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선거는 항상 산으로 간다. 정책과 공약에 대한 논의는 없고 오로지 상대 후보를 떨어뜨리기 위한 네거티브만이 판을 친다. 대통령 선거 당시에도 공약은 뒷전이었다. 한쪽에서는 ‘독재자의 딸’이라고 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종북 논란’을 일으켰다. 또 다른 한쪽에서는 “특정후보를 떨어뜨리기 위해 나왔다”고 했다. 당사자들이 이런 논란을 들고 나오자 유권자들도 공약 검토는 뒤로하고 오로지 이 문제에만 집중한 채 진흙탕 싸움을 벌였다. 어찌 보면 우리에게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선거는 사치인 것만 같다. 정책과 공약은 곱게 접어 하늘 위로 날려 보냈다.

대한축구협회장 선거를 앞두고 각 후보들의 공약을 비교하는 칼럼을 쓸 생각이었다. 공약과 정책만을 제시하고 가급적이면 특정 후보에 대한 지지나 반대 의견을 내지는 않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전에 한 가지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 있어 오늘 칼럼 주제를 급히 변경했다. 축구계에 불고 있는 때 아닌 ‘현대가(家)세습 논란’에 대해 할 말이 있기 때문이다. 이번 협회장 선거에 출마한 정몽규 프로축구연맹 전총재가 현대가의 일원이라는 점 때문에 상대 후보로부터 네거티브 공세에 시달리고 있다. 나는 특정 후보에 의견을 내지 않겠다고 생각했지만 이번 만큼은 용기를 내 이 논란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싶다. 정몽규 후보가 현대가 일원이라는 점이 협회장 선거에 영향을 끼쳐서는 안 된다.

정몽규 후보는 충분한 자격이 있다

현대가 세습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 이들은 한국 축구 개혁을 위해서 현대가에서 계속 정권을 잡는 것이 문제가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내가 반문하고 싶다. 현대가에서 계속 정권을 잡으면 그것이 한국 축구에 어떤 문제를 초래하는가. 지금껏 당신들은 현대가에서 축구 발전을 위해 과감한 투자를 할 때 무엇을 해왔는가. 나 역시 축구계의 개혁에 찬성하는 입장이지만 그 타겟이 엉뚱한 현대가로 쏠리는 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현대가에서 한국 축구 발전에 뒷걸음질 칠 만한 부정부패를 저지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경제적 이득을 위해 축구를 이용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정몽규 후보 반대 세력은 “현대가가 또 다시 정권을 잡아서는 안 된다”고 한다.

출신 성분이 아니라 후보 개개인의 능력과 정책, 역량을 따지는 것이 옳다. 그런 면에서 정몽규 후보는 충분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정몽규 후보는 프로축구연맹 총재 시절 사상 최악의 승부조작 사건을 슬기롭게 넘겼다. 법원 판결과는 별개로 승부조작 가담 정도에 따라 자체적으로 영구제명부터 자격정지까지 징계를 내렸다. 여기에서 멈춘 것이 아니라 징계 중인 선수들에게 봉사 활동을 실시, 반성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강경한 방침 속에서도 승부조작 가담자들에 대한 계도, 재발 방지를 위한 강도 높은 교육 등이 이어지고 있다. 최악의 사건에 연루돼 자칫하면 리그 존폐의 위기까지 논해야 할 상황에서 이 정도면 가장 현명한 대처를 했다고 생각한다.

뿐만 아니다. 프로축구 30년 역사상 한 번도 시행되지 못했던 승강제를 구축한 것도 정몽규 후보다. 이미 두 차례나 실패를 거듭하면서 남의 나라 이야기로만 보였던 승강제가 정몽규 총재 출범 이후 현실화 됐다. 기존 내셔널리그를 프로 2부리그로 출범시키는 것이 아니라 프로화 의지를 보이는 팀들을 설득해 새롭게 프로 2부리그를 구성하는 등 고민한 흔적이 역력하다. 아직 만족스러운 수준은 아니지만 K리그 중계 문제 역시 지역 케이블 채널과 스포츠 전문 케이블 채널 등을 통해 점차 자주 노출되고 있다. 전임 총재 시절에 비한다면 정몽규 후보가 한 일은 거의 위인전에 나올 정도로 대단했다. 프로축구 30년 역사에서 가장 돋보이는 총재가 바로 정몽규 후보다.

‘현대가’라서 안 될 이유가 없다

과연 이 유능한 후보를 ‘현대가’ 일원이라고 해 배척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 출신 성분 하나로 모든 공적을 뒤엎는 것이 타당한 일인지 묻고 싶다. 차라리 정몽규 후보에 대한 네거티브 공세를 펼칠 거면 “부산아이파크 구단주로서 이룬 업적이 없다”고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 진영에서는 이런 과거(?)에 대해서는 논란 삼을 생각이 없다. 왜? ‘현대가 세습 논란’이 있어야 양 쪽으로 갈린 표 중 한 쪽을 독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부산아이파크 구단주로서의 능력을 따지는 것이 훨씬 더 건전한 공세지만 이보다는 당파 싸움으로 일을 키워야 ‘현대가’ 라인 반대파의 압도적인 지지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가’가 또 다시 정권을 잡는다면 개혁할 수 없다는 건 억지논리다.

