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을 추모하기 위해 대전월드컵경기장 한켠에는 그의 추억이 깃든 물건들이 놓였다.

[스포츠니어스 | 김현회 기자] 한 축구팬이 세상을 떠났다. 대전하나시티즌의 오랜 팬이었던 故권혁대 씨는 지난 5일 57세의 나이에 지병으로 별세했다. 그가 떠나자 대전하나시티즌을 오랜 시간 응원해 온 팬들이 함께 슬퍼하고 있다. 故권혁대 씨는 대전 축구의 역사와도 같은 인물이다. 이 땅에 서포터스 문화라는 게 생소할 때 대전 서포터스를 조직했고 대전시티즌의 역사 조각조각에 이름을 남겼다. 구단에서도 일하며 열정을 바쳤다. 그는 7일 장례식을 마치고 마지막으로 고향과도 같은 대전월드컵경기장을 한 바퀴 돈 뒤 영면에 들어갔다.

하이텔 축구동호회의 인재, 오프라인에 등장하다

故권혁대 씨는 1997년 PC통신 하이텔 축구동호회에서 활동했다. 인터넷이 막 보급될 당시 PC통신 하이텔 축구동호회는 서포터스의 태동을 알린 곳이다. 조직적인 서포터스 문화를 갈망하던 이들은 PC통신 하이텔 축구동호회에 모여 자료를 공유하고 연구했다. 깃발 응원, 북을 이용한 응원을 비롯해 응원 구호 등의 해외 자료가 이곳에 모였다. 당시 PC통신 하이텔 축구동호회 출신들은 각 프로팀의 서포터스로 퍼져 나갔다. 이 곳은 축구 응원 문화 뿐 아니라 축구에 관한 심도 깊은 이야기도 자주 오갔다.

1996년 시민구단 대전시티즌 창단준비위원회가 발족했다. 유운호 씨는 당시 창단을 준비하면서 PC통신 하이텔 축구동호회에 자주 들어갔다. 이곳에 가면 축구에 관한 자료가 넘쳐났기 때문이다. 특히나 한 닉네임의 회원은 축구에 대한 지식도 뛰어났고 대전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이 회원은 대전에도 꼭 프로팀이 생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운호 씨는 당시를 이렇게 설명했다. “그 사람의 글을 보면 느낌이 남달랐어요. 서로 닉네임만 알고 있었는데 뭔가 공감되는 게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러다가 1997년 처음으로 오프라인 모임을 갖기로 하고 만났는데 깜짝 놀랐어요.”

알고 봤더니 그 전설적인 회원은 유운호 씨의 대학교 후배 故권혁대 씨였다. 군대에 다녀오고 대학을 졸업한 뒤 연락이 뜸해진 그 후배가 다가와 인사를 하며 웃었다. “형님, 잘 지내셨죠? 제가 하이텔 축구동호회 그 사람입니다.” 유운호 씨는 그렇게 故권혁대 씨와 다시 만났다. 대전 한남대학교에서 첫 모임이 열렸고 이날은 창단준비위원회 측 외에도 대전시티즌 창단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PC통신 하이텔 축구동호회에서도 참석했다. 이날 故권혁대 씨는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며 대전시티즌의 갈 길을 함께 고민했다.

故권혁대 씨이 생전 모습

엠블럼과 자주색, 대전시티즌의 일부 故권혁대

故권혁대 씨는 다재다능했다. 유운호 씨는 그를 이렇게 회상했다. “혁대는 글도 잘 썼고 춤도 잘 췄어요. 음악도 제일 많이 알았고 미술도 잘했죠. 학교에서 대외적인 이슈가 터지면 항상 선봉에 선 친구였어요. 술을 못 먹는 걸 빼놓고는 완벽했다니까.” 예술적인 감각이 뛰어난 故권혁대 씨는 이후 대전시티즌의 역사를 만들었다. 그는 유운호, 박선재, 장부다 등과 함께 대전의 엠블럼을 만들었다. 유운호 씨는 특히나 故권혁대 씨가 대전시티즌 엠블럼 탄생에 큰 기여를 했다고 전했다. “백제의 정신을 따서 백제기마병과 금동향로, TCFC를 엠블럼에 넣자고 제안한 게 혁대였어요.”

