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보다 중요한 게 마지막이다. 과거 만났던 한 여자친구와는 1년 동안 한 번도 싸우지 않았지만 한 번 대판 싸운 뒤 헤어졌다. 그녀와의 행복했던 추억도 많았고 우리 사이가 그렇게 나쁜 것도 아니었는데 결국 몇 년이 지난 뒤 내 기억 속에는 그녀와의 마지막만 기억에 남아 있다. 그녀의 빛나던 외모와 미소도, 나에게 해줬던 따뜻한 말도, MT간다고 거짓말하고 떠났던 1박2일의 강화도 여행도 기억나지 않고 싸우고 헤어지던 날 그녀의 이 사이에 낀 고춧가루만 기억난다. 그녀와 마지막을 조금 더 아름답게 장식했다면 아마 지금쯤 나는 그녀와 이별했어도 아름다운 추억들만 기억했을 것이다.

최은성, K리그 복귀 길 열렸다

최은성이 대전과 이별했다. 15년 동안 한 팀의 골문을 지킨 이 사나이는 결국 쓸쓸히 팀을 떠나고 말았다. 나도 이렇게 슬픈데 15년 동안 400번 넘게 최은성을 만났던 대전 팬들의 마음이야 오죽할까. 1년 사귄 애인과 헤어지는 슬픔은 여기에 비견할 수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최은성은 다시 한 번 날아오를 준비를 하고 있다. 최은성이 자유계약선수(FA) 자격을 얻어 다른 팀에서 선수로 뛸 준비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유계약선수는 오는 26일까지 다른 구단으로의 이적이 가능하다. 대전과 재계약 협상이 결렬돼 올 시즌 선수 등록에 실패한 최은성으로서는 이제 홀가분한 신분으로 다른 팀 이적을 노릴 수 있게 됐다. 돈 안 쓰는 여자친구와 정 하나로 몇 년을 사귀면서 헌신했던 남자가 도리어 뻥 차였으니 이제 그는 부잣집 막내 딸을 만나도 누구의 손가락질 받지 않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최은성이 아쉽지만 여기에서 선수 생활을 마무리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K리그 역사상 보기 드문 ‘원클럽맨’이 자신의 경력에 다른 팀을 추가하는 건 무척 아쉬운 일이기 때문이다. 15년 동안 한 팀에서 뛰다가 현역 생활 마지막 1~2년을 다른 팀에서 뛰어 ‘원클럽맨’ 타이틀을 놓치는 건 지금까지 달려온 15년이라는 세월의 의미가 퇴색될 수도 있다. 다른 팀으로 이적한 최은성은 아마 자신의 대전시티즌 엠블럼 문신 때문에 동료들과 함께 샤워를 할 수도 없을 것이다. 팔에 문신을 해 여름에도 부모님 앞에서 긴팔을 입고 몇 년째 버티는 내 친구 장석준과 같은 꼴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최은성은 다른 팀에서라도 현역 생활의 마지막 불꽃을 태우길 원하고 있고 그의 의견을 존중해야 한다.

최은성은 이번 이적시장에서 꽤 좋은 상품이다. 사람들이 대부분 빠져나가고 마트가 문을 닫을 무렵 저렴하지만 실속 있는 상품이 나온 것과 같다. 최은성을 영입한 구단은 당장 그를 즉시 전력감으로 쓸 수도 있지만 팀의 정신적인 지주로 후배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는 역할을 기대할 수 있다. 자기관리와 헌신의 아이콘인 최은성은 코치진과 선수들의 가교 역할도 할 수 있다. 또한 이런 매력적인 선수가 현역 은퇴 후 골키퍼 코치로 팀에 남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다. 요즘과 같은 상황에서 좋은 골키퍼 코치 구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최은성이라면 당장은 물론 먼 미래에까지 구단에 힘을 줄 수 있다. FM을 하다가 좋은 코치가 필요해 경험 많은 선수를 영입해 본 이들은 이해가 쉬울 것이다.

전북에 최은성이 필요한 이유

나는 최은성이 전북으로 이적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일단 전북은 다른 포지션에 비해 골키퍼가 다소 약한 편이다. ‘닥공’이 주목받으면서 취약점이 가려져 있지만 전북의 가장 큰 약점은 역시 골문이다. 글래머러스한 몸매 때문에 약간 나온 뱃살을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것과 같다. 김민식도 물론 훌륭한 골키퍼지만 아직은 전성기의 기량에 다다른 선수는 아니다. 앞으로 발전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선수다. 그런 김민식 혼자 디펜딩 챔피언이자 아시아 무대 정상을 다시 노리는 전북의 골문을 지킨다는 건 상당한 부담이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권순태가 군에 입대한 지금 염동균을 보좌하는 백업 골키퍼가 김민식의 역할이지만 염동균이 승부조작으로 퇴출되면서 그가 졸지에 전북의 골문을 책임져야 하는 중책을 맡게 됐다.