그렇다면 하나 더 생각해 보자. 나는 정몽규 후보의 출신 성분이 어떻건 지금껏 연맹 총재로서 보여준 능력이라면 후보로서의 자격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반대 진영에서 ‘현대가’에 대한 거센 반발을 보이고 있어 ‘현대가’의 축구에 대한 관심과 투자를 설명하지 않을 수가 없다. 현대는 지금껏 K리그에서 울산현대와 전북현대, 부산아이파크 등 무려 세 개 팀을 보유하고 있다. 내셔널리그 울산현대미포조선은 물론 여자축구 WK리그 인천현대제철도 운영 중이다. 이뿐 아니다. 현대고와 영생고, 동래고, 신라중, 현대중을 비롯한 유소년 팀을 지원하는 건 물론 구단 자체적으로 유소년 육성, 보급반을 구성해 선수들을 키워내고 있다. 현대라는 이름 하에 축구선수로서의 꿈을 키워나가는 이들이 수천 명이다.

엄밀히 따지면 2002 한일월드컵도 현대의 작품이었다. 정몽준 당시 협회장은 현대라는 기업을 등에 업고 월드컵 유치에 나서 불가능 할 것만 같은 개최에 성공했다. 아마 월드컵이 아니었다면 지금처럼 K리그에 최신식 전용구장이 생기고 동네마다 인조 잔디 구장에서 일반인이 축구를 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쓰다보니 ‘현대가’ 찬양이 되고 말았지만 현대가 한국 축구에 세운 공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저 “‘현대가’라서 안 된다”고 하기에 ‘현대가’는 한국 축구를 위해 한 일이 너무 많다. 한국 축구에서 적어도 ‘현대가 세습 논란’을 일으킬 수 있는 이들은 획기적인 유소년 시스템과 인프라 구축 등에 혁혁한 공을 세운 포스코를 뺀다면 없다. 포스코가 아니면 현대의 축구 발전에 견줄 세력이 있을까. 이래도 ‘현대가’에서 또 협회장을 배출하는 게 문제가 되나.

협회장, 출신 성분 아닌 능력 따져야

‘세습’이라는 단어에도 문제가 있다. 이런 자극적인 단어를 쓰려면 정몽준 명예회장이 인사에 개입해 선거 없이 정몽규 후보를 회장으로 추대하거나 정관을 개정해 정몽규 후보에 유리한 선거 방식을 채택하는 등의 비상식적인 행태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번 선거는 지역 축구협회장과 협회 산하 연맹에서 투표를 통해 결정한다. 나는 지난 칼럼에서 투표 방식에 대한 문제를 지적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보다 많은 이들의 의견을 수렴하기 위해 개정이 필요하다는 것이었지 ‘세습’을 위한 불공평한 선거라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세습’은 ‘한 집안의 재산이나 신분, 직업 따위를 대대로 물려주고 물려받음’을 이르는 말인데 누가 정몽규 후보에게 회장직을 물려줬나. 조중연 회장이 그랬나. 아니면 정몽준 명예회장이 그랬나. ‘현대가 세습’이라는 건 잘못된 말이다. ‘세습’은 북한에서 김정일 사후 김정은이 정권을 잡았을 때나 하는 말이다.

지금까지 대표팀 위주로 돌아가는 한국 축구 현실에서 정몽규 후보와 김석한 후보의 출마는 그 자체로도 상당한 의미가 있다. K리그의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정몽규 후보는 A매치와 K리그 중계권 협상을 연계하겠다는 획기적인 공약을 내놨다. 이번에 후보로 출마한 김석한 중등연맹 전회장은 18년 동안 유소년 축구 발전을 위해 노력한 인물답게 유소년 축구 육성에 대한 공약을 집중적으로 발표했다. 여기에 “지금껏 축구계에 종사하면서 단 한 번도 지키지 않은 약속이 없다”면서 “축구계를 하나로 화합시키고 소통하는 데 일조하겠다”고 했다. “KFA 등록 선수를 현 3만 6000명에서 4년 내에 20만명으로 만들 것”이라는 허승표 피플웍스 회장의 공약이나 군팀 확대, 남북 교류 활성화 등 윤상현 새누리당 국회의원의 공약도 개성이 넘친다. 정몽규 후보 상대 후보 측에서는 그를 공략할 때 정책과 공약을 놓고 따져야 한다. 그냥 ‘현대가’라서 안 된다는 건 설득력이 없다.

나는 특정후보에 대한 지지 선언을 할 생각은 없다. 후보들 모두 나름대로 한국 축구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대단한 이들이다. 하지만 건강하게 치러져야 할 협회장 선거가 상대 후보에 대한 비방으로 얼룩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이 비방전의 가장 큰 중심에 있는 ‘현대가 세습 논란’은 사라져야 한다. ‘현대가’가 또 다시 협회장에 올라서는 안 될 이유도 없고 ‘현대가’ 명함을 떼고라도 정몽규 후보가 협회장이 되어서는 안 될 이유도 없다. 능력이 있고 지금껏 보여준 실적이 있다면 현대가 일원이건 아니건 배척할 이유가 없다. 이것이야말로 또 다른 의미의 차별일 뿐이다. 한국 축구의 목표가 무엇인가. 더 나은 환경에서 발전된 모습으로 성장하는 것이 한국 축구의 목표이지 ‘현대가’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는 것이 궁극적인 한국 축구의 목표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