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상철 추모④] 1996년과 2005년, K리그 우승 동료들의 애도

ⓒ 한국프로축구연맹

유상철 감독이 우리 곁을 떠났다. 유상철 감독은 지난 7일 췌장암 투병 끝에 안타깝게 세상과 작별을 고했다. 2002 한일월드컵 4강 신화의 주역인 그는 A매치 124경기에 출장하며 한국 축구의 역사를 썼다. 그가 향년 5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많은 이들은 고인을 추모하며 슬퍼하고 있다. <스포츠니어스>는 우리를 울리고 웃겼던 유상철 감독을 추모하는 의미를 담아 기획 기사를 준비했다. -편집자주

[스포츠니어스 | 김현회 기자] 유상철은 현역 시절 숱한 기록을 세웠다. 2002년 한일월드컵 4강 신화를 썼고 A매치 124경기 출장이라는 대업도 달성했다. K리그에서 수비수와 미드필더, 공격수로 베스트11에 오르는 업적도 세웠다. 그런데 우리가 잊고 있는 사실이 하나 더 있다. 울산현대가 K리그에서 딱 두 번 우승을 차지한 경험이 있는데 이 두 번의 우승을 모두 경험한 유일한 선수가 바로 유상철이라는 점이다. 유상철은 1996년과 2005년, 울산에서 두 차례 K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이 전에도, 이 후에도 울산현대는 K리그에서 우승한 적이 없다.

도저히 유상철을 보낼 자신이 없는 김현석
1994년 건국대를 졸업하고 현대에 입단한 유상철은 첫 해부터 펄펄 날았다. 26경기에 나서 5득점 1도움을 기록했다. 대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국가대표 팀에도 발탁되고 소속팀에서도 주전으로 도약했다. 당시 현대 최고의 선수는 김현석이었다. 1991년 데뷔 시즌부터 K리그 베스트11에 이름을 올린 그는 현대가 자랑하는 공격수였다. 김현석과 유상철은 1996년 현대의 사상 최초 우승을 이끌었다. 이후 이 둘은 울산현대를 상징하는 선수로 나란히 성장했다. 하지만 유상철의 장례식에 김현석은 가지 못했다. 8일 수화기 너머로 만난 김현석 감독은 착찹한 듯 말했다. “도저히 상철이를 보낼 자신이 없어요.”

김현석 감독은 현재 울산에서 울산대학교 선수들을 지휘하고 있다. U리그가 진행 중이고 7월부터는 새로운 대회에도 임해야 한다. 하지만 현역 시절 내내 환상의 호흡을 자랑하던 후배의 장례식에는 마음만 먹으면 훈련 일정을 빼고 갈 수 있었다. 많은 축구인들이 자신의 일을 잠시 멈추고 고인의 빈소로 달려갔다. 하지만 김현석 감독은 서울로 올라가지 않았다. “황망합니다. 아직 한참 일해야 할 나이에 유 감독이 너무 세상을 일찍 떠났어요. 어제 그 소식을 듣고 정말 많이 울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같이 해온 동료였는데 마지막 가는 길은 도저히 볼 자신이 없어서 조의금만 전달했습니다.” 그는 애써 감정을 억누르고 있었다.

유상철 감독과 김현석 감독은 1996년 가장 찬란한 한 해를 보냈다. 당시 유상철 감독은 대표팀 차출과 부상 등으로 정규시즌에서는 이렇다 할 활약을 하지 못했다. 대신 김현석이 그해 34경기에 출장해 9골 9도움을 기록하며 펄펄 날았다. 당시 이 팀은 창단 이후 정규리그에서 우승을 경험하지 못하고 있어 우승에 대한 염원도 컸다. 김현석 감독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우리는 항상 우승에 대한 목마름이 있었어요. 그 당시에는 에이전트 없이 구단과 선수가 연봉 협상을 했는데 항상 우리들이 우승을 못했다는 것 때문에 연봉도 손해를 보고 있었어요. 그런데 1996년에 고재욱 감독님이 오시면서 첫 우승을 차지했죠.”

