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권도, 쇼트트랙, 양궁. 세계를 호령하는 우리나라의 효자 종목이다. 이들은 언제나 전세계 1위 자리를 놓치지 않는다. 하지만 은메달을 따고도 눈물을 흘리는 태권도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국내 선발전 경쟁이 심한 쇼트트랙이나 해병대에 입소해 정신을 무장하는 양궁이나 우리는 그 노력은 모르고 결과만을 받아들인다. 1등을 하지 못하면 곧 실패라고 생각할 정도다. 아시아 무대에서 K리그도 마찬가지다. K리그는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에서 최근 3년 동안 두 번 우승할 정도로 돋보인다. 우리는 이게 당연한 줄 안다.

승리할 자격이 충분했던 광저우

어제(7일) 열린 전북과 광저우의 챔피언스리그 조별예선은 변명할 것 없는 완패였다. K리그 최강이라고 자부하던 전북이 광저우에 무려 5골이나 내주면서 무너졌으니 참 속이 쓰리다. 수백억 원을 호가하는 몸값의 외국인 선수 3인방은 전북 수비를 농락했고 수천 명에 이르는 광저우의 팬들은 마치 그들이 홈에서 경기를 하는 것처럼 열정적인 분위기를 만들었다. 전세계 연봉 랭킹 3위인 선수가 광저우에 있다는 사실은 놀랍기만 하다. 광저우는 이 한 경기 수당으로만 28억 원을 풀었으니 말 다했다. 역시 돈의 힘으로 안 되는 건 없는 모양이다. 전북을 제외한 K리그 세 팀이 이번 챔피언스리그 조별예선에서 2승 1무라는 좋은 성적을 냈지만 이것도 다 전북의 참패에 가렸다.

이흥실 감독대행은 경기가 끝난 뒤 부상으로 빠진 조성환의 공백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도 동의한다. 조성환이 부상으로 그라운드를 떠나면서부터 수비력이 무너졌고 연거푸 골을 허용했다. 하지만 조성환이 있었더라도 광저우의 무시무시한 외국인 선수 3인방을 막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죽어라 전북의 오른쪽 측면을 공략하는 이들 때문에 이날 최철순은 뒷걸음질 치기에 바빴다. 최철순에게는 잔인한 경기였다. ‘닥공’은 더 강력한 ‘닥공’ 앞에서 맥없이 무너졌다. 이건 전술적인 패착이었고 이제 막 감독 자리에 오른 이흥실 감독으로서는 큰 공부가 됐을 것이다. 전북의 포백 수비가 상대방 공격 세 명을 막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광저우는 승리할 자격이 충분했다. 과거 돈을 앞세운 팀들은 무분별한 선수 영입으로 조직력이 형편없었다. 패션의 조화는 생각하지도 않고 그냥 명품 옷이라면 다 사들이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광저우는 달랐다. 이장수 감독의 체계적인 구상 아래 영입된 외국인 선수들은 유기적으로 움직였다. 청바지를 하나 산 뒤 거기에 맞는 신발과 티셔츠까지 산 셈이다. 광저우는 돈으로 떡칠한 다른 팀과는 다르다. 막대한 자금력과 팬들의 지지, 감독의 플랜까지 완벽하니 앞으로 우리는 광저우라는 팀에 상당히 고전할 가능성이 적지 않다. 끔찍하지만 어제의 완패는 시작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클럽월드컵에 나서면 그 출전 상금만으로도 대박이라고 하지만 이들에게 이 정도는 그냥 보너스 몇 푼일 뿐이다.

이제 ACL은 K리그의 독무대가 될 수 없다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긍정적인 면도 상당하다. K리그가 아시아에서 독주하는 것도 좋지만 더 치열한 경쟁과 열기를 위해서는 광저우 같은 팀이 더 많이 나와야 한다. 특히나 아시아 최고의 무대인 챔피언스리그가 외면 받는 국내의 현실에서 광저우의 등장은 참 흥미로운 일이다. 기껏해야 J리그 몇몇 팀과의 맞대결이 흥행의 전부였는데 이제 클럽 축구에서 K리그가 J리그 팀과 맞붙는다고 이걸로 애국심을 들먹이며 흥행몰이를 하는 것도 한계가 있다. 차라리 J리그 팀이 이기는 게 낫지 K리그의 라이벌 구단이 J리그 팀을 잡는 걸 원치 않는 팬들도 있을 수 있다. 이건 매국이 아니라 클럽 축구 시스템에서는 당연한 일이다. 또한 어제 일본 챔피언 가시와가 태국 챔피언 부리람에 패했으니 전북 팬들은 너무 속상해하지 말자. 챔피언스리그 무대는 이제 상당히 평준화됐다.

