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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니어스 | 김현회 기자] 예능 프로그램에 대해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막상 예능 프로그램 촬영 현장을 보게 되면 실망할 이들이 많다. 아무리 리얼리티 프로그램이라고 해도 ‘작가’가 있고 어느 정도의 연출도 있다. 리얼리티 프로그램에서 우연히 길을 가다 만나는 모든 인물들이 정말 우연히 길을 걷다 만난 게 아닐 수도 있다. 스튜디오에서 진행되는 토크쇼 역시 즉석에서 나오는 것 같은 이야기들 하나하나가 다 약속된 대본인 경우도 많다.

과거 한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했을 때였다. 방송 중간에 배달된 음식을 시켜먹는 내용이었는데 녹화 한참 전에 시켜놓은 음식이라 이미 음식은 완전히 식어있었다. 하지만 MC가 “정말 따뜻한 음식이 왔다”고 했고 우리는 그 음식을 먹으며 마치 입 천장이 데일 것처럼 연기를 했다. “진짜 맛있네요.” “앗 뜨거워.” 그리고 녹화가 끝나자 “어우 더럽게 딱딱하네”라는 말이 동시에 튀어 나왔다. 나중에 방송을 보니 정말 막 도착한 따뜻한 음식을 아주 맛있게 먹는 것처럼 보였다. 결과를 뒤엎거나 없는 걸 있는 걸로 만드는 게 아니라면 방송에서 이 정도 약속된 거짓말은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방송 화면 캡처

‘골때녀’ 명승부, 알고 보니 조작이었다고?

최근 재미있게 보는 예능 프로그램이 있다. 바로 SBS '골 때리는 그녀들(이하 ‘골때녀’)'이다. ‘골때녀’를 통해 축구에 대한 새로운 시선을 엿볼 수도 있고 진지하게 공을 차는 여성들을 보며 나 역시 내 직업에 대해 뒤돌아보게 된다. 지난 22일 방송에서도 FC구척장신과 FC원더우먼의 빅매치가 펼쳐졌고 이날 경기는 스코어가 3-0→3-2→4-3→6-3으로 치열하게 바뀐 끝에 FC구척장신이 최종 승리를 거뒀다. 그런데 방송 후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이 경기가 조작됐다는 의혹이 불거졌다.

네티즌들은 김병지 감독의 앉은 위치, 물통의 갯수, 중계진의 멘트 등을 분석해 전반 5-0에서 후반 6-3으로 끝난 경기를 긴장감 넘치게 편집하기 위해 제작진이 득점 순서를 조작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의혹은 사실이 됐다. '골때녀' 제작진은 24일 "제작진은 방송 과정에서 편집 순서를 일부 뒤바꾸어 시청자들께 혼란을 드린 점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드린다"면서 "지금까지의 경기 결과 및 최종 스코어는 방송된 내용과 다르지 않다고 하더라도, 일부 회차에서 편집 순서를 실제 시간 순서와 다르게 방송하였다“고 인정했다.

그러면서 제작진은 “저희 제작진의 안일함이 불러온 결과였으며, 이번 일을 계기로 예능적 재미를 추구하는 것보다 스포츠의 진정성이 훨씬 더 중요한 가치임을 절실히 깨닫게 됐다"면서 "땀 흘리고 고군분투하며 경기에 임하는 선수 및 감독님들, 진행자들, 스태프들의 진정성을 훼손하는 일이 없도록 편집에 각별히 주의를 기울여 향후 이런 일이 재발되지 않도록 하겠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캐스터가 실제 경기 상황이 아닌 조작된 경기 스코어를 해당 경기에서 언급한 점에 비추어 캐스터가 경기 후 해당 코멘트를 후시 녹음한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예능’으로 보면 그럴 수도 있는 일