울산현대 김현석은 팀의 상징과도 같은 선수다. 그는 1996년 유상철과 함께 팀의 첫 우승을 이끌었다. ⓒ대한축구협회

1996년 유상철과 김현석이 만든 첫 우승
당시 그가 기억하던 유상철 감독은 어떤 선수였을까. 김현석 감독은 유상철 감독의 앳된 신인 시절을 기억했다. “그거 아세요? 상철이가 멀티 플레이어로 유명한데 처음 우리 팀에 스카우트될 때는 윙백으로 들어왔어요. 키가 185cm 정도되는 윙백은 당시 거의 없었죠. 윙백으로 입단해서 여러 자리를 소화했는데 여러 포지션에서 사랑받은 수밖에 없는 선수였습니다. 저도 선수 시절에는 공격수로 시작해 미드필드도 하고 나중에는 수비수까지 했지만 상철이는 저에게 늘 동기부여를 일으키는 선수였어요. 상철이가 저보다 네 살 어리지만 지금 이야기하면 저는 그때 상철이가 부러웠어요.”

김현석 감독은 당시 유상철 감독에 대해 떠올렸다. “제 키가 178cm인데 상철이는 185cm였어요. 저보다 커서 헤딩 타점도 높았고 슈팅력도 좋았죠. ‘종마’ 같다고 해야 할까요. 저는 스피드와 체력이 부족했는데 상철이는 그런 게 월등했어요. 속으로 그런 조건을 많이 부러워했습니다.” 1996년 김현석 감독이 득점과 어시스트에 집중하는 사이 유상철 감독은 부상 이후 재활을 하며 칼을 갈았다. 그리고 이들은 1996년 챔피언결정전에서 마침내 팀의 사상 첫 우승을 일궈냈다. 당시 수원삼성을 상대로 우승 트로피를 놓고 싸웠던 이들은 1차전 홈 경기에서 0-1로 패했지만 2차전 수원삼성 원정에서 극적인 3-1 승리를 따내며 첫 우승에 성공했다.

당시 2차전 첫 골은 김현석 감독이 넣었고 두 번째 골은 유상철 감독이 넣었다. 김현석 감독은 감각적인 프리킥으로 팀의 선취골을 뽑아냈고 유상철 감독은 후반 강력한 중거리 슈팅으로 팀의 두 번째 골을 기록했다. 유상철 감독이 중거리슛을 꽂아 넣은 뒤 감격하며 내달리는 장면은 이날 경기를 상징하는 명장면이었다. 이 경기는 역대 챔피언 결정전 중 가장 거칠었던 경기로 손꼽힌다. 양 팀 합쳐서 퇴장이 5명이나 나왔고 경고는 14차례나 나온 역대급 혈투였다. 그만큼 간절한 승부였다. 그해 김현석 감독은 K리그 베스트11과 함께 MVP를 차지했다.

“존중과 배려가 있던 후배”
김현석 감독은 당시를 또렷하게 기억했다. “그 시즌 경기의 기억을 되돌려보면 상철이가 공격과 수비에서 많은 역할을 했어요. 전포지션을 소화했죠. 공격도 했다가 윙백에도 섰다가 중앙 미드필더로도 갔다가 이것저것 다 했죠. 상철이가 우리 우승의 원동력이었죠. 신체 조건도 좋고 주력도 뛰어나서 공격도 잘하는데 우리가 이기고 있는 상황이면 수비로 내려가서 방어까지 했어요. 1996년 그 해가 가장 기억에 남아요. 상철이 덕분에 제가 리그 MVP까지 탈 수 있었어요. 벌써 25년이 지난 일이네요.”

그는 ‘선수 유상철’도 좋아했지만 ‘인간 유상철’의 매력에도 푹 빠졌었다. “선수들 중에는 자기 주장이 강한 선수들이 많아요. 특히나 스타 플레이어일수록 더 그렇죠. 그런데 당시 상철이는 그렇지 않았어요. 제가 고참이었고 상철이는 중고참이었는데 중간 역할을 참 잘 했어요. 사람이 유하고 자기에 대한 표출을 잘 안 하는 편이었어요. 사람이 스타가 되면 누군가에게 잘나 보이고 싶어하고 그러다보면 말도 나오는데 상철이는 늘 조용조용하고 자기 윗사람 잘 챙기고 동생들한테 나눠주는 역할을 잘 했습니다. 존중과 배려가 있던 사람이었어요.”

