내 모은 돈을 선뜻 허건 재영입 모금 운동에 내기도 했다. 그에게 해외 여행보다는 팀에 헌신한 선수를 잡는 게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청소년 팬들 역시 아르바이트를 통해 번 돈을 선뜻 내놓았고 비록 부천 팬은 아니지만 다른 K리그 팬들 역시 십시일반으로 돈을 냈다. 200만 원을 쾌척한 이부터 부천을 상징하는 ‘1995’에 맞춰 1,995원을 낸 학생도 있었다. 계좌를 열어 보니 실명을 쓰지 않고 ‘허건짱’, ‘허건 돌아와’ 등의 이름으로 돈을 보낸 이들도 상당했다. 5백만 원이나 모이면 성공이라던 그들의 걱정은 기우일 뿐이었다.

‘헤르메스’는 구단과 선수의 협상 과정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철칙을 세우고 그저 자신들의 의사를 표현하는 수단으로 시작한 모금 운동이었지만 구단도 곧바로 반응했다. 모금액이 연봉을 초과할 경우 차액은 시즌권을 지역내 소외 계층에 전달하기로 했고 만약 모금액이 부족할 경우에는 나머지 금액을 구단에서 부담하기로 미리 언급한 것이었다. 결국 모금 운동 8일 만에 목표 금액을 훨씬 웃도는 2,750여만 원이 모였다. 여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모금 운동이 끝난 뒤에도 팬들의 성원은 계속 이어졌다. 마감 이후에도 168만 원이 더 들어왔다. ‘헤르메스’ 측은 이렇게 팬들의 성원으로 모인 돈을 곧바로 구단에 전달했다. 안영호 대표는 뜨거운 모금 열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 정도로 돈이 많이 모일 줄은 몰랐어요. 가난한 구단이라 늘 힘들었는데 이렇게 열정적인 팬들이 많아 참 행복합니다.”

팬들의 힘으로 다시 돌아온 허건

그는 말을 이었다. “허건 선수와는 개인적인 친분이 전혀 없어요. 전화번호도 몰라요. 경기장에서 뛰는 모습만을 골대 뒤에서 지켜봤기 때문에 아마 길거리에서 마주쳐도 모를 걸요. 단지 저희는 선수로서의 허건을 응원하고 싶은 마음에서 이번 모금 운동을 진행한 겁니다.” ‘헤르메스’는 모금된 돈을 구단에 건네면서도 재계약 여부는 구단 뜻에 모두 맡기겠다고 했다. 그리고 바로 지난 4일 반가운 소식이 날아들었다. 허건이 부천 구단과 1년 재계약에 합의했다는 소식이었다. 많은 이들이 손수 모은 돈으로 허건 재계약에 성공한 것이었다. 허건은 재계약이 확정된 뒤 이렇게 말했다. “이건 사상 초유의 일인 것 같아요. 제가 할 일은 일일이 그분들께 찾아가 감사 인사를 전하는 게 아니라 경기장에서 실력으로 보여드리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온 힘을 다해 팀을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재계약 불가 통보를 받고 소속팀 없이 방황하고 있던 허건은 바로 어제(5일) 동료들과 함께 부천 동계훈련지인 제주도로 떠났다. 팬들의 힘으로 다시 돌아온 허건을 동료들도 반갑게 맞아줬다.

물론 이런 현실이 서글프기도 하다. 재정적으로 부족해 잡고 싶은 선수가 있어도 잡지 못하는 부천의 현실이 서글프고 허건과 비슷한 이유로 부천을 떠나 현재 갈 곳 없이 방황하며 자칫 선수 생활이 끝날 수도 있는 위기에 놓인 김덕수 같은 사례가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 또한 서글프다. 하지만 팬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선수의 연봉을 주는 이 감동적인 이벤트가 실제로 벌어졌다는 건 실로 엄청난 일이다. 아르바이트를 해 모은 돈을 전부 보낸 학생부터 연말정산으로 돌려받은 돈을 모두 쏟아 부은 직장인들, 해외여행의 꿈에 부풀어 모은 돈을 선뜻 낸 이들까지. 그들의 열정이 있었기에 가능한 드라마였다. 팀을 위해 아낌없이 내놓을 줄 아는 팬들과 그런 팬들로부터 연봉을 받은 허건 모두 참 행복한 사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