예능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하면 큰 문제될 게 없다고 생각한다. 없던 골을 일부러 만들어 내거나 골 장면을 편집해 노골 처리하는 등 경기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지 않았다면 예능 프로그램의 범주 안에서 받아들이면 된다. 축구와는 관련이 없어 보이는 여성 연예인들이 나와서 악착같이 공을 차며 즐거움을 선사하는 프로그램의 목적상 골 순서를 뒤바꿔 편집한 걸 ‘조작 논란’이라는 무시무시한 프레임을 씌워서는 곤란하다. 스포츠계에서 ‘조작’이라는 말이 얼마나 무서운지는 스포츠팬들이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나 역시 ‘골때녀’ 팬으로서 내가 본 명승부가 원래의 승부와는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는 걸 알게 된 후 배신감이 들기도 했지만 이건 내가 이 경기를 마치 진짜 ‘월드컵’처럼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 이거 누구나 가볍게 보는 예능 프로그램이었지?’라고 몰입했던 나를 한 번 돌아봤다면 이런 배신감도 없었을 것이다. 물론 이건 그만큼 많은 이들이 이 프로그램을 사랑하고 몰입했기 때문일 것이다. 스포츠를 다루는 예능 프로그램에서 앞뒤 구조를 바꾸거나 여러 번 촬영해 마음에 드는 장면을 골라 쓰는 일은 흔하다. 그런 면에서 ‘골때녀’의 이번 일은 ‘논란’이라고 볼 수도 없다.

다만 ‘골때녀’의 팬으로서 아쉬운 게 있다. 제작진이 스포츠의 묘미를 억지로 쥐어 짜내려 하는 건 아닌지 돌아봤으면 한다. 승부라는 게 ‘참사’와 ‘비극’에서도 스토리가 형성된다. 오로지 서로 치고받고 골을 넣고 빼앗기고에만 재미가 있다는 걸 아니라는 걸 기억했으면 한다. 0-5로 대패한 경기도 그 자체로 하나의 승부고 0-1로 끝나도 그 자체로 시나리오다. 그걸 제작진이 ‘이렇게 하면 더 재미있겠지?’라고 건드리는 순간부터 진짜 묘미는 사라진다. 꼭 한 골을 넣으면 한 골을 먹고 또 달아나면 쫓아가고 그런 명승부를 ‘집필’하려 하지 말자.

ⓒ방송 화면 캡처

치고 받는 결과 속에서만 재미 존재하는 것 아냐

해당 논란의 경기는 0-5로 뒤지고 있던 팀이 후반에 송소희의 해트트릭으로 쫓아갔지만 결국 3-6으로 패한 게 ‘제대로 된 상황’이었다. 아마 0-5로 크게 지고 있는 경기에서 긴장감을 조성하고 시청률까지 생각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진짜 축구였다면 0-5로 지고 있는 상황에서 뒤진 팀 선수가 해트트릭을 한 자체로도 엄청난 스토리다. 이런 경기는 패했어도 진 팀을 응원하고 박수를 보내는 이들이 많다. 스포츠에 정말 다양한 서사가 있는데 이걸 단순히 골을 주고 받아야만 한다는 식으로 몰아가는 건 스포츠 관련 예능 프로그램들이 잘못 짚고 있는 것이다.

꼭 ‘골때녀’만 그런 게 아니다. 스포츠 관련 예능 프로그램을 보면 억지 감성과 억지 긴장감을 너무 자주 조성한다. 허재가 슛 하나를 던지면 ‘마지막 승부’의 전주가 나오며 리플레이로 이 장면을 여러 각도로 5번씩은 보여준다. 누가 슈팅 한 번 하면 과할 정도로 느린 화면을 남발하며 ‘자, 들어갔을지 궁금하지?’라며 억지로 긴장감을 짜낸다. 진정한 스포츠의 매력은 이렇게 ‘마지막 승부’를 틀고 여러 번 리플레이를 돌려가며 만들지 않아도 충분하다. 나는 아직도 1997년 도쿄대첩 이민성의 중거리슛 당시가 느린 화면처럼 느껴지던 그 순간을 잊지 못한다. 억지로 짜내지 않아도 스포츠는 알아서 내 머리 속에서 ‘리플레이’되는 그런 기능이 있다.

그냥 포기할 수도 있는 경기를 악착같이 따라가며 이뤄낸 명승부는 결국 편집의 힘(?)으로 치열한 난타전이 됐다. 방송을 보면서 박슬기가 왜 우는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0-5에서 팀 동료가 세 골을 따라가고 눈물을 흘렸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됐다. 스포츠는 스포츠 그 자체로도 충분한 스토리를 만들 수 있다. 나는 이번 일이 ‘조작 논란’이라는 말까지 언급될 만큼 큰 사건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스포츠를 다루는 예능 프로그램 제작진이 꼭 치고 받는 결과 속에서만 재미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잊지 않았으면 한다. 스포츠를 각본 없는 드라마라고 하는 이유를 잘 생각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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