기껏해야 J리그 몇몇 팀과 대결 구도를 형성하는 게 전부였던 챔피언스리그 무대에 우즈베키스탄 독재의 상징인 분요드코르가 등장했고 ‘공공의 적’이 된 비매너의 알 사드도 나타났다. 여기에 돈으로는 이미 ‘끝판왕’ 대열에 오른 광저우까지 등장했으니 챔피언스리그의 스토리는 무궁무진해졌다. 지금은 다소 시들해졌지만 ‘K리그 킬러’라는 명성으로도 자자한 알 이티하드의 존재도 무시할 수 없다. 반일감정 하나에 모든 흥행을 걸었던 과거와는 분명히 달라진 모습이다. 지난해 엄청난 열기를 내뿜었던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전북과 알 사드의 맞대결에서 볼 수 있듯 상대가 일본이 아니어도 시장이 커지고 스토리가 생겨난다면 이 무대도 더욱 관심을 끌 수 있다.

가장 이상적인 건 역시 K리그 구단이 이 스토리를 이끄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는 홍보와 흥행 면에서 한참 뒤처지고 있다. 위성 사정으로 생중계를 취소하는 70년대에나 일어날 법한 일이 있어도 뭐 별로 논란이 되지도 않는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광저우나 알 사드, 분요드코르, 알 이티하드, 그리고 J리그 구단들이 키워놓은 시장에 얹혀 갈 수밖에 없다. 보통 챔피언스리그 조별예선 경기였다면 별다른 반응이 없었겠지만 어제는 경기가 끝난 뒤 포털사이트 검색 순위 상위권에 전북-광저우전이 계속 올라있었다. 완패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만큼 관심도가 예전보다는 더 커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제 광저우를 상대하는 K리그 팀 선수들과 팬들의 전투력을 자극할 수 있을 것이다. 다가올 전북의 광저우 원정은 더 큰 관심을 받을 것이다.

광저우의 등장이 고마운 이유

광저우와 같은 팀은 돈을 펑펑 쓰면서 우리 대신 챔피언스리그 무대를 홍보해주고 있다.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우리 언론은 아직도 챔피언스리그를 그냥 그런 무대로 생각하고 있는데 중국 클럽이 이 무대의 가치를 대신 보여주고 있으니 어제의 패배가 쓰라리기는 하지만 한 편으로는 고맙기도하다. 최근 K리그에서 샐러리캡 도입 등 구단 규모를 제한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제도에 반대하는데 광저우의 등장으로 내 주장은 더욱 설득력을 얻게 됐다. 막대한 자금을 투자할 여력만 있다면 광저우나 알 사드 같은 팀과 누가 더 돈이 많은지 한 번 제대로 붙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물론 돈이 없다면 뜨거운 응원 열기로 이를 대체하는 게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다. 내가 진정 원하는 건 ‘돈질’이 아니라 이 ‘돈질’을 넘어설 수 있을 만큼의 열기가 생기는 것이다.

우리는 당연한 1등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동안 챔피언스리그 무대에서 K리그가 최정상에 군림하는 동안에도 이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몰랐다. 하지만 어제 전북이 광저우에 대참사를 당한 후 상황은 바뀌었다. 우리가 그토록 무시하던 중국 축구가 K리그 챔피언 전북의 안방에서 대승을 거뒀으니 이 얼마나 충격적인 일인가. 우리는 잡아야 할 목표가 생기면 이를 악물고 죽을 때까지 쫓는 독한 나라다. 오히려 앞에 누군가 있을 때 더 조직적으로 뭉치고 단결하는 사람들이다. 그동안 우리가 챔피언스리그 최정상에 있어 이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넘어서야 할 이들이 많아졌다. 비록 전주성 대참사는 슬프지만 이 경기를 통해 챔피언스리그의 흥행과 우리의 전투력 상승이라는 교훈을 얻었다…라고 ‘정신 승리’했으니 다음에는 이기자. 화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