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28일은 한국 축구에 있어 역사적인 날이 될 것이다. 제52대 대한축구협회장 선거가 있기 때문이다. 각각의 후보들은 자신이 한국 축구를 이끌 적임자라며 야심찬 공약들을 발표했다. 어떤 후보가 됐건 축구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거대한 단체를 슬기롭게 이끌 수 있는 인물이 회장이 되길 바라며 오늘은 과거 가장 유능하게 대한축구협회를 이끌었던 장덕진 회장에 대한 이야기를 준비했다. 장덕진 회장의 이야기를 통해 새로운 협회 수장의 희망적인 모습을 떠올려 보는 건 어떨까.

장덕진이 만든 ‘9개 팀 200명의 일자리’

고려대 법대를 졸업하고 1960년부터 1962년에 걸쳐 3대 고시인 사법, 행정, 외무고시를 모두 패스하는 최초의 기록을 세운 장덕진은 재무부 이재국장으로 재임하면서 대한축구협회 이사직을 겸했다. 1969년 당시만 하더라도 축구선수들은 실업팀이 없어 먹고 살기 막막한 상황이었다. 소속팀이 없으니 월급을 받을 곳도 없고 지금처럼 선수들이 좋은 경기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만 집중할 수 없던 때였다. 그저 군 팀에서 뛰거나 대표팀 발탁만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실업팀 하나 만들기도 버거운 상황에서 축구인들이 고민하고 있을 때 금융권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던 장덕진 이사가 나섰다. “제가 한 번 해보겠습니다.” 장덕진 이사는 곧바로 국책은행을 비롯한 금융권 인사들을 만나러 다녔다.

“한국 축구 발전을 위해 도와주세요. 우리 같이 갑시다.” 당시 장덕진 이사의 힘은 막강했다. 재무부에서도 실세로 꼽히는 그의 지시를 거부할 은행은 없었다. 1969년 3월 조흥은행과 산업은행, 신탁은행, 제일은행 등이 연이어 창단을 선언하면서 리그의 토대를 갖추기 시작했다. 놀라운 일이었다. 축구팀 창단 러시는 계속 이어졌고 한꺼번에 무려 9개의 금융단 축구팀이 생겨 약 2백여 명의 선수들이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이 팀들은 1983년 프로축구가 출범하기 전까지 한국 축구를 이끄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장덕진 이사는 이렇게 말했다. “재정적으로 안정된 금융단이 축구팀을 창단해야 선수들도 먹고 살 수가 있다.” 금융단 리그는 출범 첫해 10개월 동안 6라운드를 치르면서 무려 315경기를 펼쳤다. 최근 해체한 국민은행 축구단도 이때 창단했다.

1970년 박정희 대통령이 그를 불렀다. “대한축구협회장이 돼 한국 축구 발전을 이루게.”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에게 ‘양지’팀을 만들어 북한을 제압할 수 있는 경기력을 키우려고 했지만 결국 김형욱이 실각하자 근본적인 대책 마련을 위해 처조카사위(육영수 언니 육인순의 사위)이기도 한 장덕진에게 이 같은 지시를 내렸다. 그는 비록 경기인 출신은 아니었지만 비상한 머리와 열정으로 한국 축구를 이끌 인물로 평가받고 있었다. 이미 금융단 리그를 만들면서 그 능력도 인정 받았다. 당시 정부 고위 관료들이 골프를 하며 돈과 명예를 자랑할 때 장덕진은 이렇게 이야기하기도 했다. “같은 잔디 위에서 하는 스포츠지만 유유히 걷는 골프보다는 쉼 없이 달리는 축구가 더 매력적이다.” 실제로 그는 재무부 이재국에 팀을 만들어 4년 동안 공격수로 활약하기도 했다.

한 달 만에 구해온 축구발전기금 1억

장덕진 회장은 취임 후 곧바로 야심찬 각오를 내비쳤다. “한 달 안에 협회가 독자적으로 축구발전기금 1억 원을 만들겠습니다.” 이전까지 궁핍한 생활을 해오던 협회로서는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면서 “경험이 풍부한 원로들을 모아 달라”고 해 축구원로 16명으로 구성된 자문위원회를 조직했다. “현장의 목소리를 들어야 문제점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이전까지 정치인들이 잠시 머물다 가던 협회장직을 이렇게 열성적으로 수행하는 이가 없던 터라 원로들은 의아해했지만 곧바로 의견을 내기 시작했다. 장덕진 회장은 국가대표팀 경기력 강화와 선수들의 안정된 생활을 위해 머리를 싸맸다. 그리고 무엇보다 궁극적인 목적은 당시 당대 최강으로 꼽히던 북한과의 경기에서 승리를 따내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국가대표 상비군으로 1진 ‘청룡’과 2진 ‘백호’를 구성하세요. 북한과의 대결에서 패하면 저를 비롯한 수뇌부가 모두 물러나는 겁니다. 이건 각하의 지시이기도 합니다.” 한국 축구 역사상 최초의 외국인 코치도 장덕진 회장의 작품이었다. 이는 외국인 코치를 상상도 하지 못했던 당시 파격적인 시도였다. 국가대표 상비군 전용 숙소를 건설해 대표팀 경기력 향상에 집중했다. 장덕진 회장의 작품이었던 국가대표 상비군 제도는 1990년대까지 이어져 대표팀 경기력 향상의 뿌리가 됐다. 그러면서 약속했던 취임 한 달 안에 기금 1억 원 모금에도 집중했다. 장덕진 회장이 직접 발로 뛰었다.