미술에 재능을 가진 장부다 씨가 의견을 받아들여 엠블럼을 그렸다. 유운호 씨는 엠블럼 작업 당시를 회상했다. “아테네 신전에서 기둥도 따오고 거기에 공을 올려도 봤어요. 엠블럼에 백제에 쓰던 문양을 숨겨놓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탄생된 게 1997년부터 2019년까지 사용된 대전시티즌의 엠블럼이다. 또한 하나금융그룹이 인수하기 전까지 사용된 대전의 자줏빛 색도 故권혁대 씨의 아이디어였다. 유운호 씨의 말이다. “그때는 안양이 빨간색, 수원이 파란색을 상징으로 할 때였는데 나머지 팀은 그런 개념도 없었을 때였어요. 그런데 혁대가 우리는 자주색으로 가자고 하더라고요. 피보다 더 진한 색이잖아요. 그런 작업들을 혁대가 다 한 겁니다.”

구단이 창단되면서 서포터스도 공식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누가 봐도 리더십이 있고 아이디어가 뛰어난 故권혁대 씨가 서포터스 회장을 맡을 걸로 보였다. 하지만 故권혁대 씨는 후배에게 회장직을 양보한 뒤 자신은 평범한 회원으로 남았다. 당시 대전시티즌의 서포터스 이름은 지금은 촌스럽지만 ‘사커 레전드’였다. 대전시티즌은 비록 수도권의 기업구단 만큼 지원이 많지는 않았지만 열정 만큼은 어느 팀 못지 않았다. 당시 서포터스 활동을 막 시작한 신재민 현 대전하나시티즌 경기장기획운영실장은 이렇게 말했다. “충청도 놈들 굼뜨다는 말을 듣지 않으려고 악으로 응원을 했어요.”

故권혁대 씨이 생전 모습

한 선수를 위한 해외 원정 응원, 그리고 ‘샤프’

대전시티즌에는 상징과도 같은 선수가 있었다. 바로 김은중이었다. 대전 창단과 함께 대전 유니폼을 입은 김은중은 한국을 대표할 만한 유망주로 기대를 모았다. 그는 1998년 아시아 청소년선수권대회에도 발탁됐다. 당시 김은중은 이동국, 설기현, 송종국, 박동혁 등과 함께 청소년 대표팀에 뽑혔다. 故권혁대 씨는 이때 구단으로 달려가 아이디어를 냈다. “우리나라 최초로 한 선수만을 위한 해외 원정 응원단을 만들어 봅시다.” 김은중의 기를 살려주기 위해 대회가 열리는 태국 치앙마이로 날아가자는 것이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故권혁대 씨의 눈은 빛났다. 꼭 이루겠다는 의지가 보였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대전 지역매체 사장이자 대전축구협회장이 2,500만 원을 후원했다. 당시 故권혁대 씨를 비롯해 20여 명이 태국 치앙마이로 가 김은중을 응원했다. 한 선수만을 위해 구성된 응원단이 해외로 원정을 떠나는 초유의 일이 벌어진 것이다. 당시 유운호 씨는 대전시티즌에 입사해 대리 신분으로 원정 응원을 함께했다. 유운호 씨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차범근 선수 응원한다고 단체로 독일 갔다는 이야기 못 들어봤잖아요. 아마 한 선수만을 위한 해외 원정 응원단 파견은 (김)은중이 때가 처음일 겁니다. 그때 혁대가 아주 반협박하면서 일을 추진했어요.”

