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보통 경기장에 일찍 도착하는 편이다. 이런 봄날에 일찌감치 경기장에 도착해 한 바퀴 돌면서 느끼는 그 설렘을 좋아한다. 유니폼을 맞춰 입은 연인과 신이 나 뛰어다니는 아이들, 그리고 마이크를 잡고 연신 이벤트를 진행하는 예쁜 누나들을 보며 여유를 즐긴다. 한 번은 용기 내 연락처를 물어봤는데 그녀가 마이크를 든 채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이런 말을 했다.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되거든요.” 이 소리는 마이크를 타고 아마 경기장 근방 3km 내에 있는 사람들이 다 들었을 것이다. 어찌됐건 경기 시작 5분 전이면 차가 꽉 막혀 굉장히 초조해지는데 독자 여러분들도 여유 있게 경기장에 도착해 이 분위기를 즐겼으면 한다. 또한 선수들이 몸 푸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오늘의 활약을 예측해 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경기 시작 전 당신은 무얼 하시나요?

하지만 아직 K리그는 경기 전과 경기 후에 대한 서비스가 부족한 편이다, 경기 시작에 앞서 경기장을 한 바퀴 돌아도 즐길만한 이벤트는 그리 많지 않다. 축구공으로 작은 골대에 공을 넣어 경품을 주는 행사나 선수단 사인회를 제외하면 직접 관중이 나서서 즐길 수 있는 게 거의 없다. 그저 이 시간은 킥오프를 기다리는 지루한 시간일 뿐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관중이나 구단 모두 경기가 열리는 90분 동안만 즐길 생각을 하지 경기 전과 후의 서비스에는 별 관심이 없다. 하지만 K리그 경기가 더 즐거운 축제가 되기 위해서는 경기가 열리는 90분만이 아니라 그 전·후의 즐거움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일단 눈물부터 닦고 이야기하자면 지금은 외로운 솔로지만 나도 여자친구와 행복했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내가 축구장에 가자고 하면 그녀는 별로 즐거워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이런 말을 했다. “아니, 90분 경기 보려고 수원가고 전주가고 대전가는 건 너무 시간 낭비 아니야?” 물론 나는 할 말이 없었다. 내가 생각해도 경기장에 가면 할 수 있는 거라곤 앉아서 축구를 보는 것 뿐이기 때문이다. 나 같은 ‘축덕’들은 그 자체로도 충분히 흥분되지만 그렇지 않은 일반적인 팬들이라면 지루할 법도 했다. 관중에게 경기장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이벤트가 시작된다는 걸 느낄게 해줄 필요가 있어 보인다.

경기 전부터 팬들이 즐길 수 있는 문화가 많아졌으면 한다. 뭐라도 좋다. 지금처럼 몇몇 선수 사인회나 마이크를 잡고 행사를 진행하는 누나들 뿐 아니라 다양한 즐길거리를 시도해야 한다. 꼭 유명 가수가 아니더라도 경기장 앞에서 신나는 브라스 밴드의 공연이 펼쳐진다면 분위기를 띄우는데도 좋고 관중에게도 좋은 서비스가 될 것이다. 작은 ‘위닝 일레븐’ 대회를 열거나 축구 상식 퀴즈를 열어도 좋다. 축구와 크게 관련이 없다고 하더라도 지루하게만 느껴질 킥오프 전까지 즐길 수 있는 것들이 있다면 한 번쯤 시도해 봐야 한다.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 몇몇 경기장이 ‘스타디움’이 아닌 ‘파크’인 것처럼 K리그 경기장도 ‘공원’이 되어야 한다.

