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상철 추모①] 그가 우릴 행복하게 했던 역사적인 골들

ⓒ 대한축구협회

유상철 감독이 우리 곁을 떠났다. 유상철 감독은 지난 7일 췌장암 투병 끝에 안타깝게 세상과 작별을 고했다. 2002 한일월드컵 4강 신화의 주역인 그는 A매치 124경기에 출장하며 한국 축구의 역사를 썼다. 그가 향년 5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많은 이들은 고인을 추모하며 슬퍼하고 있다. <스포츠니어스>는 우리를 울리고 웃겼던 유상철 감독을 추모하는 의미를 담아 기획 기사를 준비했다. -편집자주

[스포츠니어스 | 김현회 기자] 故유상철 감독은 현역 시절 만능 선수였다. ‘멀티 플레이어’라는 용어가 한국에 도입되기 전부터 그는 모든 포지션을 소화했다. 무려 124차례의 A매치를 소화했고 K리그에서는 수비수와 미드필더, 공격수로 각각 베스트11에 선정되기도 했다. 누구보다도 강렬한 기억을 남긴 유상철의 활약은 두고두고 회자될 것이다. 특히나 유상철의 상징과도 같은 골 다섯 장면을 꼽아봤다.

1994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한일전 동점골
1994년 10월 11일 일본 히로시마. 같은 해 3월 처음 국가대표팀에 승선했던 유상철은 미국월드컵 본선 무대에는 진출하지 못했지만 이후 무섭게 성장해 아시안게임 대표팀에 발탁됐다. 아나톨리 비쇼베츠 감독이 이끈 한국은 8강 일본과의 맞대결에서 유상철을 선발로 기용했다. 당시 한국은 1992년 다이너스티컵에서 승부차기 끝에 일본에 패했고 1994년 미국월드컵 아시아 지역 최종예선에서도 0-1로 패해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한국이 일본에 따라 잡혔다는 말에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날 경기에서도 한국은 미우라에게 전반 20분 만에 선제골을 내주면서 흔들렸다. 경기장을 가득 채운 일본 관중은 엄청난 함성을 내질렀다. 그런데 후반 6분 경기장이 조용해졌다. 황선홍의 감각적인 백 패스를 허벅지로 트래핑한 뒤 오른발 슈팅으로 연결해 유상철이 득점을 뽑아낸 것이다. 페널티박스 안에서 침착한 플레이를 펼친 유상철의 역사적인 A매치 데뷔골이었다. 이후 한국은 황선홍의 역전골 이후 이하라에게 한 골을 허용했지만 황선홍이 경기 종료 직전 페널티킥으로 한 골을 더 보태며 적지에서 일본을 제압했다. 이때부터 유상철은 팬들의 기억 속에 서서히 자리잡기 시작했다.

ⓒ 대한축구협회

1998 프랑스월드컵 벨기에전 동점골
1998 프랑스월드컵 본선. 아시아 1위로 월드컵에 진출한 한국은 세계의 높은 벽을 실감해야 했다. 조별리그 1차전에서 멕시코에 1-3으로 역전패한 한국은 2차전에서 네덜란드에 0-5으로 대패했다. 이 경기 이후 차범근 감독이 대회 도중 경질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이미 조별예선 탈락이 확정된 한국은 벨기에와 마지막 경기를 치르게 됐다. 사실상 전의를 상실한 상태에서 치르는 경기였다. 전반 7붐 만에 뤼크 닐리스에게 선제골을 허용하며 밀리기 시작했다. 감독도 없이 치르는 경기에서 한국은 힘과 기술 모두 벨기에에 밀렸다.

4년을 기다린 월드컵이 허무하게 끝나가는 상황이었다. 또 다시 4년을 기약해야 했다. 월드컵에서 단 1승도 거둔 적 없는 한국으로서는 한 골이 간절했다. 그런데 후반 25분 분위기를 반전할 수 있는 골이 터졌다. 왼쪽 측면에서 얻은 프리킥 기회에서 하석주가 올려준 공을 유상철이 슬라이딩 오른발 슈팅으로 연결해 벨기에 골문을 열었다. 유상철은 득점 후 포효했다. 한국은 이후 추가 득점을 거두지 못하며 월드컵 첫 승 기회를 4년 뒤로 미뤄야 했지만 포기하지 않는 정신으로 찬사를 받았다. 투혼을 발휘한 유상철의 극적인 동점골로 한국은 전패 수모를 면할 수 있었다.