한 달이 지나자 사람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장덕진 회장이 진짜 1억 원을 만들어 왔기 때문이다. 그는 힘겹게 모아 온 이 돈을 허투루 쓸 수 없었다. 가장 먼저 직원들에게 이렇게 지시했다. “대표 선수들에게 상해 보험을 들어줘.” 대표팀 상비군과 청소년 대표 53명이 동방해상 보험회사와 상해보험을 체결했다. 이는 한국 스포츠 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각종 부상을 당할 경우 보상금으로 안정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원로들에 대한 예우도 잊지 않았다. 축구 원로 중 생계가 어려운 이들을 돕기 위해 ‘축구인원호연금제’를 실시했다. 1년에 12만 원씩 세 명에게 36만 원을 지급하는 방식으로 점차 그 대상과 지급액을 확대하기로 했다. 대표팀 경기 수익이 발생하면 일정 금액을 연금으로 적립하기 시작했다.

축구공 3만개 보내기 운동

“어떻게 축구인 소식을 전하는 전문 매체가 하나도 없는 거야?” 장덕진 회장은 고민했다. 그도 그럴 것이 주요 일간지에 대표팀 상비군 소식은 보도되지만 아마추어 축구에 관한 뉴스는 한 줄도 소개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장덕진 회장은 “협회에서 직접 축구 전문 매체를 만들라”고 지시했고 결국 1970년 4월 ‘월간축구’를 발행했다. 이 ‘월간축구’는 지금도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바로 지금의 ‘베스트 일레븐’이라는 축구 전문 잡지다. 또한 장덕진 회장은 축구인들이 한 자리에 모일 장소가 없다고 판단해 세종로 경제통신사 2층에 30평 규모 방 두 개짜리 ‘축구인의 집’을 꾸렸다. 축구인들은 누구나 들를 수 있는 연락 및 휴식 공간으로 텔레비전과 오디오, 오락기구 등을 비치해 놓고 화합의 장소로 쓰기 시작했다. 축구인들은 여기에 모여 축구에 대한 이야기를 마음껏 나눌 수 있었다.

장덕진 회장은 축구가 대표팀 위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생활 깊숙이 자리 잡아야 한다는 철학이 확고했다. “축구선수 부족과 기본기 불안으로 성인이 되어서는 발전이 없다.” 그는 이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직접 나섰다. 취임 첫해 동안 축구공 3만개 보내기 운동에 돌입했다. 이들이 자연스레 축구를 접하면 유소년 축구에도 큰 변화가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 효과는 바로 나타났다. 1970년 한 해 동안 무려 368개 초등학교 축구팀이 생기고 마을 단위로는 321개 팀이 생겨난 것이다. 무려 689개 팀에서 어린이들이 축구에 열중할 수 있는 환경이 구성됐다. 주말 축구교실도 28개 학교에서 시행하기 시작했다. 장덕진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꼭 전문 선수가 되지 않아도 된다. 축구로 튼튼한 몸과 마음을 길러라.”

뿐만 아니었다. 유소년 뿐 아니라 일반 성인들 역시 보다 자연스럽게 축구를 접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각 시군 단위로 향토예비군 축구단을 만들고 각 시군에 두 개의 마을 축구단을 구성할 수 있도록 도왔다. 전군의 연대급 이상 부대와 각 경찰서, 교도소에도 축구공을 보냈다. 전국적으로 파악도 안 될 만큼 많은 축구팀이 생겨났고 이는 전국에 새마을축구대회, 아마추어 직장인 축구대항전, 조기축구 대항전이 생기는 데 큰 기여를 했다. 당시 한 일본 축구 기자는 장덕진 회장의 모습을 보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일본은 크라머 코치의 충고를 보수적인 협회가 받아들이지 않아서 큰 문제다. 하지만 한국은 젊은 협회장이 신진대사 역할을 확실히 하고 있다. 부럽다.” 장덕진 회장은 아시아축구연맹(AFC) 부회장에 선출되면서 아시아 전체가 주목하는 인물이 되기도 했다.