잠실과 동대문의 포장마차 추억

나는 어릴 적 어머니와 시장 가는 걸 무척 좋아했다. 장이 열리는 날 그곳에 가면 군것질을 잔뜩 할 수 있고 꼭 구입을 하지 않더라도 눈으로 쇼핑할 것들이 넘쳐 났기 때문이다. 경기에 맞춰 경기장 앞에 이런 장이 들어서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이건 비단 관중을 위해서 뿐 아니라 지역 경제 활성화까지도 기대할 수 있는 부분이다. 특정 장소에 1만 명 가까운 이들이 한꺼번에 몰리는 건 축구 경기를 제외하고는 그다지 자주 있는 일이 아니다. 경기장에 도착해 경기 시작을 알리기 전까지의 시간이 죽어있어서는 안 된다. 경기 시작 한참 전부터 브라스 밴드의 연주가 들리고 아이들이 뽀로로 인형을 쥐어 패며 장난을 치고 어르신들은 파전에 막걸리를 들이키고 있어야 한다.

경기가 끝난 뒤에도 아직은 아쉬운 게 많다. 경기 종료 휘슬이 울리고 관중은 그저 빨리 집에 가기 위해 서둘러 자리를 뜬다. 이게 당연한 일이 됐다. 하지만 진짜 서비스는 이때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하다 못해 팬들이 경기 소감을 감독에게 전할 메모를 적는 이벤트라도 해야 한다. “제발 부탁인데요. XXX 좀 빼주세요”라도 적으며 관중끼리 낄낄거릴 수 있어야 한다. 경기 종료 후 기자회견이 열리지만 따로 팬들을 위해 오늘 경기에 나선 선수가 팬들과 짧은 미팅을 갖는 행사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아까 왜 패스 안 하고 슈팅하셨어요?”라고 관중이 묻고 “득점 수당 받아서 여자친구 명품백 사주기로 약속했거든요”라고 선수가 솔직하게 답할 수 있다면 이보다 더한 ‘직관’의 매력이 있을까. 경기가 끝났다고 관중에 대한 서비스도 끝나는 건 아니다.

과거 잠실종합운동장이나 동대문운동장 시절이 그립기도 하다. 그곳에서 경기가 열리는 날이면 포장마차가 주르륵 들어섰다. 초등학교 시절 아버지와 함께 경기를 지켜보고 국수를 먹을 때면 옆 테이블에서 마치 감독들이 모여 회의라도 하는 것처럼 아저씨들이 오늘 경기를 평한다. “그 자식은 왜 자꾸 경기에 나오는 거야?”, “아까 그 놈을 빼고 다른 놈을 넣었어야 돼.” 이들은 경기 시간은 90분이지만 그보다 훨씬 오랜 시간 동안 경기 내용을 안주삼아 소주잔을 기울였다. 이 아저씨들에게 축구는 딱 90분만 하는 게 아니라 경기가 끝나고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마신 뒤 집에 가 씻고 침대에 눕는 밤 12시까지였다. 나는 꼭 술이 아니더라도 경기가 끝난 뒤 팬들이 즐길거리가 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축구장이 90분만 즐거워서는 안 된다

최근 들어 서서히 K리그가 변하고 있다는 점은 반갑다. 과거에는 그저 인기 연예인을 초청해 하프타임 공연을 하는 게 전부였지만 최근 들어서는 이 짧은 시간에도 구단마다 여러 이벤트를 열고 있다. 경품을 그냥 주는 것도 아니고 사다리타기를 하는 등 팬들과 동참할 수 있는 이벤트를 많이 고민한다. 분명히 긍정적인 현상이다. 하지만 더 나아가 하프타임뿐 아니라 경기 전과 경기 후에도 팬들이 더 즐길 수 있는 무언가가 생겼으면 한다. 나는 과거 여자친구를 경기장에 데려가기 위해 경기장에 도착해 킥오프를 알리기 전까지 준비한 개그를 쉴 새 없이 했다. 이렇게 노력하지 않아도 경기장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마치 공원에 온 것처럼 편하게 즐길 수 있는 것들이 많아졌으면 한다. 앞으로 “축구 보러 갈래?”가 아니라 “축구장에 놀러 갈래?”라는 말이 더 익숙해졌으면 좋겠다. 축구장이 90분 동안만 즐거워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