물론 故권혁대 씨를 비롯한 원정 응원단은 김은중 외에도 대한민국을 열렬히 응원했다. 이 힘이 닿았을까. 당시 한국은 결승전에서 일본을 만나 이동국의 결승골로 우승컵을 차지했다. 이동국이 터닝슛으로 일본을 꺾었던 바로 그 역사적인 명경기다. 그날 모든 스포트라이트는 이동국이 받았지만 경기장에는 김은중을 연호하는 20여 명의 팬들이 있었다. 이제 막 프로 2년차에 접어든 19세의 어린 선수 입장에서는 자신을 응원하기 위해 고국에서 날아온 이들에게 벅찬 감격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故권혁대 씨는 안 되는 것도 되게 만든 대전 서포터스의 전설적인 존재가 됐다. ‘샤프’라는 김은중의 별명도 故권혁대 씨가 처음 지었다.

故권혁대 씨이 생전 모습

故권혁대 씨와 함께 한 기적 같았던 2003년

故권혁대 씨는 열정과 감각 모두 넘치는 인재였다. 1999년 직접 대전시티즌에 스카우트 돼 마케팅 업무를 맡았다. 경기장에서 목 놓아 몸으로 부딪히던 그는 이때부터는 구단 직원으로 새로운 대전의 역사를 써나갔다. 대학교 선배이자 1997년 한남대에서 재회한 유운호 씨가 마케팅팀 팀장이었고 故권혁대 씨가 마케팅팀 사원이었다. 故권혁대 씨는 2007년까지 대전시티즌에서 희로애락을 함께했다. 특히나 2003년 대전시티즌의 역대급 흥행을 이끌었다. 당시 대전시티즌의 캐치프레이즈는 ‘미라클 2003’이었는데 이 역시 故권혁대 씨의 아이디어였다. 대전에는 기적과도 같은 시즌이었다.

당시 함께 했던 유운호 씨는 그때를 이렇게 떠올렸다. “혁대가 캐치프레이즈 아이디어를 내고 회의를 거쳐 통과됐어요. 그런데 그 시즌에 정말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평균 관중수가 3만 명을 넘었고 경기장 전체 관중석이 두 번이나 매진이 됐죠. 대전월드컵경기장으로 들어오려는 차들 때문에 대전 시내 교통이 다 마비가 되고 당시 대전 지역에서는 기업들이 아침에 회의를 할 때면 가장 먼저 하는 이야기가 대전시티즌 소식이었습니다. 대전시티즌을 모르면 이야기가 안 될 정도였죠. ‘미라클’이라는 건 쉬운 말이지만 그 시기를 너무 관통한 말이었어요. 혁대가 그런 걸 참 잘 했습니다. 저는 혁대가 우리나라 프로구단 중에 마케팅 1등이라고 봅니다.”

대전시티즌을 상징하는 클럽송도 故권혁대 씨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다. 당시 유운호 씨의 말이다. “독립군가를 우리 응원가로 쓰자는 아이디어를 제가 내니까 그 자리에서 혁대가 ‘형님, 가사는 그럼 제가 써볼게요’라고 하더니 쓱쓱 쓰더라고요. 그때까지 우리 클럽송이 없어서 ‘그럼 이제부터 이걸 클럽송으로 하자’고 한 거죠. 대전에서 활동하는 버닝햅번이라는 밴드를 섭외해 일사천리로 녹음을 했습니다. 제가 퇴사하는 날에는 혁대가 경기가 끝난 뒤 안치환의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이라는 노래를 경기장에 틀어줬습니다. 그때 많이 울었어요. 참 그런 면에서는 센스가 넘치는 친구였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모인 ‘대전의 용사들’

신재민 실장도 故권혁대 씨가 구단에서 이뤄낸 성과를 잘 알고 있다. “대전이 축구특별시가 되는데 가장 많은 기여를 한 사람이 혁대 형입니다. 기획력이나 아이디어가 너무 좋았어요. 구단 머천다이징 상품도 그때 처음 나왔습니다. 구단 머플러를 처음으로 만든 게 혁대 형이 일을 할 때였어요. 서포터스로서도 가장 열정이 넘쳤고 구단 마케터로서도 능력이 뛰어났습니다.” 대전 구단에는 故권혁대 씨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는 서포터스로 시작해 구단 직원으로 일하며 청춘을 대전과 함께 보냈다.