이제는 50대 중반인 그도 총각 시절이 있었다. 고인을 떠올리며 이야기를 이어가던 김현석 감독은 총각 시절 이야기를 꺼냈다. “둘 다 결혼하기 전부터 지금의 집사람과 서로 친했어요. 우리가 경기를 하려면 서울에서 울산을 왔다갔다 해야했는데 그러면서 정이 많이 쌓였죠. 운전하면서 고속도로를 이용하다가 휴게소도 들르고 웃으며 지냈던 추억이 떠오릅니다. 결혼 전부터 서로 친하게 지내던 사이라 아주 가깝죠. 상철이 생각을 하면 상철이도 상철이지만 가족들이 떠올라 가슴이 아파요. 그래서 더 빈소에 갈 수가 없었어요.” 수화기 너머 김현석 감독은 고인 이야기를 하며 흐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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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 요법이라도…’ 자꾸만 남는 후회
“작년에 상철이가 울산에 한 번 왔었어요. 인천하고 경기를 할 때였어요. 저하고 통화하면서 ‘요새 약도 좋은 게 많으니 건강 잘 챙기라’고 했죠. 그 이후에 12월쯤에 다시 또 통화를 했습니다. 들려오는 이야기가 건강이 많이 안 좋아졌다는 겁니다. 그래서 ‘다 내려놓고 공기 좋은 곳으로 옮기는 게 어떻겠느냐’고 했죠. 제가 강원도가 고향이라 그런 공기 좋은 데 지인들이 좀 있어요. 병원 핫라인만 연결해 놓고 좀 편하게 쉴 수 있는 곳으로 갔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상철이가 그런 게 있어요. 존재감이 사라지는 거에 두려움이 있었던 것 같아요. 제가 그런 부분까지는 상철이에게 이야기할 수가 없죠.”

김현석 감독은 계속 흐느끼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고인이 세상을 떠난 게 안타깝기도 하고 슬프면서도 미련이 남는 복잡한 감정이었다. “저는 사실 좀 불만이 있었어요. 몸이 안 좋은 상태에서 텔레비전에 나오더라고요. 오히려 더 건재하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 시간에 좀 더 공기 좋은 곳에서 지냈으면 어땠을까하는 마음이 들었어요. 상철이가 투병 생활을 하면서 저도 ‘나는 자연인이다’ 같은 프로그램을 유심히 살피게 되더라고요. 기적적으로 암을 이겨낸 분들을 보면 자연 속에서 지낸 경우가 많던데 상철이도 그랬으면 조금 더 건강하게 살 수 있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자꾸 후회가 남는다. 부질없는 방법일수도 있지만 그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유상철 감독을 돕고 싶었다. “제가 유 감독과 각별한 걸 알고 여기저기에서 연락이 왔어요. ‘무슨 암을 이기는 물을 개발한 의사가 있다’, ‘교회에서 안수로 암을 이겨냈다’ 이런 연락이 와요. 검증된 방법도 아니지만 그 분들도 상철이를 살리고 싶어서 저한테 절실하게 이야기를 했어요. 당연히 과학적인 근거는 없죠. 지푸라기라도 잡아보는 심정으로 상철이가 이것저것 다 해봤으면 했는데 그런 민간요법을 상철이한테 직접 권하는 것도 어렵더라고요, 그래서 상철이 측근들에게 ‘혹시 이런 게 있는데 이거라도 해보면 어떻겠느냐’고 물었죠.”