아시아 제패와 ‘박스컵’ 창설

취임 후 곧바로 결성한 상비군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성적을 내기 시작했다. 1970년 메르데카컵 우승, 킹스컵 우승, 아시아게임 금메달이라는 성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당시 버마 등에 밀리던 한국으로서는 실로 대단한 성과였다. 집중적으로 대표팀을 육성한 결과였다. 그리고 모두가 아시안게임 금메달에 들떠 축하연을 벌이고 있을 때 연단에 선 장덕진 회장은 또 다른 목표를 밝혔다. “킹스컵과 메르데카컵보다 더 권위 있는 국제축구대회를 해마다 한국에서 개최하겠습니다.” 박정희 대통령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장덕진 회장은 이 대회 명칭을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 즉 ‘박스컵’이라고 지었다. 1971년부터 1975년까지는 아시아 국가만이 참가하는 대회였지만 1975년부터는 브라질 주리그 대표들도 대회에 나서는 등 규모는 점차 커졌다. 이 대회는 이후 ‘코리아컵’으로 이름을 바꿔 1999년까지 성대하게 열렸다.

장덕진 회장은 1971년을 ‘한국 축구 도약의 해’로 선포했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 1971년은 시련의 해였다. 그해 9월 한국이 말레이시아와의 경기에서 패하자 5천여 팬들은 경기장에서 “장덕진 물러가라”는 비난을 퍼부었고 결국 그해 10월 대표팀이 뮌헨 올림픽 본선 진출에 실패하고 만 것이다. 이 사태에 대해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했다. 결국 예선 탈락 책임을 지고 집행부 전원이 퇴진 의사를 밝혔고 장덕진 회장도 함께 물러날 뜻을 내비쳤다. 하지만 축구계의 만류가 거셌다. “이대로 물러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결국 이시동, 고태진 부회장과 이수환 부장 등 집행부 네 명이 물러나고 한홍기 코치의 사표가 수리됐지만 장덕진 회장만큼은 살아남았다. 그는 “흔들리는 한국 축구를 막기 위해 나는 이 자리에 남았다. 새 기틀을 만든 뒤 3개월 후 대의원 총회에서 신임을 묻겠다”고 했다.

1971년 영등포 국회의원에 당선된 장덕진 회장은 1972년 10월 국회에서 국민체육진흥기금법을 입법화시키는데 성공하고 국민체육진흥재단 설립도 이뤄냈다. 국민체육진흥기금은 선수와 지도자를 발굴하고 키우는데 쓰이기 시작했고 은퇴한 경기인의 생활 보조금으로도 지급됐다. 지금도 국민체육진흥기금은 꾸준히 한국 스포츠 발전에 쓰여지고 있다. 하지만 장덕진 회장은 1973년 8월 농림수산부 차관 발령을 받고 결국 협회를 떠나고 말았다. 숙원 사업이었던 축구전용경기장 건설에는 실패했지만 한국 축구의 체질을 바꾼 의미 있는 3년의 시간은 그렇게 흘렀다. 그에 대해 논할 때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이 금융단 팀 창단 러시와 금융단 축구리그지만 그뿐 아니라 장덕진 회장은 한국 축구 발전을 위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일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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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박스컵에서 한국은 버마와 공동 우승을 차지했다. 장덕진 회장으로부터 우승컵을 전달받은 주장 김정남(현 프로축구연맹 부회장)의 모습. (사진=대한축구협회)

‘제2의 장덕진 회장’을 기대한다

협회는 지난 2005년 ‘명예의 전당’을 만들면서 장덕진 회장을 가장 먼저 그 후보로 올려 놓았다. 하지만 선정위원회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음에도 장덕진 회장은 이를 고사했다. “저는 ‘명예의 전당’에 오를 만큼 훌륭한 사람이 아닙니다.” 결국 장덕진 회장을 제외하고 김용식 선생, 홍덕영 선생, 김화집 선생, 이회택, 차범근, 거스 히딩크, 정몽준 회장 등 7명만이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다. 본인이 고사했지만 ‘명예의 전당’에 8번째로 이름을 올릴 이는 여전히 장덕진 회장이 가장 유력하다. 그만큼 장덕진 회장은 모든 것이 엉성했던 당시 한국 축구의 체계를 잡고 투자를 아끼지 않으면서 획기적으로 한국 축구를 변화시켰다. 만약 그가 그저 협회를 한 번쯤 거쳐가는 정치인이었다면 한국 축구가 이만큼 눈부시게 발전할 수 있었을까.

이제 새로운 협회장 선출이 눈앞에 있다. 어떤 후보가 됐건 투명하게 한국 축구를 이끌 수장이 됐으면 좋겠다. 또한 무엇보다도 두 편으로 갈린 축구계를 통합할 수 있는 현명한 인물이 새로운 수장이 됐으면 한다. 취임 후 편 가르지 않고 축구 원로 16명으로 자문위원회를 구성한 장덕진 회장의 대통합을 2013년에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