2001 컨페더레이션스컵 멕시코전 결승골
2001년 히딩크 감독이 이끈 한국 대표팀의 분위기는 최악이었다. 2001 컨페더레이션스컵 프랑스와의 첫 경기에서 0-5로 대패하며 ‘오대영 참사’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월드컵 개막을 1년 앞두고 치른 경기에서 대패를 경험한 한국은 이후 상황이 더 걱정이었다. 프랑스 다음 상대가 멕시코였기 때문이다. 최악의 분위기에서 상대하기에는 버거운 팀이었다. 그렇게 울산 문수월드컵경기장에서 한국과 멕시코가 맞붙었다. 이날 선발로 나선 유상철은 전반 경기 중 상대 선수와 경합하다가 얼굴에 큰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유상철은 의료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경기장으로 다시 들어갔다. 한국은 후반 11분 황선홍의 선제골로 좋은 분위기를 이어갔지만 후반 36분 멕시코에 동점골을 내주면서 흔들렸다. 프랑스에 대패를 당한 뒤 멕시코를 잡고 분위기를 반전하면 좋겠지만 쉽지 않아 보였다. 그런데 후반 44분 투혼의 결승골이 터졌다. 지성의 코너킥을 유상철이 완벽한 스파이크 헤더로 연결한 것이다. 더 놀라운 건 당시 유상철은 전반전부터 이미 코뼈가 골절된 상황이었다는 점이다. 후에 거스 히딩크 감독은 “유상철은 가장 말을 듣지 않는 선수였다”며 “나를 벤치로 몰아내지 말라며 내 말을 끝까지 어기고선 후반전에 중요한 골을 넣었다”고 밝혔다.


ⓒ SBS 방송화면 캡쳐

2002 한일월드컵 조별리그 폴란드전 추가골
모두가 월드컵 첫 승을 염원했던 2002년 6월 4일. 한국은 폴란드를 상대로 월드컵 조별리그 첫 경기를 치렀다. 황선홍이 선취골을 넣으며 1-0으로 앞서 나갔지만 월드컵 첫 승이 너무나도 간절했던 한국으로서는 이 1-0의 리드도 불안했다. 그런데 후반 8분 유상철이 쐐기골을 뽑아냈다. 유상철은 골문으로부터 약 20m 정도 떨어진 지점에서 공을 잡아 강력한 오른발 슈팅을 시도했고 유상철의 발 끝을 떠난 공은 폴란드 골키퍼 예지 두덱의 손에 맞고 굴절되며 골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한국의 월드컵 첫 승은 이렇게 이뤄졌다.

당시 환하게 웃으며 두 팔을 휘젓던 유상철의 세리머니는 아직도 국민들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유상철은 이후 “모든 골들이 기억에 남지만 잊히지 않는 골은 한일월드컵 폴란드전에서의 골”이라면서 “그때 그 골로 사상 첫 월드컵 승리를 이끌었고 숙원이었던 16강 진출의 발판을 마련했다”고 말한 바 있다. 한국은 이날 승리 이후 포르투갈과 이탈리아. 스페인 등을 연달아 격파하며 월드컵 4강이라는 신화 달성에 성공했다. 이 골은 한국이 월드컵에 도전하는 한 길이 길이 역사에 남을 것이다.

2002년 K리그 부산아이콘스전 해트트릭
2002년 한일월드컵 이후 유럽 진출을 노리던 유상철은 결국 유럽행에 실패했다. 나이도 있었고 이적료도 맞지 않았다. 울산현대를 떠나 J리그 요코하마 F.마리노스와 라시와 레이솔을 거친 유상철은 2002년 월드컵이 끝난 뒤 울산현대로 돌아왔다. 당시 유상철은 “한 경기당 한 골씩 넣겠다”고 공언했다. 당시 성남일화는 압도적인 기량으로 선두를 이어가고 있었고 아무리 유상철이라고한들 경기당 한 골씩 넣고 이 우승 경쟁에 불을 지피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유상철은 복귀전이었던 2002년 10월 19일 성남일화와의 경기에서 골을 넣으며 진가를 발휘했다.

이후 유상철의 득점 행진은 무서웠다. 성남일화전을 포함해 7경기에서 5골을 뽑아내는 괴력을 괴시했다. 그의 시즌 마기막 경기 상대는 부산아이파크였다. 이날 경기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해야 ‘경기당 한 골’을 달성할 수 있었고 성남일화의 경기 결과에 따라 대역전도 가능했다. 울산은 유상철 복귀 이후 무려 7연승이라는 놀라운 행진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그는 2002년 11월 17일 부산과의 경기에서 무려 네 골을 뽑아내는 어마어마한 활약을 펼쳤다. 특히나 후반 기록한 세 골은 모두 이천수가 도왔다. 비록 같은 날 성남이 승리하며 대역전 우승에는 실패했지만 유상철은 8경기 9득점을 기록하며 ‘경기당 한 골’의 약속을 지켰다.

유상철은 늘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었다. 다들 포기했을 때 투혼을 발휘하며 한국 축구의 엄청난 역사를 썼다. 그가 하늘로 간 뒤 많은 이들이 슬퍼하고 있다. 아마도 그에게 이렇게나 열광했기 때문에 이 슬픔은 더더욱 큰 게 아닐까. 그의 활약 하나 하나에 행복했다. 그는 우리에게 많은 걸 주고 떠났다. ‘투혼의 아이콘’ 유상철이 있어 우리는 열광할 수 있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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