더 절실했기에 그는 이런 민간 요법에라도 기대 유상철 감독과 더 오래 보고 싶었다. 김현석 감독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유 감독에게 가장 필요했던 건 항암 치료고 의학이었습니다. 민간 요법은 말도 안 되죠. 하지만 상철이가 이렇게 황망하게 떠나니까 ‘그때 상철이한테 이거라도 해보자로 할 걸’이라는 후회가 자꾸 들어요. 자꾸 마음에 걸립니다. ‘이렇게 될 거였으면 뭐라도 해보자고 조를 걸’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랬으면 덜 마음이 아팠을까요. 오늘 훈련을 하긴 했는데 내가 눈으로 뭘 보고 있는 건지 정신이 하나도 없더라고요. 어떤 훈련을 하는지 눈에 하나도 안 들어와요.” 김현석 감독은 이 말을 하면서 계속 훌쩍였다.

4강 신화, 그리고 2005년 K리그 우승
1996년 혈투 끝에 유상철 감독과 함께 우승컵을 들어 올렸던 김현석 감독이 슬퍼하고 있는 동안 2005년 고인과 함께 우승을 경험했던 이는 고인의 장례식장에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바로 JTBC 현영민 해설위원이다.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유상철 감독과 함께 4강 신화를 경험한 그는 2005년 최고의 한 해를 보냈다. 2002년 울산현대에 입단해 줄곧 주전으로 활약했던 현영민 해설위원은 2005년 울산현대의 두 번째 우승을 이끌었다. 울산현대는 1996년 이후 2005년 무려 10년 만에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이때도 유상철 감독은 울산 유니폼을 입고 팀의 두 번째 우승을 함께했다.

8일 오후 <스포츠니어스>와 통화한 현영민 해설위원의 목소리도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K리그 경기를 중계할 때의 흥분된 톤과는 달랐다. “어제 장례식장에 갔다가 다시 집에 들렀고 다시 장례식장으로 갈 준비 중이었어요. 많이 슬픕니다. 빈소에 마련된 형님의 모습이 아직도 많이 어색해요. 저에게는 정말 좋은 선배였고 형이었습니다. 8살이나 차이가 나서 다가가기 어려울 수도 있지만 저에게 늘 잘해주셨어요. 어제 장례식장에 가면서 많은 게 떠오르더라고요. 2002년 월드컵을 함께할 수 있었고 2005년에는 K리그 우승도 같이 했었거든요. 저에게는 정말 큰 산 같은 분이셨는데 황망하네요.”

유상철 감독과 현영민 해설위원은 같은 세대는 아니다. 유상철 감독이 먼저 지나간 길을 후배인 현영민 해설위원이 이어갔다. 2002년 월드컵 당시 유상철 감독은 팀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주전 선수였고 현영민 해설위원은 유망주였다. 2005년 당시 유상철 감독은 이제 선수 생활을 마무리하는 단계였고 현영민 해설위원은 주축 선수로 맹활약했다. 이 둘은 건국대를 졸업했다는 공통점으로 묶여 있었고 2002년 4강 주역이라는 영광도 함께했다. 울산현대에서는 역사적인 두 번째 우승을 일궈냈다.

울산 박동혁 현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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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 차 물려받아 탔었죠” 현영민이 기억하는 고인
현영민 해설위원은 유상철 감독과 함께 했던 한 장면 한 장면을 기억하고 있었다. “사실 2002년 월드컵 당시에는 제가 경기에 나서질 못해 선배님과 특별한 추억을 만들지는 못했어요. 그저 같은 대학교 출신 대선배님과 한 팀에 있었다는 게 영광이었죠. 항상 텔레비전으로만 응원해왔던 선배와 월드컵에서 4강이라는 성과를 냈다는 게 좋은 추억이었습니다. 그런데 2005년에 상철이 형과 함께 울산현대에서 우승을 차지했던 건 너무 기억에 선명해요. 당시 상철이 형이 부상으로 마지막에 뛰질 못했지만 울산의 두 번째 우승을 함께할 수 있었다는 건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순간입니다.”