냉정히 따지자면 이제 막 피어오르는 김민식과 현역 생활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최은성의 기량에는 큰 차이가 없다. 최은성이 있어도 김민식이 선발로 나서는 경기가 더 많을 것이다. 전북으로서도 당연히 앞길이 창창한 김민식에게 더 많은 경기 경험을 쌓게 해주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누가 선발로 전북 골문을 지키느냐가 아니다. 최은성의 가세로 김민식을 비롯한 전북 골키퍼들이 안정감을 찾을 수 있다는 게 중요하다. 현재 전북은 K리그 16개 구단 중 골키퍼가 가장 어린 팀이다. 김민식은 1985년생이고 홍정남과 이범수는 각각 1988년과 1990년생이다. 소녀시대는 “어리다고 놀리지 말라”고 했지만 경험이 중요한 자산인 골키퍼로서는 이게 단점이 될 수 있다.

한 팀의 골키퍼끼리는 많은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 포지션 특성상 함께 어울릴 수밖에 없다. 훈련도 자기들끼리 모여서 한다. 그러면서 경험 많은 선배 골키퍼가 후배들에게 조언도 해주고 인생의 고민도 들어주는 게 보통이다. 최은성만큼 많은 경험과 훌륭한 인성을 갖춘 선수가 또 있을까. 최은성이 전북에 가더라도 김민식이 주전으로 나서는 경기가 더 많겠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효과를 무시할 수 없다. 최은성은 실제로 대전에서 뛸 때 플레잉코치로 후배 골키퍼들의 훈련을 도맡기도 했다. 챔피언스리그와 FA컵은 물론 44차례의 K리그 경기를 치러야 하는 시점에서 최은성은 백업 골키퍼로도 가치가 있다. 물론 이건 최은성이 주전을 보장해주는 팀이 아니어도 백업 골키퍼 신분으로 이적할 마음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K리그 레전드를 품을 구단은?

군대에 간 권순태는 올해 10월이 되어야 전역한다. 권순태가 당장 군대에서 간첩을 잡고 전역하지 않는 이상은 올해 말까지 김민식과 홍정남, 이범수 등 아직은 전성기에 다다르지 못한 세 명의 골키퍼로 골문을 지켜야 한다. 이때까지 단기간 처방을 위해서 최은성만한 카드가 또 있을까. 전북으로서는 학원계에서 15년 동안 꾸준히 강의를 하고 학생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아온 과외 선생님을 데려오는 셈이다. 최은성이라는 훌륭한 과외 선생님을 통해 똘똘한 세 명의 학생이 배울 수 있는 건 무궁무진하다. 또한 전북이 대전과의 경기에서 최은성에게 골문을 맡긴다면 이 모습은 모두의 주목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전북은 한 순간에 모든 축구팬들의 응원을 받는 팀이 될 것이다.

얄밉게 말해 전북이 최은성의 역사를 대전에서 빼앗을 수도 있다. 그가 얼마나 오래 선수 생활을 이어갈지는 모르겠지만 최은성이 선수 생활을 마감할 때 전북이 웅장한 은퇴식을 치러준다면 결국 역사는 최은성을 대전 선수가 아닌 전북 선수로 기억할 것이다. 조재진 역시 전북에서 단 한 시즌만 뛰고도 은퇴 후 ‘전북맨’으로 기억되고 있지 않나. 대전이 15년 동안 공 들여온 선수를 몇 달, 혹은 1~2년 만에 우리 팀 역사로 가져오는 건 참 쏠쏠한 장사다. 대전 팬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전북으로서는 나쁘지 않은 일이다. 15년 된 산삼을 하찮은 도라지인줄 알고 내다버렸는데 옆집에서 산삼이란 걸 알고 챙겨가는 꼴이다. 전북으로서는 공짜로 K리그 레전드라는 산삼을 얻을 수 있다.

최은성은 어떤 팀이 데려가더라도 손해 보는 영입이 아니다. 이런 레전드를 품는 구단은 젊은 선수들에게도 큰 가르침을 줄 수 있고 마케팅 측면에서도 훌륭한 가치가 있다. 특히 나는 여러 K리그 구단 중 전북이 최은성을 품을 수 있는 가장 적합한 팀이라고 생각한다. 이건 나의 하찮은 의견이지만 최은성이 다시 그라운드에 설 수 있는 곳이라면 어떤 팀에 입단하건 응원할 생각이다. 물론 내 주장대로 전북에 가는 게 나로서는 가장 흥미로울 것 같다. 두툼한 패딩을 입고 최은성이 전북에 가 의자에 쭈구려 앉아 ‘간디작살’나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민식이냐. 형만 믿고 따라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