故권혁대 씨는 2007년 구단을 떠난 뒤 열기구 사업을 하면서 다시 일반 팬으로 돌아왔다. 이후에도 경기장을 다니며 대전을 열심히 응원했다. 대전 서포터스 태동의 역사이자 구단에서도 큰 역할을 하며 돌아온 故권혁대 씨를 서포터스에서는 큰 형님으로 모셨다. 신재민 실장은 故권혁대 씨를 추억하며 이렇게 말했다. “저하고는 매일 싸웠죠. 고집도 세고 부딪히기도 하고 의견을 내면서 많이 싸웠습니다. 그래도 멋있는 형이었어요. 열기구 사업을 하는 걸 보면서 참 낭만적으로 사는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 하지만 그는 지난 5일 안타깝게도 지병으로 결국 세상을 떠났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장례식을 치른 뒤 7일 오전 어제의 용사들이 하나둘씩 대전월드컵경기장으로 모였다. 37년 간 故권혁대 씨와 함께 했던 유운호 씨, 치열하게 싸우면서도 대전을 위해 함께 고민했던 신재민 실장, 그런 그들과 함께 세월을 보낸 최해문 콜리더 등이 하나둘 대전월드컵경기장으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故권혁대 씨가 가장 빛났던 대전월드컵경기장에서 노제를 지냈다. 故권혁대 씨가 직접 디자인한 초창기 대전 엠블럼을 유운호 씨가 들고 왔고 그가 생전 좋아했던 김은중의 유니폼도 준비했다. 콜리더 시절 썼던 메가폰과 북도 놓였다.

故권혁대 씨이 생전 모습

“영원토록 휘날려라 자주 빛 투혼”

코로나19 여파로 사회적 거리두리를 한 채 모인 이들은 유운호 씨가 준비한 조사를 낭독하고 고인을 보내는 마지막 노래를 불렀다. 고인은 대전 엠블럼에 곱게 쌓여져 수목장에 안치됐고 그렇게 대전 축구의 별이 됐다. 유운호 씨는 고인을 떠올리며 슬퍼했다. “많이 울었습니다. 혁대와 관련된 애들 한 명 한 명을 떠올릴 때마다 눈물이 납니다. 혁대를 보내고 막걸리 한잔했습니다. 자꾸 슬퍼지네요. 이렇게 축구를 사랑하고 대전하나시티즌을 사랑한 사람이 없었어요. 자줏빛 붉은 전사 퍼플크루 대장 권혁대는 아마 하늘에서도 대전하나시티즌을 응원하고 있을 겁니다.” 故권혁대 씨는 대전 서포터스의 영원한 대장으로 기억될 것이다.

故권혁대 씨가 가사를 쓴 대전시티즌 클럽송은 K리그 응원가 중 역대급 명작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고인을 추모하며 마지막으로 이 클럽송의 가사를 소개한다. 그는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대전 축구를 위해 남긴 흔적은 영원할 것이다. “영원토록 휘날려라 자주 빛 투혼 모든 이의 가슴속에 무궁하거라. 진정한 용기로서 맞서 싸우면 무엇이 두려울 소냐. 가슴 깊이 고동치는 전사의 기상 두근대는 맥박 속에 용솟음친다. 모두가 하나되어 부딪혀 가면 기필코 승리하리라. 굽이굽이 험한 길을 헤쳐나가면 곧게 뻗은 미래가 반겨주리라. 서로가 굳게 맺은 승리의 약속 끝끝내 지켜내리라. 폭풍처럼 몰아쳐라 대전시티즌 포에버 대전시티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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