당시 플레이오프에서 성남일화를 2-1로 제압하고 챔피언결정전에 오른 울산현대는 인천과의 챔피언결정전 1차전에서 5-1 대승을 거뒀다. 2차전 홈 경기에서는 1-2로 패했지만 1,2차전 합계 6-3으로 우승을 차지했다. 당시 현영민 해설위원은 38경기에 출장하며 주전으로 맹활약했고 유상철 감독도 18경기에 나서 1골 1도움을 기록하면서 마지막 불꽃을 태웠다. 이듬해 유상철 감독은 마지막 한 경기를 치르고 현역에서 물러났다. 유상철 감독에게나 현영민 해설위원에게나 2005년은 기억에 남을 수밖에 없다.

현영민 해설위원은 당시를 떠올렸다. “저는 그때 20대 중반이었고 상철이 형은 30대 중반으로 가면서 축구선수로서는 황혼기를 맞고 계셨어요. 그 시절에 같이 즐겁게 축구를 했죠. 제가 어린 나이에 자동차를 좋아했는데 형님도 자동차를 참 좋아하셨어요. 2005년에 제가 상철이 형 차를 너무 마음에 들어 했더니 형님께서 ‘그럼 네가 타’라면서 저렴한 가격에 넘겨주셨던 기억도 납니다. 형님께서 애정을 가지고 타시던 차였는데 제가 너무 관심을 보이니까 흔쾌히 넘겨주셨죠. 형님하고는 생전 그 이야기를 많이 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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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난 빈자리, 남겨진 이들의 슬픔
그에게 있어 ‘인간 유상철’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8살 차이가 나는 대선배지만 현영민 해설위원은 유상철 감독을 편한 사람으로 기억했다. “운동선수들끼리는 나이 차이가 있으면 서로 대하기가 어려운데 형님은 늘 어린 선수들한테도 다정다감했어요. 항상 기분 좋고 심플하다고 해야할까요. 후배들이 먼저 편하게 말을 걸 수 있었던 편한 형님이었죠. 투병 소식을 듣고 2019년 말 박항서 선생님을 포함해서 2002년 멤버가 10명 정도 모여서 밥을 먹은 적이 있어요. 그때 형님께 ‘힘내세요’라고 말한 게 기억이 남아요. 그게 마지막 밥 한 끼였네요.”

이후에도 그는 현장에서 유상철 감독과 자주 만났다. “작년에 제가 현장에서 K리그 중계를 할 때면 유상철 감독님이 투병 중에도 경기장을 찾아주셨어요. 인천 홈 경기는 매번 오셨고 인천의 수도권 원정경기 때도 오셨죠. 인천 경기가 끝나면 함께 인천이 나아갈 방향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어요. 마지막까지 인천이라는 팀을 위해서 책임감을 다하시고 싶어하셨어요. 인천이라는 팀과 함께한 기간이 길지는 않았지만 제가 느낀 유상철 감독님의 인천을 향한 마음만은 진심이었다는 걸 꼭 말씀드리고 싶어요.”

김현석 감독과 현영민 해설위원은 유상철 감독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에 누구보다 마음아파 했다. 울산현대에서 경험했던 그 찬란했던 우승의 기억을 함께 했던 이들은 유상철 감독과의 작별이 아직 믿겨지지 않는 듯했다. 현영민 해설위원은 고인을 추모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제는 아픔 없는 곳에서 편하게 쉬셨으면 합니다. 다음 생애 또 선배님이 그라운드에서 뛰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하늘에서 편하게 쉬셨으면 좋겠어요. 가족들 잘 커나가는 것도 하늘에서 잘 지켜봐 주셨으면 합니다.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김현석 감독은 ‘마지막’이라는 말에 한 동안 대답을 하지 못하더니 흐느끼며 말했다. “아직도 한국 축구를 위해 해야 할 일이 많은 사람인데 너무 일찍 떠난 것 같아요. 스타플레이어로 살아가면서 스트레스도 많았을 겁니다. 이제는 다 떨쳐버렸으니까 좋은 곳에 가서 아픔 없이 편안하게 잘 쉬었으면 해요. 그리고 한국 축구를 짊어지고 갈 많은 분들이 오래 오래 잘 건강하게 견뎌줬으면 좋겠습니다.” 유상철 감독이 떠났고 남겨진 이들은 유상철 감독을 기억하며 슬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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